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名人 대각심(大覺心) 스님 “내 삶의 화두는 ‘이 뭐꼬’”
임신 후 부부관계는 금물
한번은 육지에서 큰스님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스님이 약수암을 방문했다. 따르는 사람도 많고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한 그야말로 큰스님이었다. 대각심은 그와의 첫 대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당신이 큰스님이라고? 뭐가 커서 큰스님이야? 좆이 커서 큰스님인가? 불알이 커서 큰스님이야? 어디 한번 내놔보아라.”
대각심이 보기에 그 큰스님은 외부에 이름만 알려졌다뿐이지 내공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첫눈에 가짜라는 것을 간파한 대각심은 ‘좆이 커서 큰스님이냐’고 한방에 갈겼다. 이 말을 들은 그 스님은 아무 말 못하고 약수암을 나가버렸다. 이처럼 대각심은 상대방 면전에 대놓고 강속구를 던진다. 사정없이 후려갈기는 것이 본인의 특기라고 말한다. 봐주는 것이 없다.
필자가 약수암을 방문한 날에도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신도가 찾아왔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벌이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고 속을 썩이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상의를 하러 온 것.
대각심은 바로 강속구를 던졌다. “아기 배고 나서 씹했지?” 필자가 동석하고 있는 데도 거침없이 원색적인 말을 내뱉었다. 얼굴빛이 확 변한 아주머니는 “안했어요” 하고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내가 저울에 달아서 보고 있는데 무슨 거짓말을 해” 하고 면박을 줬다. 중년 남자인 내가 옆에 있건없건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30대 중반의 젊은 부부가 신년초에 약수암을 방문했다. 새해 덕담을 기대하고 대각심을 찾아왔던 것. 부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대각심은 젊은 부인을 쳐다보면서 청룡도를 휘둘렀다.
“네년 뱃속에는 연하의 젊은 남자가 들어앉아 있구나.” 부인은 남편 몰래 연하의 남자를 사귀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부부는 이혼하고 말았다.
“스님은 요즘 사람들에게 음심(淫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많은 것 같아. 우선 음식을 기름지게 먹으니까 그렇지 않나 싶어. 잘먹으니까 자꾸 그쪽으로만 생각이 가는 것이지.
조심해야 할 게 있어. 임신 후 부부관계를 가지면 안 돼요. 자주 부부관계를 가지면 멍청한 아이가 나와. 박복하고 총기 없는 아이가 나오지. 아이를 보면 그 부모가 어떻게 했나를 알 수 있어. 내가 조 선생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요. 어디 가서 대중에게 강연을 할 때 이 사실을 좀 강조해줘요. 임신한 뒤 부부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고 말이에요.
또 요즘 낙태를 예닐곱 번씩 한 여자들도 있잖아. 척 보면 알지. 그런 여자에게선 악취가 풍깁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죠. 그게 다 낙태한 아이들이 몸 안에서 서서히 썩어가면서 생기는 냄새입니다. 썩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보통 사람은 맡을 수 없지만 나는 맡을 수 있죠. 그런 냄새를 맡으면 성불을 못합니다. 나는 그런 여자들이 들어오면 ‘썩 나가라’고 소리칩니다. 또 그런 여자들이 시주한 돈은 절대 받지 않아요. 그런 돈 받으면 지옥에 떨어집니다. 스님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여자들에게 ‘보살님, 보살님’ 하면서 아양을 떨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스님이 아닙니다. 무당이죠. 적어도 스님이라면 그런 여자들의 속내를 꿰뚫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스님이라는 호칭을 싫어합니다. 조 선생도 나를 스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바이 대각심’이라고 불러주세요.”
우바이(優婆夷)는 불교를 믿는 여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바이도 도통할 수 있으니 자기를 우바이로 불러 달라는 요청이다.
대각심은 선승의 삼엄한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살불살조(殺佛殺祖)에서 드러난다. 부처가 나타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나타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것. 어떤 도그마나 우상에 얽매이지 않는다. 대각심을 수십 년간 지켜봤던 주변 사람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불상도 2구나 땅에 묻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불상 앞에서 ‘사업 잘되게 해달라’ ‘돈 벌게 해달라’ ‘승진하게 해달라’ ‘병 낫게 해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고 불상을 땅에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나무토막으로 만든 불상이 돈 주고 밥 주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다. 그건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그 방편을 진짜로 착각하면 불교의 진리와는 영영 멀어지게 된다. 불상 앞에서 복이나 빌 목적이라면 백년 동안 절에 다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주장이다. 요는 자기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