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에서 어머니의 가르침 되새겨
골프는 가족, 동반자 같은 존재
인터뷰 시작부터 안현모는 오직 골프 이야기만 하고 싶다고 했다. SBS 기자 겸 앵커를 거쳐 통역사와 방송인으로 활약하는 안현모는 최근 골프와 단단히 사랑에 빠졌다. 인생의 굵직한 터닝포인트마다 안현모에게 있어 골프는 위성처럼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테일러메이드의 앰배서더로 TGL 국내 중계의 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는 요즘의 모습을 보면 결국 그와 골프는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던 게 아닐까.
책 <아무튼 골프>를 집필하고 싶을 정도로 골프에 대한 에피소드가 많다던 안현모는 지면에 채 담지 못할 만큼 자전적인 골프 스토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엄마가 골프 칠 때 ‘슬로 앤드 텐더’ 이 말을 꼭 명심하라고 하시거든요. 욕심이나 의욕이 앞선다고 이기는 게 아니라 천천히 부드럽게 가야 한다는 것. 골프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좋은 애티튜드라고 생각해요.”
안현모는 걱정이나 근심이 있을 때 필드에 서면 머리가 맑아진다고 말한다. 18홀을 도는 동안 공은 자신이 치는 대로 간다. 온전히 공에만 집중하는 순간 쓸데없는 생각은 사라지고 골프와 나만 남는다. 안현모는 골프가 자신에 대한 확신을 일깨워줬다고 했다.
안현모의 골프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구력은 얼마나 됐나.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 19살 때 수능 끝나자마자 엄마가 아파트 상가 골프연습장에 등록시켜줬다. 나에게 골프는 어른이 되는 통과 의례랄까, 일종의 운전면허 같은 거였다. 그땐 뭘 배우는지도 몰랐고 시간만 때우다 오는 수준이었다. 재미가 하나도 없었다. 골프를 장롱 면허처럼 방치한 시기가 있었다. 기자 시절 한번은 상사분들과 라운드를 나갔는데 너무 불편한 거다. 그때부터 누가 골프 칠 줄 아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했다. 오로지 부모님하고만 쳤다.골프를 시작하는 데 어머니의 역할이 컸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가정학습 숙제 같은 걸 내면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 난에 ‘골프’라고 적었다. 엄마는 지금 70세가 넘으셨는데 여전히 골프를 좋아하고 또 잘 치신다. 싱글 플레이어다. 멋있고 대단하다. 만약에 엄마가 나만 따라다니며 케어하고 학원 라이딩하고 이랬다면 난 오히려 공부를 안 했을 것 같다. 엄마는 항상 열심인 일이 있었다. 골프대회에서 메달이나 트로피, 쌀 가마니 같은 생필품을 상으로 받아오고 더 좋은 성적을 내려 연습도 게을리하지 않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엄마처럼 뭘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골프에 진심으로 몰입하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 2년 전부터. 예전엔 부모님과 소풍 같은 골프를 즐겼다면 이젠 ‘사회인’들과도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술을 별로 안 좋아한다. 모임 같은 데도 잘 안 나가는 극 ‘I’의 내향적인 사람인데 골프라면 좋다. 골프가 내 소셜 네트워킹의 장이다. 몇 년 사이 인간관계가 되게 넓어졌고 라운드 하며 가까워지고 존경하게 된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반대로 난 이런 사람과는 안 맞는구나, 하는 경우도 있다. 골프를 함께 치면 나도 상대도 어떤 사람인지 온전히 보이는 것 같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한데 원래 운동을 좋아하나. 운동신경과 순발력이 좋은 편이다. 키도 크고 아크도 크니까 늘 유망주 소리를 들었다. 내 장점은 습득과 체화를 잘해 스윙을 곧잘 고치는 점이다. 안타까운 건 바빠서 연습을 많이 못한다. 프로님들이 연습 안 하는 사람 중에선 내가 제일 잘 친다고 했다. (웃음)
평소 플레이 스타일은 어떤가. 내가 고지식한 면이 있다.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배운 대로 따박따박 치고, 이기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민폐 끼치지 말고 매너 있게 치자는 주의다. 아까 사회 초년생 때 상사와의 라운드가 고역이었다 했는데 이젠 또 달라졌다. 연세 있고 어려운 분들과 골프 치며 긴장하고 룰도 정석대로 지키는 그런 골프를 내가 좋아하더라. 누구 한 명이 룰을 깨면 정정당당한 플레이가 무너져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넉넉 잡아 ‘오케이’를 줘도 ‘오케이’ 거리가 아니면 안 받고 싶다. 음, 나 너무 빡빡한 사람으로 보이려나. 실제론 라운드에서 동반자나 분위기 따라 잘 맞추는 스타일이다. 골프는 배려와 센스다. 그리고 내가 못 치는 날엔 밥을 산다. 골프 초보 땐 돈 아끼지 말라고 하더라. 동반자들이 또 불러주는 게 나한텐 최고의 목표다.
