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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의 역사

hanolduol |2006.11.15 15:05
조회 74 |추천 0

이용의 역사

(고대에서 근대까지)

인간은 상고시대부터 생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렵을 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head 및 신체적 부상이나 질병 등의 치료법으로서 두발을 잘랐다. 이것이 이용의 계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1895년 11월 15일(고종 32년) 고종 황제 때 단발령(斷髮令)이 효시였다. 단발령을 내려 종내 상투를 하던 풍습을 없애려고 정부에서 체두관(剃頭官)을 방방곡곡으로 보내어 강제적으로 머리 상투를 잘랐다. 당시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 유길준정병하, 안정호 옹 등이 직접 가위를 들고 상감과 세자의 두발을 자른 다음, 각료 대신들도 이에 따랐다. 최초의 이용사인 안종호 옹은 18세에 전라도 완주군수를 역임했고 세자와 귀족을 가르치는 대강원의 정삼품독(正三品讀)의 강사로서 개화사상의 신문화 운동에 앞장서서 방역회(防疫會)를 조직 세종로태평로 어구에 최초의 이용원을 경영하였다.

서양의 이용은 B. C 1900년경 헤브라이(Hebrew)족이 죄인을 처벌할 때 두발을 삭발하는 것이 이용의 시초라 하며 전쟁이 일어나면서 치료의 목적과 두발 자르기, 수염 다듬기 등으로 외과의에서 분리 하나의 의학분야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이 삶을 통해 다재 다능함과 완벽함을 성취하기 위해 개개인이 자치적인 노력을 계속해 왔다. 개개인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인식은 미적 개념에 더욱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성의 아름다움'이라는 미용서적을 지은 수도사인 그는 '아그놀르 피렌쯔오'라는 책자에 전형적인 여성상은 넓은 어깨, 길고 둥근 목, 풍만한 가슴을 남성은 적당한 목의 이마와 큼지막한 눈, 둥근 눈썹을 선호, 짧은 머리 스타일(빗질을 하여 all back으로 넘기기도 하였다), 과장되고 화려한 의복과는 대조적으로 hair style은 눈에 띄지 않게 수수하게 꾸몄다.

15C 이발사들은 massage도 병행하게 되었다. 외과의사가 면도나 머리카락을 자르며, 샴푸와 고객의 목욕까지 영역을 넓혀 시술했다. 고객의 hair를 손질하거나 수술을 하게될 때는 항상 젖은 의자 위에서 hair를 자른 후엔 목욕을 반드시 시켰다. 이발사들에게도 가발 만드는 일과 사소한 수술은 하도록 허락했지만 일을 하기 전에 견습공이 목욕을 하지 않고 일을 한다면 이발사들은 머리를 하게끔 허용하지 않아 청결을 중시했다. 또한 자신들이 격식을 차리고 외과의사들보다 존경받기 위하여 노력했다. 이때부터 공중목욕탕에서 이발인과 견습공은 머리카락을 손질해 주었으며 이후에도 머리카락과 턱수염을 손질하는 것은 목욕탕에서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shop을 경영하고 있는 이발사는 shop뿐만 아니라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출장일을 했으며 이발이나 의료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과도하게 술을 마시거나 지나치게 시끄럽기도 하여 다른 이들에게 존경받지 못했다. 이와 같이 비록 이발사가 세간의 흥미거리로 멸시받았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다.

기술을 개선하기 위해 세인트 코스마스 협회에 의해 1250년 이발사를 위한 학교가 설립되었다. 규칙에 따라 이발사는 4년간의 수련과정을 거쳤다. 이발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작업도구는 면도칼, 숫돌(가위를 연마시키기 위한), 가위, 세면통이었고 직업의 표시로서 현재와 같은 사인볼을 shop 밖에 걸어두었다. 한 도시에서 이발에 종사하는 총인원은 무척 많았다. 예를 들면 프랑스 파리에서만 해도 1292년에 151명의 이발사가 있었다. 이발사 길드(조합)의 후원자는 세인트코스마스를 비롯해서 세인트 데미안, 영국침례교도 세인트 죤 까지도 포함되었다. 길드에서는 노동금지령을 정하여 일요일과 축제일에는 이발사들도 휴식을 시행하였다.

