2화 배신의 견적서
‘여자의 육감은 현실 속의 초능력이래. 누가 그랬냐고? 한나 아빠가 그러더라!’
그녀는 수정이 서울에 놀러 와 했던 얘기가 떠올랐다. 수정의 남편이 몰래 낚시용품을 산걸로 부부싸움이 난 날이었다.
주미는 지금 초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형도 참, 저도 이번만 하고 그만둘 거예요.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잖아요?”
건물 모서리 쪽에서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나왔다. 주미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거 같았다. 그건 담배연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미는 반년 동안 철저히 농락당한 꼴이었다. 사탕발림을 사랑이라 믿은 거였다.
“그래도 그렇지……. 내가 네 인생에 참견할 건 아니지만.”
“조만간 헤어지자고 하려고요. 그나저나 손님은 좀…….”
자신에 대한 이야기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미는 점점 머리가 차가워지고 숨을 쉴 수 없었다. 결국,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야 말았다.
“다른 아가씨하고 사귀는 건 들키지 않을 자신 있어?”
‘여자가 있어?’
혼이 빠진 몸뚱이를 일으켜 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 성욱의 말이 그녀를 붙잡았다.
“안 그래도 아까 톡이 와서 들킬 뻔했어요.”
“뭐하는 여잔데? 형도 새끼 좀 치자.”
“대학교 휴학하고 회사 다녀요. 마케팅부서에서 일하고…….”
“졸업 안 한 거 보면 아직 인턴인가 봐?”
“네, 사실은 주미 회사에 다녀요.”
주미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사실이 분노를 일으켰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차희 앞에선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녀는 꽤 다혈질이었다. 그녀의 고등학교 친구들도 대부분 거칠고 우악스러운 편이었다.
그녀들을 잘 알던 술집사장은 ‘소녀 깡패들 왔어?’라며 소주부터 내놓곤 했다. 오죽했으면 그 술집의 지분은 그녀들에게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너 배우 말고 드라마 감독이나 해봐라. 막장드라마 잘 만들겠다.”
성욱은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주미의 화를 더욱 돋웠다.
“왜 이렇게 오래 있었어? 얼굴 허연 거 좀 봐.”
차희가 걱정스럽게 묻자 주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까 전엔 오빠가 너무 심했지? 미안해.”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 각자 사생활이 중요한데.”
주미의 속은 타들어 버린 심지처럼 새까만 재만 남았다. 어린 나이에 사회의 쓴맛을 봐서인지 그녀는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것에 익숙했다.
‘눈깔에다가 레몬즙을 뿌려버릴라.’
차희는 주미의 이마를 짚었다.
“어디 아픈가?”
“좀 피곤했나 봐.”
주미가 손길을 피하자 머쓱해진 차희는 그대로 손을 높이 들었다.
“저기, 메뉴판 좀 주시겠어요?”
차희를 본 종업원이 곧바로 메뉴판을 가져 왔다.
“형님이 디저트도 맛있게 하는데,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그가 여자를 등쳐먹고 있는 남자로 보이지 않았다. 주미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샘이 뜨거워졌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가스통처럼 말이다.
그때 주미의 스마트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눈앞이 캄캄했지 어찌나 힘든지
욕도 많이 했지 속도 다 버렸지
“네, 장부장님.”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주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차희를 슬쩍 봤다.
“완전, 큰일 났다.”
“무슨 인인데?”
“중국지사에 있는 이사가 따로 독립하려고 한데.”
배우가 되고 싶은 이 남자보다 주미의 연기가 훨씬 나을지도…….
“큰일이네.”
“일단 설득해야겠어. 부장님이 중국으로 가는 항공권 끊어놨데.”
“바로 가게?”
“미안, 정말로 미안해.”
“미안하긴, 조금 아쉽지만…….”
그녀는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뻔뻔한 양아치를 사랑했던 자신이 미워졌다.
“가자, 데려다줄게.”
차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부장님이 데리러 온다니까, 먼저 가봐. 오늘 피곤했을 거 아냐? 얼른 집에 가서 쉬어.”
“어쩔 수 없네.”
둘은 식당을 나왔다. 시간은 어느새 제법 지나 있었다.
“중국, 조심히 다녀와.”
차희는 시동을 걸고 그녀에게 윙크했다.
“오빠도 운전 조심해.”
그가 떠난 후 주미는 역겨운 표정을 했다.
