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정말 서먹서먹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처음으로 함께 맞이하는 아침이라고 해보았자 그리 대단한것도없었다. 아침도 먹지 않았고. 서로 다른곳만 쳐다보며 침묵만 묵묵히 지키다가 출근을 했다. 사무실 책상에 앉은 지우는 수업준비는 커녕 아무것도 하지않고 맞은편 벽만 멍하니 응시했다. 준하와 있으면 모든것이 새롭다. 남자와 밥을 먹는것도 남자와 마주보는것도. 그 모든것이 처음 경험해보는 일같고 그래서 더 가슴이 떨려온다.
어제도 입었고 그제도 입었고 몇년동안 입어왔던 하얀가운이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가볍게 느껴지고 친근했던적은 없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것처럼 공기같은 가벼움. 그리고 전혀 어깨를 누르지않는 책임감과 긴장감. 지우의 품안에 안겨있을때 머리위로 느껴지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있던 피부사이로 뚫고 들어오던 그녀의 향긋함. 술이 그를 지배하지 못할만큼 강했던, 그가 사랑을 하고있다고 느낄정도로 부드러웠던.
사랑..
내가 사랑을 하고있다고 느꼈었다고? 설마..설마 아니겠지. 나한테는 오직 서현뿐이라는걸 매일 매일 뼈져리게 느끼며 살아왔던 나였는데 사랑을 느끼다는건 말도 안된다. 만약에 내가 사랑이라는것을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지우일까. 왜하필이면 이제서야 시작하는걸까. 서현에게서 벗어나려고 만나왔던 여자들로부터는 항상 찾을수 없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다가온다면 정말 말도 안된다.
모르겠다. 정말 내 가슴위로 벅차올라서 지금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것같은 기분이 사랑인건지. 순신간에 심장이 경직이 되는것처럼 갑자기 굳어버리는 것이 사랑인건지. 지우를 떠오르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이런 내가 사랑을 하고있는건지.
지우가 일이 끝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때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있는 선후와 마주쳤다.
“무슨 일이야?”
“보고싶어서 왔지.”
선후에게서 무엇을 발견했던걸까. 무엇을 찾아냈길래 그렇게도 그를 사랑했던걸까. 그리고 또 어떻게해서 이렇게 사랑이 변덕스럽게 변해버렸을까. 분명 기억속에는 그와 함께한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리고 행복했던 기억들과 함께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악몽들도 함께 남아있다. 또한 그를 사랑했던때 느꼈던 그 떨림까지도 여전히 간직하고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그것들이 어떤 것인지 안다고 해서 다시 한번 느낄수 있는것은 아니었다. 한번 떠나버린 감정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것은 그 때 당시에 그를 잊지 못 할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엄청난 노력을 하며 그를 떨쳐내려 했는데 결국 성공했다는것. 이렇게 쉽게 잊혀질 만큼 가벼운 사랑을 했던걸까, 난.
차라도 한잔 사주겠다는 선후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이번 한번만 얼굴 마주보고 이야기해준다면 족하겠지.
“오빠.”
“응?”
원두커피가 잔잔한 물결을 내며 지우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나 아직도 사랑하니?”
“예정했던대로 유학같이 갔더라면 이런 상황은 오지 않았을거야.”
원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 유학을 가지않았던것에 대해 물어본것이 아니었다. 지우는 낮은 한숨은 삼키며 선후를 바라봤다. 달라진것이 없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왜 저 사람은 변하지 않았을까. 그가 변하지 않은만큼 나도 그대로일까, 아니면 많이 변해버렸을까.
“만약 그때 나와 갔었더라면 넌 지금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되어있었을거야.”
“위로하려고하지마.”
“위로아니야. 나 그런거 못하는거 잘 알잖아. 난 사람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못해.”
사실 그랬다. 그에게는 직선적이면서도 냉정한 면이 있었다. 소위 감정적인 면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해서 피아노를 칠때만큼은 음악 속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는지 알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그가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피아노를 치고 있을때만큼은 자신의 다른 면을 꺼내어 그 내면을 승화시키는 능력이 그의 실력을 더욱 돗보이게 하는것이 아닐까.
