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원,907일의 고백(엄상익 변호사)>
1.검거
2.혈투-가장 치열했던 태화산 혈투
3.혈투-빨리 총이나 주고 그냥 가라
4.탈출-절체절명의 위기
5.탈옥-쇠창살 넘어 세상속으로
6.무기징역형을 받았던 89년 강도치사사건의 전말
7.보너스-신창원 탈옥&검거 당시 기사 원문
-1.검거-
< 벼랑끝의 행복>
신창원과 추소정(신창원의 마지막 동거녀.가명)은 전남 순천에 스물 아홉 평짜리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삼성전자 대리점과 규수방 가구점에 가서 살림도 장만했다. 그렇게 금슬좋은 신혼부부처럼 아기자기한살림재미를 느끼며 보름이 지나갔다. 어느 날 저녁 그들은 함께 텔레비전을 보았다.
SBS 특집 '신창원은 있다'였다. 소정은 그 프로를 보더니 얼굴이 달라졌다. 불안해 하는 것 같았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다는 작은 꿈마저 또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신창원은 '여기 그냥 있어야 하나'하는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그날 평소 즐겨 마시던 국산 양주 딤플을 병째로 두 병이나 벌컥벌컥 마셨다.
"소정이 너 불안하지? 우리 헤어질까?"
마음은 절실하게 그녀를 갈망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덧붙였다.
"헤어지려면 지금 말해. 더 정들면 힘들어져."
"사실 처음부터 불안했어요. 그렇지만 논산에서 내려올 때 이미 모든 걸 각오했어요. 내가 잘 할게요."
"넌, 내가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옆에 있어 줄 수 있어?"
신창원이 물었다.
"그럼요, 맹세할게요."
"내 입장 때문에 정말 미안한데... 면사포는 씌워줄 수 없어. 그렇지만 정식으로 예물은 교환하자."
신창원은 그녀에게 예물로 시계와 자그마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주었다.소정은 그 예물을 받아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 또한 신창원에게 이십만원짜리 큐빅 반지를 정표로 주었다.
"우리, 앞으로는 불쌍한 사람들도 도와주고 그래요. 진짜 착하게 살아요. 앞으로 내가 정말 정말 잘할게요."
가난했던 소정의 소원은 운전을 배워 자기 차를 몰아보는 것이었다. 신창원은 그녀를 운전학원에
등록시켰다. 매일 아침 그녀를 운전학원에 데려다 주고 시간이 끝나면 데려오곤 했다.
< 파란만장한 도피생활에 막을 내리다>
1999년 7월16일, 신창원은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침부터 몸이 너무 아팠다. 원래 위와 간이
좋지 않았다. 지난 2년 6개월 동안에도 한두 달에 한 번씩은 꼭 고통이 지나갔다. 뱃속에 커다란돌맹이 하나가 들어차 있는 느낌이었다. 그날따라 소정이는 아침 일찍 자동차 대리점으로 갔다.
사흘 뒤면 그토록 원하던 티뷰론 자동차를 갖게 되는 날이었다. 그녀는 밤에 잠도 자지 못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더니 이날은 아침 일찍부터 자동차 구입에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러 간 것이다.
오후 3시경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보통 때 같으면 항상 그녀가 방문객을 맞이하곤 했다.
신창원은 '그냥 가겠지' 하고 누워 있었다. 그런데도 초인종 소리는 계속 울렸다. 키우던 개까지 컹컹 짖었다.
그때까지 식은땀을 비오듯 흘리던 신창원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문으로 같다.
"후앙 때문에 왔는데요."
문 밖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얼얼하고 어지럽기까지 했다.얼마 전에 설치한 레인지후드에 전기가 흘러 소정이 애프터 서비스를 부탁해 놓은 상태였다.
그가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어주었다. 젊은 수리공이 후드를 수리하기 시작했다. 신창원은 바짝 긴장했다.
평소에도 직접 남에게 얼굴을 노출시키는 행동은 조심했었다.
수리공의 얼굴에서 별다른 변화를 볼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얼굴과 맞닥뜨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는지 여부를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세 표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러나 수리공 청년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 청년이 돌아갔다. 신창원은 다시 침대에
쓰러졌다. 통증이 너무 심했다. 멀미가 나고 쉴새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날 오후 3시40분경, 서울 경찰청 112지령실로 다소 긴장된 목소리의 신고전화가 접수되었다.
"신창원과 비슷한 사람을 봤어요."
수리공 김씨였다. 최은 순경은 수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직감적으로 예사로운 전화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씨의 대답은 수배전단에 나온 신창원의 인상착의와 여러모로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김씨는 가스레인지를 수리하면서 곁눈질로 신창원과 흡사한 주인의 외모를 살피며 방 안의 러닝머신,
벤치프레스 등 다양한 운동기구를 본 뒤 확신을 가졌다.
서울 경찰청 112지령실은 오후 3시42분, 전남경찰청 상황실로 팩스와 전화로 신고 내용을 통보했고
이로부터 4분 뒤 신고 내용은 전남 순천 경찰서에 그대로 전해졌다. 순천서의 전 수사 요원과 전경 등
46명에게 초비상령이 내려졌다. 출동한 경찰은 모두 권총과 M16소총 등으로 무장했다.
3시48분, 드디어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신창원의 은신처는 순천시 조례동 ㄷ아파트 였다.
오후 4시, 경찰은 205호 출입문 부근에 경찰관 6명을, 4동 출입구에 대여섯 명을 배치했다.
4시50분 검거 작전 개시 명령이 떨어졌다. 경찰관 3명이 아파트 가스배관 파이프를 타고 뒷베란다를 통해
거실로 들어섰다.
신창원은 그때까지도 침대 위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식은땀으로 침대 시트가 축축히 젖었다.
죽을래야 죽을 힘조차 없었다. 보통 땐 멀쩡하다가도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산 속에서도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다.
'소정이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걸까..'
앞이 침침하고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안방문이 열려있었다.
신창원은 가물가물한 의속 속에서 거실 창문을 통해 시꺼먼 그림자가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빨리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다급하고 초조했다. 이어서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또 들어왔다. 열에 들뜬 상태에서도 그는 종착역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았다.이렇게 끝나서는 안되는데. 그가 생각했던 최악의 상황이 닥쳐오고 말았다. 그는 주방의 칼로 자살할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피를 뿌리며 죽더라도 이렇게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는데.
"네가 신창원이지?"
형사가 죽음의 사신처럼 다가왔다.
"그래, 내가 신창원이다."
마침내 신창원은 낡은 궤짝처럼 침대에서 끌어올려지고 말았다.
"물 한잔 주라"
신창원은 그 순간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사랑도, 자유도, 모든게 끝난 것이다.
-2.혈투(태화산 혈투)-
신창원,907일의 고백(엄상익 변호사)&탈옥수 신창원(이정훈 기자)
신창원은 자신의 동거녀를 불러낸다. 하지만 동거녀는 차에 형사들을 몰래 태우고 신창원을 만난다.
한쪽 팔이 부러져 깁스하고있고, 한쪽 다리에 금이가 걷기도 힘든 상황에서 총든 무술경관 2명과의 혈투--------------------------------------------------------------------주차브레이크를 당긴 신창원은 차에서 내려 곧바로 동거녀가 타고 있는 라노스로 다가갔다. 문을 열었다.그 순간 뒷자석 밑에 숨어있던 형사가 문을 박차고 튀어나왔다.트렁크는 예상했어도 설마 뒷자석에 엎드려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있는 힘껏 다이너스티 쪽으로 뛰었다. 뒤에서 총성이 터졌다. 운전석에 올라탄 신창원은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그 순간이었다. 억센 팔이 그를 잡아 끌었다. 신창원은 엑셀러레이터부터 밟았다.그러나 미처 주차브레이크를 풀지 못했기 때문에 차가 털털거리기만할 뿐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그러는 사이 김 경사가 달려들어 신창원을 차에서 끄집어내렸다.김 경사는 타고난 장사였다. 그는 신창원을 생포할 생각으로 신창원이 두 팔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두 팔로 신창원의 몸통과 두 팔을 감아서 껴안았다.신창원도 힘이 센 편이다. 신창원은 김 경사의 두 팔에 감겨 버린 자신의 팔을 꺼내기 위해용을 썼으나 결국 빼내지 못했다.그러는 사이 최 경장이 신창원을 제압하기 위해 10여분 동안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덩치 큰 무술경관이 10여분 쯤 두들겨 패면 웬만한 사람은 떡이 돼서 축 늘어지게 된다.
그러나 신창원은 지치지 않았다. 몸을 빼내려는 신창원의 힘이 강하다고 느낀 김 경사는 최 경장에게
소리를 질렀다."다리를 쏴, 다리를"그러나 신창원은 운이 좋았다.최경장이 갖고 온 22구경 DP52 권총이 격발되지 않았던 것이다.신창원의 허리를 껴안은 김 경사는 그 때까지 공포를 쏘았던 권총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할 수 없다고 판단한 김 경사는 자신의 오른손 끝에 걸린 권총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네 발 모두 발사했으나 자세가 나빠서인지 단 한 발도 신창원의 다리에 명중하지 않았다.
김경사는 실탄이 떨어진 자신의 권총을 던져 버리고, 최경장에게 다시 주문했다."권총으로 머리를 때려!"이 때 최경장도 한 손으로는 신창원을 붙잡고 있던 상태였다. 따라서 오른손의 권총 자루를 쥔 상태에서
권총 자루 쪽으로 신창원의 머리를 내리쳤다. 신창원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 최 경장은 그 피를 고스란히뒤집어썼다.김경사도 무릎으로 신창원의 낭심을 질러 올렸지만, '독종' 신창원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신창원이 넘어졌을 때 김경사가 석고 깁스를 한 신창원의 왼쪽 손목을 밟았으나, 신창원은 역시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배고 옆구리고 아무리 내질러도 신창원은 '끅끅' 소리만 낼 뿐,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지독한 놈이었다. 이때 신창원은 부러졌던 팔의 두 곳이 다시 부러지는 중상을 입는다."뭐, 이렇게 지독한 놈이 다 있어?"격투가 30여 분 지속되자 나이가 많은 최경장이 먼저 지쳐서 주저앉았다.
이 때쯤 신창원은 손을 빼내는데 성공했다. 그런데도 김경사가 신창원의 몸통을 붙잡은 손을 풀지 않자신창원은 빼낸 손으로 김경사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김경사는 지원 병력이 올때까지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신창원의 몸통을 잡은 채 고스란히 주먹 세례를
받았다. 상황이 초반과는 완전히 역전되었던 것이다. 죽기 살기로 덤비는 신창원의 기세는 살벌했다.엎치락뒤치락 하는 사이 신창원의 티셔츠가 위로 반쯤 벗겨지며 김경사의 손이 따라 올라갔다.
그러자 신창원이 김경사의 왼손 검지를 깨물었다. 그 바람에 김경사는 '악' 소리를 지르며신창원을 붙잡았던 손을 풀었다.그때 최경장이 달려들어 신창원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피가 흘러내렸지만 신창원은 역시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최경장 마저 떨쳐내고 자유로워진 신창원은 땅에 떨어져 있던 김경사의 권총을 주워
김경사를 겨냥했다. 살기 등등한 얼굴이었다."쏜다!""쏴 봐, 새끼야! 실탄이 없을걸"
총을 뺏긴 김경장이 옆에 있던 다른 형사에게 소리쳤다."저거 빨리 쏴! 쏴!"다른 형사가 실탄을 장전하는 순간이었다. 신창원은 그 형사의 총구를 오른팔로 강하게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실탄이 투입구를 막아버렸는지 노리쇠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 형사가 권총을 움켜잡고
신창원의 머리통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신창원의 머리에서 피가 튀었다.그가 넘어지는 순간 형사들이 부러진 팔을 다시 짓이겼다. 신창원의 입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 옆에는 얼마전까지만해도 한이불을 덮고 잤던 동거녀가 있었다."도와줘!"신창원이 그녀를 향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얼굴 전체에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만신창이가 된 신창원을 팔짱을 낀 채 냉정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결국 너도 날 배신하는 구나'하는 절망감이 그 순간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어떻게 해서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서히 초인간적인 힘이 솟는 것 같았다.신창원이 형사들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형사가 뒤에서 잡으면 어깨걸이로 논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형사들도 악에 받쳤다. 떨어지면 올라오고 떨어지면 또 올라오는 처절한 싸움이었다.권총으로 맞아 머리가 깨진 신창원은 서서히 의식이 몽롱해졌다.자신의 행동이 모두 꿈만 같았다.그 때 마을회관에 있던 주민들은 총소리와 함께 '퍽퍽' 하는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당시 주민들은 그날 상황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처음에는 깡패들이 술 먹고 싸우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왜 남의 동네에 와서 싸움질이냐?'고 했더니
여자가 나서서 '아저씨는 상관하지 마세요'해서 내버려 두었죠."
"정말 대단한 격투였어요. 셋이 뒤엉켜 싸우는데 웬 힘들이 그렇게나 센지,
논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기어 올라와서 싸우고, 또 떨어졌다가 다시 기어 올라와서 싸우고..."신창원은 더 이상 감정에 지배되지 않고 미련없이 몸을 돌려 라노스 승용차로 향했다.
라노스에 올라탄 신창원은 매당1구 쪽으로 차를 몰았다.그러나 신창원은 무척 흥분해 있었는지 마을 회관 앞에 설치된 쇠사슬 바리케이트를 보지 못하고
차로 박아 버렸다. 그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라노스 승용차의 보닛이 위로 들리면서 쇠사슬이 끊어졌다.신창원은 역시 운이 좋았다. 보닛이 잠시만 더 들려 있었으면 시야가 가려진 신창원은 라노스 승용차와 함께
논바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라노스의 보닛은 곧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내려오고,신창원은 그대로 마을 안 쪽으로 달아나 버렸다.그 때, 마을 주민들의 증언."김경사는 싸우다 맞아서인지 얼굴이 울퉁불퉁 부어있었어요. 최경장의 얼굴은 깨끗했습니다."신창원은, 형사들과 격투를 벌인 뒤 차를 타고 도망치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서서히 정신이 되돌아왔다.신창원은 라노스 승용차 안에서 손에 총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거울에 비춰 보았다."어 내가 왜 여기 있지? 교도소 안에 있어야 하는데..."뭐가 뭔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잠시 앉아있으려니까 끊겼던 필름이 다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언론에선 '신창원에게 총까지 뺏긴 무능한 경찰'이라고 보도됨. 하지만 베테랑 형사들은 최선을 다했음.
-3.혈투(빨리 총이나 주고 그냥 가라)-
98년 7월 16일이었다. 새벽 2시경, 신창원은 잔뜩 술에 취해서 차로 갔다. 차가 숙소였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아무래도 잠을 자려면 반바지로 갈아입는게 편할 것 같았다. 실내등을 켜고
막 옷을 갈아입는 순간이었다. 순찰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바로 그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순간 신창원은 술기운에도 바짝 긴장했다. 조용히 순찰차의 동향을 살폈다. 어쩐지 영 느낌이 좋지 않았다.역시 예상대로였다. 순찰차는 모퉁이를 돌아가는 척하다가 돌아와 신창원이 타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의
꽁무니에 바짝 붙었다. 유사시 차를 빼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려는 경찰관의 용의주도한 행동이었다.이윽고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뚱뚱한 몸집의 경찰관이 순찰차에서 내렸다. 허리에는 리볼버 권총이
무거운 검을 빛을 뿜고 있었다. 이어서 역시 권총을 찬 젊은 경찰관이 몇 발자국 거리를 두고 뚱뚱한경찰관을 엄호하는 자세를 취했다."잠시 검문 좀 하겠습니다."뚱뚱한 경찰관이 다가와 경례를 붙이면서 점잖게 말했다."뭣 때문에 그러시는데요?"신창원이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물었다."이 차가 아저씨 찹니까?"경찰관은 어딘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신창원이 타고 있는 차를 살펴보았다."뭐, 차에 이상이라도 있습니까?"신창원이 시비조로 경찰관에게 대꾸했다."그건 당신이 알 것 없고!"경찰관도 지지 않고 위압적으로 나왔다.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고 점점 조여오고 있는 중이었다."사실은 이 차 주인은 저 건물 당구장 안에 있는데요. 그 사람이 차에서 가방을 꺼내오라고해서
여기 있는 거예요. 이건 제 차가 아닙니다."신창원이 둘러댔다. 그래도 경찰관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그럼 같이 가서 확인합시다"경찰관이 신창원을 끌다시피 해서 옆 건물 쪽으로 걸어갔다. 건물 입구 로 들어서는 순간 신창원은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경찰관이 그런 신창원의 불안감을 눈치챘는지 입구쪽에서 갑자기
그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굉장한 악력이었다. 그나마 앞뒤의 경찰관들이 권총만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해볼 엄두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그러나 둘씩이나 되는 무장 경관 앞에서 섣불리 도망이라도 쳤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판국이었다.
신창원의 온 신경이 경찰관이 갖고있는 리볼버 권총으로 쏠렸다.45구경 권총과는 달리 리볼버는 노리쇠를 후퇴 전진시키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면 실탄이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권총을 발사하려면 처음에 공이치기만 약간 풀어두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경찰관이 차고 있는 권총이 그것과 똑같은 구조로 만들어진 것인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순간적으로 번개같이 튄다고 하더라도 총이 발사되기 전까지 사정거리를 벗어나기란 불가능했다.
상대가 하나뿐이라면 어떻게든 수를 써볼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그러나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신창원은 갑자기 자신을 붙들고 있는 경찰관의
총지갑에서 권총을 쑥 뽑아냈다. 그는 경찰관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쏜다" 하고 소리쳤다.
그의 팔을 잡았던 경찰관이 이번에는 신창원의 손을 잡고 권총을 뺏기 위해 필사적으로 덤볐다.
신창원은 리볼버의 공이치기를 뒤로 제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경찰관이 안전장치를
해놓은 모양이었다.경찰과 신창원 사이에 서로 총을 뺏으려는 격투가 벌어졌다. 총을 뺏지 못한 경찰관은 드디어 신창원의
오른쪽 팔을 물어뜯었다. 뒤에 있던 젊은 경찰관은 그의 두 다리를 잡고 그를 쓰러뜨리기위해 용을 썼다.신창원으로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앞쪽의 경찰관은 어찌나 힘이 좋은지 신창원의 공격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 경찰과는 건물 입구 의 통로가 좁아 몸을 움직이기 힘들자 이번에는 신창원의 목덜미를
물어 뜯었다.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무서운 통증이 느껴졌다. 신창원도 경찰 관의 귀를 물어뜯었다.
세 명이 투견장을 방불케하는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때마침 흰 옷을 입은 이십대 여자가 그 건물을 지나치는 중이었다. 신창원을 물어뜯던 뚱뚱한 경찰관이
그 여자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아가씨, 빨리 112로 신고해 줘요!"그 여자가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상황은 더 급박해졌다. 신창원은 두 경찰관을 끌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워낙 상황이 절박하다보니 본능적으로 힘이 솟아나왔다. 그는 권투선수가 스파링을 하듯이경찰관에게 정신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나이 먹은 경찰관이 얼굴을 감싸쥐고 털썩 주저 앉았다.
순간적으로 신창원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뒤에 있는 젊은 경찰관의 리볼버였다. 신창원은 젊은 경찰관을
돌아보았다. 젊은 경찰관은 어느새 총 대신 3단봉을 뽑고 있었다. 그 꼴을 보면서 신창원은 직감적으로
그에게 실탄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로소 안심이 되면서 신창원은 헛웃음을 흘렸다.3단봉을 든 경찰관이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랐다.그때 얻어 맞고 바닥에 쓰러졌던 경찰관이 겨우 한마디 말했다."빨리 총만 주고 그냥 가!"반말은 그에게 남은 최후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그럼 안 쏠 거야?"신창원이 물었다."안 쏠게."신창원은 총을 바닥에 던지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에는 잠잠해졌다. 위기의 순간을 간신히 넘긴 것이다."그래도 그때 그분들만큼 눈치도 빠르고 힘도 좋으면서 진짜 그렇게 악착같이 최선을 다하는 경찰관은
아직 보지 못했어요."얼마전에 신창원은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그 경찰관이 징계를 받았다는 보도를 보고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는 이야기를 덧붙이기도 했다."저야 죄를 지었으니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지만, 그분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4.탈출(절체절명의 위기)-
원경장은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서 통보했다."신창원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12월 30일 오전 9시까지 평택시청 송탄출장소 앞으로 모여라"다음날 오전 9시 송탄출장소 앞에 목검과 쇠파이프, 야구 방망이 등으로 무장한 여섯 명의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원경장은 멧돼지도 30분간 기절시킨다는 가스총을 들고 나왔다.원경장은 조선일보 보급사원을 가장해 신창원이 살고 있는 문제의 302호를 두들겼다.
