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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적절한 남자(35)

리드미온 |2004.08.30 07:39
조회 9,179 |추천 0

시기적절한 남자(35)

정훈이 나가 버리고 나자 허무한 마음에 괜시리 울적해졌다.

 

그런 일이 아니라 다른 일로라도 갑자기 데이트가 취소되었다면 기분이 안좋기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불륜이란 단어도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불륜을 얘기할 때는 그저 생각없는 사람들의 불장난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정훈은 어쨌든 결혼한 상태이고 나는 미혼이다. 규정적으로 말하자면 불륜인 셈이다.

 

물론 그게 아니라고 부정할 거리도 많다.

 

정훈이 날 사랑하고 그들은 곧 이혼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었다. 그저 생각없이 불륜의 상태를 즐기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현재의 배우자와 언젠가는 헤어지리라고 믿고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나도 그렇다. 정훈이 이혼할 것이라는 것을 믿고 계속 정훈을 만나기로 결심했다.

이런 경우는 내가 참고 기다려줘야하는 것일까?

정훈과 내가 사랑으로 맺어지는 과정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일까?

그러나 무언가 무거운 것이 가슴을 짖누르고만 있는 것 같았다.

정훈과 여행을 가려고 들뜬 마음에 챙겼던 배낭이 방한구석에 놓여 있는 것을 보니 더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냥 누워서 뒹굴거릴까 하다가 무작정 밖으로 나왔다. 신촌의 북적거림 속에 있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해서였다.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싶었다. 혼자 살면 그런 여유도 가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그러다 영화 한편을 봐도 좋을 것 같았다.

애초부터 혼자 살면 해보자 했던 것들이 이러저런 사건들로 미루어진 것이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정훈은 정훈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기 전까지 내가 전화할 수는 없었다. 그것 또한 사랑한다면 감수해야할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정훈과 이별을 했을 때 다신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때가 떠올랐다. 그건 이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랑할 때는 행복하지만 이별 후의 상실감은 사람을 죽게도 만든다.

그러나 지금은 사랑하면서도 괴롭다. 다신 사랑을 않겠다는 말은 이별 후가 두렵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정훈과 헤어지면 다신 사랑같은 것은 하지 말자...

사랑의 괴로움도 이별의 아픔도 다시는 만들지 말자...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준비를 하자...

나는 배낭을 풀어서 정리를 하고 집에서 나왔다.

처음에 생각한대로 스타벅스에 들러 우유거품이 잔뜩 담긴 라떼를 주문했다. 역시 아침 커피 향은 사람을 활기있게 만들어주었다.

나는 스타벅스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한 두어시간쯤 책을 읽다가 밖으로 나왔다. 거리엔 온통 젊은 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고 걷는 커플들도 많았다.

잠시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들도 언젠가는 저런 젊은 시절을 지나 일과 사랑에 고민하는 날이 오면 다시 이곳에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보는 날이 있겠지 싶었다.

내 과거가 그들의 모습이었다면 그들의 미래 모습이 혼자 커피를 마시고 돌아다니는 내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생은 생각보다 길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나와 정훈의 재회처럼...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내친 김에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혼자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싶었다.

거의 모든 표가 매진이었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민아씨!"

나는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둘러보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있어서 누가 나를 불렀는지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민아씨!"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현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우연이? 반갑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느나 한편으로는 토요일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싶었다.

"영화 보려고요?"

현수가 물었다.

"네."

"현수씨도 영화 보려고..."

나는 혹시 현수가 나와 영화를 보는 동반자가 되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말하다가 현수 옆에 일행인 듯한 여자를 발견했다.

"네..그런데 매진이네요. 저녁 표나 있을 것 같네요."

"네. 그러게요."

"혼자 보려면 표는 구할 수 있을 거에요. 줄 서서 한번 물어보세요."

현수가 말하는 동안 현수의 옆에 서 있는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현수가 여자 친구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토요일에 여자와 함께 영화관에 나타나다니...누군지 궁금했다.

"아, 여기는 우리 회사 다른 팀의 팀장이에요."

"네. 안녕하세요?"

나는 인사를 했다.

"이쪽은 서미연씨라고 디자이너에요."

현수는 일행인 여자를 소개시켜줬다.

"네. 안녕하세요."

여자도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영화 잘 보시고 월요일에 회사에서 뵐게요. 저도 혼자면 표걱정 안했을 텐데...전 다른 데를 알아보던지 아니면 다른 걸 해야겠어요."

현수는 서둘러 여자를 데리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갔다.

혼자라면 표걱정을 안한다? 현수가 남긴 말이 묘한 여운이 되었다. 표걱정 해도 좋으니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부러웠다.

현수와 함께 있던 여자가 누군지 궁금했지만 내가 신경쓸 바는 아니다 싶었다.

역시 혼자는 표가 있었다. 거기다 선택도 할 수 있었다. 나는 그냥 전광판에 보이는 것 중에 아무거나 찍어서 표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선택한 영화가 공포영화였다. 주위의 커플들은 다정하게도 영화를 관람했다. 중간중간에 별로 무섭지도 않은데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흘러 나왔다.

정훈이 일부러 공포 영화를 보자고 했던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이 중에도 일부러 공포영화를 보러 온 커플이 있겠지 싶었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은 세상에 사랑이 끝난 쓸쓸한 사람이 있다거나 혹은 재회한 사람들의 가슴앓이 같은 것은 모를지도 모른다. 아니 무시할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뿐이다.

영화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상념만 깊어갔다. 괜히 혼자 영화를 봤나 싶었다.

영화가 끝나고 배가 고팠다. 혼자 갈 만한데라고 생각한 것이 맥도날드였다. 커플들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맥도날드 같은 데는 가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둘만의 공간의 확보되는 식당으로 갈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내가 커플과 솔로의 생활에 대해 집착해서 생각하는지 의문이 들어 얼른 집에 들어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거리에 있으면 덜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혼자 집에 있는 것보다 못한 것 같았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를 먹고 일어서려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 후 첫외박한 엄마의 소감을 듣게 될 것이라 예상하며 전화를 받았다.

"민아니? 나 너네 집에 며칠 있으면 안되겠니?"

엄마는 그렇게 물었다.

"뭐?"

엄마가 정말로 가출을 하겠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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