중년의 택시기사는 뒷자리에 자꾸만 눈이 갔다. 30년 동안 택시 운전을 하면서 우는 손님은 종종 봤지만, 이토록 서럽게 우는 여자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선 술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나쁜 자식,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줬는데.”
50대, 오지랖이 한창 많을 나이였고 그는 남의 불행을 못 보는 성격이었다. 때마침 신호대기 중이었다.
“저, 저기 말이야.”
“그냥, 그냥 아무 말 하지 마시고 운전해주세요.”
그녀는 택시기사의 묵직한 헛기침이 묻힐 정도로 펑펑 울었다.
그때 메시지음이 울렸다.
‘무슨 일 있어, 이년이 왜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발신자명은 계수대라고 적혔다. 그녀에겐 계수정이란 이름이 있지만, 친구들은 언제나 계수대라고 불렀다.
주미는 콧물을 훌쩍거리며 답장을 보냈다.
‘미안, 갑자기 전화하라고 해서 놀랐지? 아무 일도 없으니까 걱정 마.’
스마트폰 화면에 눈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주미는 노란색 케이스를 닫고 창밖을 응시했다.
‘이것들을 어떻게 족치지?’
마케팅부서에 여자는 두 명밖에 없었고 그중 인턴은 한 명이었다. 그녀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희를 데려왔을 땐 고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주미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었다. 예쁘장하고 늘씬한 그녀는 성격도 괜찮았다. 특별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말이다. 회식자리에서 몇 마디 나눴을 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부러워요, 일찍 성공하시고 얼굴도 예쁘시고.’
‘비행기 좀 태우지 마, 민주 씨도 참.’
그녀가 얼마나 미련해 보였을까? 자기의 남자를 가로챈 여자의 칭찬에 입이 벌어져서는…….
“생각할수록 열 받네!”
택시기사가 순간 움찔거렸다. 취객을 태우고 가다가 얻어맞은 기억 때문이었다.
‘술은 안 마신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괘, 괜찮아요. 남자분이 아니라서 겁먹진 않았으니.”
택시기사는 ‘여자 손님이 더 무서울 때도 있지만요.’ 라며 우스갯소리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녀의 아파트는 회사에서 도보로 10분도 걸리지 않은 곳이었다. 평소라면 집에 들어가 소파에 몸을 맡겼지만, 오늘은 달랐다.
“자동차 키를 가지고 있길 잘했네.”
종종걸음으로 간 곳은 지하주차장이었다. 그녀가 오렌지색 스포츠카 앞에 다가가자 잠금장치가 풀렸다.
의자에 앉자마자 물티슈를 뽑아 눈물 자국을 대충 닦아냈다. 이제 그녀에겐 잘 보일 남자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주미는 시동을 걸고 용인으로 출발했다.
‘자기야, 공항 도착했어?’
자동차 스피커에서 차희의 목소리가 나왔다. 주미가 중국으로 떠난 걸 확인하려는 걸까?
“거의 다 왔어. 오빠는 어딘데?”
‘어, 집에서 티비나 보려고.’
“모처럼 휴일인데 놀러 다니지.”
‘네가 고생할 거 생각하면 편하게 놀 순 없지.’
만약 전파를 통해 상대방을 때릴 수 있다면 주미는 당장 그랬을 거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유흥가라도 없는 건 없었다. 편의점, 분식집, 그리고 술집. 그중에 알탕이나 골뱅이소면 따위를 파는 곳에 연인이 있었다.
금요일 밤은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불타는 금요일은 홍대, 압구정, 이태원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용인도 제법 많은 사람이 있었고 사람 소리가 기분 좋을 만큼 들렸다.
“오빠, 나 오늘도 자고 갈까?”
“그럼, 우리 아기 많이 취했어?”
“몰라.”
차희는 그윽한 눈빛으로 인턴의 눈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늙탱이 말이야.”
“좀만 기다려봐. 오빠도 티비에 얼굴 좀 비춰야지.”
“어쩔 수 없네.”
민주는 시큰둥한 표정을 했다. 차희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잔을 들었다.
“걔가 드라마감독도 소개해줬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자.”
둘은 소주잔을 부딪쳤다.
“민주, 속이 너무 아파. 엘리베이터에선 이상한 냄새 나고.”
“다 왔어.”
