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갈피

무용가 최승희 에 관하여

내가 생각할때에 이사람이 천재적이었다는건


세계각지에 공연할때마다 의상이 조금씩 달랐다는 것
기존의것들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재창조작업들


등등




출처 나무위키


최승희

최근 수정 시각: 2017-11-16 22:30:45

  이 문서는 무용가 최승희에 대해 다룹니다. 드라마 아이리스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최승희(아이리스)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崔承喜
1911년 11월 24일 ~ 1969년 8월 8일

"그런데 그게 벌써 시각적으로 우릴 사로잡는 거죠. 그러더니 조명이 싹 귀퉁이로 산같이 동그랗게 비춰요. 모두가 다 보죠. 거기에 음악이 탁 나와요. ”봄이 왔네, 봄이 와.“ (멜로디로) ”봄이 왔네. 봄이 와.“ 거기에 맞춰서 최승희가 초립동이 춤추죠. 빨간 옷 싸악. 첫 눈에 반해버려요.


최승희는 그 눈이 그렇게 아름다워. 일본 사람들의 소설을 보면 여자의 아름다운 눈을 가리켜 ‘흑요석 같은’ 그러거든. 요석이란 게 반짝반짝 빛나는 진짜 흑요석. 반짝반짝반짝. 약을 친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몸매가 날씬한 게 보통 우리 한국 여성들보다 목이 하나 더 있었어요. 최승희가 170이고, 그리고 보통 사람은 160 안팎에서 160만 되도 괜찮았다고. 미스코리아도 165도 나왔으니까. 지금이야 175 돼야만 되지만은. 뭐 아무튼 그런데, 그렇게 우리는 키 큰 여자는 별로 안 쳤거든요. 자고로 여자는 품 안에 들어야지 키가 크면 재수 없다, 팔자가 쎄다 그래서 큰 사람은 굉장히 쇼크를 먹었는데 그 쇼크를 먹을 만한 최승희가 무대에 나와서 하는데 이건 뭐 미의 극치에요. 그러니까 하나 끝났는데 징 하고 들어가고 박수를 쳤지요.

그래 나는 이게 처음 무대면 요만큼 앉아 있다가 나중엔 끌려서 맨 앞에 무대, 무대가 이러고 나는 구경하는 거예요. 그러면 최승희가 춤추다가 내 눈하고 맞잖아요. 그런 그 최승희, 지금 생각하니까 객석에 있는 어떤 사람들을 지적해 그 사람하고 눈을 맞추는 거예요. 이것은 배우술에도 필요하다고. 그러면 객석에 있는 사람이 아, 저 배우가 나를 보고 있다 할 때, 부끄러 외면하는데 눈이 마주치면 같이 교류, 교차된다고 그랬었더라고요. 그래 나도 나를 보고 이렇게 웃으면 나도 웃는 거죠. 그런 일이 있더라고요. 야, 춤이라는 게 저렇게 좋은 것일까. 그러고는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 진짜 잠을 못 잘 정도로..."


-출처: 차범석 구술, 김성희 채록, 『2004년도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48: 차범석』, 한국문화예술위원회-[1]

"그 때 나는 불상적인 아름다움에 완전히 끌려 들어갔다. 최승희 최후의 리사이틀이 제국극장에 있었을 때에 최승희의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와서 보니까 반나체 불상춤 사진이 있었다. 몸에 보석이 장식된 반나체 사진을 보고 어쩐지 에로틱하게 생각되었다. 그때에는 스트립쇼와 같은 것이 없었으므로 최승희의 이러한 반나체춤은 전쟁 중에 허가된 최후의 반 스트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의 반나체 불상춤은 지금의 전 나체의 스트리퍼보다 훨씬 더 에로틱한 자태를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최승희의 몸에서 무엇인가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불상춤의 환상은 그 얼굴이 불상과 비슷해서 어디엔가 불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더 요염한 맛을 낸 것이 아닌가 본다."


미시마 유키오[2]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외세의 외풍의 탐류 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취하고 민족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보대감이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를 때였다. 바로 이 시대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무용을 현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춤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 등을 하나하나 찾아 내며 현대 조선민족무용 발전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장 무대에 성악작품, 기악작품, 학술작품이 오르는 예는 있어도 무용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작품들을 창작해 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일성의 회고록 불쏘시개 <세기와 더불어[3]


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북한

2.2.1. 월북

2.2.1.1. 안막

2.2.2. 승승장구

2.2.2.1. 최승희 무용연구소

2.2.3. 숙청2.2.4. 복권

3. 안성희4. 미디어에서의 최승희5. 그 밖의 이야기6. 참고서적


1. 개요[편집]

북한의 무용가, 안무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생애[편집]

2.1. 일제강점기[편집]

최승희의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당시 윗대가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가로, 아버지 최준현은 고종 즉위 시절 진사에 합격하여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름이 성녀, 또는 용경이라고 전해지는데 아버지에게 첩이 한 사람 있었으니 전주 이씨인 이재원 이었다. 최승희의 위로는 큰 오빠인 승일, 작은 오빠인 승오, 언니인 영희가 있었고, 최영희를 뺀 최승일, 최승오, 최승희 모두 후에 월북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단 최승오는 월북할 때 자식들을 남겨두고 가서 현재 남한에도 최승희의 혈육들이 생존해 있다.

