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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데 나한테 결혼하라마라야

ㅇㅇ |2015.11.16 01:02
조회 10,607 |추천 50
내 나이 27. 어쩌다 모인 고깃집에서 어른들이 너는 시집언제가냐고 물어봐서 나는 늘 그렇듯 농담처럼 시집안갈거예요- 하고 웃는 얼굴로 얼버무렸다.

그러자 다들 껄껄 웃으며 그래, 요즘세상에 굳이 결혼해야하냐며 고맙게도 다들 가볍게 넘겨주셨지.

그런데 이제는 내가 대화도 잘 하지 않는 내 아버지란 사람이 친하지도 않으면서 친한척 그러더라.

"그래도 시집은 좀 가지?"

들고있던 젓가락 집어던지고 옆에 있던 쌈바구니를 날리고싶은걸, 그저 우리 가족이 다른가족들보다 좀 데면데면하구나- 생각하고있는 주위 사람들 때문에 참았다.

당신이 뭔데 시집을 가라마라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 어머니 20살에 당신 만나 아무것도 모른채 날 임신했다.

나는 낳아야겠고, 당신과 내 어머니 모두 막내였던 터라 양가에서 도움 전혀 못받았지.

시대도 한몫 했어. 워낙 안좋은 시대였으니까.

빈털털이로 경기도로 올라가 장애인인 남편 돌보는 당신의 누이에게 20만원을 받아

그날 바로 월세 10만원 주고 나머지 10만원으로 숟가락 등 집기를사서 그렇게 시작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어머니가 21살 되던 해 심한 입덧으로 살이 쪽쪽 빠지다가 날 낳았다.

그렇게 어렵게 시작한 우리 가족이었는데

나는 다섯살이 넘도록 당신 얼굴 보면 낯설다고 울었단다.

운수업으로 한달에 며칠만 집에들어와 안그래도 낯선데 올때마다 술에 떡이된 상태였으니 아이였던 나는 당연히 자연스레 피하게 되었다.

내가 초등학생이 되고 10살임에도 세 살 어린 동생과 둘이 저녁을 차려 먹던 어느날이었다.

나는 이미 떼같은건 부릴 수 없는 아이였고, 고무줄놀이하며 놀다보면 어느덧 친구들은 엄마들이 데리러 오는데 나는 누구도 찾지않아 혼자 집에가는 길 해질녘이 외로웠던 아이였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그날, 늘 그렇듯 저녁즈음 집으로 전화를 해서 밥은 챙겨먹었는지 물었다.

보이지도 않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려는데 목이 콱 막혔다. 불시간에 찾아온 설움이 너무나 부끄러워 입을 틀어막았다.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참으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작스레 수화기 넘어로

"ㅇㅇ아. 너 우니?"

나는 태연한척 뭔소리야- 하고 웃으며 전화를 끊고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난 겨우 열 살이었다.

그렇게 내 어머니와 당신은 힘들게 살았다는걸 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와 동생을 사랑해주었던 내 어머니와 당신의 차이점은 뭐였을까.

내 어머니는 아직도 가끔 그 얘기를 한다.

오죽했으면 친구 딸내미 목마태우는걸 보고 미친년처럼 싸웠겠냐고.

그래. 당신은 나와 내 동생에게 한번도 아버지다운 모습을 한 적이 없었다.

돈은 나와 동생이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어머니와 당신이 항상 같이 벌었다.

그때까지만해도 그게 당연한 풍경이었던 나는 아직도 정상적인 단란한 가정을 보면 기분이 이상하다.

매일 같이 일하면서 집안일은 늘 내 어머니만 했고, 자식 키우는것도 늘 내 어머니뿐이었다.

그래. 뭐 괜찮다. 그 정도는 내가 도우면 되니까.

그런데 술. 그놈의 술.
차라리 폭력적이었다면 증거잡고 이혼이라도 종용하지.

그런데 늘 술 뒤에는 입이 문제였다.

장인어른이라는 단어가 엄연히 있음에도 늬들아버지, 늬들아빠.

-만일 내가 결혼하게되었을 때 사위가 당신한테 그딴소리를 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말 궁금하다.

나에게는 아무말도 못하면서 내 어머니만 붙잡고 니가 애들을 잘못 키웠다는 둥 가장대접이 이렇냐는 둥.

내 어머니는 처음엔 회유를 했고, 그 다음엔 싸웠고, 마지막엔 포기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스무살이 되던 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은 완전한 포기상태.

