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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9)

리드미온 |2004.04.18 00:31
조회 5,904 |추천 0

"이거 보세요. 여자 친구라고 하면 단박에 누군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말했다.

여자들의 공공의 적은 '바람둥이'란 사실을 남자들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바람둥이 한 사람만 레이더에 포착되면 여자들은 언제나 함께 모여 응징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제 나이가 30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한 여자만 사귀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 박진우란 사람...바람둥이에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잘못을 인정해도 시원찮을 판에 오리발을 백개쯤 준비한 사람 같았다.

 

"여러 사람을 사귀든 한 사람을 사귀든 내가 알 바 아니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여자가 내 뺨을 때렸는데 당신이 모른다고 하면 이상한 거죠..."

 

"혹시, 루이 비똥 가방을 들고 있던가요?"

 

진우는 내 말에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그렇게 물었다.

진우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들었던 핸드백이 작은 백이었는데 루이비똥을 상징하는 LV자가 겹쳐진 모양이 있었던 것 같았다.

 

"네. 아마도...."

 

"아하...은경이군...."

 

은경, 아까 나의 뺨을 때린 여자의 이름이 은경이란 말이지....

이름은 알아냈고 도대체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도대체 왜 여길 당신 집으로 알고 있는 거죠?"

 

"내 집 맞지 않습니까?"

 

"내 집이라뇨? 엄연히 이중계약이니까 나와 반반씩 권리를 갖고 있는 거죠. 그런데 어떻게 미리 그 여자가 여길 당신 집이라고 알고 있는 거냐고요?"

 

"그건...."

 

갑자기 레종이 야옹거리며 내 무릎에 와서 앉느라고 잠시 대화가 끊겼다.

 

"아. 불쌍한 레종...현수한테 버림 받더니 금방 새주인하고 친해졌네...돈 때문에 애완동물까지 버리다니..."

 

난 진우의 말에 나에게 애초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현수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현수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진우의 애인에게 뺨을 맞을리도 없지 않은가...

 

"아무튼 어떻게 된 거냐고요? 나도 알아둬야 할 거 아니에요? 내일은 누가 와서 박진우 내놓으라고 뺨을 때릴지도 모르는 일이고..."

 

"하하...걱정 마세요. 이젠 집에 여자 친구 데리고 오는 짓은 안 할 겁니다."

 

제발...당신도 불청객인데 불청객의 동반자는 만들지 말아줬으면...

 

"은경이란 그 여자...사치가 심해요. 공주병 환자죠. 그 루이비똥 가방 제가 사준 거에요. 루이비똥 가방 하나 갖는게 소원이래나 뭐래나...그래서 거금 들여서 사줬죠."

 

나는 아까 잠시 그 여자가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런 명품으로 치장한 외양 때문이었단 말인가. 아니다. 나는 그냥 느낌으로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여자가 여자를 보는 느낌으로 말이다.

 

"섹스도 호텔 아니면 싫다고 해서 제가 돈이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현수한테 양해를 구하고 제 집이라고 한번 데리고 왔었어요."

 

그렇다면, 이 남자는 은경과 잠자리를 하고 차버렸다?

마음에 없는 여자와 섹스를 했다고?

이 남자 지금 제 정신인가?

거기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섹스 경험을 술술 말하는 남자는 정말 밥맛이다.

 

"도대체 여자 친구는 몇 명이고 그 중에 섹스한 여자는 몇 명인 거에요?"

 

"자꾸 절 바람둥이로 모는데 순수한 남자라고요. 그 여자는 정리했고 현재 사귀는 여자는 한 명 뿐입니다. 다만 다른 좋은 여자가 나타나면 전에 만났던 여자를 정리하는 것 뿐입니다.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는 거고요."

 

진우는 너무 단순하게 대답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잔인한 말이다.

사람을 사귀면서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지금의 애인을 버리다니...

 

"제 생각은 좀 다른데요. 지금 만나는 사람이 최고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 나타나도 이 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해야 그게 사랑...아닌가요?"

 

"사랑....이요? 아, 몇 년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전 사랑 같은 거 안 믿습니다. 남녀 관계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거래가 있을 뿐이죠. 몸을 주고 마음을 주는 것도 다 거래입니다. 뭔가 기대하는 게 있기 때문에 자기 것을 주는 거죠."

 

이 남자의 말을 들으며 내가 3년 넘게 애인 없었던 사실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이런 남자에게 걸려들었다면? 상상만해도 바로 지옥 그 자체이다.

 

"전 사랑을 믿어요. 다만 나한테 없을 뿐이죠."

 

"그러니까 당신이 이중계약이나 당하는 겁니다."

 

내가 화가 나서 한숨을 쉬는 사이 레종은 내 무릎의 떨림을 느끼고 다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레종....어디 가니?"

 

"거봐요. 지 맘대로 가버린 애완동물을 애타게 찾다니...보기 보다 맘 약한 사람이군요."

 

내가 화를 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진우란 남자는 나의 약점을 파고들어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바람둥이이고 비열한 인간에게 작업 대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이 약해요. 다만 언제 얼마나 자주 그걸 표현하느냐에 다른 거죠."

 

"맞아요. 그래서 전 여자가 필요해요. 사랑이 없더라도 말이죠."

 

나는 더 이상 진우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세상에 나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네. 잘 알아서 하세요. 다만 다시 당신 여자친구라고 누군가 찾아오면 아주 친절하게 말해주겠어요. 지금 말한대로요. 박진우란 남자는 당신과의 거래가 끝난 거 같다. 지금 다른 여자와 거래중이다, 라고요."

 

"맘대로 하세요. 저 쫓아다니는 여자는 관심 없습니다."

 

진우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도 나에게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목욕탕은 쓰셨죠? 저 씻고 자야겠습니다."

 

진우는 목욕탕으로 가버렸고 나는 내 침대에 누웠다.

박진우란 남자가 나에게 어떤 피해를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존재 그 자체로 피곤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이...이것 봐요."

 

목욕탕에서 들리는 물 소리가 생각보다 길다고 생각하며 잠이 막 들었던 순간이었다.

진우는 처음 불청객으로 나타났던 그 순간처럼 날 깨우고 있었다.

 

"왜요?"

 

"목욕탕의 비누 제 거거든요. 다른 거 쓰세요."

 

나는 현수가 쓰던 비누라고 생각했고 새로 비누를 꺼내느니 먼저 있던 것을 쓰자는 생각에 별 생각 없이 썼었다. 진우란 남자는 보통 남자와 다르게 비누 하나까지 남의 거 본인 거 구별해서 쓰는 사람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말은 이렇게 잠든 사람을 깨워서 해야 한단 말인가.

 

"알았어요. 잠 자는 데 깨우는 짓 좀 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얼굴 볼 시간 없는데 지금 아니면 언제 얘기합니까?"

 

"사람이 입만 있나요? 앞으로 제가 없을 때 하고 싶은 말은 포스트잇에라도 쓰세요."

 

"알았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진우는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나에게 상체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불을 껐다.

무시하고 싶은 존재는 무시하면서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는 사이 먼저 잠이 든 진우는 코까지 골며 신나게 숙면을 즐기고 있었다.

 

박진우, 당신을 내 인생 최고의 불청객으로 임명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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