최준현은 아들들이 월북하는 바람에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최승희의 남편 안막의 양부인 안창선의 집 문간채에서 더부살이를 하다가 한국전쟁 도중 사망하였는데, 굉장히 안습하게도 그의 자식들은 모두 부친인 그의 사망 사실을 몰랐고, 그의 장례는 그의 조카이자 최승희의 육촌 동생인 최병창이 혼자 치뤘고, 그의 시신도 최병창이 화장을 하여 산에 뿌렸다고 한다. 

아버지 최준현은 한학자로, 집에 한문서당을 설치하여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봉건시대의 전형적인 선비였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여, 자식들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했다. 그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보통과와 숙명고등여학교[4]를 졸업했다. 학업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으며, 소학교 시절에는 내내 전교 1등을 하다 2번이나 월반을 해 같이 입학한 동기들보다 2년 일찍 졸업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승희가 숙명여학교를 다닐 때 가세가 기울어, 최승희는 장학금을 받아가며 겨우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하루 끼니를 걱정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큰오빠인 최승일이 경성방송국 연예부에 취직하여 아나운서 노릇도 하고, 연극 대본을 쓰고 연출을 하며 나름대로 적은 돈이나마 봉급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냥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어렸을 때 어려운 생활의 트라우마 때문인지는 몰라도,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최승희는 금전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구두쇠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매우 인색해졌으며, 이로 인해 형제들 사이에서도 돈 문제로 의가 상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또한 최승희는 지나칠 정도로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남편 안막이나 주변인들은 최승희에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자제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하였으나 그 습성은 절대로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월북 후에도 그 습성은 고쳐지지 않아 최승희의 호화 사치 행각은 계속 되었고, 결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교사들은 최승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최승희에게 동경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으나,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입학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최승희는 교사로 취직하여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의 입학 시험을 봤다. 100명 모집에 860명이 응시한 이 시험에서 7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입학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승희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낙심했지만, 결국 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시작하며 이시이 바쿠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 조선에선 최승희의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최승희가 일본인에게 300엔에 팔려 일본으로 기생이 되러 갔다는 헛소문이 났다. 숙명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러한 헛소문에 분개하여, 학교의 이름을 더럽힌 최승희의 졸업장을 박탈하고 최승희를 동창회에서 제명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의 이런 헛소문과는 별개로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은 점점 망해가고 있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이시이 바쿠는 시력이 점점 안 좋아지고 심지어 이시이 바쿠가 곧 실명한다는 말 까지 나올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다. 최승희는 제발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간절한 부탁을 야멸차게 거절하고, 병든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세간 사람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호기롭게 스승의 밑에서 독립하여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개설하며, 드디어 독립을 하였으나, 당시 조선에서 무용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현시창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구속되고, 또한 임신&출산 후 후유증으로 급성늑막염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 이후 안막의 수완으로 인해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운형, 마해송[5], 가와바타 야스나리[6] 등 지금 봐도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하였다.

최승희는 지방의 춤꾼들을 따라 다니며 전통춤을 배우기도 했다. 심지어는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 다니면서 까지 전통춤을 배울 정도의 열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통무용과 현대무용의 용합을 시도해 신무용의 창시자가 되었고, 오늘날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무용계에 끼친 그 영향이 매우 지대하다. 사실 한국고 해도 절대로 과언이 아니다. 

리릭 포엠 中


또한 1930년대 후반부터는 미국과 유럽, 남미 등으로 세계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는데,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 할 정도였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최승희와 굉장히 친밀했었고,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 시켜주며 최승희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는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최승희의 헐리우드 진출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아울러 최승희는 이러한 인기와 함께,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걸, 패션스타로서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고, 심지어는 음반도 여러 장 내게 된다.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의 자작곡이며, <이태리의 정원>은 <A Garden In Italy>의 번안곡이다. 아마도 번안이 아니라 무단 도용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으니.