그러자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누구세요?"원경장이 얼른 소리쳤다."아주머니, 조선일보에서 나왔어요. 문좀 열어주세요."신창원은 신문구독때문에 왔다는 소리에 이상한 육감이 들어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싱크대 앞으로 가서
칼로 무를 써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유사시 대응하기 위한 경계 태세 였다."잠깐만요." "어디시라고요?""조선일보에요. 구독 좀 해 주세요."원경장이 이렇게 대꾸하자, 문이 3분의 1쯤 열렸다. 원경장은 문을 확 잡아 제꼈다."무릎 꿇어, 권총이다!"신창원은 원 경장이 겨누고 있는 가스총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칼을 휘두르고 앞으로 나직하지만
독기가 서린 말을 내뱉었다."맘대로 해봐, 새끼야."채 2m도 안되는 거리였다. 원 경장이 방아쇠를 당기자 멧돼지도 30분간 기절시킨다는 최루액이 신창원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됐다.그러나 신창원은 끄떡도 하지 않고 왼손으로 얼굴을 한번 쓱 문지르고 나서 독기 오른 표정으로 시퍼런 칼을
고쳐 잡았다.당황한 원경장은 잽싸게 사타구니를 걷어찰 생각으로 신창원의 얼굴을 겨냥하고 가스총을 던졌다.
그러나 신창원은 권투에서 풋웍(foot work) 을 하듯 가볍게 피하고 오히려 앞으로 전진했다.원경장이 순간적으로 다리를 후들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야, 일어나, 꺼져!" 신창원이 내뱉었다.그때의 상황을 원경장은 이렇게 회상했다."칼 끝이 흐리게 보일 정도로 신창원의 손 놀림이 빨랐다. 그는 나를 죽일 수 있었으나 칼을 거두었다."빌라를 빠져나간 원경장은 공중전화를 찾아 재빨리 112로 신고를 했다.어느새 연락이 됐는지 경광등을 번쩍이며 경찰차가 도착했다.경찰관 한 명이 권총을 뽑아 신창원의 집 유리창에다 대고 총을 한방 쐈다.신창원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끼며 옥상 옆 계단을 통해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신창원은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서 숨어 있었는지 쇠파이프를 손에 든 청년이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을 피하면서 싸울 시간이 없었다. 신창원은 정면으로 내려오는 쇠파이프를
팔로 막았다. 그 바람에 팔목이 부러졌다. 신창원은 왼손으로 쇠파이프를 막으며 쏜살같이 달렸다."저게 사람인가 싶었다. 캥거루처럼 한두 발 뛰더니 감쪽같이 담을 넘었다."이 때의 상황을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그는 잔뜩 긴장한 터라 골목길만 따라가며 신창원을 추적했다.신창원을 시야에서 놓쳤다가 발견하길 수 차례, 청년은 한 골목에서 다이너스티 승용차에 올라타는
신창원을 다시 발견했다.매우 용의주도한 성격의 신창원은 새롭게 훔친 다이너스티 승용차를 자기 빌라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해 두었던 것이다.이 때 청년의 손에는 쇠파이프가 들려 있지 않았다. 그는 마침 주변에있던 붉은 벽돌을 주워 들고
다이너스티 승용차 운전석 옆으로 달려갔다. 이씨가 벽돌을 힘껏 집어던지자 벽돌은 유리창을 깨고
들어가 신창원의 왼쪽 손목을 때렸다. 먼저 쇠파이프로 왼쪽 손목을 맞은데 이어 또 다시 벽돌로 얻어 맞자
신창원의 왼쪽 손목 뼈가 완전히 부러졌다.그 순간 신창원은 엄청난 속도로 다이너스티를 급발진 시켰다.보통 사람이라면 손목 뼈가 부러질 정도로 타격을 받으면 그 자리에서 손목을 붙잡고 데굴데굴 구르며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는게 정상이다. 그러나 팔목이 부러졌음에도 신창원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그대로 차를 발진시켰던 것이다.
-5.탈옥-
1997년 1월20일 새벽 1시, 부산 교도소 3사상 6방, 일곱 명의 재소자들이 저마다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어느 한 순간, 그 중 한명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태연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쪼그려 앉는다. 감방 안에선 다른 재소자들의 숨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다들 곤히 잠들어 있음을
확인한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화장실 환기창의 창살을 떼어냈다. 지름이 1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쇠창살이 '톡' 소리를 힘없이 떨어져 나온다. 그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환기창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불과 손수건 두장 크기의 환기창을 서서히 빠져나가는 그 몸놀림이 여간 능숙한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녹슨 톱날로 두달간 하루도 빠짐없이 환기구 쇠창살을 조금씩 조금씩
잘라내느라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더구나 환기창 크기에 맞도록 몸집을 최대한 줄이기위해한 달 동안 매일 굶다시피한 그였다.'단 하루를 살더라도 밖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이 한가지 집념을 이루기 위해 근 4년동안이나 끈질기게 품고 있던 탈주 계획을 비로소 실행에 옮기는
순간이었다.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환기창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지만 사내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이윽고 몸통이 환기창을 빠져나왔다. 그는 팔을 길게 뻗어 창문 바깥의 창살을 잡았다. 마치 곡예사의
몸놀림만큼이나 아슬아슬한 동작이었다. 그는 창살을 잡은 팔의 힘에만 의지한 채로 화장실 환기창에
걸쳤던 다리를 빼내 2층과 1층 사이의 턱에 발을 디뎠다. 10센티미터도 채 안되는 좁은 턱이지만
창살에 매달로 몸을 가누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디딤돌이었다. 온몸으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사내의 표정에는 강한 안도의 빛이 역력했다. 드디어 1차 관문인 사방을 빠져 나오는데
성공한 것이다.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창문 턱에서 아래 화단까지는 약 4미터 쯤 되는 듯했다. 사내는 대강 눈으로
지면을 확인한 다음 주저없이 뛰어내렸다.'쿵' 정적을 가르는 그 소리는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만다. 잠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긴 그는
재빨리 주위를 살펴본 다음 살금살금 신축 교회 공사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보안동과 사동의 환한 불빛이
사내의 움직임을 적나라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허나 그 시각 이 사내의 수상한 움직임을 주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드디어 신축 교회 공사장의 철제담까지 다가간 그는 최대한 몸을 낮춰 언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손에는 탈출할 때 잘라냈던 환풍구의 쇠창살 토막이 쥐어져 있었다. 얼어붙은 지표면을 들어내자
그 아래는 모래처럼 푸석푸석했다. 사내는 치밀하게 계산된 움직임으로 언 땅을 파헤쳐 자기 몸이
겨우 빠져나갈 만큼의 공간을 만들었다. 사내의 몸은 온통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모습이었다.'푸드덕'어디선가 겨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담벼락 위에 내려앉았다.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흠칫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사내의 숨가뿐 동작이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사내는 그 비좁은공간 속으로 몸통을 들이밀었다. 엉덩이가 찢기고 등가죽이 벗겨져 나갔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사내는 생살이 찢겨져나가는 고통을 참으며 이를 악물로 바깥으로 기어나왔다.이윽고 신축 교회 공사장으로 들어온 그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아직 2차 관문인 교도소 담벼락이 남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교회 신축 공사장과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담벼락을 철제 대문으로 교체해 놓았기 때문에 탈출에는 더없이 유리한 상황이었다.공사장 곳곳에 흩어져 있는 파이프나 나무토막들도 탈출의 도구로 쓰였다. 사내는 그것들을 교도소
담벼락에 기대 놓은 채로 교도소 주벽 위로 손쉽게 기어올랐다. 철대문의 틈새로 바깥 동정을 살폈다.
바깥엔 아무도 없었다. 또 한번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철대문은 교도소 담장 높이와 같은 4.6미터. 사내는 공사장에서 구한 파이프를 담벼락에 걸쳐놓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일단 담을 오르는데 성공한 사내는 로프를 철대문의 문설주에 묶고
마치 훈련된 유격대원처럼 미끄러지듯 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드디어 교도소 탈주 성공.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낮은 포복으로 전방을 향해 쉬지 않고 기억갔다.
100미터쯤 기어가자 마지막 관문인 철책이 나타났다. 철책을 넘는 일은 가장 쉬운 일이었다.
사내는 여유있게 철책을 뛰어넘었다. 철책 너머로 인근 농촌의 비닐하우스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뒤 그 비닐하우스를 향해 비호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사내의 이름은 신창원. 바로 이 순간이 장장 2년 6개월, 정확하게 말해서 907일간에 걸친
그의 파란만장한 도주 신화가 시작되는 찰나였다.
(*변호사와의 대담)"쇠톱은 어떻게 구했나요?"그가 어떤 경로로 쇠톱을 구했는가 하는 것은 언론이나 수사 과정에 있어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 문제를 두고 외부에서 그를 도와준 사람이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많았다."어느 날 재료 창고에 갔었는데 바닥에 녹슨 톱날이 떨어져 있길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더니 한 구석에
톱날들을 쌓아 놓았더라구요. 금새 치우려고 했겠지요. 그 중 한 개를 운동화 안창에 숨겨 가지고들어가 방바닥 틈에 끼워뒀어요."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다른 재소자들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철창을 잘라낼 수 있었다는 말입니까?"이 부분에 대해서도 다른 재소자들이 묵인했다는 의심이 많았다."사실 방에 7명이 함께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속이는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나마 방에 연결되어 있는
화장실에 비닐이 쳐져 있어서 조금 쉬웠습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그 비닐 앞에 수건을 걸쳤죠.보통 용변 보는 걸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하거든요. 음악이 나오는 저녁 6시부터 8시
사이에 화장실에 들어가 정확히 3분에서 5분 정도 쇠창살을 절단했어요. 쇠톱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기위해서죠. 정확히 두 달이 걸렸어요."
-6.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던 강도치사죄의 전말-
*참고-'강도살인죄'와 '강도치사죄'의 차이
'강도살인죄-강도질을 하면서 사람을 죽인 죄. 고의로 죽인 경우'
'강도치사죄-강도질을 하면서 잘못하여 사람을 죽게한 죄. 죽일 의도가 없었던 경우'
"솔직히 그 당시에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졌는지도 몰랐어요."신창원은 89년도 범행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기억의 빗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날 신창원은 후배들의
싸움에 끼여들어 돌려차기를 하던 중 다리의 힘줄을 다쳤다. 곧이어 신고를 받고 출동한 방범대원을 때려파출소로 끌려갔다. 아는 형이 합의금을 대줬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고심하고 있을 때 한 후배가 와서
정보를 줬다. 완구 도매점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루 매상이 보통 1억원이 넘는다는 것이었다.신창원은 후배들 몇 명과 범행을 모의했다. 후배들이 골목 안에 잠복해 있다가 완구 도매상 사장이 나타나면
길을 막고 시비를 걸기로 했다. 신창원은 쇠파이프를 가지고 있다가 그 사장의 뒤통수를 쳐서 기절시킨다는
각본이었다. 계획한 대로 후배들과 약속된 날 범행 장소로 갔다. 후배들이 골목 안에서 완구 도매점 사장을
기다렸다. 신창원은 그보다 조금 떨어진 골목에서 대기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장이 힘깨나 쓰는 친척과
함께 골목길에 나타났다. 신창원이 멀리서보니 후배들이 그를 막아서는 것 같았다. 신창원은 쇠파이프를
들고 골목을 나섰다. 며칠전에 다친 힘줄 때문에 걸음이 더뎠다. 시간이 좀 지체됐다.후배들이 막아선 곳에 가보니 예상 외의 상황이 벌어졌다. 한 사람이 땅바닥에 쓰러져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완구 도매상 사장도 담벼락에 몸을 기댄채 신음하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후배들이 너무 서툴렀다.
사장과 함께 있던 처남이라는 사람이 반항을 했었다는데 이런 때는 허벅지 쪽을 칼로 찌르는게 건달들의
수법이었다. 그러나 후배들은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다리를 찌른다는게 옆구리를 공격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이 죽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조직 폭력배들의 강도살인 사건으로 그 일이 대서특필되었다."그때 검사가 저한테는 사형구형을 했어요. 제가 그 중에 제일 선배였거든요. 최후 진술에서 다른 말 하지
않고 죽여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판사가 무기징역을 선고하면서 하는 말이, 아직 젊고 반성하는기미가 있어서 목숨만은 살려준다고 하더라구요."신창원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회상하면서 점점 표정이 굳어졌다."그때는 그게 잘못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얼마나 큰 죄인지는 미처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저는 정말 나쁜놈이더라구요. 만약 제 동생이나 아버지가 그렇게 죽었다고 해봐요. 내가 강도놈들을살려 두겠어요. 죽여버리죠. 그러니까 저는 죽는게 마땅했어요.""저 때문에 징역 15년 선고받고 아직도 감옥에서 고생하는 그 후배들한테도 미안해요."
법률 조사 결과 직접적으로 신창원이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치사죄가 적용된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명이 작당해서 도둑질을 할 때 자기방어를 위해 칼을 갖고 야간에 어떤 사람의 집을 침입했다.
그런데 마침 집에 주인이 잠을 자고 있다가 잠에서 깨어나 도둑들에게 소리를 치며 저항했다.
주인의 저항에 놀란 도둑들이 칼을 뽑아들었고, 그 중 한명이 얼떨결에 주인을 살해했다. 이 경우 주인을
죽인 도둑뿐만 아니라 이 집에 침입한 도둑 모두가 공동 정범으로 강도치사 혐의를 적용받게 된다.
-7.보너스(탈옥&검거 당시 기사 원문)-
[부산] 강도살인 무기수 "영화같은 탈옥" (조선일보 1997.01.20)
부산=박주영-박영석기자강도치사죄로 부산교도소에 복역중이던 무기수가 탈옥했다.부산 강서구 대저1동 부산교도소 3사동 2층 6방에서 강도살인혐의로 무기를 선고받고 수감중이던 재소자
신창원(29·서울 당산 동1가)이 감방내 화장실 환기통을 통해 교도소 밖으로 달아난 사실을 20일 오전 6시쯤
교도소측이 확인했다. 교도소측은 신이 야간순찰이 끝난 20일 오전 1시 이후 탈옥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색연필] 의적 신창원? 탈옥수 신창원,복지시설성금등 자선가 행세(조선일보 1998.01.05)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부산교도소 탈옥수 신창원(30)은 평택 시내 빌라에 은신해 있는 동안
사회복지시설과 소년소녀가장 돕기 성금을 내는 등 사회사업가 행세를 해온 것으로 경찰조사 결과
밝혀졌다. 경찰은 신이 지난해 12월20일 동거녀인 강씨와 함께 평택시 지산동 소재장애인 수용시설에
찾아가 "서울에서 장사하는 한상우"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현금 1백만원과 돼지고기, 사과 등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신은 또 며칠 뒤에는 동사무소를 통해 추천받은 소년소녀 가장 홍모(10)군과 은모(13)양에게 각각
40만원씩을 전해주고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홍군에게는 자전거를 사주기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신에게 소년소녀 가장들을 추천한 동사무소측은 "외모와 말투가 단정해 교도소 탈주범이라는 의심은 전혀 못했다"고 말했다.【수원=이명진기자】
신창원 탈옥 2년반만에 잡혔다(조선일보 1999.07.16)
부산교도소 탈옥수 신창원(32)이 16일 오후 5시20분쯤 전남 순천시 D아파트 104동 205호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신창원은 지난 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후 2년6개월간 도피생활을 해왔다.
신창원은 지난 1일부터 이 아파트에 거주해왔고, 이날 가스렌지 후드를 교체하러갔던 전자제품 수리공
김모(29)씨의 신고로 검거됐다. 순천경찰서 형사 40여명이 아파트 앞뒤를 포위한 가운데 3명의 형사가
베란다를 통해 아파트에 들어가 격투 끝에 신을 붙잡았다. 경찰은 신의 팔과 다리를 묶은 후
베스타 승용차 편으로 신을 압송했다.경찰은 신창원의 등에 새겨진 사슴과 장미 문신을 확인했고, 잠적해 있던 아파트에서 그 동안의
탈주경위등을 적은 일기장, 여행용 가방 두개에 담긴 1만원권 지폐등을 찾아냈다. 전자제품 수리공 김씨는
이날 오후 3시40분쯤 "신창원과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이 있다. 여자와 함께 있는데 결혼사진이 없고,
집안에 운동기구가 많이 있다" 고 서울경찰청에 신고했다. 서울경찰청은 신고접수 직후 순천경찰서에
검거지시를 내렸고, 순천경찰서 형사들이 곧바로 이 아파트를 급습해 신을 검거하는데 성공했다.주민들은 "신창원이 지난 1일쯤 충남 34나 6826호 소나타 승용차에 여자 한명을 태우고 내려와 지금까지
계속 이곳에 머물러왔다"고 말했다. 신창원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서울구치소, 청송교도소,
부산교도소 등에서 7년 4개월간 복역하다 97년1월 부산교도소를 탈옥했다. 그는 탈출을 위해 1년여에
걸친 감식으로 살을 빼고, 감방 쇠창살을 조금씩 쇠톱으로 잘라내는 집념을 보였다.
이후 2년 5개월여 도피 행각중 경찰과는 6번 마주쳤고, 그중 5번은 격투를 벌였지만
번번이 혼자 몸인 신창원의 승리로 끝났다.그에게 붙은 현상금은 2년 5개월여 도피와 격투를 거치며 당초 500만원에서 계속 인상돼 지금은
5500만원(법무부 500만원, 경찰청 5000만원)으로까지 올랐다. 그는 그 동안 주로 김제, 천안, 평택 등
주로 충남-전북 지역에서 다방 종업원과 동거하며 은신했으며, 가끔 밤에 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와
도둑질로 많은 현금과 귀중품을 털어 생활비로 써왔다. 신은 89년 3월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주택가
골목길에서 고향 친구 4명과 함께 강도 살인 후 200만원을 뺐아 달아났다가 5개월여 뒤 검거돼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신창원 신출귀몰에 경찰 안절부절... "밥맛도 없어요"(주간한국 1998.07.29)
“신창원은 경찰의 저승사자”
대한민국 15만경찰은 밥맛을 잃고 좌불안석이다. 수도경찰 총수가 경고를 당하고 형사 수장이 죄인 아닌
죄인이 돼 3평남짓의 파출소 골방에 틀어박힌 채 신의 검거를 독려하고 있다. 그간 신의 검거실패 책임을
물어 징계를 당한 경찰관만도 무려 30여명. 이 중에는 치안감을 비롯, 경찰의 꽃인 경무관 ,총경등 서장급
이상도 10명에 이른다.
게다가 김정길(金正吉)행자부장관이 최근 “초동대응을 제대로 못해 신을 놓친 책임은 끝까지 묻겠다”고
선언, 신창원이 도피행각을 계속할 경우는 물론이고 검거되더라도 줄초상은 이어질 전망이다. 서울시내
한 경찰서장은 “신창원 출현소식이 들리면 관할지역 경찰서장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며
“신창원은 경찰의 저승사자”라고 까지 불안을 토로했다.
지난해 1월 신이 부산교도소를 탈출한 이후 경기 평택과 충남 천안, 전북 김제, 경북 성주 등으로 이어진
잇단 출현소동에서 경찰은 어처구니 없게 완패했다. 7월16일에는 최강의 치안력을 자부하던 서울경찰이,
그것도 강력범죄 베테랑들이 모였다는 강남지역 앞마당에서 죄인에게 ‘권총만은 안된다’며 애원하는
촌극까지 벌였다.
독오른 경찰, “신창원 검거에 사활 걸었다”
경찰은 최근 신에 대한 현상금을 서울 목동지역 27평형 아파트 전세값(5,000 만원)수준으로 높였다.
시민들의 결정적인 제보나 신고가 경찰이 믿는 가장 든든한 보루이기 때문이다.
이와관련 경찰의 한 관계자는 “며칠 전에 신창원과 흡사한 사람이 시장 어귀를 지나가는 것을 시내버스를
타고가다 봤다는 식의 신고가 접수되더라도 일일이 추적해 사실여부를 확인하겠다는 각오”라고 밝혔다.
경찰로서는 요즘 실추된 권위를 부끄러워 할 여유조차 없다. 이젠 사활을 건 독기만 남았을 뿐이다.