(1) 고대이집트

면도칼, 금, 동, 구리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발을 자르거나 숱을 치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2) B·C 5C 그리스

그리스에서 이발사와 미용사들의 업무는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미용사를 포함한 다수의 이발사들은 그들의 고객을 의자에 앉혀놓고 Cut를 하기 위해 고객의 목둘레를 천으로 덮고 두 손가락으로 큰가위를 쥐고 머리카락에 층이 나도록 잘랐다. 특히 아테네 사람들이 시칠리아섬의 원정에 실패했을 때도 이발사들이 퍼뜨린 소문에 의했다. 이는 왕이 면도를 하던 중 이발사에게 스스럼없이 얘기를 하다가 그 비밀이 누설되었던 것이다. 또 이발사들은 hair style뿐만 아니라 발톱 손톱을 깎아주고 수염을 다듬고 가발이나 헤어피스의 제작 활동뿐만 아니라 부역으로서 곡물을 나르기도 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핀셋이나, 거울, 연고, 천, 집게 등을 그들 스스로가 제작하였으며 그리스의 작업장에서 최초로 고안된 것으로 알려진 거울은 2C부터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3) 비잔틴시대

로마시대의 이발사는 B·C 30년 로마시대부터 이발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발소는 최신의 정보나 친구를 만나고 사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이용되어지기도 했다. 이발사들은 최신의 정보를 단골고객들에게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의 흥미거리나 가십거리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이발소에서의 시설물은 고객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어깨망토(cape), 벽에 매달린 커다란 거울 등이 비품의 전부였으며 그 외에 회전기구와 빗·수건·연고·가위를 가는 숫돌을 갖추고 있었다. 훈련받은 몇몇의 견습생들은 경험을 쌓은 후 부유층의 전용 이발사로 보내졌다.

(4) A·D 7세기

가발과 헤어 피스 등이 유행하였다. 두피의 탈모현상을 방지하고 유지하기 위해 다양하고 세부적인 치료법들이 연구되었다. 대머리(baldness)를 치료하기 위해 무우나 양배추, 양파, 사탕무 등의 즙을 짜서 두피에 문지르거나, 견과(호두·개암·밤)의 액, 양생장미, 곰의 기름, 쐐기풀의 씨앗을 혼합해 반죽한 연고를 두피에 바르기도 했다. 한편 탈모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송진을 이용한 연고와 제비갈매기의 등우리에서 뽑아낸 할리코니아 등을 사용했다.

(5) 중세시대

고위층 기독교인, 주교수도 원장은 일반적으로 법률에 의해 주로 짧은 머리 스타일(short style)을 하였고, 교회의 통치에 복종하는 의미로서 삭발이 시행되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매일 머리와 턱수염을 자르는 일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시작되는 절차로서 반복되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fine hair)과 대머리(baldness)는 중세에서는 대단한 불행으로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머리카락을 자라나게 하거나 좋아지게 되는 비상한 방법들이 많이 연구되어졌으며, 대체 물질로서 야채 추출물인 쐐기풀이나 우엉이 많이 사용되었고 동물추출물로서는 거머리를 구워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개어 1/3정도 줄어들 때까지 끓여 농축시킨 액으로 머리카락이 자라나길 원하는 부분에 발랐으며, 두더지. 벌. 산토끼의 머리를 곰기름이나 식초를 섞어 발효시켜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머리숱이 너무 많은 것에 대한 처방도 있었다고 한다.

머리 속의 이를 없애기 위해서도 한 몫을 한 빗은 화장대의 여러 도구 중 매우 중요했으며 헤어 브러시 또한 이때 만들어졌으며 재질로서는 주로 멧돼지 털이나 고슴도치 털로 만들어 졌다. brush는 중년후반의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사용되어 졌다.

중세시대의 외과의사(이 시대엔 이발사가 수술도 가능)와 이발사는 두 개의 길드 조합에 속해 있었고 요금 이외에도 계속적인 경쟁에 의해 서로의 영업영역을 침범하곤 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외과의사와 이발사는 불성실한 직업을 가진 교수형 집행자나 배우, 세금징수원 등과 같이 간주되었다. 아마도 외과의사들이 사형집행전 사형수의 경부 부분인 목을 면도해 주었다는 사실 등으로서 신체를 다루는 직업으로 간주돼 멸시 당한 결과를 낳은 지도 모른다.

