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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밥: 기 사부아

Nitro |2026.09.29 14:14
조회 1,534 |추천 5

 

홍차 사냥을 마치고 쇼핑백 짊어지고 영차영차 찾아간 곳은 프랑스 조폐공사 건물.


이 고풍스러운 건물 (파리 건물들이야 대부분 고풍스럽긴 합니다만) 2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기 사부아가 목적지입니다.


 

셰프 기 사부아가 입구에서부터 손님들을 맞이하며 환대 해 줍니다.


고든 램지의 스승이라고 하면 마르코 피에르가 먼저 떠오르는데, 기 사부아 역시 고든 램지가 프랑스에서 일할 무렵 그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멘토로 삼은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밖에는 이 레스토랑 오픈하고 20년 동안 별 세 개를 유지한 것으로도 유명하구요.


하지만 요리사 계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보다도 토마스 켈러가 기 사부아의 밑에서 배웠다는 사실에 좀 더 중점을 두기도 합니다.


페르낭 푸엥 - 트루아그로 형제 - 기 사부아 - 고든 램지와 토마스 켈러로 이어지는 현대 프렌치의 중요한 연결 고리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그런 '역사적인' 중요도 보다는 장사꾼이 아닌 식당 주인으로 남은 그의 선택이 훨씬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요.


 

물냉이Watercress를 주 재료로 한 타르틀렛과 비시수아즈(차게 먹는 수프), 그리고 튀일이 아뮤즈부쉬로 나옵니다.


일식 업장에서 요리 배운 사람이라면 보통 크레송이라고도 부르는, 약간 매운 맛이 나는 잎채소입니다.


여기에 짭잘하고 고소한 재료들을 더해 수프와 작은 타르트를 만들었네요. 막 화려하지는 않은데 입맛을 돋구는 간단한 한입거리들입니다.


 

식전빵.


꽤나 딱딱한데다가 버터를 안주는지라 그냥 조금 뜯어먹으며 기다리는 용도.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버터를 안줘?! 하고 놀랐네요.


그런데 잠시 후에 더 맛있는 빵들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아쉬움이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세컨드 아뮤즈로 나온 '캐비어를 곁들인 비트 젤리'.


알랭 뒤카스에서 멍때리고 있다가 어뮤즈 내용물이 뭔지 하나도 못알아들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이번에는 정신 단디 차리고 들었습니다.


젤라틴으로 굳힌 비트에 캐비어를 얹고 크리미한 소스를 부어줍니다.


"와, 캐비어 좋아~ 추가금 내지 않고 먹는 캐비어라니!"라고 룰루랄라 하며 먹었습니다.


나중에 뭐가 나오는지 몰랐으니 이런 순진한 반응이었죠 ㅎㅎ.


 

Supreme of chicken, foie gras and artichoke, with truffle vinaigrette


트러플 비니거렛 소스를 곁들인 치킨 수프림, 포아그라, 아티초크.


일단 소스 없이 한 조각 잘라 먹는데, 입에 들어와서 녹는 순간 '그래, 이거지!'를 마음 속으로 외쳤습니다.


전날 먹었던 푸아그라는 뿔닭 풍미에 눌려서 아쉬웠는데, 이건 닭과 아티초크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푸아그라를 살려줍니다.


소금과 후추 찍어서 한 번 더 먹고, 소스 듬뿍 적셔서 한 입 또 먹고, 따로 제공되는 바삭한 빵에 얹어 먹고 하다 보면 어느 새 몽땅 사라집니다.


재미있는 건 이 레스토랑에서는 소스팬을 아예 식탁에 놔준다는 점입니다. 


소스가 너무 맛있어서 마음에 든다면 빵 더 달라고해서 저 작은 냄비 하나 다 퍼먹을 정도로 빵을 찍어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터 너무 속도를 내면 디저트까지 완주할 수 없으니 꾹꾹 눌러서 참습니다.


그나저나 접시가 베르나르도 에퀴메네요. 


프랑스까지 왔으니 에퀴메 플래티넘 한 장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는데 여러모로 무리인지라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거든요.


