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란드와 유대인(Greenland & Jew)
최근 그린란드(Greenland)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북극의 외딴 섬이 전세계적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면적이 2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세계 최대 섬인 그린란드에는 단 5만 7천 명의 주민만 살고 있습니다. 섬 면적의 80%가 얼음으로 덮여 있으며, 대부분이 북극권 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린란드 주민의 약 90%는 토착민인 이누이트(Inuit)족입니다. 나머지 12%는 이누이트족이 아닌 사람들로, 주로 중세 시대부터 그린란드에 정착해 온 덴마크 출신입니다. 오랫동안 덴마크의 지배를 받아온 그린란드는 1953년에 공식적으로 덴마크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린란드에는 영구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없었지만, 많은 유대인들이 그린란드를 고향으로 삼았습니다. 여기서는 그중 몇몇 주목할 만한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1. 1500년대 유대인 고래잡이들
아이슬란드 역사학자 빌할무르 오르 빌할름손(Vilhjalmur Orn Vilhalmsson) 박사는 그린란드에 처음 발을 디딘 유대인은 1500년대와 1600년대에 그린란드 주변 북극해에서 일하던 고래잡이(whalers)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이 고래잡이 산업에 종사했고, 네덜란드 고래잡이들이 그 시기에 그린란드와 그 주변 해역에서 조업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오래전 고래잡이 원정 중에 일부 네덜란드 유대인들이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을 북극해에서 민얀(מִנְיָן, 유대교 예배를 위한 최소인원)을 구성하거나 유대교 명절을 지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2. 그린란드를 탐험하다.
프리츠 뢰베(Fritz Loewe)박사는 1895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뛰어난 유대인 기상학자로, 대륙 이동설(continental drift theory)분야의 권위 있는 전문가입니다. 그는 1929년 다른 두 명의 과학자와 함께 그린란드로 건너가 험준한 내륙에 외딴 캠프를 설치하고 그린란드의 혹독한 날씨와 두꺼운 얼음층을 연구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캠프에 물자를 운반하던 중, 고용했던 현지 직원들이 모두 그만두는 일이 발생했고, 뢰베 박사와 두 명의 동료는 영하 54도(섭씨)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 험준한 지형을 직접 헤쳐나가 모든 물자를 운반했습니다. 캠프에 도착했을 때, 뢰베 박사의 발가락은 온통 동상에 걸려 있었습니다. 발가락이 괴저로 손상되자, 동료는 캠프에 있던 가위와 칼, 단 한 자루의 조잡한 도구만을 이용해 그의 발가락을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탐험대의 수석 과학자가 연구 도중 사망하자 뢰베 박사가 팀의 리더를 맡았습니다. 그는 측정을 마친 후 남은 과학자들을 이끌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했습니다. 뢰베 박사는 몇 년 후인 1932년, 아내와 그의 탐험을 영화로 제작한 독일 영화 제작진과 함께 그린란드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이때 제작된 영화 《SOS 아이스버그(S.O.S. Eisberg)》는 1933년에 개봉되었습니다.
나치 선전가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이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뢰베 박사에게 명성과 찬사를 가져다주기는커녕, 당시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당선되는 시기와 맞물렸습니다. 뢰베 박사는 직장을 잃고 잠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딸들과 함께 독일을 탈출했습니다. 한동안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강의를 하다가 호주로 이주했고, 오늘날 멜버른 대학교 기상학과의 사랑받는 설립자이자 호주 과학 연구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3. 그린란드에서 코셔(Kosher) 음식 지키기
1950년대, 그린란드에는 독실한 유대인 간호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리타 쉐프텔로비츠(Rita Scheftelowitz)는 유대인으로, 부모님은 덴마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자랐습니다. 홀로코스트 당시, 그녀는 목숨을 걸고 유대인 아이들을 구한 선생님 게르다 발렌티너(Gerda Valentiner)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발렌티너(Valentiner) 선생님은 전쟁 후 '의로운 이방인(Righteous Gentile)'으로 추앙받았습니다. 성인이 된 리타는 유대교 율법에 따라 코셔 음식을 지켰고, 열렬한 시온주의자였습니다. 그녀는 모험을 찾아 1955년 그린란드 서부에서 일하기 위해 지원했고, 그 해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습니다.
리타의 배는 덴마크에서 온 의사들과 다른 관리들을 태우고 작은 마을 아시아트(Aasiat)에 정박했는데, 마을 주민 거의 모두가 항구에 모여 그들을 환영했습니다. 리타는 곧 자신의 의료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지 이누이트족은 결핵이나 홍역 같은 질병에 대한 면역력이 적었고, 많은 사람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리타는 주로 배를 타고 그린란드 서부 해안 마을들을 돌아다녔습니다. 겨울에 바다가 얼어붙으면 개썰매를 타고 내륙으로 이동했습니다.
리타는 그린란드에서 코셔 음식을 지키는 것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그린란드 해역에서 잡은 코셔 생선을 주로 먹으며 생활했습니다. 겨울 동안 두 차례에 걸쳐 그린란드 서부를 비행하는 비행기를 통해 식량이 투하되었습니다. 그 귀중한 구호품 중 하나에는 덴마크에 계신 어머니가 보내주신 선물, 즉 유월절에 먹을 마짜가 들어 있었습니다.