서울지역 31개 경찰서에는 신창원 검거업무를 전담하는 ‘24시간추적수사반’이 설치돼 본격 운영에
들어갔고 신이 도주에 주로 차량을 이용하는 것에 주목, 차량과 번호판 도난사건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수배관리령도 내렸다. 신의 도피행적과 성격 등을 정밀 분석, 수십가지의 가상시나리오를 만들어
색출·검거작전을 펴는 한편 국내 도피생활에 한계를 느껴 밀항을 통한 해외도주 가능성도 있을것으로 보고
부산 여수 인천 등 밀항 예상지역에 대해서도 수사력을 투입했다.
신창원은 어떻게 교도소를 탈옥할 수 있었을까?
탈주준비의 첫 단계로 그는 성실한 수감생활로 교도대원들의 집중 감시망에서 벗어난데 이어 위장병으로 변비가 심하다며 식욕이 없다며 식사량을 줄여 3개월여동안 80㎏이던 체중을 60-65㎏까지 줄여 놓았다.신창원은 또 감방 내부를 자세히 살펴보니 감방 옆에 있는 화장실 통풍구가 눈에 번쩍 들어왔다.신은 통풍구에 설치된 쇠창살만 자르면 감방에 빠져 나갈수 있다고 판단하고 쇠창살을 자를 물건을 찾아 나섰다.지난 96년 10월께 교도소내 영선창고에서 교도대원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쇠톱 2개를 주워 운동화 안창과 밑창 사이에 감춘 그는 6명이 함께 사용하는 감방안으로 반입하는데 성공했다.쇠톱을 운동화 밑창속에 숨김으로써 금속탐지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고 쇠톱의 감방 반입이 성공함으로써 대탈주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문제는 어떻게 하면 화장실 바닥에서 30㎝ 높이에 설치돼 있는 환풍구(가로 33㎝,세로 33㎝) 쇠창살을 소리없이 자르는 등 쇠톱을 사용하느냐는 것.고민끝에 그는 매일 오후 6시부터 30분간씩 실시하던 음악방송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고 이어 가로 70㎝, 세로 80㎝ 크기의 화장실을 매일 20-30분간씩 출입하며 음악방송 시간대에 쇠창살을 자르기 시작, 20여일만에 절단작업을 완료했다.그는 또 잘린 쇠창살이 눈에 뛰지 않게 하기 위해 껌을 이용, 살짝 쇠창살을 붙여놓고 탈주 실행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엄동의 매서운 바람이 부산시 강서구 대저동 부산교도소의 창문을 때려대고 있던 97년 1월 20일 오전 3시.동료죄수들이 체온을 빼앗기지 않기위해 이불을 뒤짚어쓰고 단잠에 빠진 그 시각 그는 소리없이 화장실쪽으로 몸을 숨겼다.껌에 지탱되고 있는 쇠창살 2개를 들어낸뒤 머리부터 밖으로 내밀고 간단하게 빠져 나왔다. 20㎏ 이상 체중을 줄인 것이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1층 땅바닥까지 높이가 3.6m나 되었지만 그의 날렵한 몸을 날리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의 손에는 화장실 통풍구 쇠창살 1개를 굳게 쥐어져 있었다.땅바닥에 우뚝 선 그는 81.2m 떨어진 24사 상동 9실 감방 앞의 신축교회당 펜스(높이 4.5m)쪽으로 갔다.자른 쇠창살로 정신없이 땅을 파기 시작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폭 54m, 높이 25m 크기의 구멍이 생겼고 그는 또 그곳에 머리를 들이밀었다.2번째 장애물을 통과하는데 성공한 그는 교회당 공사장에서 쇠파이프와 밧줄을 집어들고 곧장 47.5m 떨어진 교도소 3감시대와 4감시대 중간지점에 있는 높이 4.5m의 교도소 철제 담벼락의 임시 출입문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섰다.하늘은 일단 신창원 편이었을까.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재소자의 탈주를 막기 위해 설치돼 있던 담벼락 감시기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만약 감시기의 전자감응장치만 작동했더라면 그는 3번째 장애물에서 주저 앉고 말았을 것이다.공사장 쇠파이프를 철제 담벼락 임시출입문에 빗댄뒤 쇠파이프를 타고 담벼락 위로 타고 오른데 이어 밧줄을 이용, 월담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그러나 그의 앞에는 마지막 장애물 철조망이 얼키고 설킨채 떡 버티고 있었다 .철제 담벼락에서 61m 떨어진 곳에 철조망(폭 185㎝, 높이 2.15㎝)에 접근한 신창원은 다시 쇠창살을 꺼내 들었다.철조망 밑의 꽁꽁 언 땅바닥을 쇠창살로 파고 손으로 긁기를 시작한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철조망이 걷히고 갑자기 앞이 훤하게 열리면서 김해들판의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때리고 있었다.오전 4시 30분. 모든 지혜와 젖먹던 힘까지 총동원하며 자르고, 파고, 오르기를 한지 1시간 30분만에 드디어 그는 구금과 자유의 경계선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마지막 장애물을 넘은 그는 곧바로 인접한 비닐하우스를 뛰어들어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던 자전거를 발견, 잽싸게 몸을 싣고 정신없이 페달을 밟았다. 그렇게 2.6㎞를 달려 부산-김해간 국도까지 나와보니 `창우농원'이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창우농원의 담을 간단히 넘고 들어간 그는 양복과 구두, 자전거 등을 등을 훔친뒤 죄수복을 양복으로 갈아입은뒤 지나가는 택시에 몸을 싣고 운전사에게 구포쪽으로 가자고 했다.
신창원 도피 은신방법
낮에는 산에서 낙엽을 덥고 잤으며 밤에는 운동으로 추위를 견뎠다", "서울에서 전북까지 구보로 이동했다".경찰이 밝힌 신창원(申昌源)의 도주 및 은신방법은 일반인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상상을 초월했다.한겨울인 지난 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를 탈옥한 신은 충남 천안시 안서동 태조산 체육공원에서 2월초까지 "낮에는 낙엽을 덥고 자고 밤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해 운동을 하며 숨어지냈다"고 진술했다.같은해 12월30일 경기도 평택에서 경찰과 격투끝에 왼쪽 팔이 부러지는 상처를 입은 신은 98년 1월1일부터 10일동안 대전 시내 N독서실에 은신하며 몸을 추스렸다.98년 1월12일에는 충남 조치원의 한 정신병원 주변 논에 쌓여있는 짚단 안에서 3-4일간 숨죽여 지냈으며 같은해 3월14일 전북 정읍 신태인에서 순창-임실-남원을 거쳐 경남 하동까지 낮에는 야산에서 자고 밤에만 움직이는 방법으로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며 이동했다.특히 신은 "98년 7월16일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경찰과 격투후 구보로 이틀동안 세곡동-성남비행장-수지-신갈-송탄-조치원-논산을 통해 전북 익산으로 도망쳤다"고 진술, 자신의 강인한 체력을 과시했다.같은해 10월말까지 익산시 배산의 빈 농가에서 지내며 낮에는 근처 낚시터에서 낚시를 하며 소일하는 여유를 보였으며 11월4일에는 익산시 팔봉동 팔봉산 야산에 땅굴(비트)을 파고 비상식량, 운동기구, 차량번화판을 숨기기도 했다.또 지난 1월8일이후에는 도보로 대전에서 청주로 간뒤 자전거를 타고 천안으로 이동했으며 지난 97년 12월에는 전북 정읍의 수천재 정상에서 차안에 남아있는 지문을 없애기 위해 차를 불태우는 용의주도함을 보이기도 했다.
탈옥수 신창원과 전남 순천의 대주파크빌 아파트에서 동거해온 김 모(26)씨는 "처음부터 신창원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연민의 정 때문에 차마 신고할 수 없었다"며 "그가 건강히 생활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씨는 신의 검거 사실을 알고 달아났다가 가족의 권유로 16일 오후 8시 30분쯤 경찰에 자수했다.
다음은 김씨와의 일문일답.
-신을 어떻게 만났나.
"지난달 25일 새벽 내가 일하고 있던 충남 논산시 단란주점에 혼자 술을 마시러 와 알게 됐다."
- 신창원이라는 사실은 언제 알았나.
"술을 마시고 헤어진 다음날 약속한 점심식사 자리에서 신이 "내가 탈옥수 신창원"이라고 말해 무척 놀랐다."
- 신의 말을 믿었나.
" 신창원이가 스스로 신분을 밝힌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어떻게 믿느냐'고 반문하자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여행가방을 보여줘 믿게 됐다."
- 전남 순천까지 오게 된 이유는.
"신은 현금을 보여주면서 '빚이 얼마냐'고 물어 내가 '빚이 없다'고 대답했다. 신이 다시 '소원을 이야기하라'고 해 '고향 순천에서 살고 싶다'고 하자, 신이 '순천에 함께 가서 사자'고 제의했다."
- 순천에 오면서 경찰의 검문검색은 없었나.
"신의 쏘나타 승용차를 이용, 야간에 국도를 통해 순천에 내려왔으며 순천 시내 여관에서 이틀밤을 잤으나 한 차례도 경찰의 검문검색은 받지 않았다."
-아파트는 어떻게 장만했나.
"신이 가지고 있던 돈 4000만원과 융자금 4000만원으로 29평짜리를 분양받았다."
-순천에서 어떻게 생활햇나
"낮에는 함께 집에 있고 밤에만 돌아다녔다."
-왜 신고하지 않았나
"사람이 착하고 진실해 보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연민읜 정이 들었다."
-현재 심경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인 만큼 건강히 생활해 주기를 바란다."
도피기간에 꼼꼼히 적은 일기장은 단연 화제였다. 2년 6개월간의 탈주행각에서 벌인 그의 범법행위보다 그가 남긴 일기장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국민들은 그에 대한 측은지심과 동정심에 혼란을 겪고 있는 듯하다.
신창원의 일기장은 완결편 한 권과 습작용 2권이 있는데 경찰의 검거망을 피한 상황과 도피기간 중 느낀 사회에 대한 강한 불만, 개인성장사, 언론에 대한 불만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었다. 특히 탈옥수인 한 범죄자의 사회와 경찰에 대한 적개심이 짙게 배어 있었다.
신창원의 의도가 어떻든 일기장이 PC통신이나 방송매체에 여과없이 들어남에 따라 그가 지적한 비인간적인 교도행정, 어처구니 없는 경찰들의 각종 비리, 학교교육제도와 언론문제 등이 일반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었다는 동정표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PC통신에서는 ‘신창원 동호회’가 생기고 젊은이 사이에서는 신이 검거될 때 입은 화려한 ‘졸티’가 유행하는 등 그에 대한 영웅화는 사회의 일그러진 한 면을 보여준다.
신의 일기를 보면 최종학력이 중학교 중퇴라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문장력이 뛰어나다. 어휘가 다양하며 한글맞춤법도 틀린곳이 거의 없었다. 신은 일기에서 법적용의 형평성과 교도행정의 문제점을 제기하는가 하면 범죄가 증가하는 구조적 요인도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어 신이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가출을 해 학교에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공개된 일기장을 정말 그가 썼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신창원 일기(1)과연 법이 만민에게 평등한가 모든 이들에게 법이 평등하게 적용·집행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 이전부터 법의 형평성은 사라졌고 법이 권력유지를 위한 한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다.아직도 치외법권 지역은 상상외로 많고 권력을 쥔 자가 범죄행위를 했을 때 그에 합당한 처벌을 하기란 쉽지 않고 처벌을 하는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내가 교도소에 있을 때, 많은 재소자들과 대화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사형수들을 포함해서 억울한 사람도 많았고 정말 인간이 아니다 라고 생각되는 사람도 극소수지만 있었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느낀 점도 많았고 정말 아까운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범죄는 순간적이다. 범죄를 하고 있는 순간에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있고 그 행위가 얼마나 잘못됐는가를 느끼지 못한다.시간이 흐르고 자신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된다.일반 범죄자는 검거가 되면 자신의 잘못을 알게 되고 피해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거운 처벌이 내려져도 달게 받는다.사형수들이 살아가는 것을 가까이서 보면 연민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깝게 지내던 몇 몇 사형수들. 그들은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아 했으며 각자 종교를 가지고 정말 착실한 신자로서 속죄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맑았고 그들의 행동을 보면 저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엄청난 행위를 했을까 하는 의아심이 든다.그들은 그들이 한 행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다. 사람의 진실과 거짓은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의 눈에서 나는 그들이 진실로 속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한결같이 하던 말과 갈구하던 것이 무엇인 줄 아는가."나에게 백번, 천번 사형이 집행돼도 감사히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만한 죄를 지은 놈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죄인으로 살다 죄인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게 너무나 아쉽다. 나에게 한번 세상을 다시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피해자들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정말 참된 인생을 한 번 살고싶다."그러나 그들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교수대에 __처럼 매달렸다.그들이 형장에 끌려갈 때 일반 재소자들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저는 먼저 갑니다. 저같이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마시고 부디 새로운 인생을 사십시요"나는 이들을 가까이서 보았다. 마음을 열고 친하게 지내던 이들도 많았다.그러나 지금 그들은 이 세상에 없다. 이들의 죄가 큰가, 아니면 전두환, 노태우, 그들 추종자들, 김현철, 김영삼, 당시 권력의 수뇌부들의 죄가 더 무거운가? 죽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가! 그들이 죄를 뉘우치고 있다면 이해를 할 수도 있다. 과연 그들이 진심으로 속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누구에게 기회를 줬어야 하는가? 참으로 한심하다. 법도 정치를 하는 이들도...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얼마나 많은 뜻있는 젊은이들이 고통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가? 수백, 수천을 살해한 자들은 아직까지 살아서 잘난 체하며 떵떵거리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사람을 헤쳤지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속죄의 삶을 살아 보고자 했던 사형수들은 죽었고 지금도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어느 누구에게 온정을 베풀어야 하는가. 일반 재소자들이 보석, 형집행정지, 가석방 혜택을 받기란 정말 힘들다. 보석은 꿈꾸기도 힘들고 형집행정지는 말기 암환자나 아니면 곧 죽을 사람이 아니면 주어지지 않는다. 가석방은 또 어떤가. 법에 '자신의 형기의 삼분의 일 이상을 살면 가석방 대상이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일반 재소자가 간 쓸개 다 빼놓고 살아도 15년 형량에서 2년 감형을 받기란 정말 어렵다. 김현철이가 병 보석으로 풀려난 것으로 안다. 그가 정말 죽을 정도로 병이 깊은가. 정치인들과 가진 자들이 풀려나는 창구가 무엇인가. 바로 병 보석, 형집행정지, 특별사면이다. 그들이 오늘 내일 할 정도로 병이 악화되어 풀려나는 것인가. 정말 우습다. 일반 재소자들은 자신의 형기의 10분의 1 정도 가석방 혜택을 받기도 힘든데 -조사해보면 알겠지만- 가진 자, 쥔 자들이 형기의 절반 이상을 복역한 예는 아마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법은 형평성을 잃고 있다. 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사각지대가 아직도 곳곳에 존재하고 있고 특권층을 위한 법조항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란 쉽지않다. 법이 엄정하게 집행되어야 한다는 데는 범죄자인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강자와 약자에게 차별을 두는 법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신창원 일기(3)범죄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 문제점을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범죄 증가율을 걱정하고 있다. 정치인들은 더욱더 강한 법 집행만을 고집하고 있고 그 근원을 찾아 해결하려는 마음은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 뿐이다. 그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다. 사람이 태어날 때 너는 악마, 너는 영웅 이렇게 정해져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웅도 악마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아무리 영웅이 될 소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어렸을 때 교육과 환경이 잘못됐다면 절대 영웅이 될 수 없다. 반대로 어렸을때 교육과 환경이 잘 됐다면 악마도 천사가 될 수 있다. 부모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는 절대 그릇된 길을 가지 않는다. 재소자 거의 90%가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정에 굶주린 어떻게 보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생을 교도소를 들락거리다 죽어가는……. 만약 그들에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있었다면 절대로 그곳에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많은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아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다면 그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아이가 조금 잘못했을때 부모가 욱하는 성질로 욕을 하면서 매질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가 잘못을 뉘우치겠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도 표현력이 부족할 뿐이지 어느 정도 잘못을 알고 있다. 무엇인가를 잘못 했을 때 -- 아이가 그것을 알고, 아니면 모르고 했을 수도 있겠지만 -- 무조건 욕하고 때린다면 아이는 자신의 잘못을 잊어버리고 부모에 대한 원망만 쌓이게 된다. 그런 상황이 여러차례 반복되면 아이는 부모에게 적대심까지 갖게 된다. 정말 내 부모 맞아? 이 아이가 커서 잘될 수 있겠는가? 만약 아이가 잘못을 했을때 따뜻하게, "너 이러면 안돼. 이것은 잘못된 거야. 착하지. 다시는 절대 이렇게 하면 안된다" 하면서 말로써 인식을 시켜주고 매를 들어야만 할 상황이라면 손바닥 한두대로 끝내고 매를 댄 직후 따뜻한 말로 잘못을 지적하고 아이의 마음을 풀어줘야지 부모의 격한 감정이 들어간 매질이 된다면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학교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 교육보다 가정환경과 교육이 몇배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학교에서 문제아는 절대 학교 책임 교사책임이 아니다.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영원히 문제아로 남는다면 학교측에도 책임이 클 것이다. 학교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바르게 사는 기본기를 가르쳐 주는 곳이 아닌가. 학생이 잘못을 했다고 바로 퇴학을 시킨다면 그 학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학교에서 퇴학처분은 그 아이의 인생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교사는 정상적이 생활을 하는 학생보다 가정에 문제가 있어서 방황하는 학생에게 더 큰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학교측에서 만약 학생에게 큰 잘못이 있어 퇴학을 결정하려고 한다면 그 아이의 장래를 생각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문제아가 있다면 그 원인을 찾아 함께 해결책을 모색하고 정에 굶주린 학생이 있다면 형, 누나같이 따뜻하게 대해주고 그 아이를 위해서 함께 울어줄 수 있는 교사가 있다면 문제아라는 단어가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점은 가정, 즉 부모에게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 잘못되면 무조건 자식 탓으로 돌리는 부모가 있다면 잘못 되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잘못이 있다면 인정을 하고 사과하는 마음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학생체벌에 반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체벌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손바닥 두 대 이상을 넘기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매에 교사의 감정과 욕설이 섞이게 된다면 올바른 교육이 될 수 없다. 특히 학생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심한 욕설이나 언행은 삼가주었으면 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10대 때 경험해 보지 않았는가. 사춘기, 감수성이 예민할 때 조그마한 충격이 그 학생에게 영원히 큰 상처로 남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체벌의 취지가 무엇인가.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르게 인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런데 매질을 하고 난 후에 학생이 교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교육방법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과거에는 엄한 교육이 효과를 볼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학생들은 엄한, 무섭게 느껴지는 교사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형같은, 누나같은 때로는 친구같은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교사. 언제나 학생 마음 가까이에 자리잡을 수 있는 그런 교사를 원할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가출을 하여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그리고 사회는 이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고 아직도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도피생활 중에 가출한 몇몇 아이들과 대화를 가졌다. 나의 모든 것을 밝힌 적도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을 제외하고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아이가 별로 없었다. 현실이 힘들지만 집에 있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다는 거였다. 왜 그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의 마음이 잘못되었기에? 그들의 생각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엔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가정이 아이들에게 보금자리로 느껴지지 않고 감옥같이 느껴지게 만든 것은 누구 책임일까. 가정이 편안하고 정이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가출을 안 했을 것이고 방황을 하더라도 짧게 끝났을 것이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쉽게 빠져드는 곳이 다방인 것 같다. 한 달에 백 오십에서 이백만원쯤 벌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다방에 들어와 하루 16시간씩 일을 하면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술도 억지로 마시게 되고, 술을 먹고 난 다음날 몇 시간 늦게 일어나면 1시간에 2만원씩 봉급에서 깎이고 손님이 티켓을 끊어 노래방이나 술을 마시러 갔다가 돈을 받지 못하면 그만큼 돈을 아가씨가 물어야 한다. 때문에 돈을 벌기 보다는 빚을 지는 경우가 많다. 적게는 3·4백, 많게는 1·2천을 빚진 아가씨들도 보았다. 이때는 그만 두고 싶어도 그만 둘 수 없다. 빚을 지면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취급당하는 인상이 짙다. 17, 18살 아이들이 나와 대화를 하면서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았다. 정말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아이들도 있었다. 집에 가고 싶어도 몇 백만원 빚 때문에 갈 수도 없고……. 나는 그 아이들에게 집으로 돌아 갈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주었다. 그들에게 4, 5백은 큰 돈이었을 것이다. 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혼자 있으면 3, 4백 2, 3개월 지낼 수 있는 돈만 있으면 충분하다. 내가 좋은 일을 하려고 돈을 줬거나 이용할려고 돈을 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냥 나보다는 그들에게 더 돈이 필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그들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이 가출을 하는 이유는 부모의 무관심과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번 가출한 아이가 또 다시 가출을 하게 되는 것은 80% 이상일 것이다. 