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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wi (키위) - 29. 한 마음으로는 한 사랑만

나비 |2005.01.03 12:36
조회 1,543 |추천 0

kiwi - 29



일어나자마자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었다. 셋째 언니는 아직도 자는 중이었다. 그동안 결혼만 하면 쉽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특별한 할 일이 없어도 찜질방에 제 시간에 출근을 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이제 부지런하게 살아야 한다 생각했다.

창문 사이로 봄의 향기를 느낄 수 없는 매서운 바람이 들어왔다. 이른 아침의 시린 바람은 전보다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의 첫 시작이었고, 그것은 생각보다 매서워서 잠시 그 바람 속보단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이불에 몸을 맡기고 싶어졌다.

사고 싶은 것을 사지 못한다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무섭지 않았으나 부지런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잠시 바람과 푹신한 침대 사이에서 고민하다 병진이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네가 민성 오빠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야.’


아니라는 걸 보여줄 거야.

더 이상 망설임 없이 욕실로 들어선 나는 손과 얼굴을 찬 물로 적시기 시작했다.


언니들보다도 일찍 찜질방에 도착했을 때는 드라마 촬영팀이 벌써 도착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탤런트들은 아직 도착을 안 한 건가?’


“엄마! 무슨 드라마야? 누구 나온대?”

“일찍 왔네. 진한 추억의 향기라던가? 창고 옆방을 대기실로 쓴다고 하던데 거기에 있나봐.”

어젯밤도 찜질방에서 주무신 엄마는 피곤함이 가득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럼 조윤기도 왔어? 봤어, 어때 잘 생겼지?”

“훤칠하니 보기 좋더라. 코도 오똑한 게 돈 많은 코더라구. 귀도 남자답게 크고. 누군지 아들은 잘 낳았더라. 돈도 많이 벌고, 아들 덕에 호강 할 것 아니야.”

“엄마는 잘난 사위 두면 되지. 지금 가봐야겠다.”


하지만 혼자 대기실에 가는 것은 혼자 하기에는 쑥스러운 일이라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며 병진이를 기다렸다.


“병진아, 왜 이제와?”


단 10분밖에 늦지 않았는데도 호들갑을 떨었다. 기다림이란 것이 늘 그렇다. 처음은 설렘으로 시작해서 안타까움으로 그리고 오랜 기다림은 마음을 태우며 사람을 원망하게 만든다.


“나 어때?”

“정말 캡숑이다. 내게 너처럼 이쁜 친구가 있다는 것에 너무 감사하다니까. 거봐. 넌 핑크보다는 연두색이 어울릴 줄 알았다니까.”


찜질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이 다 비치며 하늘거리는 연두색 블라우스는 병진이의 하얀 피부를 더욱 투명하게 보이게 했다. 때가 낀 분홍색 패딩에 가려졌던 그녀의 아름다움이 다시 빛나고 있었고, 그녀가 움직일 때다 흔들리는 옷은 날개처럼 보였다. 여태껏 빛나는 찬란함을 숨기고 있었던 그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이런 느낌으로 병진이가 나를 말렸던 거겠지. 한편 쓸쓸해지는 기분으로 병진이와 방으로 향했다.


“있다, 있어.”


방문을 조금 열고 들여다보던 병진이가 말했다.


“누구 있는데?”

“조윤기 혼자밖에 없어.”

“웬일이니, 웬일이니. 들어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하면 찍어줄까?”

“우리 같은 미녀를 마다하면 걔는 남자도 아니야.”


곧 눈이 즐거워 질 것을 기대하며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역시 탤런트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막만한 얼굴. 스타일이 숨 쉬고 있는 머리하며 건장한 어깨를 보니 감탄스러웠다.


“저기여, 저 팬이에요. 사진 좀.”

“죄송해요. 저 사진은 안 찍어요.”


잘난 맛에 사는지 두 미녀가 사진 한 장 찍자는데 뭐 어렵다고 단호하게 거절을 했다. 그리고 들어올 때는 무슨 일이냐는 듯 호기심으로 바라보다 팬이라는 말을 듣고는 오히려 냉랭해져서는 무표정하게 고개까지 돌려버리는 것이었다.


