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울 것이냐, 피할 것이냐?
일제(日帝)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먼저 10월 2일 오후 2시에 국경에 배치돼 있던 경원수비대(慶源守備隊) 80명을 침입시켰고, 이어서 경원헌병대(慶源憲兵隊) 6명과 19사단 소속의 안부(安部) 소좌(少佐)가 이끄는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 및 그 외에 국경 수비대 30명까지 합하여 3일 밤까지 훈춘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또한 일제는 대체로 동서남북 사방에서 일본 군대를 신속하게 간도로 침입시키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두만강을 넘어 남방에서는 조선주차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의 78연대 3대대, 그리고 헌병대 및 경관대가 합세하여 간도로 들어왔다. 이 병력은 다시 3개 지대(支隊)와 사단직할부대 및 국경 수비대로 나뉘어 토벌구역을 분담하였다.
이들의 부대 구성과 작전지역을 살펴보면, 이소바야시[磯林直明] 지대는 경원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훈춘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대에 대한 토벌의 주력이 되며, 독립군을 나자구(羅在溝) 방면으로 추격하여 삼차구(三侘口) 방면에서 남하하는 포조군(浦潮軍)과 공동작전을 벌이도록 되어 있었다. 기무라 지대는 보병 제38여단 사령부에서 지휘하며 보병 제75연대의 기관총 소대 2개와 특종 포대, 보병 제78연대 제3대대 기관총소대 1개와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3중대, 야포병(野砲兵) 제25연대 제2대대 야포중대 1개와 산포(山砲)소대 1개, 공병(工兵) 제19대대 제2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기무라[木村益三] 지대는 온성으로부터 월강하여 왕청현(汪淸縣) 방면으로 진출, 그 일원의 독립군에 대한 토벌을 담당하였다.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을 대상으로 토벌작전을 수행하되, 특히 서대파(西大坡)·대감자(大坎子)·백초구(百草溝)·합마당(蛤摩塘) 등지를 반복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기무라 지대는 보병 제76연대 산하 기관총 소대 1개와 특종포대 및 통신반, 산포병(山砲兵) 제1중대, 공병 제19대대 제1중대의 1개 소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아즈마[東正彦] 지대는 회령 등지에서 월강, 용정 방면으로 진출하여 그 일원을 소탕하는 주력부대가 되었으며, 무산에서 북상하는 제20사단의 부대와 합동작전으로 독립군이 안도·돈화 방면으로 진출하는 것을 저지·초멸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아즈마 지대는 보병 제37여단 사령부의 지휘를 받아 보병 제73연대와 특종포대, 보병 제74연대 제2대대와 기관총 2소대 및 통신반, 기병 제27연대, 야포병 제25연대 제1대대와 야포병 1중대, 산포병 1중대와 공병 제19대대 제3중대, 약간의 헌병이 속해 있었다.
이 밖에 사단직할부대로는 제19사단장인 자작(子爵) 다카시마 도모다케[高島友武] 중장(中將)의 휘하에 보병 제74연대 제1대대 본부와 제3중대, 항공기반·무선통신반·비둘기통신반으로 구성되었으며, 국경수비대가 있었다.
또한 동쪽으로눈 중소(中蘇) 국경을 넘어 간도로 일본군이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찍이 시베리아에 침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14사단·제11사단 토문자(土門子) 지대(支隊)·제13사단 우입(羽入) 지대였다. 이들은 훈춘(琿春)·초모정자(草帽頂子)·토문자·수분대전자(銖芬大甸子) 등에서 주력부대인 19사단과 연합하여 한국인들을 학살·탄압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되어 있던 안서(安西) 지대(支隊)가 보병중대 3개와 기관총대 4개, 기병소대 1개로 편성되어 간도로 진격해 왔으며, 마지막 서쪽으로는 관동군(關東軍) 제19연대 1개 대대가 무순(撫順)·흥경(興京)·통화(通化)·관전(寬甸)·안동(安東) 등에, 그리고 기병 제20연대가 해룡(海龍)·유하(柳河)·통화·환인(桓仁)·관전·안동 등의 지방을 향해 침입해 왔다.
