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관계
(17) 우리 이만 끝 낼 때가 된 것 같아.
벨이 두 번 울렸다. 딩동- 딩동-
정확히 두 번 울리는 벨이 누구의 것인지, 현관문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람. 상현이었다. 벨이 두 번 귓가에 울려 퍼지자, 잠잠하던 가슴이 미친 듯 요동을 쳤다. 성난 파도 같이. 여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현관 앞에 섰다.
“문…….열어.”
마치, 여자의 행동들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말투로 현관문 건너편 남자가 말했다. 남자의 말에 여자가 포기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오만가지 감정들이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 휑하니 시린 바람이 지나간 가슴을 끌어 앉고 여자는 잠긴 현관문을 열었다. 열린 현관문 사이로 비친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여자의 가슴이 그렇게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지난 5년간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을, 아무런 감정 없이 정말 순수한 친구 같이 마주한다는 일은, 10년이 걸려도 힘들 것만 같았다. 사랑을 잊으려면 그 시간의 배를 아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가 그렇게 오해에 가득 찬 얼굴로 가 버린 이후, 주혁에게서 불륜이라는 말을 들은 이후, 상한에게서 고백을 들은 이후, 여자는 생각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살았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고,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 일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그만큼 그 일은 여자에게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남자의 방문을 맞이하고 있자니, 며칠 동안 잊고 지냈던, 그녀가 애써 감추어 두었던 생각들이 서로 아우성치며 그녀의 머리를 헤집고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상현이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며칠 동안 부쩍 야윈 모습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모습만으로 충분히 여자를 살리고 죽일 수도 있는 남자.
“어떻게 된 거야?”
잔뜩 잠긴 목소리로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다. 남자의 물음이 그날 주혁과 관계된 것임을 아는 여자가 한 동안 지긋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남자. 하지만 가질 수는 없는 남자. 포기하는 것이 더 빠른 남자. 지금 이 순간 남자의 대답에 여자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는 영효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대답으로 인해, 상현과 주리, 그리고 자신과 주혁이 편해질 수도 다시 힘든 나날들을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영효는 조심히 걸어가 남자의 발치에 앉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앉아 있으면 항상 상현의 긴 손가락이 여자의 머리칼은 헤 집고 들어갔었다. 남자의 따스한 손길에 세상 근심 다 잊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그 남자의 손길이 지독히도 슬펐다.
“상현아..........”
“...............”
“우리.........아닌 것 같아. 인연이.......... 한 때는 널 빼앗아 간 주리가 미웠었어. 아무 말 없이, 나한테 단 하나의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내린 네가 미웠었어.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와 내 인연이 거기 까지여서 그것 밖에 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주리에게 돌아가. 그 여자에게 충실해. 그래도 널 사랑하는 여자야. 만약 주리가 널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 너에게 접근했다면, 나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널 되찾아 왔을 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 네가 더 잘 알잖아. 주리가 널 사랑해서 그런다는 것을 잘 알잖아!”
“그래서........그 여자에게 가라는 거야? 그런 거니? 널 책임지기로 했었잖아. 넌 내 소유잖아. 다른 사람이 책임 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나 아니면 안 되는 너잖아!”
“아니..........그건 너와 나 만의 착각이야. 난 너 없이도 돼. 안 되는 것 따위는 없어. 노력하면 다 되게 되어있어. 그리고 그 책임감. 주리에게 더 강해야 하잖아. 그래...........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박상현. 이제 내가 아니라 그 책임감, 주리한테 쏟아야 하는 거야. 그게 정상이야.”
여자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단호한 표정으로 이미 정해진 일 인양 담담하게 읊조리는 여자를 남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5년간의 사랑을 어떻게 그렇게 정리 할 수 있단 말인가? 주리에게, 그래. 결혼한 여자에게 더 책임감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그럴 수는 없었다. 3년간의 기한이 아니었다면 지금 버틸 기운조차 없었을 것이다. 지금 남자에게는 영효만이 숨통이었다. 지금 그 숨통이 자신을 막아들고 있었다.
“난 너 아니면 안 돼. 너도 나 아니면 안 돼. 알잖아?”
남자의 떨리는 눈빛과 목소리에 여자는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왔다. 하지만 흔들리면 안 되는 이유가 더 생기지 않았던가? 지금 남자의 말에 동의하고 또 다시 맘 약하게 남자에게 넘어간다면, 이젠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불행해 지는 것이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지금 여자가 끊어주지 않으면 남자는 절대 뒤돌아서지 않을 것을. 자신의 몫이었다. 아프고 쓰라려도 언젠가는 치룰 일이라면 빠를수록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아프게 그녀의 손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의 머리카락을 쓸어 주면서 여자가 말했다.