내 어머니는 벽에 똥칠할때까지 산다는 당신이 늙어서 나와 동생에게 피해를 줄까봐

이혼하지 않겠다 하였다.
자기가 뿌린 씨라 자기가 거두겠다고.

그렇게 대학생활은 기숙사를 들어갔고, 졸업한 뒤로는 자취를 하며 정신없이 살았다.

그러다가 등신같은 내가 당신에 대한 실체를 까먹었을 즈음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당신은 어느새 쥐꼬리만한 월급쟁이가 되어있었는데 내가 집으로 들어가고 얼마되지 않아 당신은 내 삼촌에게 불려갔다.

삼촌이 당신이 내어머니가 번 돈까지 잘 간수해서 둘째 대학 마치게 할거 아니면 남들처럼 부인에게 월급 주고 용돈받으라고.

그러자 당신은 이 말 한마디 했단다.

그 월급은 내 마지막 자존심이라서 안된다고.

자식 키우는 생활비도 못 줄만큼 얼마나 큰 자존심인지는 몰라도 그 후부터 지금까지도 당신은 당신 혼자의 월급으로 혼자 살고있고, 동생은 내 어머니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그리고 자기가 알바한 돈으로 생활한다.

못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누굴 부양하기는 커녕 내 한몸 건사하기 힘들었는데

그럴때 정말 거짓말처럼 내게 병이 생겨버렸다.

희귀난치병이라는 이 병은 빠르게 내 몸을 망가뜨렸고, 결국 하던 일 까지 때려치고

서울로 병원을 다녔다. 한달만에 10키로가 빠지면서 겨우 병원엘 다니는데 나는 항상 내 어머니와 함께, 아니면 혼자였다.

병원비 한번 내 주지도 않았지. 사실 기대도 안했다. 오히려 당신 얼굴보면 다 악화됐을거야. 이 병의 주된 원인이 스트레스라더라.

난치병이라길래 한의원도 갔었다. 여느 환자들이 그렇듯 나또한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었으니까.

그때 갔던 난치병 전문 한의사가 내 몸 여기저기를 체크하더니 그러더라.

내 나이를 재차 물어보면서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슴에 열이 꽉 뭉쳐있어요. 홧병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렇지않게 물었다.

"홧병은 누구나 다 있는거 아닌가요?"

"맞습니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죠. ㅇㅇ씨는 병이 올 만큼 홧병이 심합니다."

그때 내 나이 25살 이었다.

나는 며칠밤을 고민한 끝에 정신병원을 찾았다.
우습게도 고민의 중심엔 돈이었다.
정신병원 가면 검사비 엄청 든다던데, 얼마나 나올까. 돈에 겁을먹다가 큰 결심을 하고 병원엘 갔다.

그 정도로 내 몸의 상태도, 마음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런데 걸려도 어떻게 이런 병에 걸렸는지.
희귀병이라는 이유로 데스크에서 돈을 받지 않자 나는 그렇게 마음이 놓였었다.

지금은 치료를 받으며 쿨하게, 단순하게 살기위해 노력중이지만 가끔 이렇게 내 가슴이 다시 꽉 막힐 정도로 건드리면 진짜 곤란하다.

머리가 크기 시작하고 주위에 이성이 점점 생기자 나도 모르게 남자들을 저울질하기 시작했다.

당신같은 사람은 만나지 않겠노라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눈은 높아졌고, 어쩌다 썸이라도 타게되면 생경한 스킨쉽에 놀라 도망가기 일쑤였다.

남자의 손길이라고는 어려서부터 전혀 받아본 적 없는 나는 아직도 연애하기가 힘들다.

관심받고 싶으면서도 막상 받으면 나쁜짓이라도 저지른 듯 안절부절하다.

그런 나에게 그래도 시집은 가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추천수50
반대수11
베플힘내|2015.11.16 01:21
낳아줬다고 다 부모가 아니구 학대하지 않았다고 좋은부모가 아니듯이 가족을 지키고 사랑해주지 않고 자신만이 중요한 사람을 단지 낳아준 아버지라는 것만으로 위하고 존경하고 사랑할필요는 없어.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너에게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참견할 자격이 없지. 너는 너의 인생을 살면돼. 아버지라는 사람의 사랑을 받은적없고 단란한가정 행복한가정이란걸 모르는 너지만 살다보면 사랑하고 같이 있고싶고 무엇보다 경험해 보지 못한사랑까지 다 보상해줄 그런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면되고 꼭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넌 무엇보다 소중하고 또 당당하기 때문에 걱정할필요없어. 자신 인생은 누구보다 소중히하니 저런 사람때문에 상처받지도 스트레스 받아서 아프지도 말고 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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