이렇게 간도를 침입한 일본군은 동서남북에서 포위작전을 통해 독립군을 압박하였으며, 이 때에 토벌작전에 동원된 일본의 전투병력은 총 2만 5천여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외에 일본군은 항공기까지 동원하여 한국인 집단거주지인 용정촌(龍井村)에 폭탄을 투하하는 등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10월 12일과 13일 사이에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지역에서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이 통솔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허근(許根)과 방우룡(方雨龍)이 지휘하는 의군단(義軍團) 혼성부대, 김성(金星)이 인솔하는 신민단(新民團), 이명순(李明淳)이 이끄는 훈춘대한국민회(琿春大韓國民會) 등이 모여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을 구성하였다. 16일에는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삼도구로 이동해 왔다. 이로써 독립군 측의 주요 부대가 대다수 모인 셈이었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묘령에서 연석하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가장 주도적으로 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북로군정서의 부총재인 현천묵(玄天默)과 대한독립군의 사령관인 홍범도 장군이었다.
“우리 군사들이 뭉쳤다고 하나 막강한 일본 정규군 부대와 전면전(全面戰)을 벌이게 되면 설사 승리할지라도 아군 역시 막대한 피해를 입을 것은 분명한 일이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의 영토이니 여기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중국 국민들의 독립군에 대한 감정도 나빠질 수도 있소.”
이러한 현천묵의 주장에 홍범도가 발끈하고 나섰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피해 다녀야 한단 말이오? 그렇잖아도 병사들이 주눅들어 있는 판입니다. 어차피 왜적(倭敵)들과 일대 격돌이 불가피한 형세이니 싸움을 미루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잖소?”
현천묵은 굽히지 않고 피전책(避戰策)을 더욱 강하게 내세웠다.
“난 그렇게 판단하지 않소. 저들의 화력이 우수한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니 일단 예봉은 피합시다. 일본군이 분산되면 그 때 국지전(局地戰)으로 파상 공세를 취하는 게 득이 될 거요.”
홍범도 장군은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리며 반박했다.
“거 참! 우리 독립군이 자주 연합부대를 편성하긴 했지만 언제 그 힘을 제대로 쏟아 부은 적이 있었던가요? 차일피일하다가 제각기 부대에 사정이 생겨 흩어지기 일쑤였어요. 그런 우(愚)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예 이 자리에서 총진군 작전 계획을 수립합시다.”
그러자 그때까지 이들의 의견을 듣고 있던 간북총판부(墾北總辦府)의 재무관서장 계화(桂和)가 홍범도를 만류했다.
“홍범도 사령관의 말도 일리가 있으나 조금만 뜸을 들이도록 합시다. 우리가 일단 접전을 피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적군이 방심하게 될 것이오. 그럼 허점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잠시 자중하도록 합시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최진동·허근·김좌진 등도 동의하는 듯해 홍범도는 한 발 뒤로 물러나 현천묵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고 더 이상의 교전 회피가 오히려 불리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고 판단되자 독립군 지도자들은 다시 긴급 회동을 갖고 피전책을 철회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기로 결론을 내렸다. 홍범도 장군은 김좌진 장군에게 이렇게 제의했다.
“김 장군의 휘하 병력이 이번 전투에서 선봉에 서 주시오. 특히 이범석 연성대장이 인솔하는 여행단(旅行團)의 용사들은 훈련이 잘 된 만큼 그들로 하여금 적군을 공격하여 청산리 골짜기로 끌어들이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조처해 주시겠습니까?”
“저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반일의병항쟁(反日義兵抗爭) 때부터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항일전(抗日戰)에서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둔 홍범도 장군의 명성을 듣고 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삼도구 골짜기로 이동했다. 1920년 10월 19일 저녁이 되자 곧 피비린내가 산하를 덮을 것을 미물도 알아차렸는지 까마귀들이 숱하게 몰려와 하늘을 가로질렀다.
★ 백운평교전(白雲坪交戰)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인 김좌진 장군은 10월 20일,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사관연성소 졸업생 3백여명으로 구성된 여행단(旅行團)으로 하여금 먼저 백운평으로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적군을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기 위한 조치였다. 김좌진 장군이 직접 인솔하는 본대(本隊)는 그 날 오후에 중봉리를 지나 백운평으로 들어섰다. 그는 교전지가 될 넓은 고지를 기준으로 우측 산허리에는 이민화(李敏華) 중대(中隊)를 매복시키고, 좌측 산허리에는 한건원(韓建源) 중대를 매복시켰으며, 정면의 우측에는 김훈(金勳) 중대를, 좌측에는 이교성(李敎性) 중대를 각각 배치시켰다.
북로군정서 병사들이 매복한 계곡은 지형적으로 보아 청산리 안에서도 계곡의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 넓은 공지가 있어 골짜기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 공지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형세였다. 때문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북로군정서에게 있어서 지형조건은 상당히 유리한 조건이었다. 북로군정서는 이러한 지형의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공지가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매복했던 것이다. 이민화 중대가 매복한 우측은 경사가 60도나 되는 산허리였고, 김훈 중대가 매복한 정면 우측은 경사가 90도나 되는 절벽이었다.
