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속에서, 신성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욱 굳게 붙잡는 것이다.
한 친구가 최근에 인생을 뒤바꿀 만한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고함 소리, 싸움,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경찰의 개입, 끊임없는 공포로 점철되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 그녀의 몸과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고,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아버지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다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그렇게 펼쳐졌고, 어른이 된 그녀는 어린 시절에는 결코 누리지 못했던 삶의 균형을 찾았습니다. 이제 40대가 된 그녀는 자신에게 만족감을 주는 일을 찾았고, 헌신적인 배우자와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용서와 속죄, 그리고 관계 회복을 구하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답장을 해야 할까요? 소통해야 할까요? 용서해야 할까요?
용서는 위험한 일입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 특히 심각하고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의나 복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적대적인 이에 맞서 맺는 유대는 서로 만난 적 없는 세대를 연결하고, 현재의 우리와 과거의 우리를 이어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가족, 명예, 자존심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배신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며, 죽은 자에 대한 숭배와 그 숭배가 요구하는 절대적이고 엄숙한 존경의 표현을 배신할 위험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Michael Ignatieff), 『전사의 명예(The Warrior’s Honor)』 참조 )
하지만 용서한다는 것은 우리를 규정하는 틀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전 수석 랍비였던 조나단 삭스(Jonathan Sacks)는 그의 저서 『차이의 존엄성(The Dignity of Difference)』 에서 용서를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부릅니다. “용서는 반응이 아닌 행동이며, 상황에 의해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It is the action that is not the reaction. It is the refusal to be defined by circumstance).”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보다 미래를 더 굳게 붙잡는 것이지만, 때론 과거, 심지어 고통스러운 과거조차도 붙잡을 가치가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언제 과거에 집착해야 하고 언제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파라샤 테루마(תְּרוּמָה)에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용했던 성막의 설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많이 나와 있으며, 그 설계도에는 다음과 같은 지시 사항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설계도 속에 계약의 돌판을 넣을 성궤 위에 서로 매우 다른 두 신화적 존재가 서서 마주 보게 하라는 지시가 숨겨져 있습니다(라비 바히야, 출애굽기 25:18 주석; 요마 54a) 이 존재들은 서로가 마주 보며 서 있을 것이라 명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5:17-22). 이 존재들은 한때 하나님의 분노를 대변하던 존재들로, 의로운 분노를 (창세기 3:24)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신성한 존재가 지상에 머물 공간을 의미합니다. 바로 팔을 뻗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이 피조물들 사이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고대 성막의 전체적인 목적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날 때, 우리 사이의 공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편지를 받은 제 친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현실적으로 그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상처받은 건 어른 여성이 아니라 아버지 없이 자란 어린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그 아이가 그토록 원했던 사랑스럽고 안전한 어린 시절을 되돌려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그녀의 미래에 가장 도움이 될까요?
그녀는 다른 모든 억울한 피해자들처럼 용서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은 피해자의 절대적인 권한이며,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리고 과거의 자신과의 인연을 끊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람밤(Rambam, 마이모니데스)은 피해자가 세 번의 용서 간청을 거부하면, 이전에는 무고했던 피해자도 스스로 죄를 짓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것은 세상의 신성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 분노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분명히 거룩함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지 않거나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거룩함이 있을까요?
신화 속 짐승들이 에덴동산을 지키던 시절, 그들은 불타는 정의의 검을 휘둘렀습니다. 그들은 경계를 지키고 에덴동산을 더럽히는 자들에게 정의를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맡은 바 임무를 다했지만, 신성함이 자리할 여지는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마주 서서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을 때, 비로소 그들 사이에 신성한 존재가 거할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By Rabbi Brent C. Spod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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