아이를 집으로 돌려 보낸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부모에게도 잘못된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가 가정을 보금자리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리고 가출 소년 소녀를 상품가치로 생각하고 그들을 이용해 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사라져야 한다. 그들의 고통을 대가로 수백 수천억을 벌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짜 힘들고 어려움에 처한 그들에게 쉼터는 만어 주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짓밟지는 말자. 그들을 두 번 죽이지 말자.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다. 범죄자가 무슨 낯짝으로 이런 글을 쓰느냐고 해도 좋다. 나를 향한 모든 욕을 다 감사히 받아들이겠다. 그러나, 전에 쓴 글과 이번 글에 거짓이 없음을 전한다. 단 한 번만이라도 다 함께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신창원 일기(4)보통사람의 인간성을 100이라고 한다면 내게 1쯤은 있다. 지금부터 나에 대한 말을 하겠다. 나를 말하길 남자답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잘못 알고 있다. 나는 남자가 아니다. 나는 잡히지 않으려고 내 여자를 버리고 도망쳐 나왔다. 내가 남자라면 절대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죽어도 곁에서 죽었을 것이다. 남자는 자기 여자를 버리지도 힘들게 하지도 않는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아직 미궁에 빠진 모든 사건을 다 내가 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불쌍한 애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고 이용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돈이 아무리 좋고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돈으로 여인의 몸을 살 수 있을진 모르지만 여인의 마음을 살 수는 없다. 이** 기자는 해분이, 성경이 그리고 며칠이나마 같이 했던 여인들을 마치 돈에 환장한 것 같이 묘사했고 마치 내가 몇억쯤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그렸다. 내가 이 여인들을 현상금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만났다면 그렇게 말해도 좋다. 그리고 함께 밤을 지내고 단 이틀이 지나고 난 후에 내 존재를 밝혔다면 내가 그 여인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접근했다는 소리도 감수하겠다. 그들이 돈 때문에 나와 함께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경찰이 거짓말을 해도 모두 믿고 내가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니……. 국가를 끌어가는데 가장 중요한 힘을 셋으로 나눈다면 권력, 언론, 여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군사정권때 언론은 잠들어 있었고 여론은 힘을 잃었으며 오직 권력만이 존재했었다. 그 결과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당했는가.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이 세 힘중에 지금은 언론의 힘이 제일 크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언론이 부패하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국민들은 바보가 될 수밖에 없고 그만큼 고통이 가중될 것이다. 기자가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사를 쓴다면 잘못될 수도 있다. 진정 사명감있는 기자라면 발로 뛰어서 취재를 하고 양쪽의 말을 종합해서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어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적도 홍길동도 아니다. 그렇다고 경찰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은 아직까지는 아니다. 보통사람의 인간성을 100이라고 한다면 아직까지 내게 1쯤은 남아있다. 나를 의적 영웅시하는 것은 원하지도 않고 그런 소리를 들을 가치나 자격도 없다. 조사하면 밝혀지겠지만 내가전에 쓴 글과 지금 쓰고 있는 글의 진위를 가려주었으면 한다. 내가 죽고 난 후라도 좋다. 신창원 일기(5)나를 쫓던 경찰들 일산역 근처에 있는 호프집에서 영숙이(크리스마스날 알게 되어 약 십일 그녀 집에서 지냈다)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데 6~7명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순간 형사들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그곳에서 일하는 아가씨가 신고한 것 같았다. 그들이 내게로 와서 신창원이 여기에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그런다며 내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그러는 동안에 몇몇이 더 들어왔다. 몇명은 잠바 겉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는데 총구의 형태가 드러나 있었고 총구들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이 정도의 인원이 들어올 정도면 밖은 이미 포위가 돼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승산이 없었다. 그때 형사들이 내게 윗옷을 벗어보라고 했다. 아마 문신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파출소나 경찰서에 함께 가서 신원을 확인해 보라고 내가 말했다.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계단을 내려오는데 계단에 몇몇 형사와 도로엔 여러대의 경찰차와 무장경찰들로 포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경찰 승합차를 타고 역전 파출소로 가는데 주위와 뒤는 경찰차와 형사들이 탄 승용차들이 포위해서 따라오고 있었다. 차가 파출소 현관문 앞에서 멈추고 여러 명의 형사들에게 둘러싸이고 한 형사가 내 바지를 잡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팔을 뿌리치고 한 형사를 빠르게 밀치자 틈이 생겼다. 그 순간에 나는 그 틈으로 뛰었다. 내가 막 뛰는데 '쏘아라'라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군데서 쏘는 총성이 들렸다. 내가 뛰고 약 2초후부터 총성이 들렸으니 대응이 빨랐다. 아마 안전장치를 풀어 놓은 상태였을 것이다. 총을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뛰는데 앞에 창고같은 건물이 있었고 우측으로 꺾어지는 모퉁이가 있었다. 그곳을 돌아 다음 담까지는 약 20~30미터. 그 담 위로 몸을 던지는 순간 자동소총을 쏘는 듯한 총성이 연속으로 들렸다. 아마 권총이었을 것이다. 여러명이 사격연습을 하듯이 집중적으로 쏘았으니 그렇게 들렸을 것이다. 담을 넘어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철길쪽으로 뛰는데 창고를 돌아서 포위하려고 온 듯한 형사 두 명이 사격을 해와 반대쪽으로 방향을 돌려 빌라 -- 아니면 아파트일 것이다 -- 쪽으로 가서 담 위로 몸을 날리는 순간에, 8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나는 담을 넘어 빌라단지 안에 상의를 벗어놓고 T셔츠 차림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검은 잠바를 입고 있었기에 무전으로 수배가 내려지면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나를 향해 쏜 총알을 최하 30발 이상이었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0.5초만 늦었어도 내 몸엔 여러개의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그들이 공포탄을 쏜 것은 아닐 것이고 위협사격을 한 것도 아니다. 내가 총에 맞지 않는 것은 내가 빠르게 움직였던 것도 있겠지만 장애물이 세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총격 때는 나는 코너를 돌고 있었고 두번째 세번째 총격이 가해질 때 담 위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아마 이제 사살령이 내려진 것 같다. 뛰는 순간 곧바로 집중 사격을 하는 것을 보면 나는 나쁜놈에다 사회에 해충같은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범죄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으니…. 그러나 아직까지는 내게 자제력이 남아있다. 탈옥수 신창원을 읽고 분노를 참기 힘들었다. 정말 책에서 묘사한 그대로 행동을 해주고 싶었고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왜 내가 하는 말은 믿지 않고 경찰이 하는 말만 믿는가. 내가 지금까지 자제를 하고 있는 것은 내 형제들과 아버지, 이 못난 놈에게 따스한 정을 줬고 내 인생을 측은히 생각해 준 해분이 성경이가 악마의 형제 악마와 함께 산 여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혼자였다면 벌써 인간이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내가 살고 싶어서 아니면 동정을 받고 싶어서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 같은가. 이** 기자에게 뭐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감정도 없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거의 모든 내용이 경찰의 입을 통한 말이었다. 내가 태화산에서 해분이를 만날 때 마치 내가 해분이를 죽이려는 듯이 묘사했고 89년에 검거될 때 그 형사가 혼자서 나를 한방에 쓰러뜨리고 검거를 했다고 하는데 그가 내 앞에서 10초 이상 서 있을 수 있다면 내 성을 갈겠다. 나는 몇몇의 형사들과 청량리 사창가에서 불쌍한 여인들의 피와 같은 돈을 갈취해 먹고 사는 자들 20여명에게 붙잡혔다. 나는 김상현이가 이전에 건달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가 가리키는 구석자리에 가서 그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뒷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목을 졸려 기절을 했다. 깨어나보니 수갑이 뒤로 채워져 있었고 권총이 머리에 대어져 있었다. 나를 혼자서 검거했다는 형사는 그때 없었고 상황이 종료된 뒤에 들어왔다. 내가 무방비 상태가 아니었고 그들과 결투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그들은 나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경찰에 환멸을 느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겠지만 -- 내 생각엔 그가 어떤 비리에 연루되었거나, 아니면 먹고 살 만큼 충분한 돈을 모았기에 더 이상 경찰직에 욕심을 두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조사해 보면 알겠지만. 이** 기자는 천안에 있을 때 첫번째로 나를 습격한 두 형사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두 형사는 경찰이 될 자격이 없다(지금은 다시 복직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이 해분이 혼자 있는 집에서 안방을 차지하고 해분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는가? 그들은 나를 더 이상 수사하지 않고 종결하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해분이를 건드렸다. 이것은 해분이가 울면서 내 뺨을 때리면서 한 말이다. 그 자리에 성경이도 함께 있었다. 해분이에게 7~8대 뺨을 맞으면서도 그냥 있었다. 내게도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내 입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 기자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글로 쓰고 있다. 경찰들이 과거 어떠했었는가.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했는가. 그들이 정말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했었고 하고 있는가. 지금 성경이 해분이 내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생각하면 당장에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참아왔다. 그녀들은 나를 잡기 위한 미끼로 이용되고 있다. 무엇으로 공갈과 협박을 하고 있는지 잘 알 것이다. 좀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내가 그녀들을 이용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이용하고 있는가는 곧 밝혀질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면……. 천명이 넘는 무고한 시민을 살해하고 어린 여성들의 몸에 칼을 댔으며 헤아릴 수 없는 어린 학생들과 뜻있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든 그들. 쥔 자 가진 자들에게 경찰은 어떻게 했는가. 왜 지금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가정이 파탄되고 부모와 자식이 생이별을 해야 하는가. 가장들이 가족을 부양할 능력을 상실해서 힘을 잃어가고 집 밖에서 떠돌고 있다. 그 원인 제공자들에게 경찰은 어떻게 했는가. 과거 경찰은 어떠했는가. 스스로 가진 자, 쥔 자를 위해 보호막이 되었고 군사정권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강자에겐 아부하고 무고하고 선량한 시민들을 탄압고문 하였다. 그들 또한 범죄자가 아닌가. 그들 또한 공범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진 자 쥔 자를 위해서만 일을 했고 일반 시민들 위에서 군림하려 했으니 억울한 사람조차 보호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들. 그들은 잘못을 느끼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아무도 과거의 잔재가 남아있음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왜 경찰은 나를 악마,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이라고 하는가. 내가 악마가 되기를 바란다면 그렇게 되어 주겠다. 아주 철저하게. 신창원 일기(6)이제 인간이길 포기하겠다 익산에 있을 때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이 있었다. 추운 겨울 손목 세군데가 부러지고 머리 6,7군데가 깨어진 상태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발가벗은 채 이틀을 견디었고 울면서 뼈를 맞추었다. 비스켓 하나로 하루를 살며 두달을 버티었고 썩은 고기를 먹고 며칠을 복통으로 신음했었다. 비오는 날 잘 곳이 없어 비를 맞고 자다가 심한 몸살도 앓아 봤고 한 여름엔 모기에 물리면서도 잠을 자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마치 두드러기가 난 것 같이 부어 올랐고 몸에 피가 날 때까지 긁고 또 긁으면서 두 달을 넘게 살았다. 이런 것은 견딜 수 있다. 이보다 몇배 더 힘든 것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익산에 있으면서 경찰들이 하는 말과 이** 기자의 책을 보고 정말 참기 힘들었다. 매일 술을 마셨고 낮에는 논에 가서 쓰러진 벼들을 베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미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미친 놈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하니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았다. 내가 벼를 벤 것은 농부들이 불쌍했기 때문이기보다는 내 몸을 학대하면서 일을 하는 동안에는 분한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았다. 내가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지금까지 사람을 해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내 목숨을 연장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다. 범죄자들의 성격은 잡초와 같다. 밟으면 밟을수록 고개를 드는…. 나는 분명히 전 번에 말했다. 내 가족과 내 여인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고. 내가 만든 현실, 나하고 끝내자고. 그들은 내 경고와 부탁을 묵살하고 오히려 더한 고통을 주고 있다. 나는 이제 그들이 말한 그대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겠다. 내가 악마가 되면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여 주겠다. 그들의 대상은 선량한 힘없는 시민이 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죄를 짓고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들은 죄가 없는 마치 국가를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지금까지 내가 공격을 받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대가 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무엇에 의해서 죽게 되는지도 모르고 당할 것이다. 나는 한두번에 그들에게 희생된 수보다 많은 인간을 죽일 수 있는 무기를 만들고 사용법을 알고 있다. 나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나는 어디가 급소고 어디에 무엇이 있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다 짐작하고 잇다. 전쟁후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들은 나를 모르고 나는 그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제부터 나를 악마 정신병자라고 해도 좋다. 내가 이렇게 변한 것은 경찰과 정부에게도 책임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이 망가지면 얼마만큼 망가질 수 있는가를 똑똑히 보여 주겠다. 그들이 힘, 억압, 모욕으로 사람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길 바란다. 죽어야 할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들이었는가? 아니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의 삶을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었는가?신창원 일기(7)나의 성장과정 나는 가난한 농가에서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항상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로 우리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인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자포자기식 삶을 사셨고 술과 도박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가정을 생각하는 것은 이전보다는 줄어 들었고 내가 아마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육성회비와 급식비 못 내서 몇개월 밀려 있었는데 하루는 여선생님이 회비와 급식비를 내라고 독촉을 하셨다. 아버님께 얘기를 해도 아버님은 돈이 없다고 하시고 학교를 가면 선생님은 독촉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회비와 급식비를 냈는데 나만 내질 못하니 창피하기도 하고 선생님이 나만 찍어놓고 따돌림하는 기분이 들어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수업에 빠지기 시작했다.장기간 학교에 가지 않고 가방은 산 속에 숨겨두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 되면 집에 가곤 했는데 수업에 빠진 것이 아버님께 알려지게 되었고 아버지를 속였다는 이유로 그날 많은 매를 맞았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돈을 가져오라고 하시고 집에서는 돈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니 정말 죽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집에 들어가기도 싫었고 학교에 가기도 싫었다. 3학년 때부터 집을 나가 2,3일을 밖에서 지냈고 밥을 먹을 수 없어서 과일과 과자를 훔쳐서 먹곤 했다. 견디기 힘들어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의 매질은 시작됐고 나는 오기로 집을 나가곤 했었다. 아마 내가 3, 4학년 때 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오셨다. 그 여자는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이었는데 아주 미인이었다. 얼굴도 이뻤기 때문에 누나와 나 동생 모두가 잘 따랐다. 함께 살기 시작하고 두달 쯤 지난 어느 날 내 동생기 감기 몸살에 걸려 심하게 앓고 있었다. 그런데 새 엄마는 신경도 쓰지 않았고 내가 동생이 아프니 약을 좀 사다 달라고 해도 오히려 내게 뭐라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새 엄마가 없을 때 자기가 난 아들 아마 세 살쯤 된 사내 아이였는데 그 아이에게는 과자나 과일 같은 것을 사다 먹이면서 내 동생이 아픈데도 신경을 쓰지 않고 오히려 야단을 치니 어린 나이지만 정말 죽이고 싶도록 증오를 느꼈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 학교를 가기 전에 내가 부엌에서 칼을 들고 나와서 내가 학교에 갔다가 왔을 때도 집에 있으면 죽이겠다고 하면서 나가라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새 엄마는 친엄마의 패물을 모두 가지고 집을 나갔고 이 일로 해서 아버지께 많이 맞았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너무 한다고 생각했고 아버지에게 반발심과 증오를 갖게 됐다. 그때부터 틈만 나면 집안에 있는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갔고 돈이 떨어져 집에 오면 심하게 맞는 일이 되풀이 됐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아버지에 대한 증오는 깊어갔고 나의 성격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6학년이 되었다. 그해 봄 나는 집안에 있던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가출을 했다. 10여일을 지내다 보니 돈은 다 떨어지고 집에 돌아가기도 싫어서 며칠을 노숙을 했다. 그러자 배도 고프고 견디기 힘들어 중화요리집에 들어가 일을 하게 해달고 말을 하니 가게 주인이 자기친척이 하는 전남 곡성에 있는 중국집을 소개해주고 그곳으로 나를 보냈다. 그곳에서 일을 5개월쯤 했는데 추석이 가까워지자 동생이 생각났다. 그래서 조금 모은 돈을 동생에게 부치면서 아버지에게 절대 얘기하지 말고 용돈으로 쓰라고 했는데 그돈을 모두 아버지에게 드리고 주소를 아버지에게 알려 주었다.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나는 놀랬고 아버지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보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집에 가자고 하셨다. 그때 나는 정말 집에 가고 싶었다. 어린나이에 먼곳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데 집이 그립지 않을 이가 있겠는가? 바로 집에 가고 싶었지만 주인이 추석이 가까워졌으니 그때까지 일을 해달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리고 사정을 하니 아버님이 추석에 꼭 오라고 하시면서 돌아가셨다. 추석이 되어 집으로 갔다. 아버지가 학교를 다녀라 너는 꼭 공부를 해야 한다 하시면서 내가 다시 곡성으로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나도 학교로 가고 싶었기 때문에 곡성에서 일하던 주인이 오기로 한 날 고구마 굴 속에 숨어서 몇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그 주인을 보내고 난 후에 굴 속에서 나왔고 다음날부터 학교에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나는 집이 싫어졌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고 서울에 고모가 살고 계셨기에 서울에 가면 고모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친구들과 서울에 갔다. 사실은 공부는 싫고 해서 취직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차를 타고 용산역에 내렸는데 겨울이기 때문에 추웠고, 날이 어두워 역전 대합실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죽는 날까지 도망자의 신분이기에 남을 속이고 있지만 여기에 적은 말은 진실뿐임을 밝힙니다.
나의 잘못된 생각으로 인하여 젊은 나이에 죽은 피해자와
그분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빌며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에
젊음을 구속당한 채 보내야 하는
여린 마음의 동생들에게 깊이 사죄한다.
나는 아마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일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선한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어떤 이들은 나에 대해서 얘기하기를
" 그놈 참 난놈이야, 의적이야! " 하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에 대해서 잘못 아는 것이다.
나는 의적도 난놈도 아니고 나쁜 놈에다 죄인일 뿐이다.
나는 그간 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도왔다.
전엔 그게 잘하는 짓인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야 느꼈다. 단돈 천 원을 도와도 내가 정당하게 힘들여 땀흘려 번 돈이 진정한 도움이라는 것을 나는 교도소에서도 문제수였다.
처음 무기형을 선고받고 자포자기 식으로 살았다.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워서 징벌을 여러 차례 받았고
내일이 아닌 남의 일로 인해서 나 혼자
교도관에게 맞고 잡힌 적도 있다.
물론 내 행동이 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도관들의 행동도 잘한 것은 아닐 것이다.
소내 규율은 잡는다고 운동 잘하는 교도관들을 선출해서 이유 없이 막무가내로 두목 급들을 구타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나 혼자서 난동을 부렸다.