1920년 10월 21일 오전 8시 일본군 전위부대인 야스카와[安川] 소좌(少佐) 휘하의 1개 중대 병력은 독립군이 매복해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한 채 하루 전에 독립군 병사들이 행군해 온 길을 따라 백운평 지역의 공지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일본군 전위 중대의 모든 병력이 공지 안에 들어서고 김훈 중대의 매복지점으로부터 10여보 앞에 도달했을 때, 연성대장 이범석의 오른손에 들린 권총(拳銃)이 불을 뿜었다. 이것을 신호로 독립군 병사들은 소총(小銃) 6백여정과 기관총(機關銃) 4문, 박격포(迫擊砲) 2문을 발사하여 일시에 기습공격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은 느닷없이 독립군의 총격(銃擊)과 포격(砲擊)을 받고 정신을 가다듬을 사이도 없이 낙엽이 떨어지듯 무더기로 쓰러져 갔다. 일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대응사격을 했으나 독립군의 정확한 은폐지점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본군의 공격은 효과적일 수 없었다. 20여분의 교전 끝에 일본군 전위부대는 거의 전멸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전위부대의 뒤를 이어 야마다[山田] 보병연대가 그 곳에 도착하자 다시 독립군 병사들의 총탄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총구는 조국의 눈이다! 총탄은 조국의 선물이다! 쏘아라! 적을 쓰러뜨려라!”
김좌진은 적진을 향해 군도(軍刀)를 내뻗으며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에서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이 전개되자 일본군의 결사항전은 금세 무기력해졌다. 우수한 무장을 갖춘 일본군은 실로 어이없게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이 백운평 산림의 서전(緖戰)에서 일본군은 약 2백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으나 독립군의 피해는 고작 전사자 20여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일본군이 전사자들의 시체를 수습하지도 못한 채 숙영지(宿營地)로 패주하자 김좌진 장군은 적군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라고 연성대장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야마다 연대의 별동대가 청산리를 향하고 있었음으로 이들에 의해 독립군의 행로가 차단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 완루구교전(完樓溝交戰)
같은 날 오후, 홍범도 장군이 총지휘하는 독립군 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은 완루구 지역에서 적군을 기다렸다. 일본군의 대공세가 펼쳐지는 상황에서 별다른 대책 없이 산간마을에 숙영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홍범도 장군은 밤에 독립군 병사들을 집결시켜 산 높은 곳에 매복시켜 놓았다.
이 때 아즈마[東正彦] 소장(少將)이 이끄는 일본군의 주력 부대는 독립군이 산 속으로 이동한 사실을 모른 채 마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들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산에 불을 지르며 중앙 고지로 올라왔다. 양쪽에서 돌격하면 독립군이 골짜기 가운데로 몰려 내려올 것이라 예상하고는 산불을 지른 것이다. 홍범도 장군은 병사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고 직접 장총(長銃)을 장전하여 적병들을 향해 사격했다.
독립군이 좋은 엄폐물에 몸을 가리고 총을 쏘기 시작하자 병력의 우세만 믿고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는 일본군의 손실이 클 수밖에 없었다. 오후 내내 접전이 계속되었다. 이윽고 산 속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일본군 사령관인 아즈마 소장은 어둠이 짙어지기 전에 중앙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급 지휘관들을 다그쳤다. “돌격, 앞으로!”라는 구호가 염라대왕의 발악처럼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양쪽 산기슭을 타고 오른 일본군 병사들이 중앙 고지에 접근하여 기관총을 쏘아댔다. 야포 공격도 드셌다. 어둠 속에서 생쥐 한 마리도 살아남을 수 없도록 화력을 쏟아부은 셈이다.
그러나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의 전술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어둠이 내리는 틈을 이용해 중앙 고지의 예비병력을 다른 은신처로 빼돌렸다. 측면 기슭에 매복하고 있던 주력 부대도 짐짓 후퇴하는 척, 고지로 몰리는 시늉만 보이고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래서 일본군 병사들은 자기편 군인들을 독립군으로 오인(誤認)하여 서로 총격전(銃擊戰)을 벌여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아마도 일본군으로서 이러한 우스꽝스럽고 또 치욕적인 패배는 기억조차 하기 싫을 것이다. 불리한 시간대임에도 공격의 고삐를 더욱 옥죈 것은 순전히 아즈마 소장의 공명심 탓이었다.
이리하여 완루구 고지에서 벌어진 전투는 홍범도 장군의 기민한 전술로 인해 일본군 전사자만 4백여명이나 생기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