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거 말고도 발해가 우리민족이라는 증거 무왕의 아들인 문왕때 일본과의 교류 과정에서 오갔던 국서를 보면 발해는 고려국(고구려)을 표방하고 황상이니 천손이니하는 칭호를 썼었고 문왕의 둘째 딸인 정혜공주의 무덤은 고구려 양식 굴식돌방무덤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특히 고구려에서 사용되던 모줄임 천장구조(천장무늬가 사각형으로 점점 좁아지는 형태) 가지고 있음 이밖에도 발해가 우리역사의 일부분이라는 인식은 많은 역사책에 나와있음 제왕운기-이승휴(고려) 최초로 발해를 우리역사로 인식 발해가 926년에 멸망하고 고려가 918년에 건국된 것을 보면 고려와 발해는 공존했던 시기가 분명 있었음 물론 제왕운기는 고려후기 충렬왕때 쓰이긴했지만 단순하게 고증할 수 없는 먼 옛날이야기를 쓴 것은 아님 그리고 발해가 멸망하고 발해왕자 대광현은 고려로 망명해서 호족의 지위를 얻고 고려 귀족으로 편입됨 이밖에도 발해고-유득공 대동지지-김정호 동사-이종휘 아방강역고-정약용 해동역사-한치윤 조선상고사-신채호 등의 책들이 있는데 특히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당시 발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서 외국(중국,일본)의 책 545종을 인용해서 기록함 걍 tmi하나 덧붙이자면 발해는 통일신라와 경쟁의식이 강했음 당시 당나라에 빈공과라고 유학생들(발해,신라)을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발해의 오광찬이 통일신라의 최언위보다 과거급제 순위가 낮자 오광찬의 아버지인 오소도가 최언위보다 아들의 석차를 올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사건도 있고 발해의 사신이 신라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함(그 당시 발해는 잘나가던 시기라 자기들이 더 국력이 쌔다고 생각함 근데 애초에 당나라는 신라와 오래전부터 친하게 지내서 거절함) 이 소식을 들은 신라의 최치원(빈공과 급제 맨처음으로 한 신라 6두품)은 당나라에 정말 고맙다고 하기까지함 ㅋㅋ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