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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신관념의 바라문종교 비판 & 연기법

자비 |2015.12.09 10:51
조회 119 |추천 2

부처님의 신관념의 바라문종교 비판

“신본주의 세계관 오히려 인간을 절망케 해”

 

바라문교(현 힌두교)의 성전에는 여러 신들의 존재를 말하는 다신교(多神敎)와 일신교(一神敎)가 동시에 나타난다. 일신교는 여러 신들 또한 하나의 절대적인 신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여러 신은 물론 인간과 세상까지도 신적인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바라문교의 창조설을 전변설(轉變說: Brahma-pari??ma-v?da)이라고 한다.

 

이러한 창조신에 대한 여러 이름들이 있다. 모든 피조물의 주인 또는 아버지라고 일컫는 쁘라자빠띠(Prajap?ti)'나 하나님이라는 '따드 에깜(Tad Ekam)' 그리고 근원적 존재를 의미하는 ‘푸르샤(Pur?a)’와 브라흐만(Brahma) 그리고 존우(尊祐)나 자재천(自在天)으로 번역된 ‘잇사라(Issara) 신’이 그것이다. 초기경전에서는 ‘잇사라(Issara) 신’이 조물주 또는 창조주의 이름으로 많이 나타난다.

즉 경전의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因說)’이라는 신의론(神意論)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의 이름이나 설명은 기독교의 여호와 신이나 이슬람교의 알라신과 거의 흡사하다. '쁘라자빠띠(Prajap?ti)'는 기독교에서 주(主)님이나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게 한다. 초기불교에서 그러한 바라문교의 유일신관(唯一神觀)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나는 범천이요, 대범천이요, 승자(勝者 : abhibh?)요, 불패자(不敗者: anabhibh?to)요, 지배자(支配者 :a??adatthudaso)요, 스스로 존재[自在]하는 자[issaro]요, 조물주[katt?]요, 최승자(最勝者:se??ho]요, 분배자[sajit?]노라, 과거, 현재, 미래의 아버지[pit?]이다. 모든 것은 나에 의해 만들어졌다.

” 이러한 구절은 곧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관(神觀)과 별반 차이가 없음을 우리는 한 눈에 알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러한 신은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신관념이 바탕한 종교는 창조주를 정점(頂点)으로 하는 위계적 또는 계급적 세계관으로 구축되어 있다. 창조 신화의 최고 정점은 창조신이고 그의 종속물로 하위신(下位神)이나 사람 그리고 동물 등으로 배치되어있다.

즉 주종(主從)관계가 전제된 ‘위계적(位階的) 세계관’이다. 위계적은 곧 계급적임을 의미하며 우열(愚劣)이라는 차별개념에 바탕해 있다. 우월한 존재는 열등한 존재의 주인임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면, 기독교에서 여호와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자신들을 ‘종’이라고 자처하는 경우에서도 잘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바라문교나 힌두교의 경우 같은 인간에서도 바라문, 크샤트리아, 바이샤 그리고 수드라와 같은 위계와 계급의 차별이 있고, 유대교 에도 신에게 선택받은 선민(選民)이라는 인간차별이 있고, 이어서 여자의 주인은 남자이고, 동물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우열에 따른 지배와 정복을 정당화하는 차별개념이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창조주와 같은 신이 있어 존재 간에 주인도 종도 있을 수도 또한 될 수도 없다고 천명한다. 생명은 그 자체로 우열을 떠나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다고 한다. 때문에 부처님의 탄생게에 선포되었듯이 개개의 모든 생명은 조물주를 대신하여 ‘최상(最上)’, ‘최존(最尊)’ 그리고 ‘최고(最古)’라는 것이다. ‘최고(最古)의 존재’는 가장 오래된 존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인들의 상상에 따르면 창조주는 자신이 만들어낸 어떠한 존재보다도 시간적으로 가장 먼저인 연장자 또는 오래된 자라는 것을 나타낸 말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놀랍게도 개개의 생명이 그렇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당시의 바라문교에서 천부(天賦)적인 차별로 합리화된 사성계급을 부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바라문 종교는 인간의 화복(禍福)을 위해 신에게 찬송하고 기도하였다. 바라문교의 베다(Veda)가 모두 찬송가로 이루어진 이유이다. 나아가 이러한 신에게 제사(yaj?a)라는 제사를 지냈다. 이러한 제사를 사성대회(邪盛大會)라는 말로 한역되었다.

