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의 미국을 가리켜 우리는 흔히 장애자. 노인. 어린이 그리고 여성의 천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미국에서조차도 지금부터 80년 이전에는, 당시 흑인에게도 주어졌던 참정권이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었다.
미국의 여성운동가들은 독립이래 꾸준히 민주적으로 건설된 그 들의 새로운 나라에서 여성들이 완전하게 참정/투표권을 행사를할 수 있도록 요구를 했었지만, 그 때까지 일단의 청치세력들에 의해서, 그러한 정당하고도 당연한 요구들이 번번히 거절을 당해 왔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남성위주의 권력구조(교회법, 헌법 등)가 너무나 견고했고, 여성 자신들조차도 [여성은 천부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게 태어났다]는 그릇된 고정관념의 노예가 되어 대다수 여성들이 감히 그 것을 깨뜨리고 나올 엄두조차 내지를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1774년 [아비가일 애덤스]부인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자기 남편이 독립선언장에 참석하기 위하여 집을 나섰을 때, <숙녀들흘 기억하세요!>라고 말한 것을 그 효시로 보고 있다.
이러한 여성참정권 쟁취 운동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은 1848년 7월 19일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과 [루크레티아 모트]라는 두 여성이, 그 전의 어떤 반노예회의에 참석했다가 여자라는 이유로 입장을 거부당한 것을 항의하기 위하여, 뉴욕의 [세네카 휠스]에서 이를 항의하는 여성대회를 열기로 선언한 날부터 이다.
그 후, 엘리자베스는 NWSA(전국여성참정권협회)를 결성하여 스스로 총재가 되고, 주로 온건한 형태의 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고 그 결과 1910년대를 전후하여서는 아이다호 주와 콜로라도 주를 비롯한 서부의 몇 몇 주에서 부터 차츰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성운동이 실력행사 등으로 보다 과격하게 바뀐 것은, 1913년 10,000 여명의 군중이 [엘리스 폴]이라는 여성의 주도 하에 시도한 - [우드로 윌슨] 대통령 취임 식장에서의 시위부터 였다.
그 후에도 줄곧 여성참정권 반대 입장을 고수해 오던 민주당 출신의 윌슨이 1916년 대통령에 재선되자, 이들은 백악관 문밖에서 줄기찬 규탄시위를 계속하게 되고, 급기야는 그 들의 대표인 엘리스가 구속되기에 이른다.
옥중에서 그녀는 자기가 그 전 영국에서 유학할 때 그 곳의 여성참정권챙취 운동원들이 그랬었던 것처럼 단식을 감행하게 되고, 그 결과, 들끓는 국민 여론의 도움을 받아서, 무죄로 풀려나게 되엇으며, 다시 줄기찬 투쟁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이러한 엘리스의 노력은 191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성참정권 부여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입장에 있던 공화당이 승리하게 되자 드디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당시 몬타나 주 출신의 [저네트 랜킨(Jeannette Rankin ; 1880 - 1973)]이란 한 공화당원이 미국최초로 여성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곧 바로 완전한 여성참정권 획득을 위한 헌법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하게 된 것이다.
그 개정안은 하원에서 단 한표차로 통과되었고, 이어 상원에 상정된 후 무려 18개월이나 시간을 끈 뒤에 1919년 6월에서야 비로소 헌법개정의 마지막 절차인 각 주의 인준절차를 밟게 된다.
그리고나서, 1920년 8월 26일 테네시 주가 마지막으로 회부된 그 헌법개정안을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미국헌법 상에는 <미국정부와 각 주정부는 남여의 성별을 이유로 미국시민의 투표권을 거부할 수 없다> 라는 실로 짧은 몇 줄의 글귀가 삽입되었었다.
요즈음 우리의 시각에서 봤을 때, 참으로 불합리하고 어처구니 없는, 정치에서의 남여차별 제도 하나를 고치기 위하여, 그것도 200 여년 이래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150 여년이라는 긴 세월과 엄청난 정력을 낭비하고, 수많은 지사들의 희생을 치루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