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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구국운동과 한국 기독교의 친일행각

이런것도 좀 |2005.05.24 17:53
조회 1,694 |추천 0

1900년대 청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를 표방한 위정척사파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개화파 간의 다툼으로 대한제국의 정치권이 시끄러워지고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부패타락으로 백성들이 고난에 시달리며 외세의 침범으로 국운이 기울어져갈 때에 우국지사인 홍암(弘巖) 나철(羅喆) 선생은 망국(亡國)의 비운을 예감하고 민족정신의 부흥을 기원해 1909년에 단군교(檀君敎)의 중광(重光)을 공포하였다.

단군 숭배사상을 기초로 한 단군교는 옛날부터 단군을 시조(始祖), 국조(國祖), 교조(敎祖)로 신봉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단군교는 사찰 본당과 대웅전의 뒷켠 삼신각에서 간신히 잔명을 유지하고,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는 공자나 주자에 밀려났다. 그리고 기독교가 유입되면서 '우상숭배'의 사이비 종교로 전락되고 일제강점기에는 말살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대종교(大倧敎)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애국적인 종교로서 일제강점기에 나라와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일투쟁(抗日鬪爭)에 가장 적극적으로 헌신했으며 중광(重光)을 계기로 한민족(韓民族)의 독립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면서 일제(日帝)의 가혹한 통제와 탄압이 따르게 되었다.

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된 대종교는 1911년 7월 21일 백두산 기슭의 화룡현 청파호(靑坡湖)로 총본사를 옮겼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사는 청파호에 총본사와 대종교 경각 등을 짓고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청파호를 근거지로 삼아 4도본사를 각기 청호ㆍ상해ㆍ서울ㆍ소왕청에 두고, 조선 반도ㆍ중국ㆍ러시아 연해주 등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를 세워 포교활동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1915년 10월1일 이른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포교금지령을 내리면서 공식적으로는 해방이 될 때까지 국내 포교활동은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대종교가 민족정통사상을 계승하면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자 각지의 애국지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대종교 중광의 주역인 나철은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라는 ‘국수망이도가존(國雖亡而道可存)’의 정신으로 독립운동과 단군신앙을 일체화하였다. 이에 따라 대종교에서는 일제의 조선사 왜곡에 맞서 신단실기(神壇實記), 신단민사(神壇民史) 등 단군조선(檀君朝鮮) 고대 역사를 적은 서적을 대량 출간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김교헌(金敎獻), 윤세복(尹世復), 서일(徐一), 이상룡(李相龍), 이동휘(李東輝), 정인보(鄭寅普) 등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 진영의 거물급 인사들이 대종교에 입교하면서 대종교는 사실상 독립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도맡게 된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외무총장을 역임했던 신규식(申圭植)은 나라가 망한 원인에 대해 “첫째는 선조들의 교화와 종법을 잊어 버렸고, 둘째는 선민(先民)들의 공열(功烈)과 그 이기(利器)를 잊어 버렸고, 셋째는 제 나라의 국사(國史)를 잊어버렸고, 넷째는 나라의 치욕을 잊어 버리게 되었으니 이처럼 잊어 버리길 잘하고 보면 그 나라는 망하게 마련이다”라고 통분하면서 ‘한국혼’을 지었다. 대종교의 ‘역사지키기’ 정신의 일환이었다.

1918년 당시 만주와 해삼위에서 활동중인 김동삼(金東三), 김교헌(金敎獻), 박찬익(朴贊翊), 김좌진(金佐鎭), 신채호(申采浩), 이시영(李始榮), 이상룡(李相龍), 이범윤(李範允), 조소앙(趙素昻) 등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 39명이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를 발표하고 서명하였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대종교 계열의 인사들이다.

조소앙이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이 선언서의 내용은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이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촉구하는 것이며 대한(大韓)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의 감정으로 보좌하는 것이 아님을 선언하면서 또 2천만 동포들에게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肉彈血戰)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대종교 독립선언서를 필두로 2.8 독립선언서와 3.1 운동의 효시가 된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가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항일(抗日) 독립운동(獨立運動)의 절정을 이루었다.

