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야밤에 심심해서.
먼저 밝혀둘게. 10년도 훨씬 지난 일이야. 기억이 나는 이유는 그때는 그냥 그랬는데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게 많다고 해야하나? 헤어질 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서 당황했었는데 이유를 이제 알것같아서.
당시 둘 다 학생이었지만 휴학하고 각자 일을 하고있었고 사귄기간은 8개월쯤? 나는 나이에 비해 돈을 잘 버는 편이었어. 잘 쓰기도 했고. 상대는 나이에 비해 돈을 그냥 벌었어. 잘 안 썼지. 나는 내가 번 돈을 내가 알아서 관리했고 상대는 집에 모두 가져갔지. 그리고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어.
데이트를 매일 하고싶어했어. 나는 그냥 들어가 쉬고싶었고. 주말에도 나는 좀 쉬고싶었는데 상대는 늘 하고싶은 게 많았지. 앞서 밝혔듯 상대는 늘 돈이 없었어. 만나서 뭘하든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갔고 돌아가는 길엔 내게서 늘 택시비를 받아갔지. 나는 막판쯤엔 내가 얘랑 돈을 얼마나 쓰는지 갈데까지 가보자 싶어서 한번 해달라는 걸 다 해줘봤어. 노래방 보드게임방 술집 피시방 영화관 분식집 레스토랑 커피숍 오락실 고깃집 택시 버스 기차 입장료 등등등 나는 아주 작정을 하고 돈을 써봤어. 그러자 정말 상대는 단 한푼도 쓰질 않더라구.
한달을 그리보내고 계산을 해봤어. 한달동안 오롯이 데이트비용으로만 200을 넘게 썼더라구. 잘 정리해서 가지고 다녔지. 일주일동안 하자는 걸 다 안 하겠다고 했어. 질금질금 내더군. 택시비는 줬어. 딱 일주일째는 택시비도 안 줬어. 짜증내더라구. 자기한테 왜 그러냐더군. 데이트비용정리한 걸 줬지. 그냥 그대로 집으로 들어왔어. 따라와서 잡는데 아무말 없이 그냥 뿌리치고 집에 들어갔어.
다음날부터 퇴근길 집앞에서 기다리더군. 밥을 사달래. 배고프대. 평소엔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먹었지만 그날은 집근처 대학생이 먹기엔 다소 비싼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제일 비싼걸로 하나만 시켰어. 앞에서 뭐라는지 기억은 안 나. 아마 마음이 제대로 식어서 귀담아듣지 않았던 모양이야. 상대가 좋아했던 것 같아. 주문한 음식을 내 앞에 두고 먹기 전까지는. 오기가 생겼는지 상대도 같은걸로 하나 주문하네. 허겁지겁 먹더라구. 다 먹고는 뭐라뭐라 하는데 딴생각하느라 잘 못 들었어. 천천히 내 몫을 다 먹고 일어나 계산하러 갔지. 쭐래쭐래 따라오네. 카드를 꺼내 내것만 계산했어. 얼굴이 벌개지더군. 뭐라는지 듣고싶지않아서 이어폰 끼고 그냥 집에 들어갔어. 상대가 어땠는지 정말 하나도 안 궁금했어. 다음날도 기다리더라구. 얘기좀 하자네. 찜질방으로 갔지. 며칠 그러다 마주치는 것도 지겨워서 퇴근하고 바로 찜질방으로 갔어. 직장근처로 찾아오네. 자전거 타고 왔길래 택시타고 가버렸어.
당시엔 내 감정이 그정도로 식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갔어. 싸운적도 없고 잘 지냈으니까. 취향도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하고 나눌 게 많았거든. 가끔 상대가 철이 없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직업군 자체가 철이 들면 그만큼 감수해야할 게 많은데라 문제삼지 않는 편이 좋았어. 믿기 힘들겠지만 단순히 돈이 아까운 게 아니었어. 막 상대에게 상처주고싶더라구. 근데 통쾌하고 싶어서는 아니었던 것 같아. 아무 감정도 안 느껴져.
아무래도 그 사람은 돈 쓰는 방법을 평생 알 길이 없고, 그래서 굴릴 수도 없고, 모을 수도 없고, 앞으로의 미래를 누군가 나타나서 대신 짊어지고 갈 사람을 찾으며 살아가지 않을까 여겼던 것 같아. 대강 들었던 가정사가 평탄치 않았는데 그걸 이겨내는 과정이 스스로 인내하고 쟁취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 그때그때 허영을 채우면서 자신의 꿈이나 앞날을 준비하는 건 늘 뒷전이었거든. 하고픈 일이 생기면 스스로 준비하지 않고 남에게 기대기만 하는 모습이 자꾸 거슬렸던거야.
근데 그게 왜 거슬렸냐면. 그게 꼭 내모습같았거든. 그 모습이 싫어서 막 끊어낸거였어.
이후로도 나는 비슷했어. 잘 벌었지만 참아야 할 걸 참지 못하고 허영을 채웠지. 열심히 해도 나는 잘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냥 잘 하는 걸 하려고 했어. 오래걸렸어. 가끔 내가 의외로 잘 견딘다는 걸 알게 됐고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걸 깨닫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
마지막으로 건너건너 들은 그사람 소식은 1년쯤 됐어. 결혼해서 애를 낳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자기사업을 한다고해. 여전한데 거슬리지 않더라구.
내가 그 사이 많이 변해서.
작게는 데이트비용이지만 그게 사람의 가치관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해. 사람사이 관계는 작은걸로 시작해서 작은걸로 끝나지. 그 어떤 관계도 일방적인 관계는 없어. 심지어 부모자식도 그렇다. 내가 아이에게 짜증 한번 부리면 아이도 그거 그대로 다른날에 똑같이 따라한다.
아이를 낳고 기르다보니 별것아닌 작은 순간들을 차곡차곡 잘 쌓아가야 무리없이 큰 그림을 그릴 수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쌓다보면 가끔 와르르 무너질 때가 있기도 하지만 한번 쌓아봤다고 다시 쌓는 것도 요령이 생겨.
그냥 아이 어린이집 소풍도시락 싸야 하는데 잠은 안 오고 시간은 흘러가서 날새느라 뒤죽박죽 맥락도 없이 적어봤어.
흉보고싶으면 흉봐도 돼.
무슨말인지 결론이 뭔지 이해가 안 가도 상관없어. 읽는사람 마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