실물을 앞에 두니 또다시 뽐뿌가 옵니다만... 참아야 하느니라.


 

Mediterranean bluefin tuna with caviar, Breton-style ragout.


캐비어를 곁들인 지중해산 참다랑어와 브르타뉴식 흰 콩 라구.


앞에서 캐비어 나왔다고 좋아하던 게 우습게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의 캐비어를 얹어줍니다.


참치에 캐비어를 곁들인건지 캐비어에 참치를 곁들인건지 애매한 수준.


프랑스 솔로뉴산 캐비어인데, 러시아산에 비하면 맛은 좀 더 순한데 질감은 더 단단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입 속에서 굴리면 살살 녹는 러시아산에 비해 뭔가 좀 더 톡 터지는 느낌이 있어서 재밌습니다.


여기에 흰 콩을 오랫동안 삶아서 갈아낸 브르타뉴 라쿠 소스를 곁들여 참치와 함께 먹으니 좋네요.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식사를 할 때면 코르크를 모으는 게 취미인데, 문제는 혼밥에서 코르크 모으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혼자서 한 병 다 마시기엔 힘들고, 하프 보틀이나 하나 따서 겨우 마시는데 이게 선택지도 좁고 코스 요리를 다 아우르기도 쉽지 않다 이거지요.


그래서 궁합이 잘 맞는 메뉴 나올때만 마시다보니 하프 보틀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기 사부아처럼 와인 페어링이 있는 경우는 더 고민하게 됩니다. 음식에 잘 맞는 와인이냐, 절반 정도 커버하면서 코르크 챙길 수 있는 하프 보틀이냐 한참 생각하게 되지요.


그렇게 와인리스트 보면서 고민하고 있으니까 소믈리에가 아주 쿨하게 답을 내줍니다.


"그러면 그냥 와인 페어링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젤 마음에 들었던 와인을 알려주면 그 코르크를 줄게요."


감사! 압도적 감사!

​


그렇게 해서 와인 네 잔으로 구성된 페어링을 했습니다.


첫 번째 와인은 이브 레치아 랄트루 비앙쿠 2022.


I.G.P. Île de Beauté ‘L’Altru Biancu’ 2022 — Yves Leccia


코르시카 섬에서만 나는 비앙쿠 젠틸레 100%로 만들었고 드라이하고 살짝 짭잘한 느낌에 트로피칼 과일향이 살짝 풍기는 금색 와인입니다.



와인이 참치와 궁합이 잘 맞아서 홀짝홀짝 먹다보니 다 비웠는데, 잔을 가져가더니 똑같은 걸 한 잔 더 채워줍니다.


"엥? 나 이거 방금 마셨는데? 두 번째 와인 나올 차례 아님?"하니까 "이 와인이 두 번째 앙트레도 잘 어울려서 한 잔 더 나오는 거임. 두 번째 와인은 다음 코스에 나와요."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세상에마상에 와인페어링에 리필이라니.


‘Raw and cooked’ lobster on coral, violin courgette with verbena, lobster ‘leather’


두 번째 앙트레는 랍스터 난소로 만든 소스를 곁들인 두 가지 방식으로 요리된 랍스터입니다. 레몬 버베나로 향을 낸 프랑스 애호박과 랍스터 가죽이 함께 나옵니다.


랍스터 가죽이라고 하니까 좀 웃긴데, 랍스터 풍미가 가득한 얇은 튀일입니다. 비스퀴 만들듯 껍질을 갈았거나 코랄(랍스터 난소)을 튀일 반죽에 섞었거나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약간 일본풍 해산물 센베 느낌도 나구요. 



 

두 번째 와인.


푸이 퓌세 프리미에 크뤼 앙 세르비 도멘 파미유 파케, 2022년산입니다.


Famille Paquet — Pouilly-Fuissé 1er Cru ‘En Servy’ 2022.


부르고뉴의 전통적인 샤르도네라고 할 수 있는 와인. 