대체 왜, 여자는 자신의 이름을 말하면 귀엽다고 느끼는 걸까? 차희는 민주를 업은 채 비밀번호를 눌렀다. 요란한 전자음과 함께 ‘철컥’하며 현관문이 열렸다.
“그년이 아홉수가 끼어서 그런가? 남자한테 차일 예정이지, 믿고 있던 동업자는 나가려고 하지.”
“그러게, 이제 단물도 빠져나가나 봐.”
“단물이라니, 걔가 과일이라도 돼? 오빠도 참…….”
“됐고, 오랜만에 안아보자.”
차희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그녀의 윗도리를 벗기려 했다. 민주도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가쁜 숨을 내뱉을 때…….
현관 센서등만 켜져 있던 거실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둘은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서로의 눈을 마주 봤다. ‘네가 불 켰어?’라고 묻듯이.
“과일 앞에서 에로영화 찍고 있네.”
싸늘한 목소리가 그들의 등골을 쥐어 잡았다.
주미는 사업가라서 그런 지 수완이 뛰어났다. 그녀가 페달을 미친 듯이 밟아 도착한 곳은 차희가 사는 아파트였다. 그녀는 맨 구석에 차를 대고 그가 사는 동으로 걸어갔다.
‘둘이서 아파트로 들어갈 게 분명해.’
그의 데이트 코스는 늘 같았다. 밥, 영화, 술, 그리고 자신의 집.
주미가 차희를 반년 동안 사귀는 동안 모텔에 가본 적이 없었다. 둘의 여행은 무조건 당일치기였다.
언젠가 연예인이 되면 구설수에 대비하려고 한 걸까? 그보단 남들이 돌려쓰는 침대를 신용하지 못하는 결벽증 때문이라는 게 맞을 거다.
‘둘이 가까운 곳에 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녀는 차희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민주를 인턴으로 뽑은 게 후회됐다. 어느덧 1102호 현관 앞에 다다른 그녀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내가 현관비밀번호를 모를 줄 알았지?”
주미는 비밀번호를 알고 싶었지만, 차희는 한사코 거부했다.
얼마 전 차희가 술에 취해 현관비밀번호를 누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기억나지 않겠지만…….
‘육. 삼. 오. 구.’
그가 정확한 발음으로 소리 내어 말했을 땐 그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느끼하고 허당이잖아?”
주미는 차희가 점점 더 미워졌다. 손톱보다 작아진 사랑은 기를 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복도에서 남녀의 재잘거림이 들렸다.
‘온다.’
12시가 넘어가고 술에 취한 채 다른 여자와 집으로 들어온다. 이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주, 주미야.”
차희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손은 구차하기 짝이 없었다.
“사, 사장님.”
생기로 가득 차 있던 젊은 민주는 순식간에 늙어버렸다. 일그러진 얼굴엔 어둠이 감돌았다.
“중국엔 안 갔어, 그보다 비밀번호는 어떻게 알고?”
차희가 묻자 주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둘은 술이 깬지 오래다. 지금쯤 하늘에 있을 사람이 자신들 앞에 있다니.
“네가 상상하는 그런…….”
그때 ‘쾅!’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주미가 서랍에서 시계를 꺼내어 망치로 내려친 거였다.
“어디 한번 씨불여봐.”
차희는 식은땀이 흘렀다. 여자라곤 하지만,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얘가 먼저 꼬셨어! 난 진짜로 너만 좋아하고 있다고.”
새빨간 거짓말에 민주는 어이가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작업을 건 게 차희였다.
“말도 안 돼!”
민주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상황도 말이 안 되고, 그렇지?”
조롱이 섞인 말에 민주는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들어간 회산데.’
가뜩이나 취업하기 힘든 시기에 들어간 회사였다. 대기업은 아니지만, 근무환경이나 연봉만큼은 대기업 수준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콧대는 햇빛을 찌를 기세였다.
‘정말 그 회사로 취직한 거야? 부럽다…….’
곧 정직원이 되면 한 학기 동안 취업계를 내고 졸업장을 받을 계획이 무너질 판이었다.
“누가 먼저 꼬셨든, 둘 다 다시는 볼 생각 없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니까!”
차희는 일부러 큰소리를 쳤다. 당당히 행동하면 주미의 화가 누그러들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까지 늘 그랬다. 그녀는 순종적이고 차희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랐다.
“이게 취하니까 뵈는 게 없나?”
주미는 다른 시계를 부쉈다. 차희는 억장이 무너졌다. 이번에 부서진 시계는 가격도 가격이지만, 더 중요한 건 한정판이라는 거였다.