“왜요? 사진빨이 안 받나보죠? 실물이 더 낫다고 생각하나봐요.”

“그게 아니라 인터넷에 사진 돌아다니는 게 싫어서 그래요. 싸인은 해줄테니까 펜이랑 종이를 가져오던가요.”


병진이의 말에도 탤런트라는 놈은 뻣뻣함을 풀지 않았다. 말하는 중에 술 냄새가 느껴지는 게 몇 시간 전까지 술을 마셨던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눈도 빨갰다.


“찍기 싫어도 좀 공손하게 거절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런 연기도 어려운가봐. 그래서 밥 먹고 살겠나.”

“제가 뭘 어쨌다고 그래요? 죄송하다고 말했는데.”

“태도 문제 아니에요? 공손하게 죄송했다고 했으면 왜 우리 기분이 상했겠어요?”

“그럼 찍어드릴께요. 대신 인터넷에는 올리지 말아주세요.”

“야, 가자. 찍기 싫어졌어. 별로 잘 생기도 않았잖아. 다 화장빨이었나봐.”


병진이는 오히려 꽃미남을 무시해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거봐. 핑크색이 더 낫을 거야. 그 옷만 입었어도 이런 일 없었지.”

“그런가? 원래 연두색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놈인가 봐. 잊자, 잊어. 그래도 은근히 열받네.”

“니네 엄마한테 촬영하지 못하게 하라고 해라.”

“어떻게 그래?”

“아, 짜증나. 내가 못생겨졌나봐. 저런 거한테 무시를 다 당하고.”

“아니야. 병진이 우리 학교 최고 퀸카였잖아. 너보다 이쁜 여자는 없어.”


병진이를 달래는 동안 점심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고, 촬영도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배를 두둑히 불린 병진이는 조윤기만 따라다니며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을 해댔다.


“대사를 술주정처럼 하네. 으, 술 냄새.”


병진이의 특기인 냄새 시리즈를 선보였지만 그 놈은 그런 것에는 익숙하다는 듯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게 있다가도 촬영만 시작되면 눈빛까지 달라지는 그의 연기를 보며 직업정신만큼은 높이 평가를 해주었다.

하지만 평소 무표정한 그의 눈빛은 허전한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 무엇에도 관심이 없는 듯 그의 시선은 초점이 없었다.

도대체 무얼 바라보고 있는 걸까?

그의 시선을 멈춰진 곳을 바라보았지만 늘 사람 없는 옷장이거나 아니면 다른 촬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시선만 그곳에 두고 있을 뿐 응시를 한다기보다 우연히 고개가 그 곳을 향한 것처럼만 보였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앞을 보게 된 사람처럼 그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시선이 쫓고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셋째 언니였다.


“쟤봐. 묘향 언니만 쳐다보고 있어.”


병진이도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너도 느꼈어?”

“니 언니한테 머리 좀 잘 하고 다니라 그래. 저런 머리 처음 보겠지. 방송물 먹은 얘가 저런 구경이 쉽나. 아주 놀란 것 같은데.”

“쟤 우리 언니한테로 가는데.”

“어, 진짜. 그런 것 가지고 충고까지 해주려나봐. 우리 가보자. 언니 구해줘야지. 니네 언니 얼마나 충격 받겠니?”


우린 서둘러 셋째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갔다.


“누나! 어디에 숨어 있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윤기야. 오랜만이다.”


둘이 아는 사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해. 누나. 그 말 정말 하고 싶었어.”

“다 옛날일인 걸. 날 기억하고 있었다니 의외다. 잘 지내지? 좋아 보여.”

“누나, 누나.”


그 놈은 우리 언니 손을 잡고는 놓을 줄을 몰랐다. 니 누나면 나는 뭐냐? 우리 언니라고.


“언니, 아는 사이에요?”

“어, 예전에 알던 동생.”