대종교도들은 민족혼을 계승하고 동포들에게 올바른 민족사를 교육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무장 단체를 조직하고 무력(武力)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직접 추진하였다.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 윤세복(尹世復), 김혁(金赫), 이상룡(李相龍) 등 많은 대종교인들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흥업단(興業團), 신민단(新民團), 대진단(大震團) 등의 독립군을 구성하고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합세하여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의 승리를 이끌었다.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 최대의 승전(勝戰)인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은 대종교도들이 중심으로 이루어낸 쾌거이다.

대종교가 무장(武裝) 항일투쟁(抗日鬪爭)의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살신성인(殺身成仁), 선공후사(先公後私),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 속에는 단군(檀君)을 국조(國祖)로 하는 민족정통의 종교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안화춘(安和春) 교수는 대종교의 항일(抗日) 구국운동(救國運動)을 크게 세가지로 종합하였다.

첫째는 조선인이 단군을 중심으로 한 민족정신을 배양하고 일제의 문화침략에 대항하여 조선 민족의 독립을 이룩하여 이상적 국가인 배달국가를 재건하려는 것,

둘째는 대종교도가 주체가 되어 반일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와 직접 무력항쟁(武力抗爭)을 전개한 것,

셋째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민족사관을 정립하여 조선 역사의 맥을 이은 것 등이다.

대종교가 이렇게 목숨을 걸고 피땀흘린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는 동안 국내의 그리스도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1930년대에 들어서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조선 민족의 황민화 작업을 위해 국내의 각 종교계에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때, 국내 그리스도교계는 처음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였다.

그것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지보다는 십계명(十誡命)에 나오는 '유일신 사상'과 '우상숭배 금지'의 계율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율화를 약속하며 조선 민족의 황민화 작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자 국내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가 일본 왕실을 신성시하는 우상 숭배의 개념이 아니라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일원으로서 의당히 해야 할 국민의례에 불과하다고 규정하였으며 일본이 수행하는 침략 전쟁을 '주 여호와가 선택하신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2월에 창간된 '기독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내며 친일논설을 기고하거나 친일좌담회에 참석하기도 했던 백낙준 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는 "황금만능주의 밑에서 운전되는 것이 미국이다. 선전만 잘하면 전국적으로도 지위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은 침략의 마수를 뻗어왔던 것이다. 이 형세를 그대로 방임해 두면 대동아공영권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불을 보기보다 명백한 것이다. 영원히 광만 뻗도록 그동안 날과 달을 거듭할수록 더욱 감개 깊이 생각되는 것은 이 싸움이 가진 도의적인 성격과 위대한 이상이다.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해방 이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36년 6월 29일 총독부에서는 양주삼 조선성서회 행정총무 감리교 목사에게 "감리교가 총회에서 신사 참배 결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양주삼 목사는 "국민의 의무일진데 누구나 참배할 것이니 구태어 결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다.

복음교회 감독인 최태용 목사는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 국가를 섬겨야 한다고 나는 생한각다."고 주장했으며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 라고 단정하였다.

일제 어용사상으로 무장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신사 참배를 반대한 자들에게 오히려 "유다 같은 사람이다"라고 매도하였다. 그들은 일본 왕실에 대한 숭배와 전쟁의 정당화 명분 협조, 신사 참배 강요 등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민족반역행위를 저질렀다. 이렇게 매국적 친일행각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국내 그리스도교는 오늘날에도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에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최덕성 고신대학 교수는 "단군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신화이다. 특정 종교단체가 그를 참배하고 우상 숭배를 하는 것은 미신적 행위이다. 상을 만들어 공립학교 교정에 세우는 것은 숨은 의도를 가지고 국민을 속이는 기만행위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대종교를 매도하고 민족정기를 모독하였다.

김해경 목사는 '기독교 신문'의 기고를 통해 "단군은 한민족의 시조도 아니도 더더욱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도 아닌 하나의 전설과 신화 속에 있는 미신적 대상일 뿐이다."라고 하여 우리 민족 역사의 시초인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를 부정하였다.

또 한철하 아시아연합 신학대학 명예총장은 "단일 시조 숭배를 통한 민족 단합은 성경이 말하는 참된 단합은 아니다.

성경의 태도는 우리 인류가 다 한 동포라는 것으로 어느 한 민족만 내세우며 다른 민족의 이질성을 구별하는 자세는 전혀 기독교 사상에 배치된다."라고 하였으며 민경배 연세대학 명예교수는 "단군을 국민적 참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일본이 그 시조를 신사에 올려놓고 정신을 지배한 것과 같은 국가 종교화로 변질될 우려가 크다.

