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준 스스로도 자신의 책 <노 해병의 회고록>에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1932년 2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해방 후 귀국한 신현준은 그 후에 해병대사령관이 되어 태극무공훈장을 한번도 안닌 두번이나 받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일들은 우리 민족만이 겪었던 역사적인 아픔을 매우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예화 된 육군 32,800명. 즉, 1개보병사단: 13,500명(미군 기준) + 1개보병사단: 13,500명 + 군단본부: 400명 + 1개보병여단: 5,400명(미군 기준)을 한국에 추가 주둔시킨다면 주한 미군 방위비 분담금 9,210억원을 증액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현재의 방위비 분담금을 약 10,389억원으로 계상(計上)하고, 정예화된 병력을 기준으로 한국주둔 미군병력을 28,500명으로 추산(推算)하여 환산(換算)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식 : 10389 ÷ 28500 × (13500 + 13500 + (400 + 5400) × 0.08) × (1 - 0.08) = 9210억원.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국군 6개해병사단 + 1개해병기갑여단을 창설하여 육군사단의 해안방어지역에 교체 투입하고, 주한미군 32,800명 증원에 따른 방위비 분담금 9,210억원을 증액시킨다면 대북한 경제제재 와 북한의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고 사료됩니다.
성과를 내 줘야 합니다. 성과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만 처리해야 하는 정형화된 조직운용체계에서는 좋은 성과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늘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job)이라 할지라도 프로젝트화(project化)해서 프로젝트 성격으로 처리해야 합니다. 이때 '프로젝트화(project化)'의 정의(正義)는 매일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단순한 일(job)이라 할지라도 어제 일어난 일과 오늘 일어난 일이 다르다고 여기면서 한번 더 곰곰이 생각하고 궁리(窮理)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수전 형태의 전투방식은 분대(하사)나 소대(소위/중위)를 특수부대처럼 매우 다이나믹(dynamic)하게 운용하는 방식입니다. 서기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그 당시 해군참모총장 직책을 수행했던 이순신 장군도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던 방식입니다. 이것은 전략/전술이 아닌 일 처리 방식입니다. 이 특수전 형태의 전투방식에서는 하사(분대장) 과 소위/중위(소대장)은 핵심요소가 되고요. 특히, 분대장인 하사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됩니다. 분대장뿐만 아니라 분대원들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는 데 이런 경우에는 첩보수집에 분대원을 활용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순수한 의미에서 말하는 특수전 형태의 전투방식에서는 하사(분대장)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지요.
가정집에서는 현관문(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지만 도둑 과 강도의 출몰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는 가정집의 현관문(대문)처럼 그렇게 매우 중요합니다.
지정학적인 측면에서도 보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대한민국은 국토방위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안방어 임무에 가장 최적화된 6개해병사단 + 1개해병기갑여단 창설은 불가피합니다. 그 중에 2개해병사단 + 1개해병기갑여단은 강원도 동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8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하고, 3개해병사단은 경기도/인천 서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수도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한 후 물샐틈없이 방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군 53보병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부산/울산지역은 해병대가 방어하기에 가장 적합한 해안방어지역이므로 나머지 1개해병사단은 부산/울산지역에 교체 투입한 후 효율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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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 (2020. 04. 06)
"무적 해병의 아버지! 평생 조국과 겨레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치신 님이여,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소서!"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에 잠든 국가공인 친일파 신현준의 묘비에 적힌 말이다. 신현준은 경북 김천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만주로 올라갔다. 이로 인해 한국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자연스레 구사했다. 신현준 스스로도 자신의 책 <노 해병의 회고록>에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년 2월,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이날부터 신현준은 1936년 4월까지 4년여 동안 일본 만주파견군과 만주국군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신현준이 모셨던 일본군 참모 중에는 만주군 제5군관구 수석고문으로 열하성 일대에서 활동한 세키하라 대좌(대령)가 있었다. 신현준은 회고록에 "장차 만주군 장교가 되고 싶다는 나의 희망을 알고 격려해 주었다"면서 세키하라 대좌와의 인연을 자세히 언급했다.
"세키 대좌는 35년 3월부터 나를 현지 실무부대(34사단)에 배속시켜 근무 경험을 갖도록 배려해주었다. 단장(연대장) 전속 통역으로 근무한 지 만 1년째 되던 36년 4월, 나는 마침내 소망하던 대로 만주군 장교가 되기 위해 봉천군관학교에 입교하게 됐다."
신현준은 1937년 9월 만주국 봉천군관학교를 5기로 졸업했다. 이후 1937년 10월부터 보병 35연대 박격포련(박격포중대)에서 견습군관으로 복무한 뒤 그해 12월 만주국군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38년 12월 1일부터 항일무장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중략)
광복 이듬해인 1946년 5월 10일, 신현준은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상륙한다. 이후 봉천군관학교 동기인 정일권의 권유로 간도특설대 출신 김대식(해병대 3대 사령관)을 만나 조선해안경비대 입대절차를 밟고 1946년 12월 중위로 임관한다.
이듬해 해병 소령으로 특진한 신현준은 1948년 5월 해군 진해통제부 참모장에 임명됨과 동시에 중령으로 진급한다. 이 해 10월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다.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한다. 신현준은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4.3사건이 발생하자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한다.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한다. 이후 1958년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유학한 뒤 1960년 6월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고 1961년 4월 국방차관보에 임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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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해병대 초대 사령관 신현준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