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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와 5년 반을 사귀고, 결혼할 수 있을까.

불쌍해 |2008.10.07 16:24
조회 1,793 |추천 0

인생선배들에게 현답을 구하기 위해 이글을 씁니다.

 

 

 

그와 난 작업실에서 만났다. 둘 다 애니메이션작가 지망생이었다. 만 5년 6개월을 사겼다.


사귄지 3개월이 채 안 돼 난 전혀 다른 분야로 취직을 했다.

 

혼자 타향살이를 하느라 먹고 사는게 급했기 때문이다.

 

그도 내가 나오자마자 거길 나왔다.


그건 곧 백수를 의미한다. 그가 할 줄 아는 건 오로지 애니메이션 뿐이다.


그는 이후로 한번도 일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데뷔를 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경제활동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 했다.


자기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나를 만나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다.


그 생활도 벌써 5년이 훌쩍 넘었다.


그는 독고다이다.


 

 


사귀는 동안 내가 대부분의 것을 책임져왔다. 물질적으로만.


옷이며, 신발이며, 데이트비용이며, 일년 전 부터는 담배 값도 내가 낸다.


그도 나도 나이가 서른이 훨 넘었으니 집에서 손 벌릴 수는 없었을테지.


(그래도 어디선가 돈이 생기면 젤 먼저 내 지갑을 채워준다. 내가 저보다 돈이 더 많은데도


만원이든, 십만원이든, 수십만원이든.....담배값만 제외하고 모두 털어 내 지갑에 넣는다)


한번도 이상하다거나 아깝다거나 찌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그의 백수생활에 이의를 제기한 적도 없다.


지금까지는 적어도 나는 순수했다.


지금까지는.


 

 


드디어,


그가 노가다라도 아르바이트를 한댄다.

 

내게 가방도, 옷도 사주고 싶고, 좀 있음 오를 내 방 전세값도 보태고 싶댄다.


돈을 벌면서 꼭 당선돼 보이겠노라 했다.


언제나 입봉(데뷔)에 대해 의지는 보였지만, 일하면서 준비하겠다는 말은 처음이다.


그가 일을 한다니....돈을 벌다니...내심 안도감이 들었다.


사실 그의 비현실성에 이제 막 지치기 시작한 터였다.


 

 


그 약속을 한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은 더위가 끝나면 이었고, 두 번 째는 추석이 지나서라 했고,

세 번 째는 본인이 집에 당분간 있어야 한다 했고,

네 번째는 부모님이 약간 편찮으시다 했고,

다섯 번째는 가기로 했던 알바 자리가 시원찮다 했고,

여섯 번째는 오라했던 곳이 전화가 없다 했고......

드디어 어제는 오늘부터 공사현장에 노가다 한다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늦잠을 자서 못갔댄다. 일곱 번째다.


신기하게도 일곱 가지의 이유는 모두 사실이다




 

사람들은 말하겠지.


왜 그런 사람을 만나냐고.


웃기는 건 무능력을 빼고는 내겐 이상형의 남자다.


외모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으로서.


그처럼 자상하고, 이해심 많고, 나를 웃게 하고, 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저 위에 내가 열거한 말들과 상반되지만


그는 돈을 벌지 못하고 일하지 않는 것 빼고는 내게 완벽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내 자취방에 와서 청소와 빨래와 일주일 동안 쌓아놓은 설겆이를 해주고,


밥과 반찬을 만들어주고, 전등을 갈아주고,


비가 오면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서 우산을 전해주러 오고,


맛있고 비싼 음식은 자기가 먹는 대신 나를 주고,


아프다 그러면 새벽에라도 찾아와 죽을 끓여주고,


내 부모, 형제, 조카에게조차 헌신하고,


내가 딴 일로 짜증을 내고 화풀이를 해도 다 받아주고,


술이 떡이 돼 내지른 구토물도 손으로 받아 치워주고,


발이 아프다면 거리에서 업어주고,


온몸이 쑤신다 한마디 했을뿐인데 맛사지를 배워와 몇 년 간 내내 만날 때마다 해주고,


말다툼한 적은 5년이 넘도록 다섯 손가락 안에 들고, 그것도 모두 내가 생떼를 쓴 거고,

 

그래도 그가 먼저 늘 사과했고......


내 모든 말을 들어주고, 내 모든 슬픔을 함께 하고, 내 꿈을 이해하고, 날 최고라 여기고,

 

날 웃게 하고.......오로지 내가 본인의 중심이고...........


이 모든 것 또한 5년 반이 훌쩍 넘었다. 단 한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


 

 

혹자는 그가 내게 의지해서 그렇지 라고 하겠지만,


물질적으로만 제외하고는 내가 오히려 그에게 빌붙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에 대한 사랑도 사랑이거니와......그냥 그게 그의 천성이다.





오늘 아침.........일곱 번째의 이유를 문자로 받고,


답장으로 생각을 해보겠다 했다. 내가 먼저 연락할테니 그보고는 하지 말라했다.


그리고 난 그 사람 때문에 처음으로 울었다. 한 번도 날 울게 하지 않던 그 사람 때문에.


진심으로 그가 안타까워 울었다...


 

 



나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나는....그와 가난을 함께 할 자신도, 그렇다고 그와 헤어질 자신도 없다.


그는 내가 자신한테 전부일텐데.........내가 없으면 안될텐데...

 

 



나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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