단군상 건립은 그를 신격화하는 것은 물론 세계화 시대에 역행하는 국수주의의 편협성을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올 위험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종성 기독교학술원장은 "역사적 실존성이 증명되지 않은 인물을 실존적 인물인양 동상을 세운다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동이며, 실존성이 희박한 인물의 동상을 초,증,고등학교 교정에 세운다는 것은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일이다."라는 망언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민족정기 회복과 항일(抗日) 구국운동(救國運動)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던 대종교가 친일행각을 벌이며 민족반역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그리스도교에 의해 해방 이후 '사이비 종교'로 매도당하고 있는 현실.

그리고 국내 그리스도교계가 권위주의적인 유일신 사상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고대사이며 민족정통인 단군조선의 역사를 부정하고 모독하여 중국, 일본의 한국 역사 축소 왜곡에 동조하고 있는 현실에서 민족적 자긍심 고취와 애국정신의 고양은 상당히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며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 구현은 한낱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국내 기독교 계열의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의 국조(國祖)인 단군(檀君)의 역사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은 기독교만이 진정한 종교이며 기독교가 아닌 다른 신앙은 모조리 사이비라는 그릇된 관념에서부터 출발한다.

기독교의 권위주의적인 유일신 사상은 다른 종교와 특정 지역의 전통문화를 일체 부정함으로써 자교(自敎)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편향적인 사관을 합리화시킨다. 따라서 단순한 신앙적 숭배 대상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적 모태가 되는 고조선(古朝鮮)의 통치자 단군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깎아내리는 국내 기독교의 월권행위는 민족의 정체성을 망가뜨리고 국가 주권의 정당성을 훼손하고 있다.

일제 어용사가(御用史家)들이 한반도 식민지화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골몰했던 것이 한국 역사의 타율적 종속성 강조와 고대 국가 형성시기의 왜곡이다. 특히 한국 역사에서 고대 국가가 형성된 시기를 일본 역사보다 느리게 설정하기 위해 단군조선을 신화 속에만 등장하는 가공의 국가로 왜곡하였다. 이것은 현재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일으킨 현재 일본 역사학계에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일본 역사학계의 의도를 한국의 제도권 사학계에서도 어리석게 발맞추어 가고 있는 형국인데 이는 이병도(李丙燾)를 비롯한 매국사학자들에 의해 조성된 친일 식민사관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교 권위주의라는 종교적인 관점에 사로잡혀 역사를 왜곡하는 그리스도교 계열의 지식인들이 대부분 국내 강단사학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는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화(神話)라는 개념은 역사적 사실이 은유적으로 포현되어 내포된 것이 많다. 이것은 단군설화(檀君說話)도 예외가 아니다. 신화는 하나의 상징이다. 우리 민족은 국조(國祖)이며 역사의 시조(時祖)인 단군(檀君)이라는 존재를 신성시하기 위해 초대 단군인 왕검(王檢)의 고조선 건국을 신화로 풀이하여 하늘의 자손, 즉 천손(天孫)임을 강조한 것이다.

단군설화(檀君說話)에 담긴 역사적 상징성을 무시하고 그것이 단지 신화일 뿐이니 이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숭배하는 것은 미신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리스도교 계열의 지식인들은 세계 각 지역의 역사적 특징과 민족적 상징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망발을 일삼은 자신들의 과오를 반성해야 하며 좀더 깊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본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단군설화(檀君說話) 중 단군의 수명이 1048세라는 것은 단군이 한 사람의 개인 명칭이 아닌 단씨가 세대를 통해 내려온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단군은 신화가 아닌 고조선을 다스리는 제왕의 호칭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수 있지 않은가?

단군 숭배사상이 미신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 역시 여호와만을 진정한 숭배의 개념으로 삼아야 하고 다른 신앙은 모두 우상 숭배라는 식의 권위주의적 종교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단군은 국조이며 우리 민족의 조상이다.

후손이 조상을 모시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다. 그리스도교식 논리대로라면 우리의 부모, 조상은 무시하고 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를 우리의 조상처럼 떠받들라는 억지성 강요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이 외침(外侵)을 당해 국난이 닥칠 때마다 단군이라는 존재는 우리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단군은 하나의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역사적 실존인물이다. 단군설화(檀君說話)는 우리 선조들이 체험했던 역사를 그 골격으로 하고 있다. 단군설화에서 단군의 탄생 부분은 우리 선조들이 단군을 신격화하기 위해 신화로 꾸민 것이다.