놈은 우리가 성가시다는 듯 언니의 손목을 잡아 나가자는 시늉을 했고, 언니는 당황하면서도 큰 반항도 없이 조용히 나가버렸다. 사태 파악이 안 된 병진이와 나만 남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 뭐야? 알고 있던 사이? 나한테는 한 번도 말 안했는데.”

“수상해. 그냥 누나 동생의 눈빛이 아니었어. 둘이 연인 사이? 말도 안돼. 니네 언니 나이도 많잖아.”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분위기 진짜 이상했지?”

“쟤 막 울려는 것 같았는데. 니네 언니가 찼나?”

“나이가 어리긴 해도. 저런 미남을 마다할 언니가 아닌데.”

“유명해지기 전에 돈이 없으니까 헤어졌겠지. 묘향언니 돈 엄청 밝히잖아. 너도 그렇지만.”

“내가 언제? 또 이상한 소리한다. 우리 소화도 안 되는데 음료수나 먹자. 왠지 열나.”

“니가 쏘는 거?”


시원한 음료수도 두 사람에 대한 궁금증을 가셔주진 못했다. 병진이와 수다를 떨며 언니를 기다리고 있는데 현상 오빠가 찾아왔다. 조그만 희망이라도 남겨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먼저 밖으로 나가자고 말했고, 우리는 가까운 커피숍에 마주 앉게 되었다.


“친구한테 들었어. 너 결혼한다며?”

“그것 때문에 온 거라면 헛걸음했네. 들은 대로야. 확인하려 여기까지 올 필요 없었는데. 전화로 했어도 말해줬을 거야. 나 결혼해. 좋은 사람을 만났어.”

“너 왜 그래? 나한테도 결혼하자고 했잖아. 그 사람한테도 결혼하자고 조른 거야? 왜 결혼에 너를 팔아?”

“아니야. 그 사람이 먼저 하자고 했어. 나도 싫지는 않았고.”

“싫지 않았다고? 그 사람 너 사랑한데? 내가 널 사랑한다고 말했잖아. 그런 기회는 오히려 나에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미 끝난 일이야. 오빠한테는 미안해. 내가 철없이 결혼하자고 조르고. 내 맘대로 헤어져 버리고.”

“그럼 나랑 결혼하자. 그 자식 어떤 생각으로 결혼하자고 했는지는 몰라도 널 사랑하지는 않을 거야. 그 결혼 나랑 해. 내가 사랑해줄게.”

“갑자기 생각이 바꿨네?”

“물론 당장은 힘들어. 하지만 예전처럼 다시 만나다가 서로 나이가 들고, 자리가 잡히면 그때 하면 되잖아.”

“말로만이라도 고맙다.”

“혜림아, 사랑 없는 결혼은 하는 게 아니야. 네가 뭐에 쫓기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구.”

“결혼에 사랑이 중요한 거지?”

“당연하잖아. 남녀가 사랑하지 않으면 만날 이유가 없잖아. 서로 팔고 사는 것도 아니고.”


팔고 산다.

얼마 전까지 데리고 살기 편한 애라고 광고를 하며 결혼이라는 시장에 내 자신을 내 놓았던 생각이 하며 잠시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오빠, 나 사실 결혼 안해.”

“······?”

“그런데 오빠는 만날 수가 없어.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거든.”


현상 오빠는 결혼할 남자가 있다고 했을 때는 필사적으로 말리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은 막을 수 있어도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 마음으로는 한 사랑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젠 자신이 더 이상 들어갈 틈이 없겠구나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아깝다. 똑똑한 놈 인가보네. 난 나중에야 니가 좋은 앤줄 알았는데.”

“고마워. 이해해 줘서.”

“아쉽다. 아쉬워. 대신 그 놈이랑 헤어지면 전화한 번 해라. 술이나 사줄게.”


현상 오빠는 행복을 빌어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뜨거운 사랑이라도 끝은 있는 거라며 그 끝에 있을 때 옆에 앉아 술친구나 해주겠다고 했다. 나도 좋은 여자를 만나 잘 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민성오빠를 만나면서 알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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