지난해부터 테일러메이드의 앰배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 5월 한창 골프를 열렬히 치던 때 골프장에서 카트 사고가 났다. 카트에서 4명이 다 떨어져 나간 큰 사고였는데 어깨가 너무 아파서 ‘난 이제 골프 못 치겠다’ 했다. 그런데 몸을 회복할 무렵 테일러메이드에서 앰배서더 제의가 왔다. 골퍼로서 영광이고 브랜드에 누가 되면 안 되겠다 싶어서 골프를 더 열심히 치게 됐다. 이렇게 골프가 나와 밀당을 계속한다.
그게 골프에 대한 애증이다. 골퍼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다. 한 5~6년 전에는 골프가 정말 싫었다. 골프에 야단법석 하고 집착하는 모습들도 싫었고. 내가 평생 골프를 안 치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까, 외국어 3개는 마스터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이렇게 골프를 좋아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가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직업을 갖기도 하고, 절대 친해지지 않을 것 같던 사람과 친해지기도 하지 않나. 인생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골프 안 쳐’ 했던 내가 골프에 푹 빠져 버리는 것처럼.
골프를 그렇게 멀리했는데 어떻게 다시 빠지게 됐나. 그땐 골프를 원수처럼 여기는 게 온몸으로 표현됐다. 공을 띄우지도 못하고 엉망인 모습을 몇 번 동반자에게 보여주니까 체면도 깎이고 성격도 안 좋아지는 것 같았다. 그때 엄마가 날 붙잡아줬다. “그런 슬럼프 누구나 겪는 일이야. 엄마 말 믿어. 다시 옛날의 네 샷이 돌아올 거야.” 그렇게 엄마와 라운드 하며 트라우마를 극복해갔다. 필드에서 “아무도 없으니까 마음껏 쳐봐” “지금 거 굿 샷이다” “거 봐, 되잖아” 이렇게 소리치며 격려해주시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기라성 같은 골프선수가 와도 날 그렇게 바꾸지 못했을 거다. 이런 정신적인 지지는 가족만이 가능하니까.
그런 라운드 순간들은 절대 잊을 수 없겠다.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부모님과 골프 칠 시간은 꼭 뺐다. 그게 내 나름의 효도였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행복인데 라운드에선 그분들을 독립된 캐릭터로 바라보게 된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승부욕이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소녀처럼 깔깔거리면서 사탕이나 초콜릿을 나눠 먹고 그런 모습을 보면 엄마의 놀이터에 와 있는 느낌이다.
한번은 아빠가 무릎이 안 좋으셔서 라운드 내내 카트만 타신 적이 있었다. 3인 플레이를 엄마랑 둘이서 치게 됐다. 퍼팅을 하는데 그린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저 멀리 아빠가 카트에 앉아 응원해주시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훗날 그 모습조차 못 보게 되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내 바람은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우리 딸 진짜 잘 친다’ 들을 만큼 더 나은 실력을 보여드리는 거다.
때로는 골프가 가족을 끈끈하게 이어준다. 나에게 골프는 가족이다. 추억이 너무나 많다. 2023년 당시 오크힐에서 F&B 매니저로 일하게 된 작은언니 덕분에 PGA 챔피언십을 직관했던 경험도 있다. 김주형 선수가 진흙탕에 빠져 화제가 됐던 때 나도 그 대회에 있었다. 그래서 김주형 선수를 인터뷰했을 때 할 얘기가 많았다. 김주형 선수가 내 조카와 동갑인데 헤어질 때 “또 봬요, 누나” 말해주더라.
실력과 스타성이 대단한 선수다. 이제 가족이 모이면 조카까지 3대가 같이 골프를 친다. 부모님, 형부와 사돈어른까지 함께 칠 때도 있다. 모든 경험이 결국 연결되어 있고 내 마음의 안테나가 골프로 향하고 있는 느낌이다.
올해 TGL 중계를 맡으며 새로운 도전을 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풀 스윙>을 재미있게 봤다. 위키피디아나 관련 사이트를 뒤져가며 선수 프로필, 경기 룰 등 사전 준비를 열심히 했다. 중계는 5번 하는데 그간의 경기는 승부가 일찍 결정되어 아쉬웠다. 3월 25일 열릴 결승전을 기대하고 있다.
골프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나. 일을 하다 보면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 난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일이 좀 잘못되면 ‘틀렸다, 망했다’ 생각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골프를 치면서 ‘다음번에 잘하면 되지’라는 마인드가 생겼다. 자책하고 나에게 엄격하게 굴던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됐다. 골프에선 드라이버를 망쳐도 칩샷을 잘하면 되고 만회해서 버디를 할 수도 있다. 지금은 내 마음 같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려도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안다. 골프가 순간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끝날 때까진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자신감을 내 밑바탕에 심어줬다.
골퍼로서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건강관리를 잘 해서 아프지 않게 오랫동안 골프를 치고 싶다. 나에게 골프는 평생 함께하는 동반자 같은 존재다. 90살이 넘을 때까지 마르지 않는 취미로 삼을 거다.
이은정 매경GOLF 기자(lee.eunjung@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