최승희는 음악에도 나름 조예가 있었는데, 특히 리듬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뛰어났다고 한다. 춤을 추던 도중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어쩌다가 실수를 하면은 추던 춤을 멈추고 연주자에게 어떤 부분에서 틀렸다고 바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도의 무희>를 포함하여 영화에도 여러 편 출연하였는데, 이 중 무용 영화 <반도의 무희>는 최승희가 주연을 하였지만, 일본에서 제작되고, 일본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하고, 일본인 배우들이 출연한 일본 영화다. 내용은 최승희의 자전적인 성공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데, 주인공인 백성희가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애인을 찾아 상경했다가 굉장한 무영가의 눈에 띄어 뛰어난 무용가로 성장했지만 스승의 죽음을 모른 채 화려한 무대에 선다는, 그런 내용이다. 최승희의 딸 안성희의 원래 본명은 안승자 였지만, 광복 후에 안성희로 개명하였는데, 성희라는 이름은 이 영화의 여주인공 백성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이 영화는 평가부터 하자면 극영화로는 완벽한 실패작이었다.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 실린 혹평을 보면 당시의 반응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나리오 자체가 충분히 연구되지 않았고, 돌연히 은사의 죽음이 설정된 이유도 불분명하다. 그 밖의 스토리 전개 또한 매끄럽지 못하다. 그리고 조선 로케가 무엇 때문에 필요 했는지 알 수가 없고, 무대가 동경으로 바뀌었다 해도 동경과 같은 느낌이 나지 않는다. 또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센다가 무엇 때문에 출연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최승희의 무용"


-아사히 신문 1936년 3월 21일자 기사


또한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의 친구이자 화가인 안석주는 <반도의 무희>에 다음과 같은 평을 하였다.

나는 그녀가 주연한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를 보았다. 나는 이 영화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 나온 그를 정말 최승희로는 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기가 싫었다.

그러나 그 영화 중에서 홀로 무용 선생에게 훈련과도 같은 기본 연습을 맹렬히 할 때의 그 모습은 틀림없이 최승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영화배우로서는 마땅치 않음을 어서 빨리 깨닫고 무용가로서만 지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승희를 거의 친동생처럼 생각했을 정도로 아꼈고, 최승희와 친했다는 사람마저 이런 저주에 가까운 극언을 할 정도면, <반도의 무희>라는 영화는 정말 상상 이상의 개판이자 망작이었고, 그 영화에서 최승희의 연기가 정말 눈뜨고 봐주기 힘들 수준이었을 거라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자체는 그럴싸하게 나왔던 모양인지라 최승희의 인기 덕분에 무려 4년이나 장기 상영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고, 영화사도 돈을 많이 벌었으며, 이 영화의 감독과 최승희도 그 동안 내내 영화사에게 월급을 받았다고 한다. 



1937년작 <옥적(玉笛)의 곡(曲)> 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이 이뤄낸 미적, 예술적 성과에 대해서는 링크를 참조하자.

그러나 최승희는 본인이 가진 실력과 그 명성에 비해 한 개인으로의 인간성은 일제강점기 당시나 북한에서나 많이 까이던 편이었으며 매우 독선적인 성격이었다. 대표적인 일화들은 이러하다. 세계순회공연에 제자를 제외시키고 일본에 혼자 남겨 놓아 자신의 딸 안성희를 돌보게 하였고, 제자가 이에 불만을 품자 무용단에서 쫓아내 버렸다고. 또 평소에 제자들을 하녀 부리듯이 마구 부려먹었다고 하며, 심지어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 인터뷰에서는 "팬레터를 받으면 대충 보고 그냥 던져 버린다."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말한 일, 면담을 요청하는 수많은 제의들을 "조선 땅에서 나를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 라며 차갑게 거절한 일, 심지어는 당시 공연 관람 예절에 익숙하지 않았던 조선인 관객들이 공연 관람 도중 소리를 낸다고 추던 춤을 중단하고 관객들에게 조용하라고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낸 일 등이 있다. 그리고 공옥진과의 일화는 해당 문서를 참조하면 되겠다.

사실 여기까지의 행보로만 보자면 한국 무용의 레전드로써 충분히 존경받을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러나 1940년대 들어서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하고 국방헌금도 여러 번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펼쳤으며, 그래서 광복 이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여러모로 압박을 받고 욕을 많이 먹었으며 먼 훗날인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 

쉴드를 치는 쪽에서는 이러한 친일 행보가 최승희 본인의 자발적인 행보가 아닌 일제에 의한 강요된 행보, 혹은 친일행보는 페이크였고, 실제로는 뒤에서 몰래 민족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들은 주로 최승희와 가까웠던 관계거나 혹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하고 있고, 그 사실 관계가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 아니니 알아서 걸러 듣는게 좋다. 

