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내 맘속에 들어왔던 그는 5개월 만에 나를 떠났다. 내가 좋아지지 않는다고. 미안함만 커지고, 회의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5개월. 누군가에겐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모든 걸 쏟아 부었던 나에게는 길게만 느껴진다.
나는 통칭 철벽녀였다. 누구에게도 맘을 여는 게 쉽지 않았다. 때문에 누가 접근하면 일단 방어태세부터 갖추는 게 일반적이었고, 때문에 타이밍을 놓치고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왠지 처음부터 마음이 열렸다. 꾸밈없는 모습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가 순수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내 속으로 정의를 내려버렸고, 5개월이란 시간동안 그것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믿었다. 바보같이.
나는 마음 표현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늘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고, 많은 사람들을 밀어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던 나였기에,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표현을 해 보려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리고 나는 곰이었다. 밀당 같은 것은 내 사전에 없었다. 내가 표현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표현을 해야 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이런 내가 당연하고 쉽게 여겨졌을까. 우리가 만나는 과정은 순탄하기만 했다. 그의 연락이 없으면 내가 먼저 연락을 했고, 내가 연락을 하면 그는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 다음은 마치 공식 같았다. 소개팅 세 번째 만남에 만나자고 했고, 일주일 뒤에 첫키스를 했다. 그리고 100일 기념으로는 여행을 떠났다.
내가 믿고 싶었던 그의 모습은 이랬다. 고백하는 말을 꺼내기 힘들어 어색한 상태로 한참을 걸었다. 첫키스를 하던 날엔 치맥을 하자고 하더니 어둑하고 사람 없는 곳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 뒤엔 데이트를 하다 사람들이 없는 틈에 키스를 해 주곤 했다. 밥값을 낼 때면, 학생인 내가 돈을 내는 것을 극구 말리고 미안해하는 듯 했고, 내가 서운함을 표현하거나 화가 났을 때는 항상 먼저 미안하다고 해 주었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도 생각날 때마다 연락을 해 주려 노력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연애를 머리로 하고 있다는 걸. 그런데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관심 없는 여자에게 돈과 시간을 쓰지 않는다.’, ‘먼저 미안하다고 해 주는 남자는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좋은 사람이다.’ 이런 말들이 나를 착각 속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 그저 너무나도 착한 사람이었고, 성실하게 ‘남자친구의 의무’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처음 한 달을 넘겼을 때부터, 나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예외가 있다면 내가 정말 화가 났고, 그걸 풀어주고자 했을 때 한 번이었다. 주말이면 만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면서도, 목요일, 금요일이 되도록 내가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만날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연락을 열심히 하려 노력했다. 정말 바쁠 때가 아니면 카톡 답장 속도가 3~40분을 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의 카톡엔 물음표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해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낸 카톡을 읽지 않은 채 본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통보했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내가 건강상의 문제로 죽을 만큼 아플 때에도, 공감해주지 못했다.
사실 처음부터 그는 그랬다. 데이트 할 때 화장실에 가면, 핸드폰을 하느라 한참동안 나오지 않았다. 나와 있는 게 그렇게나 재미가 없었을까. 데이트는 점점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가 하고 싶은 일들로 채워졌다. 할 얘기가 떨어질 때면, 공식처럼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리고 점점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의 삶에 내가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거부했다. 나는 그의 집이 있는 동네에 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내가 단 하나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의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헌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것은 그가 한 경솔한 결정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와 사귀자고 한 것 처럼.
나는 이런 그의 모습을 모두, 그가 바빠서, 힘든 일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조금 서운하게 만든다 해도, 그를 이해하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기했다. 늘 그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친구들을 만난다면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고, 회식이라면 나를 신경 쓰지 않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나는 5개월간 불안에 떨었다. 내가 보고 싶은 좋은 모습들만 보면서. 애써 믿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나보다 덜 좋아해서 그래. 아직 준비가 안 되어서 표현을 못 하는 걸 거야. 자존심 따위 내려놓고 조심스레 그의 마음 알아보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좋아한다는 말, 그 흔한 말 한 마디를 끝까지 해 주지 않았다.
그를 만나서 내가 기쁜 것이 있다면, 처음으로 나를 내어 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나의 맘을 내어 준 적 없던 나는, 버릇처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경솔하게도.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사랑받는 게 최고야. 라고 말했다. 이제 알았다. 나도 사랑받을 자격 있는 사람이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해주는 이에게 고마워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다. 결혼에 뜻이 없었고, 일찍이 엄마와도 33살 이후에 가기로 합의 보았던 나다. 하지만 온 힘을 다해 좋아했더니, 결혼하면 좋은 점들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래. 이제 내 삶에 결혼도 하나의 옵션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를 만난 것으로 내가 화가 나는 것은, 내가 5개월을 만나도 좋아지지 않을 만큼 매력 없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그를 만나는 동안에도 나 좋다는 사람은 있었다. 이것이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자기위안이라고 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무슨 소용인가. 내가 바라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마음이 없음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었음에도, 바보같이 내 모든 것을 내어 줄 때까지 작동하지 않은 나의 방어 기제에 화가 난다. 쓸데없는 데서는 그렇게도 작동을 잘 하더니. 정작 나를 보호해야 할 순간에는 왜 작동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슬프다. 너무 슬프다. ‘총 맞은 것처럼’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고, 정말 물리적으로 가슴이 아프다. 그동안 가슴이 아프다는 건 그냥 비유적인 말인 줄 알았는데. 가슴이 뻥 뚫린 것 같다는 말이 정말이구나 싶다.
이 글을 그동안 처절한 바보였던 나에게 바치고, 이제 그를 만나기 전의 나로 돌아가려 한다.
그를 만나기 전에, 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두고, 나만 생각하던 나로.
‘연애보단 내 삶이 중요하고, 내 커리어가 중요해. 내 커리어에 걸림돌이 된다면 결혼도 육아도 포기할 수 있어’ 라고 말하던 나로.
누구보다 자존심 센 나로.
근데 며칠이 지나야 이 눈물이 멈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