“내가 미안해……. 이년이 들이댔을 때 바로 거절했어야 했어. 그저 밥 한번 먹자고 해서 밥 먹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됐어. 다음부턴 정말 이런 일 없게 할게, 응?”
차희는 어느새 무릎을 꿇었다. 주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돈과 출세욕 때문이었다. 그녀 덕분에 알게 된 연예계 관계자가 한둘인가?
“그래서 어쩌라고?”
주미는 다른 시계도 마저 부쉈다.
“애꿎은 시계는 그만 부수고 대화로 풀자.”
“내 돈으로 산 시계, 내가 부시겠다는데 불만 있어?”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지랄.”
그에겐 주미의 눈물 따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싼 옷들이 잘려나가고 명품시계만이 보였다.
차희는 그녀의 슬픔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봐주세요. 사장님.”
민주도 손에서 닭똥 냄새가 날 정도로 손을 비볐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본 주미는 통쾌함을 느꼈다.
“뭘 잘했다고 울어?”
“제발요. 저 안 그래도 학자금 때문에 빨리 취업해야 한다 말이에요. 정말 잘못했어요.”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 그렇게 간절했으면 이런 일이 없게 하든가. 누군 학자금 대출 안 받았나? 그리고 너!”
그녀는 손가락으로 차희의 미간을 세차게 밀어냈다.
“으, 응.”
“넌 남자 새끼가 감싸주지 못할망정,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니? 이거 아주 양아치네?”
주미의 눈동자가 마루에 세워진 오디오로 돌아갔다. 축구공만 한 스피커가 달린 오디오도 주미가 선물한 거였다. 사실 말이 오디오지, 쓸만한 경차 한 대 값이었다.
‘배우한테 음악감상은 필수라고. 말하자면 감성을 다듬는 거지.’
지금 생각해보면 핑계에 불과했다. 차희는 그저 값비싼 오디오를 사고 싶었을 뿐이었다.
‘감성은 개뿔.’
“주미야, 그것만은 좀 봐줘라.”
차희는 얼굴이 하얘졌다. 그건 허세를 정당화시켜주는 마법의 상자였다. 자랑질의 수단이자 일상을 잊게 해주는 보물이 사라질 판이었다.
“응, 뭐가?”
주미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동안 자신을 갖고 놀던 남자가 이젠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니.
“오디오는 제발 참아줘라. 망치 좀 내려놓고.”
“아, 망치? 당연히 내려놔야지. 나 그렇게 폭력적인 여자 아니야.”
차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민주는 그를 죽이듯이 째려봤다.
“열 받았더니 바람 좀 쐬고 싶네.”
“그래, 그래. 마음 좀 가라앉히면…….”
주미는 베란다로 나가 샷시를 열었다. 쌀쌀한 바람과 함께 간간이 지나가는 자동차의 전조등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름답고 평온한 광경이지만, 이쪽은 그러지 못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네, 그렇지?”
주미는 상냥히 웃었고 차희도 덩달아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거실로 들어왔다.
“안돼, 주미야!”
차희는 자기도 모르게 일어났다. 그녀가 오디오를 끌고 가는 걸 보고 그는 기겁했다.
“이것도 내가 사준 거였지?”
그녀는 낑낑거리며 오디오를 난간에 걸쳐놓았다.
“휴, 더럽게 무겁네.”
한숨을 내쉰 주미가 오디오를 밖으로 밀자 차희는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갔다. 밖에선 마법의 상자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런 찌질이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게 믿기지 않네.”
주미는 민주에게 다가갔다. 민주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회사 대표의 애인을 가로채던 악랄함은 사라져버렸다.
“민주 씨, 못된 짓엔 대가가 따른다는 걸 이제 알겠지?”
민주는 주미를 보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건 버릇이 없다기 보다 말할 힘도 없는 표시였다.
“내가 바보지, 남자관리도 못 하고……. 회사에서 잘리고 싶지 않겠지? 그런데 난 신뢰 가지 않는 사람은 다신 쓰지 않아.”
“열심히 할게요. 쥐죽은 듯이 일만 할게요. 이번만 봐주세요.”
“내가 엄청나게 닦달할 텐데, 견뎌낼 수 있겠어? 단언컨대 지옥을 맛보여 줄 수도 있어.”
민주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졸업도 못 한 사회초년생에겐 가혹한 시련일지도 모른다.
