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숙
새벽잠을 깨우는
전화벨 소리
"용화이 자넨가? 아부님이 방금 운명하셨다네."
직감으로 그런 전화는
누구의 전화란 것을 안다
오늘
세상을 버리신 당숙께선
갈쿠리 같은 손으로
당신보다 먼저 가신 내 아버지
살과 뼈를 발라 이장(移葬)을 하면서도
소주 같은 눈물
그렁그렁 그 훗훗한 정으로
내 뼛속 깊이 각인되었던,
내가 살아보지 못한 고향이란 데,
그 고향 하늘 아래
한 그루
아름드리 느티나무셨다
*우리 당숙, 이제는 만나볼 수 없는 그리운 얼굴. 그리운 이름. 李 字 錫 字 昌 字 어른. 아버지의 사촌이니 내게 당숙이다. 종조부 容 字 壽 字 어른의 아들이며 나의 6촌 우재 형의 아버지다. 우리는 나 2살 때 고향 둥구리 깽번을 떠나야만 했다.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인 즉슨, 아버지가 어느 날 하루 집과 땅을 모두 팔아 당신의 노름빚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노름빚을 청산하더니 화가 났던지 집에 있던 장독을 바윗돌로 다 깨부수고 어머니와 우리 3남매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사라져 나타나질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 3남매를 데리고 고모랑 동세랑 광주리 장사를 해서 근근히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둥구리 사람들이 어머이 가련한 신세를 한탄하며 동정해서 해주는 말이 오히려 창피하고 고깝게 들리고 마음의 상처가 되자 둥구리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둥구리를 떠나 일단 친정 아버지가 계시는 남원 감성으로 가 몸을 의탁하고 장차 살 궁리를 하였다. 하지만 친정에서도 맘이 편치 않았다. 새엄마의 아이들에 대한 차별과 괄시를 못참고 뛰쳐나와야 했다. 감성 친정을 나와 남원 읍내 강정물에 계시던 이모의 집 곁방 한칸을 얻어 동백기름 장사를 시작하여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그 일도 잠시뿐 살길을 찾아 또다시 강정물을 떠나야만 했다. 오수 양춘옥에서 식당 일을 하다가, 삼례에서 식당 일을 하다가, 봉동에서 남의 밭일을 하다가, 잠시 잠시 살았던 것 같다.
어머니가 3남매를 데리고 살기 위해 거쳐간 지명을 일일이 세세히 다 밝혀낼 수 없지만 평소 이야기 속에 나오는 지명만 해도 그렇게 많다. 종국에는 아예 지긋지긋한 전라도를 떠나 강원도 속초로 갔는데 강원도에서도 삶의 길을 찾아 양양, 고성으로 어디로 옮겼다. 그러다가 봉평 어느 홀애비 농부의 집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거기서도 오래 못살고 원주, 공주, 청양에 살다가 최종적으로는 수원 화성에서 살게 되었다. 어머이 인생 90년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처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고향이란 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일찌기 어릴 때 내게는 왜 일가친척이, 아버지가 없냐고 어머니께 하소연하듯 물었는데, 내게도 이렇게나 일가친척이 많구나 싶었다. 내게 아버지도 살아 있었다니! 어린 나는 감동의 눈으로, 놀라운 눈으로 고향 산천과 친척들을 바라보았다. 고향의 산천과 친척들은 하나같이 다 따스했다. 이렇게 따스한 사람들을 두고 어머이는 왜 이역만리 떠나셨을까?
내가 대학생일 때 풍문으로 임실 어느 여자의 집에서 머슴 살던 아버지를 찾아 어머이와 합쳤다. 어머니는 남편이 죽도록 미웠지만 거두어 주었다. 내가 군대에 다녀오고 교사가 되고 두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뇌출혈과 중풍으로 돌아가셨다. 이제 어려운 시절을 다 견디고 살만 하다 싶으니까 먼저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가파른 고향 뒷산 숙부님의 밤나무 산에 묻히셨다. 고향사람들이 모두 어머이의 인고의 세월을 치하하며 아버지 시신을 기꺼이 고향 뒷산에 받아주었다.
그 뒤로 내가 척추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숙부님은 당신께서 아버지 산소를 잘못된 곳에 써 이 집 長子가 몸을 크게 다치게 되었다고 술을 드시고 자책하셨다. 결국 아버지 산소를 남원시 요천수 건너 국유지 산으로 옮기기로 했다. 자칭 지관일을 하는 숙부가 숙부, 숙모, 4촌들, 6촌들의 미래 묫자리를 미리 많이 잡아둔 곳이었다. 당숙께서 아버지 산소를 헐고 미처 다 육탈이 안 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여 요천수 건너 산으로 이장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