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칙사랑 - 23. 알코올 특유의 냄새
“잘 못 한 줄은 아는 거야?”
“오빠 몰래 감정 있는 사람을 만난 건 아니지만 오빠 입장에선 속은 기분 들 수 있다고 생각해. 내 실수였어. 솔직히 말을 했어야 했지. 미안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럼 됐어. 앞으로 이런 일 다시 만들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믿음에 대한 배신을 느꼈던 건 사실이야.”
“······.”
“서로 조심하자. 나도 그런 일 만들지 않을게.”
지극히 표면적인 화해였다. 그의 마음속에 뜨거운 울렁거림이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같은 일을 당했다면 더 크게 화를 냈겠지. 월요일이었다. 12시가 넘어 하루가 시작되는, 아직 아침이 오기 전까지 잠을 자야하는 새벽은 늘 날짜를 헷갈리게 만든다. 하지만 분명히 월요일이었다. 아버지는 토요일과 일요일 이른 오후의 흐트러짐은 이해하시면서도 월요일, 즉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때부터는 작은 흐트러짐도 일체 허용하지 않으셨다. 새벽에 물을 마시러 거실에 나가는 일만으로도 눈치가 보이는 일이어서 지금 이 시간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것만으로도 내겐 일탈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차는 막힘없이 앞으로 나아가 집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집을 뒤로하고, 아버지를 뒤로하고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를 따르리라. 그를 따르는 길이 곧 나의 길, 내가 선택한 길이니라.’
머리와 뱃속 가득한 알코올 기는 평소 쓰지 않는 시 같은 문구를 머리에 맴돌게 만들었고, 기분까지 처음 부모님께 반항하는 사춘기 시절로 돌려놓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기대어 있던 것 같았는데 날 흔드는 그의 손길에 잠이 깼다.
“오늘은 여기서 자자.”
창밖을 내다보니 옛것으로 보이는 관광호텔이었다. 큰 모텔과 구분이 되지 않는 허름한 호텔이었지만 이 근방에서는 제일 나을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러자.”
몸을 일으켜 차 밖으로 나왔지만 막상 호텔로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곳을 남자와 단둘이 출입한다는 것은 ‘조신하지 못한 여자’ 라고 얼굴에 글씨를 쓰는 기분이 들게 했다. 조신? 남자 경험이 있다고 쓰면 안 되는 말일수도 있겠지. 차라리 당당히 들어갈까 했지만 역시나 어색해져서는 훤한 간판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해?”
“응? 들어가.”
호텔방에 들어서자 약한 스탠드 조명이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다른 물건들도 많은데도 하필 침대만 더 크게 보이다니. 이불이 곱게 접혀 있기는 했지만 침대를 덮은 하얀 시트는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었다.
확실히 표면적 화해는 그에게 친절한 모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옆에 사람이 없는 듯 행동하는 그의 모습에 나 또한 뾰루퉁해져서는 침대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소리 내는 것도 조심해하며 텔레비전 리모콘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난 덩그러니 방안에 놓인 꼴이 되었다. 온 신경은 문 밖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며 텔레비전을 보고 있자 십 분쯤 지났을 때 그가 문을 두들겼다. 문을 열어준 다음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텔레비전에만 응시했다. 등 뒤로 부스럭거리는 비닐 소리가 들렸고 곧 진한 알콜 냄새가 코를 찔렸다. 혼자 술을 마시려는 모양이네. 이강주? 문배술? 여하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임은 틀림이 없었다.
“술은 왜 마셔? 많이 늦었는데.”
“·····.”
등을 돌린 그 자세로 말을 건넸더니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그가 말했다.
“궁금하다고 했지? 전에 만난 사람에 대해서.”
술 없이는 하기 힘든 이야기라는 소리군. 화가 난 기분으로 그의 말에 온통 신경을 쏟는 나. 이미 텔레비전의 요란한 화면은 흘러가는 영상일 뿐 절대 기억할 수 없는 것들이 될 것이었다.
“지금 말하려고?”
“그러자. 언젠가는 물어볼 말이라고 생각했어. 피할 생각은 없고.”
그는 천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이야기며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의 이야기들을. 난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입에서 진한 알코올 냄새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전한 그의 사랑이 담아져 오는 이야기였다.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불쾌한 이야기들이었다. 당장 집어치우라고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 불쾌감은 더해져 머리가 아파왔고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결국 프러포즈를 하는 대목에선 눈물이 흘렀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행여 울음을 들킬까 닦지 못했고 눈물은 밑으로 도르르 떨어져 버렸다.
그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 내가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행히 목소리도 떨리지 않았다.
“오빠는 술이 왜 좋아?”
“술? 처음엔 술이 좋은 건 아니었지. 사람들이 좋아서 술을 마셨지. 흥겨운 기분, 솔직한 이야기들. 그런데 나중엔 나한테 위로가 되더라. 그래서 좋았어. 어떤 사람들보다도 술 자체가 위로가 되더라고. 알코올 중독자가 따로 없었지. 이젠 익숙해, 술 취한 상태가. 맨 정신으로 있을 때 가끔 낯설 때도 있다니까.”
이전과 아주 다른 이야기를 태연하게 하는 사람. 다른 여자를 사랑했었다는 말을 내 앞에서 방금 뱉고도 평소처럼 말하는 나쁜 사람.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왜 좋아하는지.”
“난 술 냄새가 좋아. 특유의 알코올 냄새 있잖아. 뚜껑을 열자마자 확 퍼지는 냄새, 그게 좋더라.”