“대신 아무한테도 소문내지 않을게. 충고하는데, 다른 회사로 취직하는 게 좋을 거야.”
민주는 다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주미는 한숨을 쉬고 천장을 바라봤다.
“왜, 싫어?”
“아니, 아니요.”
민주는 차라리 회사를 나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문만 나지 않는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저 악마도 애인을 빼앗긴 걸 사람들한테 떠벌리진 않겠지? 쪽팔리게 말이야.’
“대신 조건이 있어.”
“말, 말씀하세요.”
“첫째, 다음 주부터 출근하지 말기. 둘째…….”
주미의 얼굴에 오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둘째, 뺨 맞기. 세대면 충분하겠지?”
“네?”
민주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거실은 싸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입이 가볍진 않거든.”
“진심이세요?”
“당연하지. 싫다면 내가 아는 회사대표들 만나서 다 퍼트리고.”
민주는 머리가 아찔했다. 평소 다정했던 주미의 이미지는 모두 무너졌다. 선택을 잘못한다면 취업은 고사하고 밖으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것 같았다.
“꼭 그러셔야겠어요?”
“면상도 두껍네? 가해자는 너야.”
정적이 감도는 건 잠시였다.
“계속 시간 끌면 다른 회사대표끼리 모였을 때 다 까발리고. 그다음 인터넷에 네가 한 짓이 올라올 테지? 그럼 넌 외국으로 이민을 하던가, 룸살롱에 가던가, 둘 중 하나야.”
주미는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민주의 얼굴과 몸매를 훑어봤다. 하얀 줄무늬가 들어간 베이비 핑크 롱카디건도 가리지 못하는 굴곡진 몸매는 질투심을 불렀다.
“그래, 그냥 룸살롱에서 일해라.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딱 좋네? 배불뚝이 아저씨들이나 상대하면서…….”
비꼬는 말투가 무섭게 들리긴 처음이었다. 잘못하면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났다.
“맞, 맞을게요.”
“잘 선택했어. 그런데 이거 어쩌지, 시간 끌어서 다섯 대로 늘어났네?”
오디오는 부품이 떨어져 나가고, 나무가 갈라지고, 부서져 버렸다. 그야말로 주인과 똑같은 꼴이 돼 버린 거다.
“젠장, 미치겠네. 이거 고치지도 못할 거 같은데?”
차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때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럴 필요까진……. 너무한 거 아니야?”
차희가 주미에게 말했다. 주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너무한 건 너고.”
그때 멀리서 민주가 울먹이며 나타났다. 환한 가로등에 비친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자기야, 왜 그래?”
민주는 차희를 째려봤다. 눈동자엔 후회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왼쪽 뺨이 토마토가 자란 거처럼 벌겋게 부어올랐다.
차희는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그녀의 뺨을 봤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닥칠 시련이라고 생각하니 한기가 느껴졌다.
“그래, 내가 자초한 건데.”
차희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아무래도 반성하는 척하고 빠져나와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그녀의 화를 돋워봐야 손해였다.
‘그래, 여자는 또 만들면 되지.’
“이제 우리 그만 만나. 그리고 사장님, 정말 죄송했고 부탁할게요.”
민주는 그곳을 탈옥하듯이 빠져나갔다. 차희는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누구 죽었어? 표정하고는……. 내가 지금까지 선물했던 게 꽤 많더라? 그래서 좀 늦었어.”
컴퓨터, 게임기, 시계, 명품 옷 등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차희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독한 년, 이젠 잃을 것도 없다. 그만 꺼져.”
“어머, 이제 본심이 나오나요?”
주미는 다시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맞아, 이게 내 본성이야. 이렇게 지랄 맞은 줄 알았다면 너랑 시작도 안 하는 건데.”
“그건 제가 할 말이고요. 참, 아직 남아있지 않았나?”
차희는 주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자동차가 생각났다. 처음 인도받고 친구에게 자랑한 게 두 달은 됐으려나?
‘남자라면 별 하나쯤은 달아야지.’
민주와의 밀회, 훌쩍 떠나는 나홀로 여행, 클럽에선 작업의 수단. 그는 자동차에 애착이 깊었다. 정작 주미를 옆에 태웠던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키는 절대 못 줘. 죽어도 안 돼!”
“아, 엄청나게 아꼈나 보네? 그럼 어쩔 수 없지.”