“어쨌든 난 가지않았어.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고.”
선후는 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래서 더 염치없어. 그렇지만 비행기를 탔던 그 순간부터 후회했어. 너가 헤어지자고 했을때 왜 순순히 그러자고 했었는지. 물론 내가 잘못한게 있으니까 너가 그랬지만 그래도 그건 오해였어.”
“그래? 그럼 리즈는? 리즈하고는 한번 장난삼아 해본 사랑이었던거니?”
그가 무슨말을 하려고 입을 열자 지우가 바로 막았다.
“그랬었던거라고 말할 생각하지마. 그렇게 말하면 나 듣기좋으라고 하는 소리니까.”
선후는 오렌지쥬스를 한모금 마시고 옆 창밖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난삼아 해본 사랑도 아니었고 심각하게 했던 사랑도 아니었어. 그때는 내가 술에 취해서..”
“술? 내가 봤었어. 오빠의 정신은 굉장히 맑았었다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을때 오빠의 그 눈빛, 나 잊을 수가 없어. 아무리 리즈가 요부라고 하더라도 오빠는 그러는게 아니였어.”
“한순간의 실수였어. 난 2년이 지났어도 널 잊지못해. 그때 널 그냥 보내는게 아니었어.”
“오빠가 날 보낸건 아니었어. 내가 오빠를 보냈지.”
“그래. 너가 보낸대로 난 결국 이기적인 생각으로 내 미래를 위해 가버렸던거야.”
더이상 그의 말에 대꾸할 힘조차 남아있지않았다. 꼭 말싸움을 하려 서로 대면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만하자.”
짧고 간단하게 말한 지우는 어깨에 힘을 풀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리웠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때만큼은 세상 그 어떤것도 두렵지 않고 모든것이 아름답게만 보였었다. 지우는 스스로를 이해할수 없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사랑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헤어지자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잊지못하던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수 없었다. 그 수치스럽고 모욕적이던 단 1분보다도 그와 함께했던 4년이라는 세월이 더 컸다. 하지만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고 결국은 승리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나 그가 선물해준 책을 보고있어도 과거에 대한 희열만이 솟아오를뿐 그를 사랑하는 감정은 생겨나지 않을정도가 되었다.
“한번만 더 기회를 줘. 잘할게.”
지우는 고개를 저었다.
“잘할게, 지우야. 너, 나 사랑했었잖아. 다시 한번 더 할수 있을거야. 나는 아직도 널 잊지 못해.”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사랑해, 지우야. 사랑해.”
변하지 않는다는 영원한 사랑을 해보는것이 어릴때 지우의 바램이었다. 어릴때 누구나 꿈꿔보는 동화같은 사랑. 하지만 현실을 알게되고 겪어봤을때 그런것은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첫사랑은 무척 달콤하고 아름다웠지만 첫이별은 약보다도 더 썼고 그 어느 병보다도 고통스러웠다. 분명 선후의 눈에는 진실이 담겨있는듯 했지만 지우는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더이상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매트리스 위에 앉아 녹차를 마시는 지우의 귓가에는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밤이었다. 그리고 혼자였다. 어젯밤에 준하와 함께 있었던것을 생각하니 지금 혼자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외롭고 처량해보일 정도였다. 무심코 전화기를 쳐다봤다. 준하의 전화번호를 이제는 알고있는 지우였지만 쉽게 전화를 할수가 없었다. 자존심문제는 아니었지만 먼저하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 사람이 못참겠거나 보고싶으면 먼저 전화하겠지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그 사람이 날 먼저 찾도록 하고싶어.
따르릉. 따르릉.
순간 뜨거운 녹차를 매트리스위에 쏟아버릴뻔했다. 설마..
“여보세요?”