시트러스와 미네랄리티가 눈에 띄는 와인으로, 포텐셜이 그렇게 높을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좀 빨리 열어서 먹어도 괜찮은 거 아닐까 싶습니다.


"오, 나 푸이 퓌메는 먹어봤는데 푸이 퓌세는 처음 먹어봐!"하니까 "그래? 그럼 충분히 즐겨보셈."하더니 곱배기로 따라줍니다.


여기 직원들 왜 이렇게 유쾌해 ㅋㅋㅋ


 

Artichoke soup with black truffle, layered truffled mushroom brioche.


기 사부아의 시그니처, 아티초크 수프입니다. 트러플 버터와 브리오슈가 함께 나옵니다.


버터 안나온다고 아쉬웠던 마음은 트러플 버터를 한 컵 가득 내주는 데서 흔적없이 사라집니다.


기 사부아가 어릴 적 과일조각 넣은 브리오슈를 수프에 찍어먹었던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서 만든 시그니처 메뉴입니다.


일단 트러플 슬라이스가 둥둥 떠있는 수프를 몇 스푼 먹고, 브리오슈에 부드러운 트러플 버터를 듬뿍 발라서 수프를 찍어 먹습니다.


고소하고 짭잘하면서 트러플과 아티초크의 풍미가 살아있는 수프도 맛있지만, 버터 바른 브리오슈를 찍어 먹을 때의 파괴력이 무시무시합니다.


왠지 어릴적 오뚜기 수프에 식빵 찍어먹던 추억도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내가 안톤 이고였나 싶기도 하고...


감동받아서 먹고 있으려니까 수프 냄비를 들고 가던 웨이터가 "마음에 드냐"고 묻길래 "넘나 맛있음"했더니 한 국자 더 퍼줍니다.


"여기 파인다이닝이 아니라 무한뷔페였냐고 ㅋㅋㅋ"하며 맛있게 먹어줍니다.


 

세번째로 나온 와인은 샤토뇌프 뒤 파프 2022년산, 도멘 샤르뱅.


Châteauneuf-du-Pape 2022 — Domaine Charvin.


레드와인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CDP입니다. 사실 아는 게 이거밖에 없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서도.


교황을 아비뇽에 박아놓고 와인이나 즐기면서 속세에는 신경 끄라고 하다보니 만들어진 맛있는 와인이라는 배경 스토리도 마음에 들고


와인 시험 칠 때 무르베드르, 시라, 그르나슈 품종 포도로 만든 와인... MSG가 들어가서 맛있는 와인...으로 외웠던 기억도 나서 좋습니다.


검붉은 과일 느낌, 꽃과 향신료가 뒤섞인 허브향이 깔려있는 와인입니다.


"샤토뇌프 뒤 파프! 나 이거 좋아해."했더니 "그래? 좋아하는 거면 많이 마셔야지."하고 또 곱배기로 따라줍니다.


 

메인 나오기 전에 팔레트 클렌져인가? 하고 받았는데 알고 보니 잠시 후에 나올 오리 심장 구이입니다.


쫄깃하니 씹는 맛이 있는 오리 심장을 먹다 보니 그림형제의 "당나귀 양배추"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젊은 사냥꾼이 마법의 오리를 잡아서 그 심장을 먹고 매일 베개 밑에 금화가 생겨났는데 마녀가 이 사실을 알고 사냥꾼에게 토하는 약을 먹인 후 자신이 그 심장을 낼름 주워먹고, 사냥꾼은 먹으면 당나귀로 변하는 양배추를 마녀에게 먹여서 복수하는 뭐, 그 비슷한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매일 금화가 생긴다면 남이 먹고 토한 심장 쪼가리를 주워먹을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한참 고민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심장을 먹었으니 본격적으로 오리를 먹을 차례입니다.


메인으로 나온 요리는 ‘Spatchcock’ duck. 번역하자면 펼쳐서 구운 오리 요리 정도 되겠네요.