창조신도 단백질이 풍부한 고기를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람은 물론 가축들을 죽여 제물로 올렸다. 부처님은 이러한 사성대회에서, 여러 마리 황소와 숫물소, 암물소 및 많은 염소 새끼 등을 중생들을 잡아매어 모두 죽이는 제사는 큰 죄악을 짓는 것으로 비판하고 계신다.

더 나아가 “사성대회 장소로 가서 기둥에 묶어두었던 황소 등 모든 중생들을 모두 놓아주어 마음대로 자유로이 산이나 늪이나 들에서 마음껏 풀을 뜯고 깨끗한 물을 마시며 사방의 바람을 쐬면서 온갖 즐거음을 누리게 하라”고 바라문들을 선도한다.

부처님은 같은 생명으로서 동물학대를 해서는 안된다는 현대의 ‘동물권’을 2600년 전에 이미 말씀하고 계신다. 기독교 에도 번제(燔祭) 또는 전소제(全燒祭)라 하여 수없는 양이나 소 또는 사람을 죽여 여호와 신에게 올리는 제사가 행해졌다.

보통 유목 민족인 유대인은 양들을 희생제물로 사용하였다. 때문에 예수를 훗날 인간제물로서 ‘희생양’이라는 표현을 쓰고 유럽을 거친 기독교는 미사의식에서 예수의 피와 살이라고 포도주와 빵을 올리는 의식도 바로 이러한 희생제의이다.

마찬가지로 같은 셈족 기원의 이슬람교에서도 매년 10월26일에 ‘이들 아드하’라 불리는 종교 기념일에 양을 잡는 희생제를 치른다. 이 때 무슬림들은 이틀 동안에 약 1억마리 이상의 양과 염소 등의 동물을 잡아 신에게 희생제물로 바친다. 한국에 있어 돼지머리로 고사를 지내는 것도 비슷한 종교적 맥락이다.

부처님은 신을 말하는 바라문교 경전을 인정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들의 성전에 근거하여 사람과 동물을 죽여 지내는 제사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신다. 불교가 오계 가운데 불살생 조항들이 계율로 제정된 한 이유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차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고 사성의 평등을 강조하신다.

바라문교는 더 나아가 요즘의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그들의 성전인 ‘베다의 가르침만이 진리이고 나머지 다른 가르침들은 모두 진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에 있다. 한마디로 베다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베다는 인간에 의해 작성된 것이 아니라 신의 계시에 의한 계시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경전의 여러 곳에서 부처님은 이러한 바라문교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진리관을 논파하기 위해 매우 직접적인 어조로 그들의 세계관을 비판하신다.

인간을 포함하여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하늘에 있는 신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그래서 신의 섭리가 진리이고 그것을 알고 따르는 것을 강조하는 바라문에게 부처님은 창조주와 같은 신을 말하는 것은 마치 “맹인들의 줄서기” 또는 “장님들의 행진”과 다르지 않다는 비유를 하신다.

“그것은 맨 앞의 사람도 보지 못했고, 중간 사람도 보지 못하고, 나중 사람도 보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말하는 것은 실없는 것이요, 말뿐이며, 공허하고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비유하면, 어떤 젊은 청년이 아직 보지도 못한 미녀를 상상으로 사모하고 연모하는 것과 같고, 보지도 못한 하늘의 궁전에 오르기 위해 사다리를 만드는 것”과 같다고 하여, 바라문교의 거짓 신념과 독단을 일깨워주고 있다.

사실 신의 존재를 말하는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신을 직접적으로 보았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다. 유대교의 경우, 겨우 선택받은 특정한 사람인 모세에게 그것도 신의 등짝 정도만을 보여주었다는 희화스러운 신화도 있다. 바라문교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신 중심의 종교에서는 자신들의 성전에 쓰여있기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성전을 누가 썼는가 하는 데는 크게 문제 삼지 않으려 한다. 그저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가 ‘바라문과 같이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계시’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돌린다. 그래서 모두 자신의 종교 안에서 이야기되는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만이 참된 존재이고 다른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유일한 존재는 참된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지만 여러 유일신의 종교 가운데 과연 어느 신이 ‘단 하나의 유일한 존재’인지 모를 일이다. 상대성을 인정하면 곧바로 자신의 절대성이 부정된다.

