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는 과녁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화살은 그녀의 허락도 없이 활을 떠나버렸다.
" 퉁..."
화살은 과녁 가장자리에 볼쌍사납게 박혀버렸다. 소예는 활을 쥔 채 축 늘어진 오른팔을 왼손으로 감싸며 고통스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난 번 전투에서 얻은 상처는 소진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지만 완전히 아문 게 아니었다. 소진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몸을 사리며 치료에만 몰두하던 소예는 소진이 백성을 치료하고자 몰래 성을 나선 틈을 타 활을 챙겨들고 뜰로 나왔다.
선선해진 공기와 맑은 햇살이 뜰 가득 내리쬐고 있었고, 소진의 감시에서 벗어나게 되자 소예는 엄마 가 외출을 간 틈을 타 집에서 장난거리를 찾아낸 아이마냥 즐거웠다. 몇날 며칠을 갇혀서 쉰다는 건 정말 할 짓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활을 쥐는 순간 그녀는 해방감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녀의 기분대로 따라주지 못했고 소예는 아련한 통증에 짜증까지 몰려왔다.
" 소예야!"
그 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가움이 가득 실린 목소리였다. 소예가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비영이 서 있었다.
가을 햇살이 비영의 머리에 쏙아지면서 그녀의 금발은 더욱 탐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비영의 선한 눈매에는 소예를 만난 반가움이 가득 실려있었다. 새로 맞춘 듯 빳빳하게 풀을 먹은 아름답고 우아한 보라색의 비단 드레스가 비영에게 참 잘 어울렸다. 그녀의 모습은 검은 색 타이즈에 품이 넓은 셔츠를 대충 걸쳐 허리를 묶고 화살통을 어깨에 둘러 맨 소예와 대조적이었다. 심지어 비영의 잘 손질된 풍성한 금발과 하나로 묶어 맨 소예의 붉은 머리칼까지도 둘은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어쩐..일이야?"
소예는 비영의 뜻밖의 등장에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물었다.
" 성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왔어. 성인식 이후에 우리 한 번도 못 만났잖아. 네가 아주 보고싶었어. "
"그래....?"
소예는 비영의 반가움에 들뜬 목소리와는 달리 무관심하게 대꾸하면서 활을 만질 뿐이었다.
" 너무하잖아. 왔으면서 어쩜 연락도 없었니? 편지도 한동안 오지 않고, 나 걱정 많이..."
"축하해"
소예가 차가운 목소리로 비영의 말을 부자연스럽게 잘랐다. 비영은 처음에 소예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 약혼식 준비로 바쁠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연락하지 않은거야. 부담주기 싫었거든."
"..............."
비영은 순간 소예가 낯설었다. 친자매 이상으로 가깝던 소꼽친구가 남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녀는 한 번도 소예와 소진 자매가 귀찮거나 부담스러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소예를 만나지 못하면 허전할 정도로 소예는 비영의 삶에 있어 일종의 필수 요소와 같았다.
북방성의 공주 소예와 서방성의 공주 비영은 외모와 성격, 취향면에서 공통점이 거의 없는 공주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어릴적부터 유난히도 친했다. 같은 드레스를 입고 연회에 참석하여 쌍둥이처럼 붙어다니는 것으로도 유명했고 성장해서도 너무 붙어다녀 남자들이 접근을 못할 지경이라 왕가에서 걱정을 할 정도였다. 심지어 한 명이 앓아누우면 곧이어 다른 한명도 같은 증상으로 앓아눕는 일이 잦았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둘은 자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를 걱정하여 두 왕가에서는 이 유별난 공주들을 두고 우스갯소리도 많이 나왔다.
소예가 전장터에 나가 살게 되면서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둘은 주기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했고 비영은 해마다 가죽으로 만든 말안장에 비단실로 수는 놓아 소예에게 보내곤 하였다.
언젠가 비영이 심하게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그러던 비영이 한 밤중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면서 서방성은 발칵 뒤집혔다. 성 곳곳을 뒤져도 비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광목천왕은 병사를 풀어 인근 부락까지 뒤지게 하였지만 비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뭔가 예감이 든 왕비가 사람을 북방성에 보냈는데 비영은 그곳에서 발견되었다. 북방성 사람들도 비영을 발견하고는 입을 딱 벌린 채 어이없어했다. 비영은 난리가 난 다음 날 오후에 소예의 침실에서 나란히 잠든 채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본 즉, 비영은 전장에 있던 소예가 한밤중에 북방성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소예가 너무 보고싶은 나머지 아픈 것도 잊고, 누구에게 알릴 틈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북방성으로 말을 달려갔던 것이었다.
둘은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어 있었고 희안하게도 비영의 열이 감쪽같이 내려가 있었다. 이 두 공주의 못말리는 우정에 광목천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이마를 탁 치며 껄껄 웃을 뿐이었다.
소예와 비영은 이처럼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비영은 소예에게서 뭔가 달라진 변화를 느꼈다. 하지만, 혹여 자신이 예민해진 게 아닐까 오히려 비영은 스스로를 의심할 정도로 소예는 여전히 다정했었다. 그런데 오늘의 소예는 찬 바람이 쌩쌩 불었다. 비영은 소예에게서 두드러진 변화를 느꼈지만 그 이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할 뿐이엇다.
" 약혼 축하 선물은 소진이 편으로 보낼게."
소예는 화살통을 풀어 나무 의자 옆에 놓으면서 지친듯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 약혼식에 오지 않을거야?"
놀란 눈으로 비영이 되묻자, 소예는 통증으로 저려오는 오른팔을 매만지면서,
" 곧 전장으로 돌아가야해. 미안하지만 약혼식에는 참석할 수 없겠어."
비영은 그 말에 서운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소예의 축하를 받고 싶었다.
애끓는 사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부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 약혼식이었다. 그녀는 늘 그랬듯 부모님의 바램을 따라 약혼을 받아들인 것 뿐이었다. 열정도 반감도 없이 순리인 마냥 따르는 약혼식이었지만, 비영의 가슴 속 어딘가에선 갈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소신이 결여된 이번 약혼에서 비영은 소예가 어떤 확신을 심어 주기를 기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소예가 비영의 앞날의 축복해 준다면 비영은 마치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약혼식마냥 온전히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축하의 말과 달리 싸늘한 소예의 말투는 비영에게 어떤 용기도 주지 못하는 우울한 메세지와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