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만나는 날이다.
엄마에게 정훈에게 연락처를 가르쳐줬단 얘기를 들은 후부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나는 정훈일거라는 기대감에 들떠 전화를 받았다.
정훈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엄마에게 얘기를 들은 후 이틀 정도가 지나서였다.
'여보세요'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단번에 정훈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늘 아침 저녁으로 늘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던 목소리...
아마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나의 뇌 깊은 곳에 저장되어 있을 그 목소리...
'민아니?'
'응.'
'잘 지냈니?'
'응. 그럼...'
'너 회사에서 차장되고 집도 구해 나갔다고 너희 어머니가 자랑하더라...'
'넌?'
'나도 회사 잘 다니지...'
잠시 침묵이 흐른다. 너무 떨려 정훈의 말에 간신히 대답을 했을 뿐이고 겨우 몇 마디 질문을 하고는 할 말이 없어졌다.
'한번 만날래?'
'응'
나는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무엇인가 홀린 것만 같이 아무런 고민도 없이 너무 쉽게 그러자고 말이 나왔다.
'내일 저녁 명동 일마레 어때?'
일마레라면 우리가 1000일 기념 식사를 했던 곳이었다. 그때 약속은 천백일, 천이백일도...영원히 함께 있자고 했었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식사였다. 그 후 천일쯤 지난 것 같았다.
'응.'
정훈이 명동 일마레를 얘기하자 나만 정훈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훈도 나에 대한 추억을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구나....
정훈과 전화를 끊고 약속 시간이 되기까지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몰랐다.
아침에 요란스레 치장을 하는 모습을 보며 현수는 남자친구를 만나느냐고 묻기도 했다.
현수는 일자리를 구하는지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인터넷 취업사이트에 매달려 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서로에게 생긴 예의는 서로가 전화를 할 때는 침묵해준다는 것이었다.
때로 통화를 하고 있을 때 상대방의 전화벨이 울려 곤란할 때도 있기는 했지만....
일마레에서 삼 년만에 처음 만난 정훈은 참으로 오묘한 분위기였다.
예전과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이 변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정훈이 3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했다.
얼마만에 나를 잊었고, 얼마만에 나를 다시 생각했는지...
"뭐 먹을래?"
정훈은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삼년만의 재회치고는 무드 없는 질문이었지만 역시 정훈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나의 불만도 정훈이 무드가 없다는데 있기도 했다.
"해산물 스파게티..."
나는 주저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도 그걸 먹었었다.
"그래....넌 여기서 늘 그것만 먹더라..."
정훈도 그때처럼 그라탕을 시켰다. 어떻게든 정훈이 쌀이 들어간 음식이 좋다고 했었다.
"그런 적 없니? 인생을 한 삼년 쯤 뒤로 가서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
왜 없으랴...삼년만이랴...돌아갈 수 있다면 십년 쯤 돌아가서 대학도 바꾸고 전공도 바꾸어서 다시 살아보고 싶다. 아니면 아예 대학을 가지 않던가....그때와 지금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많이 바뀐 것 같았다.
정훈이 한 질문은 아마도 날 염두해두고 한 말이라고 생각되었다. 삼년 전이라면 우리가 헤어지던 그 시점이었으니까...
"그땐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뻔뻔해지는 게 정말 싫었어. 직업도 없는 내가 널 붙들고 있는 게 남자다운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조금만 버티면 좋은 날이 올 수도 있었는데...1년간 백수였지만 그래도 1년 후엔 취직했어. 조금 늦었을 뿐인데...난 그게 안된 거라고만 생각했었지..."
나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다시 정훈을 만날 날이 올거라고 생각했다면 정훈과 헤어지고 무작정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도피 여행 같은 것은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휴가 처리를 해서 복귀할 수 있었지만....
모든 게...끝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나만 실연당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구의 자전이 왜 멈추지 않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감정이 세월에 무디어지는 것을 보며 그럭저럭 견디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정훈을 드라이브를 하자고 했다.
삼 년 전에 꿈도 못꾸는 일이었다. 우리는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다가 밤늦으면 택시를 이용하는 평범한 데이트만 했었다.
"회사에서 1년이 지나 무작정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처음 차를 운전하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 밤늦은 시간에 널 데려다 주면서 속으로 차가 있으면 좋겠다고 많이 생각했었거든...그런 기억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정훈은 그 말을 하면서 내 손을 잡았다. 정훈의 촉감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손을 잡을 때마다 약간 빨라지는 가슴의 고동소리도 예전 그대로였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나타다 삼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정훈이 차를 세운 곳은 한강변이었다.
차 유리창으로 강바람이 들어왔다.
삼년 전에는 이렇게 한강변에 함께 온 적이 없었다. 이곳은 그저 차가 없으면 오기 힘든 곳이라고만 생각했었다.
"네가 언젠가 한강에 함께 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어. 내가 차도 없고 귀찮으니 거절했었지...그게 두고두고 미안하더라..."
정훈이 떠나고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집앞에서 헤어질 때 정훈이 키스를 하려고 하면 누가 본다고 늘 투덜거리며 억지로 했던 일, 내가 해준 요리를 먹어보고 싶다고 했는데 하나도 해준 적이 없던 일...그리고 여자친구로 자기 남자친구들 모임에 가달라고 했을 때 거절했던 일....
온통 미안한 일 투성이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이 되어서는 그렇게 했어도 떠날 사람은 떠났을 것이라는 나름대로 위안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우리...다시 시작하자...!"
정훈이 강바람에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는 나를 보며 말했다.
순간 나는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다시...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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