이로 인해 나는 문제수로 낙인이 찍혔고 교도소 네 곳을 거쳐서 청송 제2교도소에 가게되었다. 청송을 가기 전에 대전에서 교육을 받는데 아마 예전 삼청교육이 힘들었어도 이만했을까 싶다. 30㎏의 모래 가마니를 어깨에 매고 훈련 을 받는데 3시간을 땅위에 내려놓지 않고 훈련을 받는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시작해서 여러 가지를 하는데 젊은 나도 감당하지 못하는데 연세 많은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시는걸 옆에서 부축했더니 머리, 어깨를 안가리고 몽둥이가 날아왔다. 그것도 웃으면서 하는 말이
" 너희들은 죽이지만 않으면 돼. 병신이 되어도 우리에겐 책임이 없어. 국가에서 허락한 일이야! "
8주 동안 계속된 훈련은 정말 그들이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훈련으로 인하여 허리, 관절 등에 고질병이 생긴 이들이 무수하다. 이유 없이 날라 오는 몽둥이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면 손가락질하며 웃는 그들의 모습은 악마 그 자체였다.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 중 절반 정도는 자기가 교육을 받기 전의 교도소로 다시 가고 나머지는 청송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수갑을 찬 채 몽둥이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열두 시에 그곳에 도착해서 6시경에 방에 들어갔으니 얼마를 맞았겠는가. 연세 많으신 분들도 머리를 맞아 피가 나는데도 멈추지않고 매질과 기합이 계속됐다. 한겨울에 방안에 있는 물이 꽁꽁 어는데 정좌를 하고 문 앞에 경비교도대의 얼굴만 보여도 머리가 마루바닥에 꽝 소리가 날 정도로 절을 해야 했다.운동시간을 15분 정도 그것도 기합으로 시작해서 기합으로 끝났다. 새로 지은 특별교도소로 옮기기 얼마 전에서야 자유롭게 운동을 할수 있었다. 새로 지은 교도소에 옮겨서 생활하는 도중에 영하 15도쯤 내려가는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데 마루바닥에서 담요 세 장으로 살아야 하고, 방안에 있는 물이 꽁꽁 어는 데, 얼굴을 내놓고 자야한다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정좌하고 앉아있어서 몸이 꽁꽁 얼어붙어서 발을 손으로 문지르면 자세 불량으로 얻어맞고 밤에 얼굴을 내놓고 자면 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얼굴을 수건으로 덮고 자면 깨우고, 그래도 너무 추워 수건으로 덮으면 자다말고 끌려나가 두드려 맞기를 여러차례, 추워도 참고 그냥 자자고 해도 잠이 오질 않았다. 그래서 위장병과 간염이 생겨 열이 39도를 오르내리고 너무나 아파서 방안을 굴러다니면서 치료를 받게 해달라고 하니까 보건의가 와서 체온계를 떼고는 " 열이 있네 " 하면서 해열제만 한 알 주고는 그냥 갔다. 해열제를 먹었는데 고통은 가시지 않고 속에서 피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의사를 불러달라고 소리치니까 대답이 없어 방문을 발로 찼다. 방문을 발로 차니 교도관 여러명이 오더니 " 이새
끼가 방문을 차 어디 한 번 죽어봐라 " 하면서 끌고 나가 온 몸을 묶인 채 얻어맞고 밟혔다. 그것도 약1시간 반 동안 아마 내 체력이 강해서 살 수 있었지 보통사람이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나를 밟으면서 그들이 하던 말과 얼굴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 이 새끼가 쌩 까네 " 하면서 웃는 모습 그들은 때리면서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내가 그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었다면 그들의 목이라도 물었을것이다. 그 뒤로 나는 죽음을 많이 생각했다. 죽으려고 몇 번 생각했지만 죽을 수 없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때부터 나는 탈옥을 계획했고 내 계획이 성공할 때까지는 5년이걸렸다. 5년 동안 나는 간과 쓸개를 빼놓고 살았다.
나는 나쁜 짓을 많이 했다. 그렇지만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짓은 하지 않았다. 5년 동안 허점을 찾느라 보냈고 허점을 발견하고 실행까지 3개월이 걸렸다.
쇠창살 2개를 절단하는데 2개월이 걸렸고 체중을 빼느라 밥을 거의먹지 않았다. 실행당일 나는 못으로 만든 칼 하나에 팬티 하나만을 걸치고 나왔다. 만일 발각되면 죽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창살을 빠져 나오는데 너무 힘이 들었다. 억지로 몸을 밀어 넣어도 몸이 꽉 끼어 움직이기도 힘이 들었다. 무리를 주어 빠져 나오는데 힘이 들지만 공했다. 등과 어깨는 찢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은 것은 3개의 담간이 벽 위로 쳐진 5m의 담을 밑으로 뚫고 들어가는데 2시간이 걸렸고 공사장에서 쓰는 철근을 담에 대고 1번째 담을 넘었다. 나를 발견하고 총을 쏘는데 걸리는 시간을 5,6초잡았고 내가 담을 넘는 시간을 5초잡았는데 내가 담 위에서 발견되면 3초 정도의 시간이 나에게 있고 그 시간이면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빨리 넘어서일까 아니면 경비교도대원이 자고 있었는지 발견되지 않았다. 담을 모두 넘어 농가에 있는 자전거를 타고 화원에 가서 옷을 훔쳐 입고 부산 시내도 들어갔는데 날이 밝아 오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서울에 가기로 하고 첫 택시를 잡았는데 기사가 젊은 사람이었다.
만약에 일이 잘못되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게 될 것 같아 그 차를 보내고 다음 택시를 잡았는데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다.그 차를 타고 가면서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분에게 자식들이 몇 있어서 자식들 얘기를 한 것 같다.
택시가 서울에 가까워질 때 내가 기사에게 나는 탈옥을 한 탈옥수이고 오늘 새벽에 나왔으니 지금 라디오를 틀면 나에 대한 얘기가 나올 거라고 하면서 " 나는 아저씨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
제발 내가 아저씨를 해치는 일이 없게 해 달라 " 고 하면서 차 운전은 내가 하게 해달라고 했다. 톨게이트를 지날 때 아저씨가 만약 신고를 했어도 나는 차만 몰고 그냥 왔을 것이다.
서울에 도착해서 아저씨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전화할 데가 있는데 돈이 없어 그러니 500원만 주세요 했더니 그래도 차비는 있어야 할게 아니냐며 나에게 2만원을 더 주셨다. 그 분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아저씨께 정말 감사드린다.
나는 아저씨가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만 하고 바로 서울을 빠져 나와 천안으로 갔다. 천안에서 3일 정도를 산 속에서 잤고 남의 집 지하실에서 몇 일을 자다가 TV에서 한일전 축구경기를 중계 한다기에 다방에 가서 축구경기를 보다 해분이를 알게되어 해분이와 일년 여를 살게 됐다.
그간 나는 남의 돈을 훔쳤다. 70평 이상 되는 빌라 100평,120평되는 빌라들 해분이와 살았던 얘기는 쓰지 않겠다. 나를 두 번 팔아서 그녀가 미워서가 아니다. 나를 두 번 팔았지만 그녀에게 피해는 주고싶지 않다. 내가 만약 그녀와의 생활을 쓴다면 나는 거짓말을 해야되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나는 그녀를 이용하지 않았고 내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집에 들어 갈려고 하는데 계단 불이 다 꺼져 있었고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총소리와 함께 눈 주위에 강한 충격이 왔고 눈을 뜨기도 호흡을 하기도 힘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그곳에서 빠져 나왔고 되도록이면 멀리 피 할려고 쉬지 않고 달렸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얼굴과 머리는 손을 대지도 못할 정도로 따가웠고 화끈거렸다. 억지로 눈을 뜨고 뛰었는데 금방 날이 밝았다. 내 몰골을 보면 금방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될 것 같아 땅을 파고 땅속에 숨었다. 밤이 되어 밖에 나와보니 사람들은 평소와 똑같이 생활 하고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집 근처로 접근했는데 몇 명의 사람들이 집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이 잠깐 가계 쪽으로 간 틈을 타서 해분이를 만났다. 그녀를 만나 " 이제 너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 발각됐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나와 함께 갈래? " 그러자 그녀가 말했다.
" 좋은 여자 있으면 그 여자와 함께 살아. 나는 지금 갈 수 없어 "
그때 나는 그녀가 이제는 자신이 위험하니 나와 헤어지려고 하는 줄 알았고 나는 그 동안 고마웠고 잘 살아 라는 말을 하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10여 일을 떠돌다 성경이를 알게됐고 성경이의 모습이 선화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그 때문에 정이 갔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내가 도피처가 필요했기에 빨리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던 것을 부인하지 않겠다. 내가 성경이를 이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녀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나지 않았다. 결과는 그렇게 되었지만. 성경이와 함께 해분이를 만나러 갔다. 옷과 짐,그리고 내가 기르던 강아지를 가지러 간 것도 이유이지만 해분이와 헤어질 때 해분이가 살림을 차릴 여자가 있으면 꼭 한 번 데리고 오라고 했다. 얼굴 한 번 보게. 그때 처음 둘이 얼굴을 대했고 그 때문에 해분이와 그날 많이 싸웠다.
그때는 여자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해분이가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하는 줄만 알았고 그녀의 말대로 성경이를 데려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송탄에 와서 몇 일 있는데 아침에 차 있는 곳으로 가니 차 사이드 밀러가 접혀 있고 거기에 쪽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 쪽지를 읽으려고 하는데 뒷 쪽에서 크락숀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해분이 차가 거기에 있었다. 송탄을 하루 온종일 돌아다녀 내 차를 찾게 됐다고 했다.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가 없어서 왔다고 했다. 난 성격이 모질지 못 하다. 성경이와 해분이 어느 한쪽을 버렸다면 이렇게 힘든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날 나는 해분이를 데리고 성경이와 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둘이 얘기를 하라고 했고 성경이가 " 해분이 언니와 오래 살았으니 언니와 함께 살아 " 라고 했다.
성경이는 정말 순진하고 정이 많은 아이다. 착하고 불쌍한 애.
나는 성경이에게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해분이와 2,3일을 지내면서 성경이가 너무 불쌍하고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다. 그때 성경이가 울면서 " 오빠 잠깐이라도 좋으니 얼굴 한 번만 보자 정말 죽고 싶어 " 라고 했다. 나는 성경이의 우는소리를 듣고 너무 괴로웠다. 성경이는 전에 사는 것이 괴로워 물 속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다행히 주위에 사람이 있어 인공호흡을 해서 다시 살아났지만, 내가 성경이를 만나기 전이었지만 그일 때문에 너무 걱정이 되어 해분이에게 성경이를 잠깐만 만나고 올테니 기다리라고 했는데 안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 일도 없고 잠깐만 얘기만 한다고 했는데도 절대 안 된다고 했고 그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고, 나는 성경이에게 그냥 가버렸다.
그때부터 성경이와 함께 살았는데 해분이의 계속된 전화와 전화 추적을 통해 금방이라도 경찰이 들어올 것 같은 불안감 대문에 너무힘들었다. 그 때문에 성경이에게 잘 해주지도 못했고 내 신경이 괴로워져 많이 다퉜다. 분명히 12월이나 1월달이면 전화추적이 들어 올거라는 것을 생각하고 하루 빨리 그곳을 벗어나야 했는데 그럴수없었다. 나에게 경찰들이 들어 닥치기 하루 전날 나는 성경이에게 오늘 떠난다고 말하고 울고 있는 성경이를 놔두고 집을 나왔다.
그날 저녁 내내 성경이가 너무 불쌍해서 너무 괴로워 술을 마셨고 그녀를 떠날 수가 없어 다음날 다시 들어갔다. 그날 떠났더라면 그녀에게 피해는 없었을텐데
잠을 자고 있는데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집에 올 사람이라곤 성경이 친구밖에 없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 성경이에게 문을 열어 라고 하고는 주방에 가서 칼을 잡고 오이를 썰고 있었다. 성경이가 누구냐고 하니 신문사에서 나왔다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신문을 안 본다고 하면서 문을 열자 4,5명의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내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가스총을 쐈는데 손바닥으로 눈을 보호하고 가까이 다가가니 총을 나에게 던졌다 피하면서 저희들끼리 도망치다 넘어지곤 했다. 앞뒤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빌라 전체가 다 포위되어 있었다. 나는 집을 빠져나와 옥상으로 올라가 다른 계단으로 내려왔는데 그 때 총을 가지고 와서 두 번째로 집으로 들어가는 중에 내가 나왔다.
계단에서 나오면서 포위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하니 물어보니 위험하니까 빨리 들어가라고 했다.
그 사람은 나를 못 알아봤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이 나를 알아보고 " 여기 있다 " 고 소리치자 금방 그 주위를 둘러쌌다. 나는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쇠파이프가 날아오는 것을 피하지 않고 손으로 막고 뛰었다.
나는 그때 칼이 있었고 내가 만약 사람을 해치려고 했다면 팔도 부러지지 않았고 더 쉽게 빠져 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검도에 자신 있다고 해도 칼만 있으면 열 명도 짧은 시간 안에 자신 있게 처리할 수 있다. 나에겐 힘과 스피드와 칼과 주먹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그 곳에서 나에게 쏜 총알이 몇 발인지 모른다. 총소리가 여러 번 났고 10여분을 추격전을 벌였지만 나는 그곳을 빠져 나와 곧바로 전주로 갔다.
수중에는 돈이 십 원도 없었고 때문에 나는 전에 훔친 수표를 바꿔 돈을 마련되고 3일 뒤 귀경 차량을 따라 대전으로 왔다.
팔이 부러진 것을 전주에서 깁스를 하고 대전에 왔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서 10여일 뒤 대전 병원에 갔더니 다시 어긋났다고 해서 다시 깁스를 했고 그 다음날 성경이가 걱정이 되어 성경이에 대해서 알아 볼 마음으로 해분이에게 전화를 했다. 해분이와 할 얘기도 많았고, 내가 그 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 같았으면 절대 전화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분이를 만나기로 약속하고 천안 인터체인지에서 해분이 차가 나오는 것을 보고 뒤를 따랐는데 조금 이상했다.
뒤의 봉고차가 이상했는데 운전에 자신이 있어 내가 차에 타고 있는 한 잡히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계속 뒤를 따랐다. 뒷좌석에도 사람이 없었고 무엇보다도 해분이를 믿었다. 차를 세우고 해분이 차있는 데로 다리를 절며 가는데 뒷좌석에 엎드리고 있는 두명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을 보자마자 차있는 데로 뛰었는데 잘 뛸 수가 없었다. 왼팔은 깁스상태였고 오른발은 금이 가 있었다. 운전석에 앉자마자 나는 붙잡혔고 그때부터 몸싸움이 시작됐다. 둘다 총이 있었는데 공포탄이었다. 총을 쏘면서 겁을 주고 둘이서 붙잡고 총을 들고 머리를 찍고 그래도 내가 반항하니 깁스한 팔을 총으로 내리찍고 머리를 계속해서 내리찍었다. 그때 내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른팔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맞고 있는데 멀리서 차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른 팔로 한 명을 쳤는데 다리에 힘을 줄 수가 없어 체중을 얹지 못해서 위력이 없었다.
한사람이 한대 맞고 눈 주위를 감싸고 있을 때 오른 팔로 한사람을 잡아채 그가 바닥에 쓰러졌을 때 총을 빼앗았다. 그것으로 그들을 겨냥하자 그들이 움찔 하면서 뒤로 물러섰고 나는 마치 내 차안에 누가 타고 있는 것 같이 " 야 모두 쏘아버려 얘들은 총알이 없어 " 하고 소리치자 모두 도망쳤다.
그 뒤로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고나니 나는 산밑에 있었고 머리에서는 싸이렌 소리와 경광등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왜 여기에 있는가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앗다. 한 5분 여를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리는 일곱 군데가 찢겨서 피가 나고 있었는데 한곳은 크게 벌어져서 선지피가 나왔다.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피 때문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다리는 땅에 댈 수도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고 손목은 제멋대로 돌아가 있었다. 빨리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그 몸을 이끌고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개울을 따라서 계속 걸었고 도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밤새도록 20여㎞를 걸어서 갔는데 어지러움과 추위를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통증은 저리 가고 몸이 꽁꽁 어는 추위를 견디기 너무 힘들었다. 옷이 모두 젖어 얼었고 머리카락에 고드름이 었고 피가 얼어 겨울이 아니었고 여름이었다면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추위 때문에 피가 멈췄고 상처가 곪지 않아 그나마 시간은 좀 걸렸지만 나을 수 있었다. 병원, 약국에도 갈 수 없어 손목 부러진 것을 혼자서 맞추는데 손목이 3군데가 부러져 맞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병신이 되지 않으려고 고통을 참고 뼈를 맞추면 혼자 깁스를 하고 붕대를 감을 때 다시 어긋나고 팔이 퉁퉁 부어 뼈가 만져지지도 않지만 8,9차례를 반복해서 울면서 뼈를 맞췄다.
깁스를 하고 3주만에 풀었다.
깁스를 하고 다니면 눈에 빨리 띄게되기 때문에 두 달을 추위 속에서 바람만 막을 수 있으면 잤다.
너무 추우면 단전호흡으로 몸을 덥히고, 하루에 한끼도 먹지 못 할때가 많았고 농가에 들어가 몰래 표가 안 나도록 밥통에서 밥을 조금씩 먹고 할아버지가 하는 가게에서 비스켓을 사서 하루에 하나를 먹으며 견디었다. 팔을 조금 움직일 수 있게 되어 김제에 가기로 했다. 집에 갈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곳은 내가 잘 알기에 되도록이면 잘 아는 곳, 지리를 잘 아는 곳이 나을 것 같았다. 청주에서 전주까지 자전거로 갔다. 브레이크도 잡을 힘이 없어 그곳까지 가는데 6,7번 넘어졌고 넘어질 때마다 팔의 통증 때문에 바닥에 그냥 누워있었다. 김제에 도착해서 낮에는 낚시 밤에는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잤다. 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먹고 낚시 온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해가지고 온 밥을 나누어 먹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고 어스름 녘에 빵과 우유를 사려고 가게에 들렸다. 그 가게는 그때가 세 번째 가는 거였다. 가게에 들어갔는데 주인의 안색이 평소와는 다르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빨리 물건을 사고 나가자는 생각을 했는데 내 뒤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태연하게 앞을 보고 있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사람이 내 앞으로 오더니
" 왜 그렇게 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냐 얼굴 좀 보자 " 하고 모자를 벗겼다. 그때 나는 주먹을 날려서 기절을 시킬까 생각하다가 그냥 태연하게 두고 보자는 마음에 가만히 있었다. 자기가 경찰이라며 나에게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고 나는 그 동네에 살고 있다고 했다. 주민등록증을 보자고 하기에 집에 두고 왔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저기차에 가서 얘기 좀 하자고 했고 나라는 것을 짐작한 눈치였다.
지금은 나에겐 표정적인 것이 하나 있다. 전에 까스 총탄을 정면에서 맞아 눈 밑에 큰 점이 문신처럼 되어 버렸다. 검은 점을 상징처럼 달고 다니는데 누가 못 알아 보겠는가. 그래서 그걸 감추려고 남을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모자를 깊게 눌러 쓰고 다녔다.
그가 그 검은 점을 봤기에 나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자기 혼자는 무리라고 생각하는지 어디에 연락을 하려고 했고 그때 내가 있는 쪽으로 4,5명의 사내들이 빠른 걸음으로 왔는데 형사들이라는 게 확실했다.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그대로 행동했다.
옷을 두텁게 입었기에 그를 밀치고 뛰는데 스피드가 붙지 않았다. 뒤에서는 빨리 총을 쏘라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 거리가 20여 미터밖에 나지 않았다. 나는 겨냥을 못하게 지그재그로 뛰는데 뒤에서 총성이 나고 총알이 바로 내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개울을 넘어 뛰는데 거리가 차츰 멀어지는데 총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거기서 밤이 새도록 달려 아침이 될 때는 포위망에서 벗어났다. 다른 사람을 나로 오인하고 신고한 덕을 톡톡히 봤다. 이곳 저곳에서 나를 봤다는 제보들이 많았지만 나는 제보가 들어 갈만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서 밝힐 수 없지만 몇 분, 정말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전주에서 벗어나 그분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지금은 내가 한번 간 곳은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어떤이들은 "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지 " 하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의 환경이 교도소보다는 백 배, 천 배 낫다고 생각한다. 얼마 있으면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고 나는 성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팔이 부러지고 온몸이 얼어붙은 채 잠을 자며 비스켓 하나로 하루를 버티며 살 때도 나는 교도소보다는 나았다.
왜 인줄 아는가? 지금은 그 가학성 변태 성욕자같은 자들의 노리개감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왜 그들은 처벌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그들은 국가에서 그렇게 하라는 허락을 받은 것인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그렇게 당해도 싸다고 하면 할말이 없다. 사람이 잘못 행동을 하고 있을 당시에는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고 지난날을 생각할 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물론 나 같은 놈은 짐승취급해도 좋다. 그만큼 나는 나쁜 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도소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들 보다 순수함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게 한 번에 그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은 법무부에도 책임이 크다.
무조건 강압적으로 대한다고 사람의 성격이 바뀔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재소자들이 제일 불쌍하다. 올바른 가정환경 따뜻한 정을 받아보지 못하고 정에 굶주리면서 살아온 재소자들이 80% 이상일 것이다. 물론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은 재소자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저런 사람이 왜 이곳에 왔을까하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열심히 일하고 굳은 일 마다하지 않고 자기가 나서서 하는 사람들. 그런 재소자들은 자기가 받을 형을 모두 살고 나가는데 돈이 있다고 빈둥거리고 사는 사람은 특사를 받고 나가는게 너무 많다. 너무 돈만을 바라는 교도관들이 많고 재소자들을 벌레 취급하는 교도관들이 많기에 또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되는 순진한 이들이 계속 될 것이다. 재소자에겐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따뜻한 정, 포근한 말 한마디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재소자들을 위해서 얼마 안 되는 봉급을 쪼개어
불쌍한 재소자를 돕고 진정으로 그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삶을 바꿔보려고 노력하는 교도관들도 많다.
그분들께 고마움을 표하며 싸잡아 비난한 것 같아 미안하다.
