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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어느날

20170515 |2017.05.15 00:41
조회 185 |추천 1


스무살의 어느날.
컴퓨터를 켜고 두 손 모아 수험번호와 주민번호를 키보드에 쳐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합격자 발표에 “합격”이라고 떳네요. 순간 두 눈을 의심하게 되었고, 다시 보고 또 다시 보고
아 정말로 합격 했구나 소식을 보고 엄마한테 전화했죠.
엄마! 나 합격했어.
엄마도 어리둥절 하신지 축하해! 한마디 하고 전화를 끊으셨어요.

그리고 얼마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합격을 축하합니다.
오리엔테이션 참석 여부를 묻더군요. 당연히 참석한다고 하였죠.
오티 전날의 오후 좀처럼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엄마가 외출하고
오시더니 낮에 조금 취해서 집을 오신 거예요.
엄마가 5만원을 쥐어 주시면서 오티 가서 맛있는거 사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대학 오티 처음 가보니깐 당연히 저도 돈이 좀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기까진 좋았어요.
근데 엄마가 갑자기 엉엉 우시는 거예요.
20년 살면서 처음본거 같아요. 그렇게 서럽게 소리내 우시던 엄마의 모습.
지금도 그날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 나네요.
이유를 물어볼 수 없었어요. 처음이기도 했고, 저도 너무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이 나질 않았으니까요.
대학 오티 3박4일 동안 100원도 돈 쓸 일이 없더군요.
오티를 다녀와서 엄마한테 다시 5만원 드렸어요.
그날의 엄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돈을 다시 드렸던거 같아요.

그리곤 엄마에게 조심스레 물었어요. “엄마 그날 왜 운거야?” 그제서야 조심스레 말을 꺼내 더라구요. 집에 지금 돈이 없어서 너 반지 팔았어! 그러시는 거에요.
순간 당황했어요. 제가 너무나 좋아 했던 반지 거든요. 사실 비싼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내 차고 다녔어요. 반지쯤이야 다시 살 수 있지만 엄마의 그 우는 모습은 다신 보고 싶지 않네요. 엄마 미안한데 뭐 하나 물어봐두 돼? 우리집 그렇게 돈이 없어? 심각 한 수준으로 채무가 늘어 난거에요. 몰랐어요 전혀.
중·고등학교 시절 기숙사 생활 하느라 집안 사정을 전혀 몰랐고, 집에 오는 주말에는 엄마가 전혀 티도 안내시고 기숙사로 가는 월요일이면 꼬박꼬박 용돈을 주셨거든요.
그래서 오티를 다녀온 그날.
대학을 포기하고 일 해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렵게 마음을 먹고 엄마한테 엄마 나 대학안가고 일해서 돈 벌어 올게.
말했더니 엄마가 또 우시는 거예요.
공부도 때가 있다며 대학을 꼭 가라고 하더군요.
어떻게 또 엄마가 빚을 내서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오셨어요.
남들만큼 열심히 대학생활을 했어요. 공부도 하고, 선배·동기랑 잘 어울려 다니고, 장학금 받으려 노력했어요.
물론 장학금을 받은 학기도 있고, 못 받은 학기도 있고 못 받은 학기에는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학비를 충당했죠. 용돈은 엄마가 일용직 일을 다니셔서 하루에 35,000~40,000원 정도 받아 오셨어요. 엄마가 누나랑 저를 이틀에 만원씩 줬어요.
당시에 누나도 대학생. 누나는 4년 중에 1학기인가 2학기인가 빼고 전장학금 받았던거로 기억해요. 이틀에 만원이면 집에서 학교 가는데 왕복 차비가 5천원이 였어요 이틀이면 만원 용돈이 끝 이였죠. 용돈 투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럼 밥은 어떻게 해결 했냐구요? 선배님들이 점심 저녁 다 사줬어요. 사주신 이유가 제가 선배님들 보면 인사를 좀 잘했어요. 인사 잘하는 후배로 통했죠.
그래서 선배님들 식사하로 갈 때마다 데리구 다니셨어요. 행운아였죠.

여름 겨울 방학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일만했어요. 생활비 보태고 싶어서...
엄마는 일용직 일을 일주일에 3~4일 정도 나가시고 한 달에 100만원 정도 벌이를 하셨던 거 같아요. 엄마 누나, 저 이렇게 세 가족 500에 35월세에 살았어요.
자취해본 분들은 알거에요. 세 가족이 보증금500에 35월세에 살 수 있는지(매우불편).
누나는 여자라 방을 줬고, 저는 엄마와 마루에서 함께 잠을 자곤 했어요.
성인인데 남들이 보면 불편할거라 생각 들겠지만 물론 남들에겐 말해 본적도 없고, 불평 불만 해본적은 단 한번도 없던 것 같아요.

