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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너에게 닿지 못할 편지

만두 |2016.07.24 05:23
조회 547 |추천 0

안녕, 오랜만이야.

익명 게시판은커녕, 남들 다 하는  sns에도 영 관심이 없던 너라서.

(유독 태그놀이를 좋아했던 내 탓에, 너는 sns에 강제 흥미를 붙였었지. 너 참 피곤했겠다.)

아무튼, 아마도 너는 이 편지를 읽을 일이 없을 거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곳에 내 마음을 담아 글을 써내려가 보려 해.

너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좋다고 말해줬었어. 내가 쓴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하기도 했었고.

그치만 나는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어. 왜 그랬냐면, 사실은 내가 글을 드럽게 못 쓰거든.

내용은 또 얼마나 말도 안 되게 쓰는지 알아? 난 판타지가 싫은데 써놓고 보면 판타지더라.

그러니까, 혹시라도 네가 이 글을 읽게 된다면..

이건 그냥 내가 지어낸 말도 안 되는 소설이다, 하고 넘겨주었으면 해.

 

음..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너나 나나 땀이 참 많았는데, 그 땀 많은 둘이서 여름을 맞이한다고 헬스장을 다녔잖아.

(그런데, 넌 땀이 나도 냄새는 안 나더라. 그게 참 신기했어. 나는 냄새 났나? 났다면, 참느라 고생했어.)

수영장에서 비키니 자태를 뽐낼 것도, 바닷가에서 빤스 바람으로 물놀이를 할 것도 아니었는데,

어리고 귀여웠던 우리는 그렇게 동네에서 가장 싼 헬스장을 한 달 끊어 (놀러)다녔었다.

너의 진지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나에게 운동을 알려줄 때의 너는 진지 왕이었고,

너의 진지한 모습이 매력있어서 한 2주 열심히 다녔더니, 더는 배울 운동이 없더라.

마지막 2주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고, 뒤늦은 변명 중이야.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나 거기에 내 운동화를 두고 왔거든. 그거, 아직 남아있진 않겠지?

 

참, 나고 있다던 사랑니는 어때?

난 밥 세 공기 먹는 네가 참 좋았는데, 사랑니 때문에 잇몸이 부어서 씹기 힘들다던 네가 눈에 선해.

그거 날이 갈 수록 더 아파질 텐데 걱정이다. 근데, 왜 나 만날 땐 안 나던 사랑니가 이제서야 나냐.

엄연히 이름이 사랑니인데, 사랑할 때 났어야 하는 거 아니냐? 살짝 기분 상하려 그런다.

치료 잘 하고, 많이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픈 사람은 진짜 많이 아프다던데, 그게 너면 어떡하지..

아, 나 2주 정도 전에 발견한 게 하나 있는데, 오른쪽 위에 사랑니가 나더라.

내 기억에 너는 왼쪽 위인지, 아래인지. 그랬던 거 같아. 이걸 기억하는 내가 신기하다.

잇몸이 부어 아프다던 너에 반해, 나는 정말 아무런 통증이 없어. 그냥 이가 나고 있다. 잇몸 뚫고.

나는 사랑니가 사랑할 때 나는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의심을 좀 했어야 됐나 봐.

 

그.. 책은 많이 읽고 있냐?

책 읽는 거 말곤 할 게 없다던 네 말을 생각하면 사실 웃음부터 나와.

우리 같이 도서관에서 책 빌렸다가 둘 다 반도 못 읽고 지하철역 반납함에 넣었던 거 기억나?

그것도 그럴 것이, 하루가 멀다하고 만나서 맛있는 거 먹고, 노래방 가고, 카페 가면 수다만 떨고.

그랬던 우린데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심지어, 각자 집에 가면 영상 통화도 했었다.)

우리는 정말 예뻤고, 서로만 있으면 24시간도 길지가 않았어. 남들이 봐도 우리는 참 예뻤대.

참, 핵심을 빼먹을 뻔 했다. 네가 말해줬던 가장 인상깊은 구절, 그거 말이야.

그 날의 초라한 사람은 나였던 거 같아. 너에게든, 나에게든. 밑도 끝도 없이 초라해져버린 나여서 미안해.

 

헤어지기 전부터 맞춰두었던 팔찌는, 색이 바래버렸더라.

분명히 물이 닿아도 변색되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꽁꽁 싸두기만 했는데도 변해버렸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지난 번에라도 줄 걸 그랬나 봐. 그 땐 색이 안 바래있었을 지도 모르잖아.

 

하고 싶은 말이 되게 많은 것 같았는데, 막상 하려니까 참 별 거 없다.

그래서, 사과를 하려고 해. 넌 누가 사과하는 걸 듣는 게 미안하댔는데.. 미안. 해야할 사과가 있어.

헤어지자고 해서 미안해. 너에게 상처될 걸 알면서도 모진 말 한 것도, 붙잡는 너 뿌리친 것도.

아, 헤어지자고 한 진짜 이유를 알려달라고 했을 때, 나 그 때 너한테 거짓말 했어. 이것도 미안해.

가장 미안한 건, 너를 포기하려 마음 먹었던 나. 그리고 그 때의 어리석은 내가 지금의 나라는 거야.