혹시나 하는생각에 무척 긴장이 됐지만 전혀 아무렇지 않은듯 평소처럼 말했다.
“지우? 나야..준하.”
나의 승리!
“네. 어쩐일이예요?”
“그냥 한번 해봤어. 오늘 못봤잖아. 아침에만 보고. 잘 지냈나 해서.”
“그냥 그랬어요.”
뭔가 더 할수있는 말은 없을까. 그를 앞에두고 마주보고있을때도 이렇게까지 말문이 막힌적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너무 어색했다. 그의 얼굴을 보지않고 말한다는게 너무 이상할 정도였다.
“궁금한게 있어.”
“네.”
무척 뜸을 들이는 눈치였다. 반대편에서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을만큼 조용했다.
“여보세요? 준하씨?”
“어, 여기있어.”
“궁금한게 있다면서요. 뭔데요?”
“저번에 내가 학원에 전화했을때 말야. 어떤 남자랑 같이 밥먹으러 간다고 했었잖아.”
“네.”
“혹시..누구였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쿠션에 머리를 베고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조금은 침침한 하얀 불빛을 비추는 백열등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첫사랑.”
또다시 준하가 조용해졌다. 전화가 끊긴거는 아닐거라는 생각에 지우도 가만히 있었다.
“그랬구나. 좋은시간 보냈어?”
더운데 칼국수를 먹은것이 떠올랐다. 그리 좋은 시간이 아니었던것같다.
“별로였어요. 아픈 기억 떠오르게 하는 사람 보는거 별로 좋은 시간 아니잖아요.”
“음.”
준하는 지우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고는 차마 이런 질문을 할수없었다. 물론 전날밤엔는 술의 힘을 빌렸지만 정신이 원래대로 돌아온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전화가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왜이렇게 알고싶은걸까. 사실 그사람이 누구였던간에 나하고는 상관이 없지 않나.
“왜 헤어졌던거니?”
지우는 옆으로 돌아누워 일직선으로 보이는 바닥을 쳐다봤다.
“토요일이었어요. 토요일 오후에는 항상 그 사람은 집에 있지않았어요. 과외를 하러간다던지 아니면 같은 과 친구들과 만든 밴드 연습을 하고는 했었거든요. 왠일인지 그날은 제가 저녁을 해주고싶었어요. 별로 할수있는건 없지만 스파게티만은 잘하거든요. 장을 다 보고 그의 집에 갔어요. 열쇠가 있었기때문에 초인종을 누를필요도 없었고 당연히 그가 없을거라 생각했구요. 그런데 그가 있더라구요. 다른 여자하고 같이. 둘이 침대위에서 엉켜있는 모습을 보고 그와 눈이 마주치고 한 얼마동안은 그렇게 서있다가 나왔어요. 그여자, 리즈. 내 최대의 라이벌 그리고 적이었는데.”
꼭 남의 이야기를 하는것처럼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멀리서만 들려오는 준하의 숨소리가 따뜻했고 그가 바로 옆에 있는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준하는 잠시 침을 삼켜야했다. 슬픈 사랑이 뒤에 감춰진 지우는 아름답게 빛이 나는 여자였다. 전혀 고통이라는것을 모르는것처럼 밝은 사람. 하지만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보여지는 깊이는 역시 헛것이 아니었던거다.
“준하씨.”
“응?”
“보고싶어요..”
“……”
“12시간전에 봤었지만. 그래도 또 보고싶어요, 나..”
아침에 지우가 앉아있던 쇼파에 몸을 맡기고 있던 준하는 수화기를 더욱 더 세게 쥐었다.
‘나도 왠지 너가 보고싶어.’
머리속에만 수백번 멤도는 말은 도저히 입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결국 진부한 안녕이라는 인사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방안으로 들어섰을때 침대앞에 섰다. 지우와 함께 누워있던 자리. 따뜻하고 고요했던 밤. 홀로 남겨진 오늘 밤, 또다시 그녀와 함께 잠들고싶다. 그녀를 품에 온전히 안은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