절대적인 존재로서 창조주를 이야기하는 신 중심의 종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상대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려다보니 자연히 배타적이게 되고 결국 반목과 대립의 형국으로 나아간다. 이는 인류 역사에 있어 신 중심의 종교끼리 오랫동안 피 흘리는 종교전쟁이 이를 잘 증명하고도 남는다.

부처님이 깨달은 연기법은 근본적으로 ‘관계를 떠나 신과 같이 유일한 어떤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과 같은 근본 실체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인간에게 희망을 주고 달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그렇기에 창조주를 세우는 세계관을 매우 직접적인 어조로 비판하고 부정하였던 것이다. 더 나아가 ‘유일한 존재를 상정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절대적인 신념이야말로 궁극적으로 개개인에서부터 집단과 집단 그리고 국가와 국가 간에 걸쳐 결국 인간고를 낳는 뿌리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경전들은 관계를 떠나 존재할 것이라는 신본주의 세계관이야말로 오히려 인간을 슬픔과 비탄으로 몰고 가는 요인임을 지적한다. 확실히 신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른 요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필요와 요구의 뿌리는 인간 욕망에 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에 의해 인간의 고통은 반복적으로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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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이 꺠달은 연기법 

 

대체로 유신종교는 신 아래 인간과 다른 생명 간에 또는 같은 인간 사이에도 천부적(天賦的)으로 차별적인 지위와 권한의 위계가 주어진다. 즉 성경의 창세기 등에서 모든 자연과 동물을 지배하고 정복하는 ‘인간 우월주의’와 ‘유대민족 선민주의(選民主義)’ 그리고 베다성전의 ‘바라문 선민주의’와 같이 특정 민족이나 계급만 우월하다는 배타적 차별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위계의 세계관은 창조신과 인간 그리고 동물이라는 수직적 주(主)와 종(從)의 관계가 설정되어 있다.

 

연기법의 의미는 이러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신에 세계의 근거와 본질은 ‘의존적 상호관계’로서 수직적 주종이 아니라 수평의 평등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예를 들면, 남자가 있기에 여자가 있고, 여자가 있기에 남자가 있다. 인간이 있기에 자연이 있고, 자연이 있기에 인간이 있는 것과 같다. 이는 불교가 왜 일체 생명의 소중함과 존엄성을 강조하고 사람간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좀 더 가치적인 면에서 이야기하면 인간의 아상(我相)과 아만(我慢)은 근본적으로 ‘우월주의’라는 우열(愚劣)의식에 기초하며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에서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할 수 있는 권한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우열을 말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유신종교는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이야기하지만 인간 이외의 동물에 대한 자비를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한때 유럽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따른 나치 독일인이 유대인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사람이 다른 동물을 무자비하게 죽일 때도 거기에는 우열의식에 바탕하고 있다.

 

즉 유럽 백인이 유대인이나 다른 인종을 자신들과 우열 관계로 보고 평등한 관계로 보려하지 않은 때문이고, 사람이 다른 생명을 우열관계로 보아 반성 없이 죽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수직적 위계로 보려는 세계관이 결과적으로 어떠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불교의 연기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상호관련성 때문에 자타불이(自他不二)이며 동체대비(同體大悲)라는 생명 윤리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불살생(不殺生)이라는 계율이 오계의 첫 번째에 있는 이

유도 그렇고, 그래서 불교를 ‘자비의 종교’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연기의 이치를 투철하게 알지 못하기에 우열(愚劣)과 빈부

(貧富).귀천(貴賤)․미추(美醜)․정(淨)과 부정(不淨)․다소(多少)․고하(高下)․장단(長短) 등과 같은 상대적인 이변(二邊) 또는 양변(兩邊)에 집착하고 있다. 마치 이러한 이변과 양변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대립과 충돌의 고통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연기법은 모든 인간 세계의 상황이 인연 따라 있는 것이지 따로 빈부․귀천․미추 등이 고정되어 불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연기법은 다른 표현으로 배대(背對)적인 이변과 양변에 대한 비판으로 불이(不二)나 중도(中道)를 함의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연기법은 차별적 배타주의 세계관을 극복하는 ‘원융화합의 길잡이’ 역할을 하여 인류를 구제할 대안사상이라고 세상의 뜻있는 지성인들에 의해 재평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조준호 한국외대 인도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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