나와서 복수를 할려고 내가 반 혼수상태에 있을 때 나를 짖밟던 그를 찾아갔다. 부산에서 이들을 기다려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 평생 침대에서 살게 만들려고 차문을 열고 나왔다. 그때 어느 부부와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가족을 보면서 느낀점이 있기에 나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가 혼자라면 나는 몇 번이고 내 계획대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가정이 있고 그 때문에 괴로워할 생각을 하니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내 계획을 접고 편지를 썼고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가 문틈에다 편지를 꽂아놓고 나왔다. 내용은 재소자에게 인간대우를 해주라는 내용이었다. 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당사자는 잘 알 것이다. 또 한번 부탁한다.
편지의 내용을 잊지 말길 나는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번 사람을 해치면 두 번, 세 번, 계속될 것 같고 나 자신이 살인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를 신고한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복수할 생각은 하나도 없다. 나를 알게되면 신고해라. 도피하는 생활을 해야 되기에 남을 속이고 돈을 훔치는 짖을 많이 했다. 피해자들께 용서를 빈다.
다시 교도소 얘기를 하겠다.
교도행정이 하루라도 빨리 고쳐져야 하겠기에 쓰기 싫지만 적겠다. 재소자들이 아프면 무료로 치료를 받는다.
면회를 오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은 몸이 아파도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병을 키워서 출소하던지 아니면 그곳에서 치료다운 치료를 받지 못한다.
'교도소에서 무료로 치료를 해주는데' 하고 생각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말이 치료를 하는 것이지 형식적이다.
진찰을 교도관이 한다.
약 처방도 교도관이 하고 주사도 재소자가 놔준다.
의무과장이라고 사회 의사가 있는데 정말 많이 아픈 사람만
그에게 진료를 받는다. 80,90프로는 교도관이 한다. 교도관이 병에 대해서 뭐를 알겠는가. 의사도 각 교도소마다 다르겠지만 산부인과 정형외과 같은 전문의들이 많다. 내과 전문의는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약 처방을 할때 약명을 적는 것을 본다. 나는 영어공부를 오래해서「잘은 모르지만」조금은 안다.
7,8가지의 약을 처방을 했는데 약봉지를 열면 2,3개정도 나머지 3,4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의무과, 용도과, 작업과, 분류과 비리가 수없이 많다.
잘 사는 사람거라면 모르지만 얼마 되지 않는 예산이지만 재소자들을 위해 써야할 돈이 그들이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벼룩의 간을 빼먹는 행위가 아닌가. 나는 지금 거짓말도
과장도 하지 않는다. 사실 그대로 적고 있을 뿐이다.
교도소에서 오랫동안 살다 나온 사람들에게 한번 물어봐라.
헌 담요를 몇 년째 사용하고 거의가 자신이 구입한 담요를 쓴다. 모든 물품을 공급해야 하는데도 거의 지급이 없다. 1년 예산에 포함 된 물품들, 그 물품을 지급해야 하는데 지급 받지 못했으니 그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교도관에게 얼굴이 멍들고 상처가 나도록 맞아도 어디에 호소할 데도 없다. 그곳에서 맞아 죽어도 모를 것이다.
사실 그런 적도 청송에서 있었고 청송에서 함께 있던 재소자들은 거의 다 알고 있다. 그들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법무부에서 교도관들의 비리를 방지하기 위해서 가끔 감사가 나온다. 교도소끼리 서로 직원들을 다른 교도소에 보내 상대 교도소를 감사를 하곤 하는데 모두 형식적이다.
몇일전부터 감사가 나온다는 것을 연락받고 감사받을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감사를 받는데 비리가 발견되겠는가. 감사를 하는 사람들도 잠깐 시찰하는듯 마친 견학온 것처럼
둘러보고 그냥간다. 상부에서 아무리 좋은 지침을 내려보내도 교도소안에서 재소자가 받는 것은 매 한가지다. 왜냐하면 그 지침이 재소자에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도소도 개혁되고 변화되어야한다.
재소자를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이 바뀌어야만 재범하는 사람
들이 줄어들 것이다. 마음을 고쳐먹고 착실하게 살아가는 전과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도 하나같이 사랑으로 대해주는 교도관들이 있었다. 그들의 마음을 바꾼것은 매도 아니고 어느 누구의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억누른다고 고쳐지겠는가.
가슴을 짖밟으면 밟을수록 적대감과 반항심이 커질 뿐이다.
진정한 것은 따뜻한 정이었다. 정에 굶주린 사람들 그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누가 정을 조금만 줘도 푹 빠져드는 그들. 그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폐쇄된 공간, 치외법권 지역에서 계속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다. 자신을 방어할 수도 없고 어디에 호소도 할 곳이 없다. 그들이 죄인이기에 당해야 한다는건 너무하지 않은가.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은 잘못을 할 수 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 하면 환자고 교도관은 의사나 간호사가 아닌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치료해서 개끗히 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악화시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나에게 고통을 가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는건 절대 아니다. 앞으로 내가 겪은 지옥 같은 생활을 다시 경험하는 사람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내 배움이 짧아 내가 쓰고 싶은 말들을 다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도 나뻤지만 지금 나는 몇 배 더 나쁜 놈이기에 나에 대한 변호는 하지 않겠다. 내 형제들, 나 때문에 힘들게 살고 있을 동생들, 그리고 나와서 만난 두 여인에게 정말 미안하다. 특히 성경이 그 착하고 정많고 순진한 아이.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지금이라도 달려가고 싶지만 내가 해야할 일이 하나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당장 죽어도 원이 없다. 첫사랑 선화를 잊는데 6,7년이 걸렸다. 내가 처음 교도소에서 나와 찾아갈려고 했던 사람은 나를 밀고한 사람이 아니고 그의 매형이었다. 내가 밀고로 잡히던날 그곳에서 밀고한 사람(친구의 선배였다)의 매형이 선화를 보면서 하던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매형이 청량리588에서 색시집을 한다고 들었다).
" 제 귀여운데 내 가게에 데려다 놓으면 장사 잘 되겠다 "
그 소리를 듣고 그에게 다가가려다 형사들에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게 맞았다. 어디 그게 남자가 할 소리인가? 전에 신문에서 나에 대한 얘기를 쓴 걸 봤다.
'청량리, 천호동 사창가에서 기행하면서' 라는 대목이었는데 그것 읽고 화가나서 편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썼다가 부치지 찮았다. 내가 천호동에서 살았고 청량리에서 잡혔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했던것 같다. 나는 돈을 주고 여자와 관계하는 것을 싫어한다. 애정이 없는 sex는 싫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여자를 이용하려고 했으면 교도소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부자가 됐을 것이다. 나에게 미쳐있던 돈 있는 여자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얹혀 살든지 아니면 그들을 이용해서 돈을 욹궈냈다면 부자가 됐을 것이다. 선화에게 한번 물어봐라 내가 그 불쌍한 여자들 등쳐먹을 사람인지. 내가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평생을 피해 다닐수는 없다. 언젠가는 총을 맞고 피를 뿌리며 끝나겠지만 항상 준비가 되있다. 그때가 오면 내 마지막을 담담히 맞겠다. 그러나 나는 모든 수완을 동원해서 피해 다닐 것이며(아무리 급한 상황이 오더라도 일반인은 절대 해치지 않겠다) 도저히 힘든 상황 이라고 판단되면 경찰도 나에게 당하게 될 것이다. 총이 무서운 무기임에는 분명하지만 안전장치를 풀고 홀즈터에서 뽑아 겨냥을 했을 때의 얘기지 그러기 전에는 쇠붙치에 불과하다.
아무리 빨라도 3초는 걸릴 것이고 3초면 내 주먹이 15번쯤 나갈 수 있고 칼이라면 그 보다는 느리겠지만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분명하다고 생각되면 내 머리를 먼저 쏘고 내 몸을 가져가라. 나를 사로잡으려고 하다간 평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복싱을 했지만 유도, 씨름, 격투기를 선수들 정도는 아니지만 2,3단짜리들하고 해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내 말을 명심하길 바라고 더 이상 내 형제들과 아버님, 그리고 내가 사랑했던 세 여인들을 힘들게 하지 말기 바란다.
만약 이들중 한명이라도 잘못됐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 가족이나 그녀들에게 가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만든 일이니까 나 하나면 되지않은가. 더이상 가족과 여인들에게 고통을 주지 말길 바란다. 이건 나의 부탁이고 경고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내 마음을 내가 자제하고 남자가 해서는 안될 짓을 절대하지 않고 있다.
도피자금 때문에 돈을 훔치지만 지금 나의 처지로선 어쩔 수
없다. 부탁한다. 내가 만든 현실 나하고 끝내자! 나 하나만
나는 언제라도 죽을 자세가 되어있다. 절대 자수는 없을 것이며, 교도소에 살아서 들어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단 하루도 그들의 노리개감이 되어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998년 7월 16일 19시 신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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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씨’가 옥중에서 쓴 참회의 편지이글에서 자신의 잘못과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중학교 중퇴한 범죄자의 글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한문이며 문장솜씨로 자신의 심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정말 이 분이 따뜻한 가정에 태어났다면 얼마나 휼륭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전 의적이 아닙니다. 그저 죽어 마땅한 罪人(죄인)일 뿐입니다.」10代(대)들이 절 우상처럼 生角(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웠습니다.“멋있다”고 生角(생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美化(미화)된 표면적인 것일 뿐입니다. 人間(인간)이기를 포기한 놈“악마” 또는 무슨 말로 욕해도 괜찮습니다.그러나 절대 절 조금이라도 美化(미화)시키지 마십시오.아이들이 저처럼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않게 해야 합니다.청송(교도소)에 老人(노인)이 한 분 계셨습니다.重病(중병)까지 앓고 계셔서 교도소에서는 치료를 포기했지만家族(가족)이 인도를 거부했습니다.결국 그분은 마지막 날까지 가족을 원망하다가 世上(세상)을 떴습니다.그분은 죽는 날까지 自身(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습니다.모든 原因(원인)은 자신에게 있으면서도 家族(가족)과 社會(사회)를 원망했던 것이지요.】그분도 태어날 때는 백지장처럼 하얗게 똑같았을 겁니다.
제가 만난 재소자들 중 90%가 父母(부모)의 情(정)을 받지못했거나 아니면 家庭(가정)폭력 또는 無關心(무관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면 思春期(사춘기)때 비로서 表出(표출)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도소를 아무리 많이 짓고 경찰을 늘려도 犯罪(범죄)는 줄지 않습니다.家庭(가정)이 화목하고 子女(자녀)들에게 사랑과 觀心(관심)을 가지면 犯罪(범죄)는 自然(자연)히 줄어들게 마련입니다.이 순간에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는 어린이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또 길에서 어떤 형태로든 犯罪(범죄)가 수반됩니다.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되고 그게 반복되면 앞의 老人(노인)처럼 됩니다.】“가출한 아이들” 社會(사회)에서 문제아라고 치부해버리는 아이들은 情(정)에 굶주린 불쌍한 애들입니다.가까이가 꾸짖으면 아마 폭행을 당할지도 모릅니다.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면 의외로 여리고 순수함에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별종이 아닙니다.그들을 소외시키고 멸시하면 더욱 더 악해질 것입니다.정에 굶주린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받아보지 못한 사랑과 情(정)이기 때문입니다.주위에 이런 아이들이 있음을 기억해주십시오배움이 짧아 글로서 마음을 표현하기 쉽지 않네요.“저 같은 犯罪者(범죄자) 다시는 없게 ”問題兒(문제아)“에社會(사회), 家庭(가정)에서 사랑을 주십시오“】
절도죄와 탈옥 등 22년6개월형을 언도받은 신창원이 다른 구치소로 이송시켜 달라는 뜻을 엄상익 변호사에게 전했다. 그러나 청송교도소측은 ‘이송문제’는 재소자의 권한 밖이며 법무부 소관이라는 뜻을 밝혔다. 특히 접견과 관련, 언론인들에게 면회를 제한하는 것은 교화와 갱생을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창원 가족측은 재소자라도 최소한의 인권이 있는데 인간의 존엄권을 무시한 채 미치도록 방치해두는 것이 교화냐며 인권회복을 강력하게 호소하고 있다. 지난 12일 본지는 엄상익 변호사와 함께 청송교도소를 찾아 신창원의 최근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독방 안에서 원혼 쌓인 귀신이 보인다” 교도소 면회실에서 통곡한 신창원
“변호사님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땐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수감생활하기가 너무 곤욕스럽습니다. 밤이면 목 매단 채 자살한 한 남자의 귀신이 나타나고 낮에도 헛것이 보입니다. 하루종일 시멘트 벽만 보다가 하루가 가고…. 제 삶에 프로그램이 없어요.정신병자가 되기전에 저를 신앙으로 붙잡아주세요. 동물 같은 생활, 이젠 정말 삶의 한계를 느낍니다.”
푸른 수의를 입고 스포츠형 헤어스타일로 면회실에 들어선 신창원은 무척 야위어 있었다. 눈 언저리는 움푹 들어가 있었고 볼살은 빠져 있었다. 그는 면회 온 엄상익 변호사를 보자 달려가 껴안은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신창원이 눈물을 그치지 않자 옆에 있던 젊은 교도관이 휴지를 꺼내 건넸다. 신창원은 교도관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그를 안은 엄 변호사는 그의 몸이 무척 가볍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절도죄로 경찰에 잡힐 때까지만 해도 당당하고 패기만만하던 그가 왜 이런 몰골이 됐을까?
신창원 말에 의하면 육체가 약해진 것은 지난 해 부터라고 한다. 그는 육체가 허약해지니까 정신도 약해진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또 외로움에서 오는 허전한 마음도 한몫 했다고 말했다. 그가 마음을 갈아 앉히고 엄변호사에게 들려준 말은 귀신 얘기였다. 22년간 1.4평의 독방에서 하루종일 시멘트 벽만 바라봐야 하는 자신이 한탄스럽기도 하지만 밤만 되면 40대의 한 남자가 매일 밤 찾아온다는 것. 그는 그것을 원한에 쌓인 듯한 귀신이라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귀신이 신창원의 방에서 나온다니 믿을 수 없었다. 신창원도 처음엔 그것이 ‘연기’인줄 알았다고 한다. 처음엔 잠깐 있다가 사라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목에 목매달았던 자리를 손으로 쓸으면서 물끄러미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물체는 형체가 또렷이 나타나고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 같아 붙잡으려하면 금세 없어진단다. 특히 독방엔 태울 물건도, 끓일 물도 없는데 연기라니?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가 일부러 얘기를 만들어서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귀신을 봤다는 사람은 신창원 말고도 탈옥범 조세형이 있었다. 조세형에 따르면 밤마다 자신이 수감하고 있는 감방 아래에서 슬프게 우는 소리가 매일 들였다고 한다. 시인 지하 역시 수감생활을 하면서 감옥 천장이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독방에서 수감하는 재소자들의 정신상태가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필이 생긴다면 그림 그리고 싶다”
강간 혐의는 부산고법에서 무죄로 판결
환영을 보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외로움이라지만 올해 2월까지 엄정 독거수용 생활(일반 재소자보다 강도있게 수감하는 방식, 신창원은 현재 특별수감자로 지목되어 있다) 을 한 그는 심신이 지칠대로 지쳤다.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정신이 피폐해졌다.
최근 그는 강도있는 수감생활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뜻을 청송 관계자에게 알렸다. 현재 청송교도소에서는 신창원을 ‘엄정독거수용’에서 ‘완화독거수용’ 단계로 낮춘 상태. 그러나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진 엄정한 독거생활을 했다.
엄정독거란 말 그대로 엄격하고 원칙대로 수용생활을 하는 것. TV와 신문보는 일의 제한은 물론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 차단되며 노역(勞役)의 기회도 없다. 일을 아예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가 오래되면 ‘구금성 질환’이라 해서 변비는 물론 정신적 황폐화도 일어난다. 천정이 무너져 오고 벽이 좁혀오는 느낌을 받을수 있으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지나치게 정리정돈에 몰두하는 식의 결벽증도 생길 수 있다고 한다. 행형법상 엄정독거 수용은 2년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2년이상 수용하면 정신이상을 보이거나 반사회적 성향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창원이 참기 어려운 것은 외로움이었다. 면회가 가족으로 한정되어 있고 편지왕래도 원활치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일례로 그가 엄상익 변호사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는 전달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교도소의 한 관계자는 서신을 왕래하는 것은 자유지만 제소자가 발설해서는 안될 내용이나 불합리한 내용이 적혀 있을 때는 서신왕래를 제한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12일 기자가 그를 면회갔을때도 접견은 거절됐다.기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면회를 하겠다고 해도 면회는 이뤄지지 않았다. 독방생활에 접견 금지, 서신왕래 제한 등 재소자가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도 차단된 것이다.
이에 대해 교도소의 한 관계자는 신창원은 일반 재소자와 달리 특별히 관리하는 ‘특수수감자’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에 교도소 원칙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최근 다른 교도소로 이송하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긴 하지만 재소자가 수감생활하기 힘들다고 이감시켜달라 할 때 그 뜻을 다 따라주면 다른 재소자들도 그렇게 할것이 아니냐면서 이송을 요구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요구사항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도소의 한 관계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창원이 수감생활을 너무 고통스러워해 올 3월부터 수용방법을 대폭 완화시켜 영양가 있는 배식(식사)은 물론, TV시청과 신문보기, 교회가는 일과 운동 등 최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창원이 독방생활을 하며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이상한 일들이 몇 가지 벌어지기도 했다. 어느날 A라는 목회자가 찾아와서 신앙적으로 무장을 해야 하니 자기가 하라는 대로 따라하라고 했단다. 신창원은 교도소에 입소하면서 기독교인이 된 터라 목사가 시키는대로 따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세례를 준답시고 머리에 물을 끼얹더니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언어를 따라 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자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중도에 그만 두었지만 이제 신앙의 싹이 자라고 있는 상태에서 그에겐 충격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신창원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가 더 피곤해졌다는 점이다.
모 출판사의 B씨도 이들 중 한 사람인 것으로 알려졌다. 계약금을 10만원만 준 상태에서 출판을 했다는 것이다. 신창원은 내용증명과 함께 이 돈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접한 신창원의 가족은 이상한 사람을 일절 만나지 말고 수감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주위에서 신창원을 이용하면 할수록 수감생활이 더 힘들기 때문이다. 한편 그의 동생 신현기씨는 교도소측의 재량이라는 수감방법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본지에 전했다. “수감생활을 하는 것은 그동안 지었던 죄를 뉘우치기 위해 형을 사는 것인데 현재 형이 환영, 환청 등 정신적 공황을 계속한다면 악화 되기전에 독방에서 나와 정신적 치료를 해야 할 줄로 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배종섭 보안과장은 “언론 및 주위 사람들이 신창원에게 관심갖는 것은 자유지만 신창원이 재소자인만큼 형을 무사히 마치고 출소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신창원이가 현재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송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구요. 그렇지만 그것은 법무부 권한입니다.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언론에서 계속 취재하고 인터뷰 하려들면 신창원의 입지가 더 안 좋아집니다. 신창원이 언론에 계속 나오면 나올수록 법무부에 ‘요주의 인물’ 로 낙점된다는 것이지요.
최근엔 ‘완화 독거수용’ 결정이 내려져서 수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방도 넓은 편이고 음식도 잘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담장안에서이긴 하지만 운동도 충분하게 시켜주고 있고 교회생활과 자유시간 등을 충분하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자는 재소자들에게 그런 복리후생 및 수감 제도를 완화시켜 주고 있는데 왜 서신이나 면회는 자유롭지 못하냐고 물었다. 그는 교도소의 모든 결정은 재소자들의 교화와 갱생이 목적이기 때문에 일련의 조치는 교도소측의 재량권이라고 말했다.
“교도소는 일정 기준에 따라 재소자들의 편지를 제한 할때가 있습니다. 부적절한 내용이 들어가 있거나 교도소 내의 정보 유출이 심한 내용은 저희가 차단합니다. 검열을 하는 것이지요. 기자들에게 면회를 할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은 모두 신창원이를 위해서입니다. 언론에 기사가 나가고 이러쿵저러쿵 얘기가 들리면 신창원이만 난처해집니다. 조용히 수감생활하다가 형량을 마치고 나갈 수 있도록 주위 분들이 도와줘야 할 줄로 압니다. 출소 후에 기술이라도 배워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론에서 그를 과대포장할 것이 아니라 신창원이를 가만 내버려두는 것이 그를 돕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교도소의 완화된 제도를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겠냐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대도 조세형은 탈주하다 잡히면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교도소의 살벌함을 고발한 적도 있었고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재소자들이 의문사를 당하거나 죽은 사람이 하루만에 장례가 이뤄지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올해 5월엔 w교도소에 복역중이던 한 재소자가 교도소장을 상대로 고소하는 등 재소자와 교도소측과의 갈등 관계가 증폭되고 있는 추세다. 이에 대해 엄상익 변호사는” 재소자들의 삶이 일반인들과 다른 점은 인정하지만 그들의 인권을 유린하고 박탈하는 비인륜적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고 전제한 뒤 “신창원을 변호했던 사람으로서 현재 그의 상태는 환영 환청이 보이는 등 매우 위급한 상황인만큼 자살로 이어지기 전에 정신적 치료를 받게 하는 교도소측의 조치가 있어야 할 줄로 안다고 말했다.