하지만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환웅(桓雄)과 웅녀(熊女)의 결합은 환웅 부족과 곰 부족의 연합으로 고조선이 건국되는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이다. 게다가 인류사회에서 국가가 등장하는 시기는 청동기 시기인데, 고조선이 건국한 해는 기원전 2333년이다.

그런데 만주와 한반도 중부에는 기원전 24~17세기경의 청동기 주거 유적이 다수 발굴된 바 있다. 이는 고조선이 실재한 국가라는 것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며,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檀君) 왕검(王儉) 역시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밝혀주는 것이다.

단군 숭배사상이 일본의 신사 참배와 비슷하다는 기독교인들의 치졸한 논리 역시 역사적 지식을 망각한 궤변에 불과하다. 일본의 신사 참배는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 국왕을 신격화하는 개념을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에게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숭배하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미국에는 미국의 건국자 조지 워싱턴을 숭배하는 워싱턴 기념관이 있다. 그 기념관을 건립할 때에 미국의 개신교도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종교계의 단군성전(檀君聖殿) 건립을 비난하고 매도한다.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에 앞장섰던 국내 기독교가 단군 숭배사상을 일본의 신사 참배와 대조하는 것은 그 자체가 허구이며 모순이다. 우리가 후손으로서 우리 민족의 시조(時祖)를 섬기는 것이 어째서 잘못인가?

단군성전 건립은 국수주의의 편협성을 드러내는게 아니라, 우리 민족을 하나로 묶어줄 구심체로 작용할 것이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지역감정 및 대립을 해소하고 우리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단군성전 건립이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다. 혹시 국내 그리스도교인들은 우리 민족의 구심체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 따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만약에 단군의 역사적 실존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기독교 계열 지식인들의 주장이 옳다면 고조선이라는 국가도 역사로 치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내의 국사교과서에는 고조선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고문헌과 우리 민족의 옛 사서에는 고조선이 존재한 국가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계열의 강단사학자들이 필사적으로 위서(僞書)라고 몰아세우는 규원사화(揆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단군은 엄연히 실존한 인물이라 기록되어 있고, 신화적인 요소로 꾸며지긴 했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에도 단군의 기록이 있으며 여지승람(輿地勝覽), 응제시주(應製詩註), 조선사략(朝鮮史略), 동국통감(東國通鑑)에도 단군의 고조선 건국 사실이 적혀 있다.

게다가 동국통감은 단군의 수명 1048세를 단군 한 사람이 아닌 단씨가 세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단군의 역사적 실존성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기독교 계열 지식인들의 주장이 종교 우월주의에 입각한 어설픈 거짓말이 입증되는 근거이다.

국내 기독교인들은 주변 민족의 영토를 빼앗는 더러운 근성의 유태인 역사는 줄줄 외우면서 왜 정작 우리 민족의 역사를 무시하고 있는지 필자는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는 본시 유태인에게서 출발한 종교다.

유태인들은 선민사상에 의해 자신들만이 신에게 선택받은 민족이라 여긴다. 유태인의 전통적 신앙에서 출발한 기독교는 오로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종교이며 다른 민족과의 이질성을 구별한다.

기독교는 겉으로는 세계 모든 인류가 한 동포라고 이야기했지만 17~18세기에 특정 지역의 신앙과 전통문화를 말살하고자 인디언과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대량학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인들만의 종교일 뿐이고 유태인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이 처음부터 신화적인 요소로 알려져 있기에 단군의 역사적 실존성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교 역시 충분히 약점이 잡힌다. 모세가 홍해를 가르고 예수 그리스도가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만드는 기적이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죽은 후 며칠만에 부활하는 것 또한 신화적인 요소가 강하며 허구에 불과하다. 기독교인들의 논리대로라면 모세나 예수 역시 역사적 실존성이 희박한 인물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규철 '대종교의 반일 독립운동'
곽병희 '일제 치하 한국 기독교의 친일행각'
'종교신문' 2005년 3월 1일자, 2004년판 '기독교보'
'개신교의 국조(國祖) 단군(檀君) 부정론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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