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봉자와 신오무교
9.
이른 아침에 설선녀를 따라서 천봉자는 높은 바위산을 올랐다. 신오산은 무당산처럼 크지는 않았지만 무척 험하였다. 주봉은 사방이 깊은 절벽이었으며 흑선비곡이 거처하는 꼭대기로 통하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 하나뿐이었다. 계단은 겨우 사람 한명이 지날 수 있는 동굴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초대교주가 통로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척박한 곳에서 지낸 이유는 자혈검 때문이었다. 신오산의 주봉은 좁은 동굴만 봉쇄하면 침입할 수가 없었다.
꼬불꼬불한 동굴을 벗어나자 넓은 터가 나타났다. 오추을의 영전을 모신 신오전(神梧殿)이 멀리 보였으며, 그 밑에는 대대로 교주들이 거주하는 영추관(映秋館)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 앞에는 삼대집사가 거주하는 건물이 있었다. 삼대집사(三大執事)는 신오전만 지키는 고수들이었다. 미리 전갈을 받은 삼대집사는 공손한 자세로 설선녀와 천봉자를 맞이하여 영추관으로 안내했다. 천봉자는 삼대집사의 틈새 없는 몸가짐에서 상승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신오전에서 검은 옷을 입고 내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흑선비곡이었다. 커다란 덩치를 조용히 움직이며 영추관으로 들어선 흑선비곡은 설선녀를 바라보았다.
“교주님, 무척 오랜만에 뵈옵니다. 설선녀가 인사드립니다.”
설선녀의 인사에 고개를 약간 끄덕인 흑선비곡은 형형한 눈빛으로 읍하는 천봉자를 보았다. 평생을 은둔하며 지낸 자의 조용한 미소가 흘렀다.
“흠, 무척 귀한 분이 오셨군요. 저는 평생을 이곳에서 은둔하며 지내고 있으며 함부로 외부인과 상면하지도 않습니다. 오늘은 제 딸인 설선녀가 특별한 손님을 모셨다고 하기에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입니다. 편히 앉으십시오.”
천봉자는 소리 없이 미끄러지며 앉는 흑선비곡의 움직임에 놀랐다. 평시의 움직임 자체가 바로 높은 무공과 직결된 느낌이었다.
(저절로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몸가짐이로다. 손놀림과 발놀림 하나하나가 빈틈이 없으며 장중한 목소리는 깊은 내공을 뿜고 있구나. 내가 엎드려 배움을 간청할 사람이 분명하도다.)
흑선비곡은 조용히 말했다.
“귀공에 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인품과 무공이 강호의 대인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묘연존자가 서역무공의 아성이라면 귀공은 동쪽무공의 우뚝한 봉우리일 것이니, 상면하는 뜻이 대단히 깊습니다.”
천봉자는 앉은 채로 읍하며 말했다.
“교주님의 명성에 비하면 저 같은 사람이야,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홉 마리의 소가 있는데, 그 중의 털 하나에 불과할 뿐이니 어찌 과분한 칭찬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부끄러울 뿐입니다.”
흑선비곡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듣고만 있었다.
“오늘 교주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강호를 주류하며 산처럼 높은 분들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으며, 그 덕에 겨우 천한 제 이름이나마 남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오추을 초대교주님이 강맹한 무공을 엿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초심자의 마음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을 이곳에서 쏟고 싶습니다.”
흑선비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봉자와 설선녀를 번갈아 보던 흑선비곡은 속으로 짐작했다.
(흠, 내 딸의 화색이 저렇듯 피어오르니 이것은 천봉자와의 만남 때문이리라. 드디어 꽃이 나비를 만나서 그 뜻을 다하게 되었구나.)
흑선비곡은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천봉자님의 뜻을 잘 알겠습니다. 우리도 환영하여 마지않습니다. 언제까지라도 이곳에서 지내시며 원하시는 뜻을 이루기 바랍니다. 다만 한 가지 외람된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허락하여 주심에 감사드리겠습니다. 무슨 부탁인지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소문에 의하면 천봉자님의 무공은 흐름과 형태가 없으며 이름조차도 없다고 합니다. 묘연존자와 삼년에 한번씩 겨루는 무공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참으로 헛된 소문입니다. 그러나 교주님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시무(施武)를 하여도 좋을 듯 합니다.”
“으흠, 대단히 고맙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수를 배우는 마음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흑선비곡은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내려서더니 커다란 노송 아래로 걸어갔다. 바닥에 평편한 바위가 박혀 있는 곳에 앉더니 먼저 손을 들어서 바위를 손으로 쓸어나갔다. 그러자 바위의 거친 표면이 매끈하게 변하면서 햇빛을 반사하였다. 참으로 무서운 장력이었다.
천봉자는 팔짱을 끼고 침묵하였다. 반들반들 해진 바위 표면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가락을 천천히 바위에 대었다. 손가락 끝에 강한 내공이 소리 없이 몰려들더니 철벽같은 강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쭉 내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서 바위에 깊은 줄이 파여 내려왔다. 옆으로 긋고 아래로 긋더니 네모반듯한 바둑판을 만들었다.
