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톡을 눈팅만 즐겨하는 스물 둘 대학생입니다.
고민이 생겼는데 친구들한테 말도 못하고, 답답해서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저에겐 사귄지 200일이 넘은 남자친구가 있습니다. 저희는 대부분 데이트를 저희 동네에서 하거든요.
보통 저녁때 남자친구가 저희 동네로 오면 시내에서 놀다가 막차 시간쯤 해서 같이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를 태워 보내고, 저는 정류장에서 10분 거리인 집으로 천천히 걸어옵니다.
특별히 어디 놀러갈 때를 빼놓고는 거의 시내 데이트 -> 버스 정류장에서 빠이빠이 -> 나홀로 우리집 이런 패턴이거든요.
남자친구 집이 저희 동네에서 버스로 20~30분 거리인데 왕복하면 거진 한시간을 이동하는 데만 버리는 거잖아요.
그점에 있어서 늘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오랫만에 동네에서 둘이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들어가는데 남자친구가 삘도 받았겠다,
술 마시고 여자 혼자 집에 들어가게끔 할 순 없다, 여태 너네 집도 모른다 해서 저희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거에요.
저도 웃으면서 알겠다고, 그러라고 하곤 손잡고 룰루랄라 처음으로 정류장을 지나쳐서 저희 단지로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희 집이 3년 전부터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서 결국 살던 집을 팔고, 작년에 옆동네에 평수도 작고 5층짜리 엘리베이터가 없는 집으로 이사를 왔거든요.
20년 된 아파트라 겉에서 보기도 허름해서 저도 처음엔 너무 충격적이고, 슬펐는데 제가 속상해하면 부모님 마음은 더 안 좋으시잖아요^^;
그래서 그냥 내색 안하고, 25층에서 2층에 사니 편하다고 웃으면서 우리 가족들 더 열심히 살고 있는데요.
전 아무 생각없이 저희 단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하는데 남자친구가 딱 그 타이밍에 이러더라구요.
"우와. 이런 아파트도 여기 있네? 설마 너네 집 여기 아니야?ㅋㅋㅋㅋㅋ"
마치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해맑게;;; 웃으면서 장난을 치는데 순간 머리가 띵~ 하더라구요.
평소라면 솔직한 제 성격대로 "응. 여기 맞는데 왜?" 이랬을텐데
정말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려서 유명 여자연예인이 광고를 하는 브랜드파워가 있는 저희 집 바로 앞에 아파트 단지로 향했습니다.
그러곤 그냥 대충 어느 아파트 앞에 서서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데려다줘서 고마우니 어서 집에 들어가라고 등떠밀어서 남자친구를 겨우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뜸을 들여서 조마조마한 심장으로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집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어요ㅠ_ㅠ
그날 이후, 한번은 시내에서 노는데 갑자기 비가 잠깐 와서 남자친구가 집에 같이 가서 우산 갖고오면 어떠냐 해서 깜놀했습니다.
정말 거짓말 한번 했다가 미치겠습니다.
난 당당한듯 했는데 그동안 우리집을 초라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괴감도 들고, 엄마아빠께 괜히 죄송한 맘도 들고ㅠ
혹시라도 또 집에 데려다 준다면 뭐라고 할까, 집 앞으로 찾아왔다고 갑자기 나오라고 그러면 어쩌나, 집구경 시켜달라면 어쩌나 가슴이 벌렁벌렁해요.
드라마에서 보면 재벌집 남자를 차지하기 위해 야망있는 여자가 막 된장녀인 척(?), 도도하게 접근하고 그러잖아요.
전 그럴 생각도 없고, 큰 욕심없이 제 공부 열심히해서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갖고 직장생활하는 게 꿈이거든요.
휴........................... 이대로 계속 거짓말을 할 수도 없구요.
만약 이번 일을 고백했다가 남자친구가 기분이 상해서 헤어지자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것보다는 진실을 고백하는 것 그 자체가 무섭고 두렵습니다.
자존심인지 자격지심인지가 저를 무겁게 누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