차희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맞다, 감독님하고 조만간 만나기로 했는데.”
그의 앞에 아직 고비가 버티고 있었다. 자존심 때문에 참아왔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쪽이 앞으로 모델을 해봤자 얼마나 하겠어요? 서른이 넘었는데 인지도는 바닥이지, 젊은 애들은 치고 나오지.”
주미는 차희 눈앞에 손바닥을 펼쳤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주미는 쾌감을 느꼈다.
“드라마에 나와서 성공하고 싶어? 그럼 싸대기 열 대로 퉁칠 수도 있는데.”
“뭐, 뭐라고?”
많은 걸 잃은 차희는 냉정히 머리를 굴렸다. 이 순간만큼은 솔로몬1)보다 현명해야 했다.
‘여자가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겠어? 그래, 자동차하고 연줄만 건졌으면 다행인 거야.’
“좋아, 너한테 사죄할 수 있다면 뺨 정도는 맞아야지.”
“주둥이는 아직도 살아있네? 일단 면상 좀 가까이 해봐.”
남자의 얼굴엔 각오가 보였다. 남한테 꿀리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는 야망도.
“표정 좀 풀어. 이거 무서워서 때리겠나?”
“어쩔 수 없잖아…….”
주미가 가만히 있자 차희는 인상을 조금씩 폈다. 그제야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오른손은 귓가에, 어깨는 뒤로 젖히고 세차게 움직였다. 중심 발도 제대로 딛고 허리도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완벽한 자세와 함께 엄청난 소리가 났다. ‘짝’하는 소리가 아니라 ‘쩍’하는 소리, 그건 거대한 나무가 부러질 때 나는 소리였다.
“잠깐!”
다음 싸대기가 뺨에 닿기도 전에 차희가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숙였다.
“벌써 포기하시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차희는 예상과 달리 엄청난 힘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주미는 어렸을 적에 외할머니의 밭일을 돕곤 했다. 곡괭이질은 기본이고 삽질, 도리깨질까지 했던 몸이다. 그녀가 중학생 땐 역도부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던 일도 있었다.
주미가 미술학원에 다니지 않았다면 올림픽에서 활약하지 않았을까?
‘아까 오디오 집어던지는 거 보고 알았어야 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아프다고 하진 못하겠고.’
더군다나 ‘무슨 여자애가 힘이 무식하게 세?’라고 하면 그녀의 화를 돋울 것만 같았다.
“눈, 눈은 찌르지 말자. 아무리 그래도 장님으로 만드는 건 심하잖아.”
“그랬어? 미안.”
“부탁 좀 할게.”
차희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가슴이 요동치고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예방주사를 맞으러 가는 꼬마로 변해갔다.
다시 한 번 ‘쩍’하는 소리와 함께 차희의 비명이 들렸다. 주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 때릴수록 가슴이 시원해졌다.
“아야…….”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닮는다고 했던가? 차희의 뺨은 민주처럼 변하고 말았다.
“아주 죽으려고 하네?”
“네가 무식하게 힘만 세서 그런 거잖아! 이거 완전히 미친년이네? 지금까지 약한 척하면서 내숭이나 부리고!”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한 차희는 당당했다. 주미는 어이가 없었지만, 별 내색하지 않았다. 이젠 그가 무슨 진상을 부리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래, 이게 구차희라는 남자의 본모습이구나.”
“이제 알았어? 할 거 다했으면 이제 꺼져버려!”
주미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알았어, 가면 될 거 아냐?”
그녀는 근처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자동차로 갔다.
“망할 년…….”
담배를 꺼내 물던 차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주미의 자동차가 굉음을 내며 앞에 멈췄다. 그가 한차례 욕을 퍼부으려던 찰나 창문이 열렸다.
“잊고 있었네? 생각해보니까 그쪽 자동차, 아직 명의이전도 안 했어.”
“뭐라고?”
차희는 멍한 표정으로 담배를 떨어뜨렸다. 다시 한 번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귓구멍에 코르크 마개를 박았나? 네가 끌던 차가 아직 내 소유라고, 바보야.”
“에이, 주미야. 방금 오빠가 뭐라고 한 건…….”
그가 변명할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동안 그쪽하고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못 타봤네?”
그녀의 자동차에선 짐승의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다. 남자의 울부짖음과 함께…….
1)솔로몬: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자 다윗의 아들.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고 아기의 친모를 가려낸 재판이 잘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