흑선비곡은 내심 감탄하였다.
(아하, 대단한 내공의 힘이다. 이런 내공은 소림사의 반야신공이나 대승범천신공을 모두 합쳐놓은 것보다 더욱 강하고 깊다. 역시 소문대로 천봉자는 대단한 강호인이다.)
이번에는 흑선비곡이 하얀 돌을 손아귀에 넣어서 힘을 주었다. 돌이 동그란 모양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곧이어 검은 돌을 또 집어서 힘을 주자 동그란 바둑돌이 떨어졌다. 천봉자도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명성에 합당한 내공이다. 실로 감당키 어려운 상대로다.)
수북이 쌓인 바둑돌을 한 움큼씩 나누어 가지더니 흑석비곡이 먼저 말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먼저 수를 두어 공격하겠습니다.” 싸늘한 눈초리로 바둑판을 응시하자 옆에 있던 바둑알이 둥둥 허공으로 떠올랐다. 떠오른 바둑알이 바둑판 위로 이동하더니 한 곳에 뚝 떨어졌다. 중주혈(中注穴)이었다. 사람의 단전에 해당하는 아랫배였다.
천봉자는 이에 상응하는 요혈을 노리며 반쯤 감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봤다. 옆에 있던 바둑알이 둥둥 뜨더니 살며시 바둑판의 한곳으로 내려앉았다. 중주혈을 방어하는 동시에 상대방의 신궐혈(神闕穴)에 해당하는 배꼽 위를 지그시 누르는 형세가 되었다. 흑선비곡은 움찔하더니 냉정한 표정으로 신궐혈을 뿌리치면서 연액혈(淵液穴)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연액혈을 슬쩍 피하면서 천봉자는 눈썹 위의 양백혈(陽白穴)을 냅다 후려쳤다.
설선녀는 기괴한 장면에 넋을 잃고 있었다. 벌써 해는 지려는데, 두 사람은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무서운 내공의 대결이었다. 사람 인체의 백팔십 개 요혈을 서로가 공격하고 방어하는 외공의 대결을 바둑돌로 대신하고 있었다.
바둑이 중반에 들어서면서 두 사람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이마에는 송글송글 땀방울이 솟았다. 천봉자가 영태혈(靈台穴)에 해당하는 곳에 바둑돌을 놓았을 때에 흑선비곡은 싸늘한 느낌을 받았다. 흡사 비수가 날아든 기분이었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한참동안 진땀을 흘리던 흑선비곡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을 놓았다. 목 뒤에 있는 옥침혈(玉枕穴)을 찌르고 들어오는 형세였다. 천봉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살며시 내려 뜬 눈에서 안광이 번쩍였다. 옥침혈을 봉쇄하며 신도혈(神道穴)로 돌이 내려앉았다. 천봉자의 목소리가 침중하게 들렸다.
“척추에 해당하는 신도혈이라서 무척 신랄하며 잔인한 감이 있습니다만, 지금의 형세를 봐서는 그 방법만이 살 길입니다. 탓하지 말아주십시오.”
흑선비곡은 천봉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신음소리를 내었다. 바둑알이 천천히 떠오르며 신도혈을 제압당한 흑선비곡의 다음 수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무자비한 살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천봉자는 흑선비곡의 바둑알이 떨어지자 눈을 질금 감으며 전율을 느꼈다. 이간혈(二間穴)이었다.
흑선비곡의 검은 돌이 일제히 하나의 형상을 그리며 천봉자의 견고한 하얀 돌을 가운데로부터 조각조각 내는 모습을 드러냈다. 천봉자의 눈꺼풀에서 땀방울이 뚝 떨어졌다. 안광은 퍼렇게 빛났다. 곧바로 천봉자의 돌이 이간혈에서부터 두 칸을 옆으로 하고 세 칸을 위로 한 빈 공간에 떨어졌다.
“으흠, 이럴 수가......”
흑선비곡의 얼굴에 낭패의 빛이 돌았다. 조각나던 하얀 돌은 일제히 포위의 형세를 취하며 검은 돌을 위아래로 붙잡는 모습이 드러났다.
“한 손으로는 백회혈(白會穴)을 때리며 또 한 손으로는 단전혈(丹田穴)이라니,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지경이다. 더 이상의 묘수가 나올 수가 없구나. 참으로 무서운 내공과 외공이로다.”
천봉자는 긴 숨을 내쉬었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사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란, 제가 교주님을 꺾을 수도 없지만 교주님도 저를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길입니다.”
흑선비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로소 웃음을 터뜨리며 긴장을 풀었다.
“평생 한번을 만나기도 힘든 고수를 만났도다. 강하기는 태산 같고, 부드럽기는 봄바람 같다.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이다.” 천봉자는 두 손을 들어 읍하며 말했다.
“너무도 과찬의 말씀입니다. 저야말로 오늘 세상이 넓고 두터운 줄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많은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천봉자의 창백한 얼굴에도 웃음이 감돌았다. 옆에서는 설선녀가 방실방실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