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뒤덮은 페미니즘 물결
하굣길 납치·폭행당해 사망한 소녀
`#파티마에게 정의를` 국민적 분노
"하루에 여성 10명씩 살해당하는 나라"
8일 세계 여성의 날 맞아 3만명 시위
#지난달 11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 경찰당국에 한 건의 실종신고가 접수됐다. 수업이 끝난 딸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갔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차가 막혀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엄마는 애타게 파티마를 찾다가 실종 신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경찰은 곧바로 실종 경보를 발령했다. 한 여성이 파티마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CCTV 영상이 공개됐지만 아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나흘이 지나고 나서야 파티마는 시내 골목길 검정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옷이 벗겨져있고 성폭행 당한 흔적이 있었다. 7세 소녀의 갑작스럽고도 잔혹한 죽음은 멕시코 전역을 거센 분노로 뒤흔들었다.
#그보다 앞선 2월 9일. 멕시코시티에선 또 한 명의 여성이 죽었다. 25세 여성 잉그리드 에스카밀라가 동거를 하던 40대 남성의 칼에 찔려 살해된 것이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수법으로 그가 목숨을 잃은 현장사진을 경찰과 일부 언론이 버젓이 공개하면서 공분 또한 커졌다.
"내가 다음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고, 내 엄마가 그다음 차례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살인, 성폭행 등 잇따른 '페미사이드(Femicide·여성 혐오 범죄)'에 분노한 멕시코 시민들은 지난 8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대규모 총파업을 가졌다. 보라색 셔츠나 모자, 반다나를 쓴 여성들은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3만여 명이 도심 집회에 참여했다. AP통신은 "그동안 살해당한 여성과 소녀의 엄마들이 앞장서서 일요일 행진을 이끌었다"고 보도했다. 시위대 일부는 시내에 위치한 소칼로 광장 바닥에 페인트로 피해자 한명 한명의 이름을 써내려가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여성들이 성차별 폭력을 반대하는 의미로 이틀간 전국파업을 벌이기로 했다"면서 "성폭력과 잘못된 남성주의(machismo)로 인해 훼손된 여성 인권이 이번 일을 계기로 바뀌길 바라고 있다"고 전했다. 시위대는 멕시코 대통령궁으로 몰려가 최루탄을 터트렸다. 멕시코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에서는 여성들이 흘린 피를 나타내는 뜻에서 분수대의 물을 빨갛게 물들였다. 현지 언론은 정부청사 인근에서 시위대 16명이 연행되고 경찰 19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멕시코의 여성 혐오 범죄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BBC는 멕시코 내에서 살해된 여성의 수가 지난해 기준 3825명이라고 전했다. 하루에 평균 10명씩 사망하는 셈이다. 이 중 여성 혐오 범죄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2015년 426명이었다가 2019년 1006명으로 두 배 넘게 증가했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는 이유는 이러한 혐오 범죄로 인한 사망률이 매년 증가하고 있음에도 멕시코 정부가 별다른 해결책을 내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에서 대부분의 살인 사건은 미제로 남기 일쑤다. 보안당국 대신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나서서 실종자를 찾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대대적인 변화를 약속하며 2018년 12월 취임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은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긴커녕 연이은 막말로 파문을 일으켰다. "(여성 폭력 현황이) 언론에 의해 조작됐다"거나 "여성 폭력은 신자유주의 경제모델의 결과물"이라는 발언에 70% 안팎을 유지하던 지지율은 이달 초 50%대로 하락한 상태다.
이렇듯 여성 폭력에 대한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지만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 지도자들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지난 2일(현지시간) 여성 살해에 대한 처벌 강화 법안을 서명하는 자리에서 "가해자 남성의 의지뿐만 아니라 피해 여성의 포지션도 문제"라는 발언을 내놔 논란을 빚었다. 그런가 하면 레닌 모레노 에콰도르 대통령은 지난달 사석에서 "(여성들은) 상대가 매력적이면 꼭 성희롱으로 여기진 않는다"고 말해 비난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