“자극적이지, 알코올 냄새.”
“······.”
“술 말이야,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자극적이고. 꼭 너 같다.”
“내가 왜 좋은지를 몰라?”
“지금은 몰라. 그냥 좋아.”
그냥 좋다는 그의 말에 저며졌던 마음이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지는 듯 했다. 스스로의 멍청함과 바보스러움이 싫으면서도 나를 좋아한다는 그의 말을 다시 듣고 싶었다.
“홍주야, 넌 술 안 마실래?”
“시간 늦지 않았나?”
“괜찮아, 조금만 마셔.”
몸을 돌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소파 옆자리를 내게 내주었다. 독한 알코올냄새가 진동하는 잔을 들어 술을 마셨다. 싸한 느낌. 뱃속의 알코올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 듯 했다. 그렇게 조용히 술을 함께 술을 들이켜다 보니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진 기분이었다.
“사랑해.”
그의 입술이 작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주 가늘고 섬세한 혀가 귓가에 닿았고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팔을 들어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손가락을 스르륵 빠져나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이었다.
“미안해, 정말.”
“으응!”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제스처는 더욱 더 미안한 마음을 들게 했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하고 싶게 만들었다. 덥혀진 입술로 그의 얇은 입술을 지긋이 눌렀다. 벌려진 입속엔 미끈거리고 탄력 있는 혀가 살고 있었다. 내 입속에 넣고 싶은 예쁜 혀였다. 내 이에 살짝 물린 혀는 조심스레 움직이기 시작해 입 속을 더듬고 있었다. 점점 숨소리는 거칠어졌지만 주위는 더욱더 고요해지는 듯 했다. 텔레비전은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았고 간간히 창 밖 차 소리를 의식할 수 있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는지 물을 밟고 지나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내 의식은 오직 그를 느끼기에 바빴으므로.
“홍주야, 무릎에 앉아봐.”
내 엉덩이가 그의 허벅지에 닿았다. 단단했고 힘이 느껴지는 허벅지였다. 그가 움직이질 않길 바랐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고개가 자꾸만 젖혀질 것만 같았다. 팔을 목에 두른 채 그의 이마에, 눈에, 눈썹에, 뺨에 천천히 입맞춤을 하자 허리를 감고 있던 그의 팔이 스르륵 옷 속으로 들어왔다. 행복했고, 감사했다.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그 것에 감사했고, 그렇게 느끼게 해준 그에게 고마웠다.
“사, 사랑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여러 번 말을 해도 부족하다는 기분. 그 말을 되뇌는 나를 안은 그는 침대로 향했다. 나의 말은 그치지 않았다.
***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을 때 그가 내 옆에 있음을 알고는 아주 잠시 놀랐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풍경. 하지만 그 풍경을 계속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람. 잠든 그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일어나서 보니 아침 7시 반. 머리가 깨질 듯 했지만 깨끗이 씻은 모습으로 그를 보고 싶다는 생각에 머리를 흔들며 욕실로 향했다.
“오빠, 나 회사 어떻게 해?”
“음.”
욕실에서 나온 그에게 투정 섞인 목소리를 내자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은 내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았다.
“홍주야, 이 참에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결혼한다고 할까?”
“무단결근한 후에 결혼 발표라. 요즘 고등학생도 이러진 않을 거야.”
“나랑 결혼하기가 싫어?”
“아니, 상황이 그렇다는 거잖아.”
여전히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결혼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고 있었다.
“싫다는 거냐고?”
“결혼으로 해결할 생각 말고 대책을 세워줘. 아무래도 공장엔 같이 출장을 왔다고 하는 게 좋겠지? 직원들한테는 소문이 다 돌겠지만 말이야.”
“소문나면 나야 좋지.”
“뭐야?”
그가 들고 있던 하얀, 그의 몸에 닿았던 축축한 수건을 뺏어 그의 몸을 때리는 시늉을 해보았지만 그는 오히려 내 어깨를 감쌌다.
“이러니까 부부 같잖아. 아하, 일하러 가기 싫다.”
“일 해! 돈 벌어야 같이 살아주지!”
“그래그래. 개미처럼 일할게, 걱정 말아.
행복한 아침이었다. 온 세상 축복을 모두 받은 듯한, 그래서 두렵기도 한 아침이었다. 그의 차를 타고 공장에 도착했다. 입고 온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최대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장 입구에도 미치지 못하고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아버지!”
“홍주, 너. ······. 빨리 차에 타!”
“저, 아버지.”
“빨리 타라니까!”
화가 잔뜩 표정을 짓고 계신 아버지는 말은 들어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찬기씨는 이따 서울에서 보자고. 오늘 일 마무리 되는 대로 일찍 회사로 오게.”
“예. 알겠습니다.”
‘찬기씨?“
아버지를 따라 차를 타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찬기? 아버지가 이름을 실수로 부르신 건가? 차는 서울을 향해 급히 출발했다. 당황스러움이 가라앉으면서 이럴 줄 예상을 못한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충분히 예상을 했어야 했는데. 외박하는 딸을 그냥 두실 아버지가 아니었지. 그나저나 그럼 나와 찬영 오빠 사이를 알고 계셨다는 건가?’
“찬기랑 심각한 사이인 게냐?”
“예? 찬기요? 찬영씨 말씀 하시는 거예요?”
“나쁜 놈. 이 이름도 안 알려준 모양이군. 찬기 말이야, 찬기!”
난 소리치는 아버지의 말을 생각하느라 멍한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