면회를 마치고 온 엄상익 변호사 1문1답 내용 신창원의 현재 상태는 어떠한가?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한마디로 뼈만 앙상한 채 가죽만 남은 느낌을 받았다. 예전의 총기나 패기는 사라지고 나약해졌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처럼 나를 보자마자 통곡했다. 죄 지은 제소자지만 개인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2년 전 신창원의 절도,강간 혐의에 대해서는 어떤 판결이 났나?
절도죄로 22년 6개월이 판결났다. 지난 2000년 9월 25일 부산고등법원 형사2부(2000 노 235)에서 강간혐의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간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이 위증을 한 것이다. 결국 신창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그를 변호하던 사람으로써 무죄를 입증시켰지만 유감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신창원이 이송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청송교도소측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청송교도소는 나름대로 제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도소는 말 그대로 재소자들이 수감생활을 잘 하고 출소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기 때문이다.특히 이송 문제에 대해서는 신창원이 요구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송문제는 법무부가 관할하기 때문에 재소자가 가고 싶다고 해서 가고 오고싶다고 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권이 유린되고 생명을 위협받는 가혹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를 변호하던 사람으로써 행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재소자도 죄인이기 전에 생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신창원이 보낸 편지를 두 통이나 받지 못했다는데?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신창원이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긴 것 같은데 교도소측에서 제한한 것 같다. 면회하는 날 받지못한 편지를 달라고 했는데 폐기 처분했다고 해서 가져올 수 없었다.
재소자들의 편지도 교도소에서 제한할 수 있나?
교도소에서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검열하는 것은 교도소내의 기밀이나 정보 등을 재소자들이 발설하는 것을 막기 위함으로 알고 있는데 원칙적으로 서신 왕래를 막는 것은 위법에 해당한다.
이유리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로 말해달라?
신창원이 부산교도소에 있을때는 편지도 오고 면회도 자주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청송교도소로 온 뒤부터는 오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얘기가 들리지만 현재 신창원은 이유리와 교제하고 있지 않다. 신창원은 옥중 결혼에 대해 생각한 바 없으며 뜻도 없음을 나에게 분명히 밝혔었다. 당시 그는 교제후 얼마 안 있다가 이유리에게 그만 만나자는 이별 편지를 부쳤는데 다음 편지에 그녀가 악의적인 편지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창원은 옥중에 있는 자신을 생각해주고 보살펴 준 것에 대해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한 것 뿐이지 그 외에 다른 감정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부 출판사와 목회자가 신창원에게 접근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라고 밝히진 않겠지만 계약금 10만원을 주고 출판하는 출판사도 있었다. 신창원이 직접 쓴 편지를 출판하려 한 것인데 신창원이 몹시 불쾌해하고 있다.신창원이 그에게 내용증명을 보낼 정도였다. 계약금은 돌려준 것으로 알고 있다. 또다른 문제는 신앙문제와 관련한 일인데 A라는 목사가 신창원을 찾아와 누워서 기도를 하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기도를 하라는 둥 무리한 신앙생활을 요구했다.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으로 새출발 하려는 그에게 너무 못할 짓을 한 것 같다.
현재 신창원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혼거수용이다. 쉽게 말해 제소자들이 여럿이 있는 방에서 수감하고 싶은 것이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독거수용을 지향하지 않고 있는 추세다. 1평 남짓한 폐쇄된 독방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벽만 바라보고 20여년 넘게 지낸다고 생각해봐라 아무리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해도 미치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특히 교화란 죄를 지은 사람을 수용한 후 교육시켜 출소시키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정하는 일인데 수감생활로 인해 재소자가 더 악독해지고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것은 원래 의미인 교화의 목적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신창원이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다던데?
신창원이는 여태껏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강아지를 잘 그린다. 면회 당시 연필과 스케치북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재료를 받게 되면 그림을 그리면서 수감생활을 잘 하라고 충고해주고 왔다.
앞으로 계획은?
재심청구를 할 생각이었지만 이미 신창원이가 강간혐의에 대해서는 무죄판결 받았기 때문에 재심이 불가하다. 재심이라는 것은 혐의자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청구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이전에 한 인간이다. 감옥 안이지만 그 안에서도 행복할 권리는 있다고 본다.
지난 3월 초, 두툼한 서류봉투가 배달됐다. 발신자는 ‘청송교도소 신창원’. 강도치사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1997년 1월 부산교도소를 탈옥, 1999년 7월 붙잡힐 때까지 공권력을 비웃듯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을 벌인 바로 그 ‘희대의 탈옥수’ 신창원(41)이다.
그가 유명해진 건 단순히 탈옥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도피생활을 하며 훔친 돈으로 장애인 수용시설에 기부하고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가 하면, 그가 남긴 일기장과 편지 등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가 알려지면서 동정을 샀기 때문이다. 탈옥 기간에 강도강간 등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얘기도 나왔지만 무죄로 결론이 났다. 그는 탈옥으로 22년6개월의 형량이 추가됐다.
기자는 그간 신창원과 수십통의 편지를 주고받고 면회도 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덕분에 그의 재수감 후 10년여의 수감생활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00년 장애아 복지시설 여교사와의 결혼설 전말, 2004년 고입·대입 검정고시 합격, 2005년 대전교도소에서 극도의 정신질환을 앓은 사연 등을 보도했다.
신창원이 보낸 봉투 안엔 그가 법무부 장관을 상대로 2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자필 소장 사본이 들어 있었다. 그는 동봉한 서신에서 “소장을 2월2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우편으로 접수시켰다”고 했다.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유는 교도소에서 자신의 요구를 묵살하고 허리디스크 치료를 제때 안 해줘 병이 악화되는 바람에 육체적 정신적 피해를 봤다는 것. 하지만 근본 목적은 재소자의 인권침해에 대한 문제 제기임을 분명히 했다.
좌절된 향학열
3월4일, 신창원을 만나러 경북 청송으로 내려가면서 지금껏 그가 보내온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2004년 12월 대전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그의 편지는 희망으로 가득했다. 그는 2004년 중졸 검정고시와 고졸 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하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최종 목표는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해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살아서는 사실상 교도소를 나갈 수 없기에 일반 대학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교도소 안에 사이버대학 강좌가 개설될 예정이고, 여기엔 심리학과 과정도 있다는 걸 안 그는 학사고시를 통한 국어국문학과 학위 취득을 목표로 세웠다. 그 후 사이버대학 강좌가 개설되면 심리학과 과정에 편입할 요량이었다. 따라서 재소자 대상으로 학사고시반을 운영하는 대전교도소로 이송되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당시 그는 기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부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학사고시를 하려는 것은 명예나 사회에 일찍 나가고 싶은 마음 때문은 아니에요. 살아서 밖에 나간다는 미련은 접은 지 오래됐습니다. 제가 지은 죄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은 삶의 초점을 담 안 생활에 맞추게 된 것이지요. 동료들은 시간이 빨리 흐르기를 바랄지 모르지만, 저는 빠르게 흐르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마음이 조급해집니다.
제 꿈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화장실이며 바닥 청소, 식기 닦기, 빨래 등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더라도 동료들과 함께 바로 서기를 해보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하고 무의미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동료들. 지금 마음을 추슬러 바로 서기를 못한다면 이들의 미래는 저처럼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이 2006년 가을 보내온 사진. 디스크로 쓰러지기 전 찍은 사진으로 언론에 공개되는 신창원의 가장 근래 모습이다.
상담심리학을 통해 저와 동료들을 돌아보고 문제점을 찾아 함께 치유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공통된 문제 때문에 범죄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에 문제점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배움이 짧고 생각이 열리지 않아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는 동료가 있으면 함께 미래를 설계해보고 싶습니다. 교도관이나 다른 수용자의 말은 듣지 않아도 제겐 마음을 열어줘요. 그래서 마음의 대화가 가능합니다.
마음의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얼어붙은 가슴은 사랑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도 마음이 열려야만 전달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뼈저리게 후회하는 게 있습니다. 지난날 잘못을 뉘우치고 새롭게 살아보려는 생각은 많이 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아서 지금의 현실을 만들고 말았어요. 밑바닥에서 지저분한 옷을 입고 땀을 흘리는 모습이 창피하게 느껴졌던 거죠. 출소해서 일을 하려 해도 이런 이유로 금방 포기하고 쉽게 돈을 벌 생각에 범죄를 저지르곤 했던 겁니다. 우리의 공통된 문제점이지요.
‘상태 심각, 시급한 수술 요함’
우리가 바로 서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 담 안입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추한 모습으로 추락해 있는 지금, 우리의 잘못된 삶을 돌아보며 문제점을 발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잘못된 자존심을 버리고 몸으로 직접 밑바닥 생활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이곳에서부터 밑바닥 생활을 자청해서 해야 사회에 나가서 주위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땀 흘려 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밑바닥에 들어가 몸부림치듯 살려는 것입니다.”
당시 그는 성실하게 수감생활을 했고, 동료 재소자들과도 잘 지냈다. 기자가 2004년 청송 제2교도소로 면회를 갔을 때 그의 후견인인 김신웅 장로는 물론 교도관들도 입을 모아 그를 칭찬했다.
그런데 대전교도소로 이송된 지 얼마 후 그의 누나로부터 연락이 왔다. 신창원이 너무 힘들어한다며 면회를 가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전교도소는 기자의 면회를 불허했다. 면회신청서 ‘재소자와의 관계’란에 ‘지인’이라고 썼지만 교도소 측은 이미 기자 신분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
신창원은 편지에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어 보냈다. 공부를 하기 위해 대전으로 간 것인데, 학사고시반 편입이 불허됐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있는 사동엔 4명만이 수용돼 있는데, 교도관을 살해한 정신질환 사형수, 역시 동료 재소자와 교도관을 폭행한 혐의로 추가재판 중인 정신질환 재소자, 그리고 사동 청소를 하는 재소자와 자신뿐이라고 했다.
종교집회, 자매결연, TV시청 등이 모두 금지된 데다 0.7평(2.31m2) 비좁은 독방에 갇혀 있다 보니 극심한 공황장애를 앓은 모양이었다. 밤마다 꿈에 시체가 나타나고 환상과 환청에 시달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게다가 방이 너무 비좁아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해 퇴행성 척추질환이 심해지고 신경성 소화기능 질환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동, 조금 더 넓은 독방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다른 재소자들과 어울려 숨통이라도 틔게 해달라는 것도 거부당했다. 처음엔 이감돼 왔으니 ‘군기’를 잡으려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3개월, 4개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했다. 기자가 대전교도소 측에 신창원을 그렇게 처우하는 이유를 묻자 “탈옥수였기 때문이다. 우린 규정대로 할 뿐”이라고 답했다.
결국 신창원은 8개월여 만인 2005년 8월, 청송 제2교도소로 다시 이감됐다. 정신적 고통은 사라졌지만 디스크는 쉽게 호전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다시 공부할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며 기뻐했다. 실제 그는 2006년 4월 지금의 청송교도소로 이감된 후 독학으로 공부해 2007년 3월 치러진 학사고시 1차 시험을 가뿐하게 통과했다.
하지만 시험을 치른 다음날 쓰러져 20여 일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등 허리디스크가 악화됐다. 김신웅 장로에 따르면 “하반신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휠체어를 타고 생활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확한 진단을 위해 외부진료기관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는 신창원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특별한 이상이 없다는 이유였다.
“많이 망가졌어요”
신출귀몰한 절도행각, 탈옥 등 신창원을 모티프로 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 ‘탈주’의 제작 예정을 알리는 인터넷 홈페이지.
신창원은 2007년 11월27일에야 인근 종합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고, 병원은 ‘제4▼ 5번 요추 추간판 탈출증’이란 진단과 함께 ‘상태 심각하여 시급한 수술적 치료 요함’이란 소견을 내렸다. 이에 따라 12월 초 경북대 병원으로 이송돼 디스크 제거 수술과 신경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수액을 긁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청송교도소 면회소에 도착해 “수인번호 5401번 신창원을 면회왔다”고 하자 전산망을 통해 기자의 신분을 파악한 담당직원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솔직히 면회가 이뤄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신창원이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만큼 교도소 측으로선 기자가 그를 만나는 게 달가울 리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20여 분 후 면회대기자 명단에 신창원의 수인번호가 떴다. 면회가 허가된 것이다.
해당 면회실에 들어서자 아크릴 칸막이 너머로 신창원이 보였다. 2000년 처음 봤을 때처럼 짧은 머리였다. 쑥스러운 듯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잘 지내셨어요?” 하고 안부를 건네는 그의 얼굴이 조금은 수척해 보였다.
▼ 건강은 괜찮은가요.
“좋아지고 있어요. 여전히 통증이 있고, 하체에 힘이 안 돌아오긴 했지만 움직이는 건 괜찮아요. 칼을 대는 수술을 해서인지 회복이 좀 더딘 것 같아요. 지금은 조금씩 운동을 하고 있어요.”
▼ 지금도 독방에 있나요.
“한 달 전쯤에 병사(病舍)로 옮겼어요. 여전히 독방이지만 전에 있던 곳보다는 조금 넓어요.”
▼ 신앙생활은 잘 하고 있습니까.
“많이 망가졌어요. 지금은 종교집회도 참석하지 않아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보려 해도 벽에 부딪히는데다, 이런 일까지 겪고 나니 회의가 들더라고요. 다시 신앙을 일으켜 세우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목사님도 무조건 용서하라, 참아라, 싸우지 말라고만 하니까 이를 실천할 수 없는 제 맘이 편하지 않아요.”
영화제작 반대하는 이유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면 면회를 제지당할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신창원의 삶은 영화 소재로 그만이다. 최근에도 배우 이동건이 영화제작사 씨네2000으로부터 영화 ‘거북이가 달린다’(가제)의 주인공 신창원 역을 제의받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 신창원씨를 소재로 한 영화가 만들어질 모양이던데요.
“저도 신문기사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려면 제가 동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씨네2000 이춘연 대표에게 편지를 보내 물어보니까 저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이라는 답장이 왔어요. 언론에서 왜 그렇게 보도했는지 자기도 모르겠다고 썼더군요. 그래도 미심쩍어서 일단 제작에 신중을 기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내놓았어요. 저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언짢더라고요.
또다른 영화사에서도 저를 소재로 한영화를 기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영화사에선 누나에게 판권을 샀다고 하는데, 누나는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설령 누나와 계약을 했다 해도 당사자인 제 동의가 없으면 무효잖아요.”
▼ 자신을 소재로 한 영화 만드는 것 자체를 반대하는 건가요.
“지금까지 제게 7, 8개 영화사에서 제안이 왔어요. 교도소까지 저를 찾아온 제작사만 그 정도예요. 영화에서 저를 어떻게 다루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저로 인해 피해를 당한 분들의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건 그분들을 두 번 죽이게 되는 거죠. 유족들에게도 미안한 일이고요. 그래서 다 거절했어요.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는 허락할까 생각도 했어요. 당시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행정소송을 하려고 했는데, 그러려면 변호사 선임비용 등 이런저런 돈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도리가 아니다 싶어 맘을 고쳐먹었죠.”
“재탈옥은 불가능”
▼ 허리는 언제부터 아팠나요.
“2001년 5월부터 조금씩 아프다가 2004년 12월 대전교도소로 이송된 후 심해졌어요. 지난해 3월 이후에 급격히 악화됐고요. 의무과장에게 허리와 골반, 복부와 다리 통증을 계속 호소했지만 엑스레이만 찍고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외래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싶다고 했는데 거듭 묵살당했어요. 죽을 병이 아니기 때문에 외부 병원으로 나갈 수 없다는 식이었죠. 일찍 정밀검사를 받아서 원인을 찾았더라면 물리치료나 레이저 수술로 간단하게 완치될 수 있었을 텐데…. 지난해 12월 외래진료를 받았을 땐 이미 늦은 거죠.”
▼ 교도소 측에서 왜 그랬다고 생각하나요.
“이유는 단 하나죠. 교도소 윗분들이 저에 대한 의심을 풀지 않는 거예요. 청송 제2교도소에서는 보안과장이 저를 믿고 일반 재소자처럼 대우했어요. 그래서 제가 검정고시 공부도 하고, 새로운 인생 설계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대전교도소나 여기는 수용자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주기보다는 격리시키려고만 해요.
규정을 위반해 징벌을 받은 수용자라도 1년이 지나면 어떤 제한이나 차별도 받지 않아요. 탈옥수도 재판 종료 후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2~3년이 지나면 취업장에 출역시켜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일하며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저는 지난 10년여 동안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성실히 살아왔는데도 여전히 탈옥수 취급을 하니 답답하죠.”
▼ 교도소 측으로서는 아무래도 탈옥에 대한 부담이 있겠죠.
“감시대와 정문 후문만 근무수칙대로 근무하면 탈옥은 불가능해요. 6m 담장, CCTV와 적외선 감지기, 3m 정도의 철조망과 소총으로 무장한 경비교도원, 이렇게 5중으로 안전장치를 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부산교도소를 탈옥할 수 있었던 건 당시 그곳이 담장을 허물면서 차단막만 설치한 채 교회당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차단막으로 인해 감시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사각지대가 생겼고, 땅을 조금만 파도 차단막을 통과해 공사장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어요. 게다가 차단막 때문에 적외선 감지기를 꺼놓은 상태였고, 공사장엔 담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철근과 밧줄이 있었죠.”
‘독거수’ ‘미지정’의 위험성
▼ 아무튼 디스크 수술은 이제 지나간 일이고 수술도 잘 됐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물론 덮고 지나갈 수도 있어요. 문제 제기를 해봤자 저한테 좋을 게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럼에도 소송을 하는 건 저 같은 피해자가 더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몸이 아픈데 외부진료를 안 보내주니까 수용자와 교도관 사이에 마찰이 심해져요. 수용자는 병이 더 악화되고, 교도관들은 스트레스로 병들어가요. 외부진료를 좀더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갖춰지면 재소자들은 물론 교도관들에게도 좋을 겁니다. 그래서 소장을 접수시켰는데, 한 달이 지났는데도 아직 답이 없네요.”
▼ 편지에서 소송을 하는 이유가 단순히 손해보상을 받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요.
“10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하면서 법이 아무리 합리적으로 개정되어도 담 안의 구조적인 문제가 개선되지 않는 한 재소자 교정·교화는 불가능하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천문학적인 국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지만 재범률과 범죄율이 감소하지 않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봐요. 교도소 일선 직원들도 지금 상태로는 교정·교화가 결코 이뤄질 수 없다고 말해요. 그런데 법무부의 높은 분들은 이런 현실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그래서 앞으로 담 안의 구조적인 문제, 즉 재소자 인권 문제를 개선하는 데 제 모든 것을 바치려고 해요. 부당한 것은 소송을 통해, 불합리한 부분은 헌법소원을 통해 하나하나 개선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전공도 국문학에서 법학으로 바꿨어요.”
▼ 소송을 하면 앞으로 어려움이 많을 텐데요.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를 개선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어떠한 비난도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용자들의 정상적인 사회복귀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청송교도소 관계자 인터뷰“규정대로 처우할 뿐…‘인권’ 악용할 여지도 있다”
▼ 신창원이 10년 가까이 별문제 없이 수형생활을 했는데도 여전히 독방에 가두는 이유는.
“신창원은 영향력이 큰 수용자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용자들이 동조할 가능성이 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여전히 주의관찰인물로 분류돼 있다. 교정사고가 나면 그 책임을 누가 지나. 우리는 규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독거수용은 필요에 따라 우리가 할 수도 있고, 수용자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신창원은 본인이 원해서 하는 것으로 안다. 독거생활에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게, 혼자 갇혀 지내는 건 맞지만 하루 두 차례 운동을 할 수 있고, 상담과 종교집회에 참석할 수 있다. 신창원도 마찬가지다.”
▼ 외부진료를 해주지 않아 병을 키웠다고 주장하는데.