 

나, 성폭행 당했어.

사실, 내가 일기 쓰는 걸 때려치운 건 너와 헤어진 날부터가 아니라 그 날부터야.

나도 차마 내 일기장에 쓰지 못한 일을, 어떻게 너에게 곧이 곧대로 말하겠니.

너에게 사실대로 말하자니 겁이 났고, 너를 속이자니 그건 또 내가 너무 힘들더라.

네가 이 사실을 그 때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화를 냈을까? 슬퍼 했을까? 나에게 헤어지자고 했을까? 그 새끼 죽여버리겠다고 난동을 부렸을까?

(네가 살인자가 될까 봐 걱정도 했었다. 정말, 진심으로.)

울었을까? 웃지는 않았을 테고.. 아니지, 실성해서 웃었을까? 장난치지 말라고 넘겨버렸을까?

그 어떤 반응이든, 나는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어.

나 혼자도 이렇게 아프고 힘든데, 그걸 너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 되게 잘 우는 거 알지? 근데 나 그 당시에 단 한 번도 안 울었다. 눈물이 안 나더라.

 

너에게 가장 상처될 만한 말로 이별을 고했고, 내 예상대로 넌 아주 크게 상처를 입었다.

(근데, 나 사실은 아직도 이 생각은 한다. 차라리 그렇게 받는 상처가, 너에겐 나았을 거라고.)

난 굉장히 큰 일을 겪었지만, 내 스스로가 그 일을 지우고 나니, 생각보다 아무 것도 아니더라.

흔한 심리치료 한 번 받지 않았고, 가해자와 마주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할 수 있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인 너에게도 숨긴 일을, 그 어디에서든, 그 누구에게든 못 숨기겠니.

그래도 차마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는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 친구도 몇 없지만,

그 몇 없는 친구도 아무도 모른다. 1년하고도 조금 더 지난 지금에서야, 글로 써보네.

솔직히, 나 일부러 엄청 막 살았던 것 같기도 해. 잘 못하던 술도 많이 늘었다.

내가 내 욕심으로 너를 내 옆에 두면 너는 영영 힘들어 했을 거고,

내가 너를 포기함으로써 네가 힘들어할 시간이 줄어들 테니, 나는 내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너의 새 여자친구 사진을 보게 되었어.

내 선택이 틀렸더라. 나 정말 하나도 괜찮지 않았더라. 그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 참 못 됐지? 부딫혀볼 용기도 없이 널 놓았는데, 네가 멀리 날아가려 하니 미칠 것 같더라.

며칠 못 가 헤어졌다는 말에도 하나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냥 니가 미웠던 것 같아. 그 땐.

내 이기심에, 널 속여서라도 널 다시 만나려 했다. 너는 그런 내게, 이미 늦었다고 말 했지.

하긴, 내 잘못이 좀 컸어야지. 어찌 감히 널 포기하려 들어? 네가 나에게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몇 달을 매달렸다. 너는 제발 사실대로 말 해달라 했지만, 난 끝내 그러지 못 했다.

차라리 널 붙잡지 말 걸 그랬어. 그럼 내가, 너에게 조금은 나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이 편지를 쓰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

우린 어차피 안 됐을 거야. 시간을 되돌린대도 난 이 사실을 절대 너에게 말하지 못 할 테니까.

사실, 후회 많이 했었거든. 차라리 사실대로 말할 걸,

니가 날 잊고 새 여자친구를 사귀는 동안 나 혼자 이 모든 걸 끌어안고 끙끙 앓고 있었다고,

괜찮은 척 힘들지 않은 척 했지만 나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고, 무진장 힘들었다고,

왜 나 힘든 걸 알아채주지 못했냐고 적반하장이라도 해볼 것을, 하고 후회 했었는데.

근데, 안 그러길 잘 했다. 이제 너는 하나도 힘들지 않잖아. 딱 내가 바라던 대로 됐어.

 

이기적인 나는 마지막까지 이기적인 사람이 되려 해,

너한테 끝내 사실을 말해주지 못하고 거짓말만 늘어놓았다는 게 참 마음에 걸렸었는데,

나 지금 여기에 털어놓았으니, 더이상 너에게 미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난 분명 너한테 편지를 썼으니까, 니가 이거 못 읽어서 모르면 니 탓인 거다.

그리고, 나 이제 네게서 종적을 감추려 한다. 솔직히 나 너에게 너무 구질구질하게 매달렸어. 그치?

너에게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아예 보이지도, 연락이 닿지도 않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은 날 찾지 않는 너지만, 언젠가 날 찾을지 모르잖아. 그 땐 내가 없을 거다. 이 바보야.

너에게 뻥 차인 주제에, 나 지금 또 갑질 하려 하고 앉아 있다. 내가 생각해도 참 별로다, 나.

 

그러니까,

만에 하나 이 편지가 너에게 닿는다면, 부디 나에게 미안해하진 말았으면 좋겠어.

예쁜 일만 겪으며 행복한 너이길 바라. 정말 진심으로, 네가 행복하길 바라.

나를 많이 사랑해줘서 고마웠어. 건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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