후에 누나가 졸업하고 취업을 해서 엄마가 일용직 나가는 횟수가 줄어들고 다행이다 싶었죠.
엄마한테 일용직 그만 다니시라고 설득 했어요.

다행히도 일용직 근로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더군요.
절차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당시에 필요했던 서류중 하나가 일용직 다니던 관련 회사에 입사 문의를 했다는 증명서가 필요 하더군요. 회사 관계자들이 증명서 작성해 줄리 없고, 대신에 명함을 받아오라고 했던 것 같아요.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께 모르는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사정이 이러니 명함 하나 주세요.
하면 과연 누가 줄까요? 그렇게 엄마는 저한테 말도 못하고 출 퇴근 시간에 누구네 회사인지도 모르는 곳에 찾아가 명함을 받아 오려 했죠. 당연히 못 받아 오셨어요.
그렇게 며칠을 헤매이다
어느 날 명함을 구해 오셨더군요.
어렵게 받아 오신거 같아요.
그 며칠은 아마 일용직 일하는 것 보다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게 엄마는 몇 달 동안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통이 왔어요 낮에 누나에게...
누나는 평소 전화를 잘 안 해요 저한테...
엄마한테는 정말 친구 같은 누나고 저한테는 엄마 같은 누난데.
뭐지? 왜 낮에 전화했지? 전화를 받았는데 엄마가 쓰러지셨다는 거예요.
고대병원 중환자실이니 빨리 오라는 거예요.
근데... 제가 그날 하필 그날 너무 중요한 일 때문에 전화를 받고 약3시간 후에 출발하게 된 거예요. 3시간동안 계속해서 누나가 전화가 오는 거예요 언제 오냐고 빨리 와야 한다고.
그리고 도착 했어요 그날은 면회가 끝나서 면회가 안 된다고 하더군요.

담당 의사선생님과 상담을 했는데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거예요. 엄마가 조금만 늦었으면 집에서 일 치뤘을 거란 말에 심장이 내려 쾅하고 돌로 찍는거 같더라구요.
다음날 면회시간에 엄마의 얼굴을 보는데 평소에 집에서 보던 엄마의 얼굴이 아닌 거예요.
소리 내 울고 싶었지만 중환자실의 다른 환자들 때문에 입 막고 펑펑 울었어요.
물론 지금은 엄마는 한 달에 한번 병원 가서 검사를 받고 평생 심장 약을 먹어야 하지만
건강한 것 같아요. 다행이죠.
그때 생각했어요. 모든 행복에 1번은 가족이구나.

이기적인 저는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고,
어느덧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이런 저런 사건 사고가 많았어요.
물론 누구나 사연이 있고, 그 사연속엔 분명 행복과 시련이 있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저는 앞으로도 행복과 시련을 겪게 되겠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또 내 행복을 위해 더 열심히 살아 보려구요.

어쩌면 제가 가정사를 밝히는 일이 누군가의 시선엔 눈살 찌뿌릴 수 있고, 편견을 갖고 저를 볼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일들이 20대때는 저에게 약점인줄만 알았는데, 30대가 되어보니 가정사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떳떳하지 못할 이유도 없고, 창피할 일도 아닌거 같더라구요.

시대가 말하는 흙수저, 금수저로 평가하자면 저는 금수저는 분명 아닐테지요.
매일 도전하고 매일 꿈꿀 겁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리고 저의 미래는 매일 제가 그리고 있답니다.

그러니 한 말씀만 하자면.

여러분 자신의 환경 때문에 혹시나 포기해야 할 일이 생길 때 그때 그 시간만 잠시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니 였다는 걸 분명 알 수 있어요. 20대 되어보니 중·고등학교 때는 아무 것도 아니 였잖아요?
때론 아무 일도 안하고 며칠씩 무기력해도 돼요. 슬픔에 빠져도 돼구요. 슬럼프에 빠져도 돼요. 우리는 다 할 수 있어요. 물질은 수단이지 우리의 가치를 바꿔 놓을 수 없어요.
그러니 우리 조금 지쳐도.
꽃길만 걷기로 해요^^

-서른이 넘은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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