1955년, 독일계 유대인 부부인 피셔(Fischers)부부는 그린란드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 공동체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 유대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알프레드 피셔(Alfred Fischer)는 훗날 아내와 함께 아시아트의 병원을 둘러보았다고 회상했습니다. 리타는 방문객들에게 자신들도 유대인인지 물었고, 부모님이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를 피해 덴마크에 정착했으며, 그린란드에서의 일을 마친 후에는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아동 보호 시설에서 일하는 것이 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피셔 부부는 리타에게 자신들이 비축해 둔 차와 통조림 파인애플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떠날 때, 리타는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라는 뜻의 " B'Shana b'Yerushalayim, לְשָׁנָה הַבָּאָה בִּירוּשָׁלַיִם" 이라고 말했습니다.
리타는 일자리를 찾아 그린란드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습니다. 대신 이스라엘로 이주하여 히브리어를 배우고 텔아비브에서 일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남편을 만나 결혼했고, 이후 덴마크로 건너가 가정을 꾸렸습니다.
4. 세계 최북단 민얀(מִנְיָן)
그린란드 북서쪽 해안, 북극권 내에 위치한 미군 기지인 피투픽 공군 기지(Pituffik Air Force Base, 구 툴레(Thule) 공군 기지)는 세계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유대인 회중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미국과 덴마크군은 1941년 툴레에 기상 패턴 연구 및 무선 메시지 송출 기지를 설립했습니다. 10년 후, 미국은 툴레 공군 기지를 확장하여 1만 명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는 대규모 군사 기지로 만들었습니다.
툴레 공군 기지로 몰려드는 병사들 중에는 유대인들이 있었고, 마침내 1954년 툴레에는 정식 유대인 단체가 생겼습니다. 공군 2등병 윌리엄 J. 고든(William J. Gordon)은 뉴욕의 예시바 (Yeshiva)대학교 졸업생이었고, 육군 일병 모티스 베트먼(Mautice Betman, 디트로이트 출신) 역시 기도할 수 있는 유대교 공간을 원했습니다. 두 젊은 병사는 함께 기지 안에 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농담 삼아 그곳을 '브나이 툴레(B’nai Thule)', 즉 '툴레의 아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20명이 넘는 군인들이 정기적으로 이 임시 회당에 참석했습니다.
1955년, 뉴올리언스 출신의 열정 넘치는 젊은 유대인 변호사 모리스 버크(Maurice Burk) 중위는 툴레 공군 기지에서 유월절 세데르를 조직했습니다. 그는 마짜, 코셔 음식과 와인, 그리고 하가다(Haggadah)를 기지로 공수해 오도록 했습니다. 그린란드의 다른 기지에서 온 병사들을 포함하여 50명이 넘는 군인들이 참석했습니다.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 유대 신년)에는 기지에 있던 랍비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명절을 위해 툴레로 보내진 통조림 게필테(gefilte)피시를 먹었습니다.
1955년 툴레를 방문한 한 유대인 관광객은 툴레에 주둔했던 유대인 군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버트 J. 메지스트라노라(Robert J. Mezistrano)는 군인은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아랍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는 물론 영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군에 입대했습니다. 루이스 헬리시(Louis Helish)는 베를린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전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그린란드 최북단의 험준하고 척박한 땅에서 이들은 전우애와 유대인 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5. 이스라엘 해군의 첫 번째 함정은 그린란드에서 왔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노스랜드(the Northland)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함선 중 하나였습니다. 버지니아(Virginia)에서 건조된 이 함선은 북극 환경에 적합하게 설계되었으며, 미 해안경비대(US Coast Guard)는 "새로운 순찰선은 해빙의 압력을 견딜 수 있도록 강화 용접 선체를 갖추고 있으며, 코르크 단열재로 추위를 차단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노스랜드호는 알래스카를 포함한 미국 서부 해안에 배치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노스랜드호(the Northland)는 나치의 침략에 덴마크가 함락된 후 미국이 그린란드를 순찰하게 되자 그곳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노스랜드(the Northland)호는 인상적인 승리를 여러 차례 거두었습니다. 1940년, 미국이 명목상 중립을 유지하던 당시, 노스랜드호의 존재는 그린란드 동부에 위치한 노르웨이의 주요 기상 기지에 대한 보급을 차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는 북유럽의 나치 기상 예보를 무력화시키고 독일이 영국 해상 침공 계획을 철회하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1년에는 노스랜드호 승조원들이 노르웨이 상선을 타고 이동하던 독일 간첩들을 나포했습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에도 노스랜드호는 그린란드로 간첩을 실어 나르던 여러 나치 선박을 차단하는 등 다양한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1946년, 노스랜드호는 퇴역하여 하가나(Haganah: 훗날 이스라엘 방위군(IDF)이 되는 유대인 비밀 전투 부대)를 지원하던 미국 회사에 매각되었습니다. 1947년, 이 배는 히브리어로 "나침반(Compass)"을 뜻하는 마쯔펜(מצפן)호로 개명되었고, 영국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미국 해안경비대는 "이 배는 나치 포로를 수용소로 이송하고, 이후 유대인 난민을 팔레스타인으로 실어 나른 유일한 배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이 국가로 건국되었을 때, 마쯔펜호는 이스라엘 신설 해군의 첫 번째 함선이 되었습니다. 이후 이 배는 메디나트 하예후딤(מְדִינַת הַיְּהוּדִים, Medinat HaYehudim) 즉 "유대 국가"로 개명되었습니다.
그린란드는 아름답고 험준하며 접근하기 어려운 섬입니다. 사람이 살기에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유대인 군인, 과학자, 모험가들을 배출해냈습니다.
By Dr. Yvette Alt Miller (Ph.D. in International Relations from the London School of Econom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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