기자 출신으로 최승희와 친하게 지냈고, 최승희의 평전을 쓰기도 했던 다카시마 유사부로는 최승희의 친일 공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최승희는 일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황군 위문을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센티멘탈하지 않았다. 그 본심은 일본군을 위문하여 재일조선인 뿐만 아니라 조선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대접받고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그 여자는 일본군 위문을 갔지만 군이 기대한 것과 같은 전의양양을 위한 무용 같은 것은 일체 추지 않았다. 만몽의 광야에 지쳐빠진 군인들에게 상냥스러운 <견우직녀의 칠월칠석>을 춤추어 보였다. 멀리 떨어진 고향의 어릴 때의 평화로웠던 시대의 칠석놀이를 생각하며 일본병들은 모두 울었다."


그리고 1940년대 당시 최승희의 공연에서 반주를 맡았던 지영희는 "최승희가 일본군의 돈을 받고 춤을 추었지만, 그 돈을 연안독립동맹에 보냈다."고 증언했고, 최승희의 육촌 동생 최병창도 자신이 최승희로부터 연안독립동맹에 돈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고 증언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증언일 뿐 확실하게 그 사실 관계가 입증되지 않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증언은 최승희와 가까웠던 지인들이나 혈육들에게만 나온 증언이고, 이 증언의 사실 관계가 정확하게 입증 되려면 돈을 받았다는 쪽, 그러니까 그 연안독립동맹의 관계된 사람들이 직접 이런 증언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쪽에서는 이런 증언이 없다. 반면 애국헌급 납부, 일본군 위문 등의 최승희의 친일 활동은 일단 엄연히 여러 기록이 남아 있는지라..... 

최승희의 명성과 재능을 아꼈던 사람들, 혹은 최승희와 가까웠거나 친했던 사람들이나 제자 등 주변인들은 최승희의 친일행보가 사실이더라도 그녀의 춤과 그녀가 한국 무용에 남긴 업적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이를 어떻게 받아 들일지는 뭐 받아 들이는 사람들 마음이다. 

2.2. 북한[편집]

2.2.1. 월북[편집]

다만 광복 직후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앞서도 말했지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최승희의 주변인이나 제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최승희 본인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나름 반성하긴 했지만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승희 자신이 일본군 위문도 했고 친일적인 행위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남편 안막이 일본 경찰에 많은 수모를 겪었고, 연안독립동맹에도 가담하였으며, 자기 자신도 나름의 민족 의식을 가지고 좋은 일도 했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광복 후 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당황했다고 한다.

한 예로 최승희는 중국에 억류되어 있다 1946년 5월 29일에야 겨우 귀국할 수 있었는데 귀국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그 동안에 일본에 자의가 되었든, 타의가 되었든 친일을 했다는 것은 변명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나 최승희가 해방된 조국에 와서 속죄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오직 한 가지 코리안 발레를 창건하는 것으로 이바지하겠다." 라는 인터뷰를 하였으나 언론에서는 최승희의 발언을 왜곡, 곡해하여 "일본 놈들 앞잡이 노릇 하던 최승희가 이제는 코 큰 사람들이 들어오니까 이제는 미국 놈들의 앞잡이가 되서 발레라는 것을 하려고 한다." 라는 자극적인 보도를 하였고, 저 보도로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서 최승희를 당장 반민특위에 넘겨야 한다고 들끓었으며, 이로인해 최승희는 더욱 겁을 먹게 되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광복 직후 월북했기 때문에 혼자 귀국한 최승희를 보고 어떤 기자는 "당신의 남편은 평양으로 갔는데, 당신은 이 곳에 왜 온 것인가?" 라고 면전에서 대놓고 빈정대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승희가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기자에게 험한 말을 하였는데,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이런 최승희의 태도에 반성의 기색이 전혀 없다고 더욱 신나게 깠으며, 그래서 최승희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 되었다고 한다. 기레기들은 어느시대건 꼭 존재한다.자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견디다 못한 최승희는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를 만나 자신을 선처해 달라, 자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호소하였으나, 하지의 대답은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라는 짧은 말이었으며, 그는 최승희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한편 월북했던 안막은 몰래 남한에 내려와 최승희에게 월북을 종용했지만, 최승희는 월북에 대해 회의적이었고, 급기야 안막은 "여기 있으면 당신이 갈 곳은 감옥 밖에 없다. 나랑 같이 북으로 가면 여왕처럼 대접 받을 것이다." 라며 최승희를 협박하며 달래기까지 했다.





추천수0
반대수28

공감많은 뉴스 시사

더보기

뉴스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