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세력에게 바치는 글.
qwer
|2025.06.0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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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국가를 흔들기 차원에서 접근하는 세력의 준동에 우려를 표한다."
오전 8시, 중앙방송국은 무표정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치 오래된 자장가처럼 익숙하고 둔한 톤이었다.
“오늘 새벽, 국회는 ‘국가통합 및 시민행동 보호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허위 정보 확산과 불필요한 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며, 국민 대다수의 암묵적 동의를 얻은 결과입니다.”
카메라는 정보를 전하는 기자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환한 국회의사당을 비췄다.
국회 앞에는 박수를 치며 인증샷을 남기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그들 뒤로는 사라진 얼굴들, 말이 없어진 사람들의 자리가 있었지만 누구도 그 공백을 질문하지 않았다.
박만득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박수치는 대중과 국회의원들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무려 10년 전, 그는 이 장면을 꿈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웃고, 환호하며, 입을 맞춰 “이제부터 진짜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때 그는 알지 못했다. 악몽은, 대체로 반복될수록 현실이 된다는 걸.
“정식아.”
그는 여덟 살 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학교 가기 전에, 아빠랑 짧게 뉴스 한 편 보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동자엔 흥미도 없고, 두려움도 없었다. 그건 이 사회의 교육이 성공했다는 증거였다.
5년 전, 국가보안강화법이 통과됐을 때, 만득은 반대 시위에 나섰다.
그는 기자였고, 언론의 자유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는 마지막 세대였다.
하지만 그날, 경찰 대신 그를 끌어낸 건 시민들이었다.
“당신 때문에 나라가 불안해지는 거야.”
“왜 자꾸 갈등을 만들려고 하죠?”
그들은 만득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 “통합을 방해하는 당신이야말로 반역자입니다.”
그때부터 그는 깨달았다. 피가 아닌 박수, 공포가 아닌 동조가 독재의 기초를 다진다는 걸.
권력자는 총칼로 길을 트지만, 그 길을 황금길로 포장하는 건 늘 대중의 두 손이었다.
그 손은 한때 죽창을 들었고, 촛불을 들었으며, 이젠 박수를 친다.
누구를 향해?
진실을 말한 자가 쓰러지는 그 순간을 향해서.
독재는 언제나 환호 속에서 완성됐다.
미래의 기록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만득은 가끔 폐쇄된 도서관의 지하 서고에 내려가 낡은 종이 냄새를 맡는다.
어느 책에선 ‘자유’라는 단어가 붉은 펜으로 지워져 있었고, 다른 책에선 ‘국가라는 단어 아래 '절대선'이라는 필기가 덧붙어 있었다.
그는 이따금 아들에게 묻는다.
“정식아,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그러면 아이는 어김없이 대답했다.
“개혁 시민이요.”
그 말은 이제 하나의 정답이었다. 시험에도 나온다.
거리엔 파란 완장을 찬 '바른역사 시민자율감시단'이 서성이고, 건물 외벽에는 “가짜뉴스를 척결하자”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한때 진보를 외쳤던 사람들은 권력의 품에 안겼고, 보수를 자처하던 자들은 오히려 저항자가 되었다.
모두가 입을 맞춰 말한다.
“우리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오늘의 자유를 잠시 반납합니다.”
그 문장 속 ‘잠시’는 이제 10년째다.
그날 밤, 만득은 한 편의 칼럼을 썼다.
“화합은 침묵이 아니며, 통합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그 글은 10분 만에 삭제되었고, 그에게 돌아온 건 한 통의 통지서였다.
'귀하의 시민점수는 기준치 이하로 하락했습니다. 재교육 대상자로 지정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는 아이를 안았다.
“정식아, 기억해. 아빠는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아빠,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언젠가 너도 이해하게 될 거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라가 얼마나 끔찍한 나라인지를.”
아이는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보다 이내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만득은 깨달았다. 이 싸움은 이미 졌다는 것을.
그의 진실은 아이의 침묵 앞에서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