1545년 "총상과 그 치료법"의 저자 안드레아스 페레는 이 저서로 인해 파리의 이용사 대표겸 외과의사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6) 근대

1630년경 남자들의 머리는 여성들처럼 귀밑에 curl을 하고 프랑스권의 나라에선 앞머리를 부풀리는 것이 유행했다.

1637년 12월 이발사와 가발 제조자의 길드(협동조합)가 파리에서 결성되었으며 가발의 수요가 지속적으로 증가(짐승 가죽에 인모인 머리카락을 사용하여 바느질했으나 그후엔 부드러운 아마포를 사용)했다. 루이 13세가 가발을 사용하고부터는 가발 자체가 장식품이 아닌 왕조의 권위를 갖춘 hair style 자체로서 일반인과 차별화 시킬 수 있는 고귀한 사치품이 되었다.

파리 최초의 헤어 드레서인 상파뉴는 파리 궁전에서 이름을 떨쳤다.

1804년 쟝 바버(Jeang Barber)가 외과와 이용원을 완전 분리시킴으로서 현재도 이용원은 그의 이름을 붙여 바버숍(Barber shop)으로 사용되고 있다.

1871년 가구 제작소인 바리캉마르(Bariqunn Mar) 회사가 바리캉(Bariquant)을 발명해 hair cut을 위한 수동식 도구로서 사용되었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전자식 바리캉인 클리퍼(Clipper)가 개발되어 사용되고 있다.

청·홍·백색의 샤인 보드(sing board)는 이 당시 병원을 표시하였던 상징적 간판으로서 정맥과 동맥 그리고 흰 붕대의 의미로서 이용문화는 점차 발달되어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1872년 아시아권의 일본은 귀족 목촌중랑(木村重郞)이 서구문명을 받아 들여, 이용기술을 연구, 일본 정부의 삭발령 선포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상투머리와 비슷한 "쫑마게"를 자른 short hair style을 만들었다.

1872년 독일의 Todtnau에서 태어난 Karl Ludwig Nessler에 의해 최초의 전기 히터(electrical heater) 파마를 창안시켰다. Nessler는 처음에는 그의 지방 마을에서 한 이발사의 도제(徒弟)로 있었다. 그러다가 스위스로 옮겨온 후에 이발업을 시작했고, 그의 이름을 영국식 이름인 Charles Nestle로 바꾼 후, permanent wave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였으며 다양한 기구를 가지고 모발에 대한 시험을 시작했다. 1901년 Nestle는 런던 레스터 광장의 beauty salon에서 일했지만 고객에게 marcel wave 대신 perm으로서 영구한 wave를 시도하려했던 것이 발각되어 해고를 당한 후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1902년 Nestle는 Great Castle가에다 자신의 London 미용실을 개업 거대한 전기히터 기계을 이용한 perm을 시도했다.

(7) 현대

Han Kel은 1937년에 견습생들에게 Marcel wave의 기술로서 2가지의 원인을 제공했다. marcel wave의 테크닉은 미용사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기능이 되었으며, 아름다운 wave를 형성시키기 위해서는 head에 대한 구조를 익히게 할뿐만 아니라, hair를 어떻게 조절할 것인가 즉 head면에 대한 굴곡인 두상의 형태를 이용 머리카락의 길이로서 volume up or down 시키므로서 head line을 보완시키는 고도의 테크닉인 미학적 관념으로서의 작업인 marcel wave를 만들기 위해 꾸준하고 끈기 있는 완성된 연습시간의 필요에 따른 표현되는 미 자체가 예술(art)인 것을 처음으로 표출시켰다. 시술시에 따르는 많은 주의(hair 분배와 wave의 균형 등)와 정확성의 결과를 요구하는 즉 hair style을 만들기 위한 美的인 시각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으며 미용에서 'art'란 단어의 사용 시작은 물론 marcel wave가 여성들을 위한 beauty hair dresser(미용사)와 barber hair dresser(이발사)를 구별하기 위한 기술중의 하나로서 분류시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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