프랑스어로는 엉 크라포딘en crapaudine이라고 하는데, 닭이나 오리를 반으로 갈라 펼친 모습이 마치 두꺼비(crapaud)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소스에 적셔서 나온 오리 고기는 껍질이 바삭하면서도 고기는 육즙이 가득하고 부드러워서 맛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렇게 펼쳐 구운 오리를 게리동 서비스로 옆에서 잘라줬으면 더 좋았을텐데 싶었다는 거.


 

마지막으로 디저트 와인이 나옵니다.


Domaine Muré — Muscat Vendanges Tardives ‘Clos Saint Landelin’ 2018.


도멘 뮈레의 뮈스카 방당주 타르디브 ‘클로 생 랑들랭’ 2018년산.


가격 확인은 안해봤지만 디저트 와인인데 제일 고급 아닌가? 싶은 그런 와인.


방당주 타르디브는 늦게 수확해서 당도를 높인 와인을 의미하는데, 열대 과일의 풍미와 달콤함 그리고 그에 뒤지지 않는 산도가 묵직하게 받쳐줍니다. 지금 뜯은 게 조금 아쉬울 정도로 포텐셜이 있어 보이는 스위트 와인입니다.


 

전래동화에서 엿장수 소리 들리면 뛰어나가는 아이의 이미지는 서양에선 아이스크림 트럭 소리 들리면 뛰어나가는 아이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달다구리들이 눈 앞에 어른거리면 나도 모르게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그 본능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른들의 가슴 속에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디저트 먹을 때가 되니 엄청난 포스를 뽐내며 들어오는 디저트 카트를 보자 환호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뛰어오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아냈지요.


물론 빵 카트나 치즈 카트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역시 트롤리의 최고봉은 디저트 트롤리입니다.


 

디저트 트롤리가 다른 테이블부터 한 바퀴 도는 동안 정식 디저트가 먼저 나왔습니다.


얼린 맥주를 곁들인 로즈마리와 복숭아.


Peach-rosemary and iced beer.


맥주를 넣어서 만든 차가운 소스 위로 설탕 틀에 담긴 소르베가 복숭아 절임과 로즈마리 사탕과 함께 나옵니다.


길쭉한 로즈마리 설탕이 파삭파삭 부서지는데 부드러운 복숭아와 소르베를 함께 먹으니 질감에서도 맛에서도 서로 보완해줍니다.


이것만 먹으면 좀 허전하다 싶을 것도 같은데 와인과 함께 먹으니 딱 좋네요.


 

그리고 드디어 디저트 트롤리!


일단 무화과 파이와 조각 케이크를 한 조각씩 담고, 은색 통 안에 가득한 아이스크림 중에서 라즈베리 소르베를 선택합니다.


트롤리 아래층에 놓여있던 구리팬에서 끓고 있던 살구 파이도 한 스쿱 담구요.


마음같아서는 다른 아이스크림과 푸딩도 모조리 조금씩 먹어보고 싶은데, 코스 막바지에 다다르니 그건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만 듭니다.


기 사부아는 이 런치 코스를 "Keep it simple"이라고 이름붙이고 "약 90분에 걸친 미식 체험"이라고 설명했는데


전혀 간단하지도 않고, 시간은 90분이 아니라 세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디저트를 보면 위가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긴 공간도 다 채워넣어서 에스프레소 한 잔 먹고 싶은 것도 참을 수 밖에 없는 만복감입니다.


중간에 수프와 소스와 빵을 무한리필 고깃집에 온 것 마냥 퍼먹지 말았어야 하는데,하는 후회가 몰려옵니다.


 

"옥이의 배는 최대한도로 늘어났고 거반 바람 넣은 풋볼만치나 가죽이 탱탱하였다. 

그것이 앞으로 늘다 못하여 옆구리로 퍼져서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숨도 어깨를 치올려 식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 꿀 바른 주악 두 개는 어떻게 먹었을까. 

상식으로는 좀 판단키 어려운 일이었다. 

하여간 너 이것은 하고 주악이 나왔을 때 옥이는 조금도 서슴치 않고 받았다. 

그리고 한 놈을 손끝으로 집어서 그 꿀을 쪽쪽 빨더니 입속에 집어넣었다. 