“아픈 재소자는 외부진료를 나갈 수 있고, 현재도 나가고 있다. 물론 교도소 사정상 원한다고 다 들어줄 수는 없다. 지금도 외부진료를 보내달라는 재소자가 50명이 넘는다. 이들이 모두 외부진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인지도 의문스럽다. 신창원의 경우 외부진료를 한번 나가려면 비상이 걸린다. 교도관이 20명은 따라붙어야 한다. 쉽지 않다. 기회를 봐서 외부진료를 받게 하려고 했을 뿐이다.”
▼ 결과적으로 교도소 측에서 병을 키운 것 아닌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병이 크게 악화돼서 수술을 받은 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신창원의 처지에선 진료가 늦어 병을 키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판단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무과장이 의사로서 한 판단을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의사가 괜찮다는데 환자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지 않나.”
▼ 신창원이 재소자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인권, 좋은 이야기다. 우리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지금의 교도행정체계가 그걸 충족시켜줄 수 없는 상태다. 우린 힘이 없다. 예산도 권한도 없다. 현실적으로 재소자들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 교정 시스템 자체에 대해 국가에 개선을 요구하는 것은 우리들도 공감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재소자들의 어려움만큼이나 교도행정도 어렵다는 걸 이해했으면 좋겠다. 너무 열악하다.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을 다루기 정말 힘들다. 인권이란 것 때문에 집단난동, 행패, 부정부패를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
▼ 재소자의 인권도 보호돼야 하는 것 아닌가.
“인권을 악용할 여지도 고려해야 한다. 지금도 자매결연을 빙자해 한자리에 모여 부정 모의를 하고, 반입금지 물품인 담배 등을 전달하는 사례들이 있다. 신창원이라고 그런 것을 안 한다는 보장이 없다. 일일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신창원은 밖에 알려진 것과 다른 부분이 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수용생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권위 진정, 고소 고발, 정보공개청구 등을 이용해왔다. 그래서 이번 소송에도 순수하지 않은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 우린 규정과 통계에 따를 수밖에 없다.”
▼ 기자에게 보낸 서신의 발송을 불허하고 일방적으로 폐기했다고 하던데.
“교정법 시행령 제62조3항에 의하면 서신에 명백한 허위사실을 기재하거나 안녕과 질서에 명백한 해를 끼친 내용이 들어 있는 경우 발송을 허가하지 않고 그 사유를 본인에게 고지한 후 이를 폐기한다고 돼 있다. 분명히 이 사실을 고지한 후에 폐기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여기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조항이 수용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위헌요소가 있다 하여 2004년 8월9일 법무부 예규 제707호 ‘수용자의 서신업무처리지침’ 제4조2항에 “소장은 발송서신을 불허할 경우에는 먼저 불허사유를 작성인에게 통보하여 다시 쓰도록 권유하고 이에 불응한 경우에는 동 서신을 영치한 후 석방시 본인에게 교부하여야 한다”고 보완했다.
▼ 재소자 인권 문제란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요.
“대략적인 내용을 편지에 적어 보냈는데 발송이 불허됐더군요. 우선 외부 병원 진료와 보건·치료 프로그램의 문제점, 그리고 1시간 남짓한 운동시간 외엔 종일 비좁은 독방에서 생활해야 하는 독거수와 미지정(작업을 하지 못하고 방에서만 생활하는 수감자)들의 교정·교화 문제점과 위험성을 지적하고 싶어요. 저와 재소자들이 겪은 인권침해, 그리고 수용자의 교정·교화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교도소 체제의 구조적 문제 등에 대해 낱낱이 조명한 책을 12월에 출간할 예정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 스스로 독방 수감을 원하는 재소자도 있다던데, 독방 생활이 그렇게 고통스러운가요.
“교도소마다 적게는 10% 이상의 재소자들이 독방에 갇혀 살아요. 장기간 독거생활과 미지정 생활을 하면 사회성 상실, 무기력증, 이상성격 형성, 폐쇄공포증, 피해망상 등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가 10년여 동안 직접 체험했기에 그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만약 제가 인내력이 부족했거나 꿈이 없었다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겁니다.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요.
그런데 3범 이상의 수용자들은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 사회성이 떨어지고 인성적인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이들을 지금처럼 격리시키고 23시간 비좁은 독방에 가둬 방치한다면 상태가 더 악화될 위험성이 커요. 출소하면 더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고요. 사형수들도 정신적 안정을 위해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생활하도록 하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사회성을 길러주고 갱생 프로그램을 제대로 작동해서 교화해야 합니다.”
▼ 교도관들에 대한 불만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것은 아닌가요.
“그렇지 않아요. 이젠 교도관들도 많이 달라졌어요. 특히 과거의 탈옥 동기가 됐던 교도관들의 폭력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교도관들 의식도 변했고요. 예전엔 비인간적인 교도관이 90%, 인간적인 교도관이 10%였다면 지금은 그 반대예요. 교도관들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그들도 어떤 의미에선 현 교도행정체계의 피해자예요.
재소자는 죄를 지었으니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는 보호받아야 합니다. 갇혀 있는데 아프면 얼마나 더 힘든지 모를 겁니다. 정말 아픈 환자들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면회시간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렸다. 신창원은 기자에게 먼저 퇴실하라며 손짓했다. 쓸쓸하게 돌아서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13년 후엔 출소 가능?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김신웅 장로를 만났다. 그는 신창원이 대전교도소로 이송될 것 같다고 했다. 이곳보다는 대전이 치료받을 여건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신창원이 죽기 전에 세상에 나올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제가 신창원에 대한 형량재심청구를 신청했어요. 현재 형량이 ‘무기징역+22년6개월’인데, 최근에 법이 바뀌어 추가형량이 없어질 수 있는 길이 열렸거든요. 이게 받아들여지면 신창원은 무기형만 남아요. 이미 10년 가까이 살았으니 앞으로 한 13년 정도만 더 충실하게 생활하면 모범수로 나올 수도 있어요. 교도소장도 그렇게 되도록 힘을 써보겠다고 했는데, 이번에 소송을 제기한 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김 장로의 희망이 이뤄진다면 신창원은 만 53세쯤엔 세상 빛을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신창원은 이와는 상관없이 재소자 인권을 위한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청송교도소를 나오며 돌아보니 교도소 입간판에 쓰여 있는 ‘인간존중 법질서 확립’이란 표어가 눈에 들어왔다.
‘탈주범’ 신창원에게 ‘무기징역+22년6개월’은 마땅했을까
표창원의 죄와벌/ ②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신창원은 현장에만 있었을 뿐 살인은 공범이 저질렀다 그러나 강도치사로 무기징역형 또 탈주와 절도로 추가징역 한 소년을 범죄자로 키운 사회적 책임은 고려되지 않고 형량은 가혹하기만 했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경우미군자녀 2명이 함께 있었지만 검찰은 1명만을 기소했으며 법원은 범인인지 확실치 않다며 그마저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나라 범죄 역사에서 신창원만큼 극적인 인물은 찾기 어렵다. 교도소를 맨몸으로 탈출해 2년이 넘게 15만 경찰을 농락하며 전국을 활보하면서 절도 행각을 계속해, 사회에 불만을 느낀 젊은이와 청소년층에게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렸던 범죄자.
그가 검거될 당시 입은 외국 유명 브랜드 셔츠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범죄자 등 비난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패션을 따라하는 ‘블레임 룩’(blame look) 현상 논란마저 일으켰다. 특히, 신창원이 거쳐간 곳마다 경찰서장이나 파출소장이 문책을 당해 ‘신창원이 경찰 인사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름이 같아 ‘유명한’ 신창원의 덕을 본 측면도 있고, 범죄자 이름으로 불리는 ‘치욕’을 겪기도 했다. 신창원이 검거돼 한창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때 한 라디오 생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참가했다가 진행자가 ‘경찰대학 신창원 교수’라고 부르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고, 지난해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친 40대 남성이 ‘신창원 교수 맞죠?’ 하며 악수를 청한 일도 있었다. ‘죄와 벌’ 연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다뤄야 할 대상으로 신창원 말고는 다른 대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표창원엔 따뜻했으나 신창원엔 따가웠던… 19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에는 비상이 걸렸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재소자 한 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신창원. 몸이 날렵하고 체력이 좋긴 했지만, 높고 두꺼운 교도소의 담벼락을 뚫고 탈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물론, 당시 부산교도소는 외벽 보수공사가 진행중이어서, 사동 건물만 벗어나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마련되어 있기는 했다. 신창원은 마치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에 나오는 것처럼, 오랫동안 치밀하게 탈옥을 준비했다. 최소한의 단백질과 탄수화물만을 섭취하고, 이기지 못할 고통의 순간에 이를 때까지 운동을 해 필수 근육 이외의 살을 모두 뺐다. 그리고 모범적인 수감 생활을 하며 작업장을 드나드는 사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틈타 작고 얇은 쇠톱 하나를 훔쳤다. 드디어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고 판단한 그는 평소 눈여겨봐 뒀던 화장실 쇠창살 하나를 쇠톱으로 끊어내고 뛰어올라 공중에 매달리고 나서, 보통 사람은 몸의 반도 들어가지 못할 좁은 공간 안에 작은 머리를 집어넣은 뒤 얇아진 상체를 밀어넣고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그 뒤 바닥으로 가볍게 뛰어내린 다음에는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공사중인 외벽을 향해 달렸다.
그로부터 2년6개월, 전 경찰이 전력을 다해 쫓는 비상경계령을 농락하며 유유히 전국을 활보한, 대한민국 사상 최장기간에 걸친 탈주극이 시작됐다. 외환위기 직전의 경제적 어려움과 답답한 사회 현실에 분노하던 사회 일각에서는 신창원을 ‘홍길동’이나 ‘일지매’ 같은 ‘의적’으로 칭송하며 검거되지 않길 바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인터넷에서는 범죄자를 추앙하는 ‘팬카페’가 신창원을 대상으로 해서 최초로 개설되고, 신창원을 주인공으로 한 만화까지 등장해 가히 ‘신창원 신드롬’이라 불릴 만했다.
범죄학 강의 중 간혹 ‘표창원과 신창원’을 비교해 설명하기도 한다. 학생이나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창원은 표창원과 딱 1년 차이인 1967년 5월 출생이고, 싸움과 서리 등 말썽꾸러기 어린 시절을 보낸 점에서 비슷하다. 다만 부친의 베트남 참전으로 수년간 ‘아버지 없는 유년시절’을 보낸 필자와 달리 신창원은 일찍이 모친이 사망해 ‘모성이 결핍된 유년시절’을 보냈고, 전쟁 후 복귀한 필자의 부친과 달리 신창원의 잃어버린 모성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잘못과 말썽을 저지를 때마다 강한 체벌과 엄한 질책을 받았던 것은 유사하지만, 그럴 때마다 표창원에겐 따뜻한 가슴을 열어 위로와 격려를 해준 이웃 아주머니와 선생님들이 계셨던 반면 신창원에겐 이웃의 싸늘한 시선과 불만, 교사의 욕설과 무시가 뒤따랐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신창원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국민학교 5학년 때 선생님이 학교에 낼 돈도 가져오지 못하는 놈이 뭐하러 오냐며 심한 욕설을 한 뒤 내 마음에 악마가 생겼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범죄학에선 이러한 ‘표창원과 신창원의 차이’를 설명할 때 ‘사회적 유대’라는 개념과 ‘낙인효과’라는 이론을 자주 사용한다. 한 사람이 주위 사람들과 사회와 긍정적인 연결고리가 강하게 형성될수록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통제력이 강해지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유혹이나 스트레스 등 범죄 유발 요인 앞에 쉽게 무너진다는 것이 사회적 유대 개념이다. 사회적 유대를 구성하는 4개의 요소가 가까운 지인과 애정과 관심으로 연결되는 ‘애착’, 실현 가능한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전념’, 소속된 공동체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참여’, 그리고 도덕과 윤리, 법 등을 준수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인데, 신창원에게는 이 4가지 요소가 모두 결핍되어 있었다.
1997년 1월 부산교도소의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한 신창원은 숱한 화제를 뿌리며 경찰을 피해 다녔다. 1999년 한 파출소의 벽이 신창원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채워져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5살 아들을 소년원에 보내달라던 아버지 게다가 1982년 15살 중학생 때 거듭된 밭과 과수원 서리에 대해 이웃이 항의하자 신창원의 아버지는 어린 신창원의 손목을 잡고 경찰서를 찾아가 ‘소년원’에 보내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경찰은 아버지의 뜻대로 신창원을 소년원에 보내고, 그 결과는 ‘범죄자’라는 낙인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학교에 돌아갈 수도 없었고 이웃에서는 자녀들에게 ‘창원이랑은 어울리지 말라’며 외면했다. 신창원이 찾아갈 곳은 소년원에서 만난 비슷한 처지의 청소년들뿐이었다. 그들과 어울려 다니다 무작정 서울로 올라간 신창원은 1년 뒤인 1983년, 다시 절도죄로 검거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다 결국 1989년, 22살 때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돈암동 한 주택에 들어가 강도질을 하다가 공범 중 한 명이 피해자를 살해하는 바람에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범죄자 신창원에게는 하나의 ‘신조’가 있었다. ‘결코 사람은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남의 돈을 훔치는 ‘도둑’일 지언정 사람을 상하게 하는 치졸한 파렴치범은 되지 않겠다는 나름의 원칙이었다. 하지만 공범이 살인을 저지르는 바람에 자신마저 살인범으로 몰려 ‘무기징역’을 선고받자 절망하고 좌절했다. 더구나, 실제로 사람을 죽인 살인범들도 변호사를 사서 적극 변론하면 징역 5년, 7년 정도를 선고받고, 세상을 어지럽힌 대형 권력형 비리 범죄자들도 몇 년 복역하지도 않고 세상에 나가는 현실 앞에서 분노감마저 들었다. 결국, 수감된 지 7년 만인 1997년, 탈옥을 감행하게 된 것이다. 탈옥 후에도 신창원은 여러 차례의 절도 범죄를 저질러 총 9억8천만원에 이르는 금품을 훔쳤고, 그중 일부는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 기부하면서 메모를 남기기도 하는 등 도주중임에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결국 탈옥 2년6개월 만에 검거된 신창원은 기존의 무기징역에 더해 22년6개월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수감중에 중졸·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신창원은 언론사 등에 보내는 자신의 편지를 발송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도소장을 대상으로 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자신의 권리 찾기에도 열심이었다. 특히, 스스로 법전과 법학서적을 탐독한 뒤 모든 소송 과정을 변호사 도움 없이 수행하고 승소해 1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1년 7월에 부친이 사망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당하자, 신창원은 그로부터 한달 뒤인 8월에 자살을 시도했다. 한때 중태에 빠졌으나 지금은 건강을 회복한 상태다.
형법에는 범죄행위마다 형량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그 상한선과 하한선을 둘 뿐이지 단일한 형벌을 정해놓지는 않았다. 특히, 작량감경(정상참작 사유가 있을 때 법관 재량으로 형을 줄여주는 것) 등 감형 사유나 가중처벌 요소 등이 있어 결국 ‘판사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범죄의 형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법의 원칙을 ‘자유 심증주의’라고 한다. 물론, 항소나 상고 등 불복 가능성이 있기에 판결은 신중하게 이뤄지며, 판사 개인의 자유재량이 아닌 과거 판례와 대법원이 마련한 양형기준, 그리고 당시 국민의 법감정 등을 고려해 형량이 정해진다.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할 범죄였나 범죄학에서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국가책임론’, ‘사회체계 책임론’, ‘회복적 정의’ 등의 요소를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해당 범죄자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에 국가의 법과 제도의 미비나 문제로 인한 책임의 정도와 이웃 공동체와 문화, 윤리, 교육체계 등 사회화 시스템의 문제가 기여한 정도를 감안해야 하고, 가해자에게 어떤 조처를 내려야 피해자의 피해 회복에 가장 바람직할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 범죄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형벌의 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는 것도 이러한 복잡한 ‘범죄와 정의’의 본질적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각 범죄가 끼친 객관적 해악과 범죄자의 ‘악의’라는 주관적 요소가 같은 잣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법 앞의 평등’ 원칙은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된다. 특히, 범죄자의 지위나 신분, 경제력과 권력의 차이가 범죄 형량에 반영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더 나아가 범죄자의 말이나 행동, 생김새 혹은 인종이나 지역 등의 요소가 형량에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 자체가 ‘차별’이라는 ‘인권침해’로서 그러한 편파적인 판결 자체가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요소를 모두 고려할 때, 1989년 저지른 강도치사죄의 공범으로, 실제로 살인을 하지 않고 그 현장에 함께 있기만 했던, 신창원이 받았던 ‘무기징역’형은 공정했을까? ‘정의’에 부합하는 형량이었을까?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에 문제는 없었을까? 그가 비록 15살부터 절도죄로 소년원을 들락거렸고, 그 뒤에도 절도를 저질러 유죄 판결을 받은 전과자라고 해도, 그가 저지르지 않은 ‘강도치사’ 범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강도 범죄를 모의하고 실행했으며, 범행 이후 자수하지 않고 도주했다가 검거된 죄책만 물으면 된다. 비교 사례로 1997년에 발생한 ‘이태원 살인사건’을 들 수 있다. 2명의 미군 군속(군무원) 자녀가 함께 한 햄버거집 화장실로 피해자를 따라 들어가 그중 한 명이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에서, 검찰은 그 2명 중 1명만을 살인죄로 기소했고, 법원은 “2명 중 1명이 범인인 것은 확실하나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점은 확신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신창원 사건의 경우, 오히려 피해자를 살해한 자는 명확히 밝혀졌고, 신창원은 그 살인행위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과연 그에게 ‘공동정범’(2명 이상이 함께 범죄를 저지를 경우)으로서의 책임을 물어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것이 정의로운 판결이었을까? 또한 신창원이 태어나 자란 과정에 교육과 복지, 소년사법 등의 국가·사회적 기제가 잘못 작동된 책임은 전혀 없을까? 22년6개월이라는 추가 형량 역시, ‘경찰과 국가제도를 우롱하고 장기간 도주 성공한’ 데 대한 ‘괘씸죄’라는, ‘감정’이 작용한 측면은 없을까?
누구나 그저 ‘평생 감옥에 있어 마땅한’ 사람으로 매도한 신창원. ‘진정한 정의’는 그에게 아직 구현되지 않은 것 같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 가장 비난받아 마땅한 자에게 보장되는 권리와 정의가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는 말이 있다. 신창원에게 주어지는 ‘정의’의 수준과 크기는 곧 언제든지 나에게 내려지고 주어지는 ‘정의’의 수준과 크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1967년 대한민국 출생
1997.1.20 부산교도소 감방 화장실 환기통 쇠창살을 절단하고 탈옥 1997.1.23 법무부, 신창원에 현상금 500만원 지급 결정. 1997.4.4 전북 김제에서 택시와 충돌사고 냈으나 훔친 운전면허증으로 체포위기 모면 1997.8.8 서울 강남구 서초동 삼호아파트에서 뉴그랜저 승용차 절취. 1997.9.28 충남 천안시 목천면 삼성리 한영빌라로 은신처 옮김. 1997.10.15 동거녀 전씨, 신창원 소재 제보 1997.10.18 충남 천안 목천면 h빌라에서 원종렬 경장 등과 격투. 가스총 2발 맞고 도주.(1차 대결) 1997.12.20 경기 평택의 장애인수용시설 `요한의 집'과 소년.소녀 가장 2명에게 180만원 기부. 1997.12.30 경기 평택에서 원종렬 경장, 김구현 경장 등과 결투. 가스총맞고 왼쪽 팔목 부러진채 도주. 현상금 1000만원으로 인상
(2차대결) 1998.1.11 충남 천안 목천면 태화산 기슭에서 김병록 경사, 최갑철 경장과 격투후도주. 두 경찰관 정직 3개월. 천사령 경기경찰청장
직위 해제, 김영태 평택경찰서장 등 7명 징계위 회부.(3차대결). 1998.3.6 전북 김제시 금구면 금천저수지에서 경찰 검문 따돌리고 도주. 김제경찰서장 교체. 김제경찰서 수사과장 사표. (4차 대결). 1998.5.18 경북 성주에서 순찰차 따돌리고 도주. 성주경찰서장 교체. 경찰관 2명 전보. 1998.7.16 서울 강남구 포이동 주택가에서 경찰관 총뺏고 귀와 팔 물어뜯은 후 도주. 윤종옥 서울 수서경찰서장 전보
김광식 서울경철청장 경고 (5차 대결). 1998.7.21 현상금 5천만원으로 인상 1999.6.1 충남 천안의 다방 주인 신고로 발각돼 쫓기는 중. 1999.7.16 전남 순천서 검거
총 탈옥일수 907일 (세계1위)
탈옥기간중 공무원 2명 직위해제, 12명감봉, 2명 전보, 2명 정직, 1명 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