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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골룸 |2004.03.09 01:05
조회 10,184 |추천 0

 

미디어는 용서와 화해에 관한 영화라고 하였으나 내가 보기에는
부정(父情)에 관한 영화였다.

 

재영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의
당사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눈치는 많이 보지만 대개 세상과 단절된 자신만의 세계에
잠기는 유형, 둘째는 오히려 무엇에든 마음을 열어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시선을 무장해제시키는 유형.

 

재영은 후자쪽이었다. 해서 그녀는 낙천적이고 항상 웃는 얼굴이다.
하지만 전자나 후자나 마찬가지로 그들은 태생적으로 사람의 정(情)을
잃는 데 있어 지나치게 민감하기 마련이다. 때문에 언제나 자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로 일관한다.

 

게다가 재영은 부정(父情)을 누리지 못하고 자랐을 가능성이 크다.
나이 많은 남자에 대한 그녀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진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정(情)을
얻지 못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정(情)을 잃는 것이 더욱 아프기 때문이다.

 

재영이 죽고난 후의 여진의 행동은 재영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뜻에 대한 재영의 무조건적인 태도들이 부담감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진은 재영의 행동을 재현함으로써 부담감을
떨궈내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여진에게 영화 제목처럼 욕망에 병든
어른들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가는

의심스럽다. 재영도 이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내 눈에는 단지 나이 많은 사람에게 아버지의 상을 투사하고자 했던
재영과, 재영에 대한 미안함에서 벗어나고 싶어한 여진의 모습으로만
보일 뿐이다.

 

여진의 부친이 취한 마지막 행동들이 인상적이다. 그는 여진의 뒤를
쫓는 과정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돌이키기 힘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이제 다만 그의 신분을 이용한 며칠간의 말미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는 그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여진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게 하기. 그리고 역경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기. 여진의 부친은 그것들을 직접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보여줬을 뿐이다. 그리고 직접 몸으로
깨우치게 했다. 때문에 우리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진흙탕에 차바퀴를
빠뜨린 여진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극장문을 나설 수 있다.
그녀는 이미 돌부리에 걸린 자동차를 꺼내는 방법을 배웠으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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