그 꿀을 한참 오기조기 씹다가 꿀떡 삼켜본다. 가슴만 뜨끔할 뿐 즉시 떡은 도로 넘어온다. 

다시 씹는다. 어깨와 머리를 앞으로 구부려 용을 쓰며 또 한 번 꿀떡 삼켜본다. 

맛깔스러운 그 떡맛. 생전 맛 못보던 그 미각을 한 번 즐겨보고자 기를 쓴 노력이다. 

만약 이 떡의 순서가 주악이 먼저 나오고 백설기 팥떡 이렇게 나왔다면 옥이는 주악만으로 만족했을지 모른다. 

그러고 백설기 팥떡은 단연 아니 먹었을 것이다." 


- 김유정 단편소설 "떡" 중에서


소설 속의 옥이마냥 기를 쓰며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진짜진짜 마지막으로 나온 셔벳으로 입가심을 합니다. 


맛이 없다면 끄트머리만 살짝 떠먹고 말았으련만, 눈물나게 끝까지 맛있습니다.


이거 하나가 엄청난 맛이라기보다는 코스 전체가 잘 짜여진 작품과도 같아서 그 마지막 마침표를 찍지 않을 수가 없었달까요.


 

크리스티앙 르구비와 엠마뉘엘 들라콩테가 쓴 "위대한 셰프들(원제:Sacrés chefs)"이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현재 프랑스 음식문화를 대표하는 여덟 명의 요리사들과 그들의 음식 철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 사부아는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해당 섹션의 제목은 "손님". 


단순히 음식을 파는 장사꾼이 아니라 주인(Host)로서 자신의 레스토랑을 찾아온 사람들을 환대(Hospitality)하는 그의 신념이 담겨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 사부아는 이 책의 첫 장을 시작했던 알랭 뒤카스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또 다른 길을 걷는 요리사입니다.


세계 곳곳에 자신의 레스토랑이 있고, 현존하는 요리사 중 가장 많은 미슐랭 별을 갖고 있으며, 커피와 초콜릿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알랭 뒤카스는 누가 봐도 세계 최고 레벨의 요리사입니다.


하지만 감각을 날카롭게 가다듬고 예술 작품 감상하듯 맛을 음미하는 파인다이닝이 아니라, 즐거운 분위기에서 몸과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는 경험이라면 기 사부아를 그 앞에 놓게 되네요.


파리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맛있었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파리에서 먹은 것 중 가장 프랑스다웠냐?하면 그것도 아니예요.


하지만 인생 통틀어 가장 즐겁게 먹었던 식사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지금은 폐업한) 뉴욕의 불레이, 그리고 파리의 기 사부아가 가장 먼저 생각날 듯 합니다. 


혼밥인데도 너무나 즐겁게 식사를 했고, 중간에 셰프가 와서 "음식은 어떤가요? 다 마음에 듭니까?"했을 때 "상상했던 거 이상으로 다 좋네요. 미래에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저도 이런 레스토랑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예요."라고 대답했더니 일 초도 지나지 않아 "오늘은 이곳이 당신의 레스토랑입니다, 마음껏 즐기세요"라는 대답이 바로 나오는 건 기 사부아의 인생이 그렇게 즐거운 손님 맞이로 가득하기 때문일 겁니다.


점심 코스메뉴 가격은 295유로에 와인 페어링 추가해서 410유로, 대략 65만원 정도에 먹은 셈입니다.


영수증과 함께 내일 아침에 먹으라고 챙겨주는 브리오슈를 한 개 받아들고 식당을 나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푸이 퓌세 코르크도 잊지 않았구요.


하지만 가장 뿌듯한 기념품은 따로 있습니다. 한국에서부터 혹시 몰라서 챙겨 간 "위대한 셰프들(원제:Sacrés chefs)"에 기 사부아의 사인을 받아 챙긴 거지요.


왠지 들어갈 때보다 몸무게나 손에 든 짐 무게나 두 배는 늘어난 느낌입니다. 그리고 기분은 세 배 정도 좋아졌네요.

추천수5
반대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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