“사랑하지만, 안 되는 것도 있어. 세상에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사람은 드물잖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잖아. 지금 우리가 그래..........”
“그래서, 지금 나 보고 어쩌라는 거니..........”
“주리를 사랑하도록 노력해봐. 그러도록 해봐. 힘들겠지만, 그렇게 해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널 놔두고..........”
“날 사랑하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인거야. 상현아............ 우리 이미 그런 관계인 거야. 다른 사람들이 보면 손가락질 하는 그런 관계로 널 만나고 싶지 않아. 이제 우리 끝내자.”
남자는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흐르는 눈물 사이로 비친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붙어 있었다.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을 그에게 전달하려는 듯. 여자의 그런 표정, 몸짓, 손짓하나를 다 아는 남자로써는 더 이상 매달릴 여력이 없었다. 시작조차 하지 않았는데 끝내자니. 여자의 말에 남자가 소파에서 일어나 여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랑했던 여자, 지금도 지독히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저 여자가 힘들었을 아픔을 아는 남자로써는 더 이상은 여자를 힘들게 할 자신이 없었다.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여자에게 매달 릴 수도 없는 남자의 입장. 상현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럼 3년 후에는.......... 그때가 지나면 내 곁으로 돌아와 줄 수 있겠니?”
남자의 말에 영효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완전히 끝내자. 우리 남으로 살자. 나 너 보는 거 힘들어. 언제 올지 모르는 껍데기 같은 너 기다리는 것도 지치고, 남들에게 불륜이라는 손가락질 받는 것도 싫어. 나 정말 힘들어. 상현아……. 나 정말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여자가 얼굴을 가리고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가늘게 새어 나오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갈가리 남자의 사지를 찢는 것만 같았다. 영효와 다시 살게 되면 행복할 것만 같았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아픔쯤은 간과 했던 것이, 그것이 여자를 저 지경이 되도록 몰아붙인 것만 같아 남자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사랑했다. 미치도록, 최선을 다해, 죽을 만큼 사랑했다. 영효 아는 다른 여자는 여자로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했다. 하지만, 가질 수 없다는 것이, 억지로 상현이 더 다가가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여자 때문에 남자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내가...............없어져 주면, 네 인생에서 빠져 주면.......... 행복 하겠니?.....”
‘제발 아니라고, 나 아니면 못 살겠다고 대답해줘.’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는 상현의 눈을 영효가 또렷이 바라보았다. 애원어린 그의 눈빛을 조롱이라도 하듯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남자에게 눈빛을 준채로. 매정히. 여자의 그 태도 하나에 남자가 주저 앉아버렸다. 조금 전 여자가 한 것과 같이 가늘게 떨리는 남자의 등을 보며 영효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박영효. 정신 차려. 지금 네가 상현이를 안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거야. 제발……. 제발.......... ’
그를 안고 싶어 하는 마음과, 그를 안으면 안 된다고 설득하는 이성의 충돌. 영효는 상현의 떨리는 등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조금만 더 그를 보고 있으면, 주혁이고, 주리고 지금 관계고 뭐고 다 때려 치고 그의 손을 잡고 도망이라도 쳐 버릴 것만 같았다. 세상 모든 손가락질 다 견뎌 내고 그렇게 그의 손을 잡아주고 싶을 것만 같았다. 여자는 천천히 일어서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굳게 닫힌 방문 너머로 상현의 작은 흐느낌이 그녀를 괴롭혔다. 아아악- 비명이라도 질러 버리고 싶었다. 여자는 귀를 막아버렸다. 영효가 들어간 굳게 닫힌 방문을 상현이 망연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이제 그에 대한 마음을 닫는다는 여자의 선전포고 같은 행동에 상현은 죽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이별을 고할 때도, 언젠가는 다시 그녀를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이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남자는 미칠 것만 같았다. 상현은 일어나, 닫힌 방문 앞에 섰다. 조용한 적막감속에서 남자는 손을 들어, 방문을 쓰다듬었다. 마치 안쪽에 힘들어하는 영효의 가녀를 등을 쓰다듬듯이.
“미안하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었나봐. 그래……. 이제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 주리라는 것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그러는 것이 널 위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너와 나 그리고 그녀를 위하는 일이라면, 흡……. 이 악물고……. 버텨 볼께. 네 보고 싶은 것 참아볼게. 주리를 사랑해 보도록 노력할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라면 나 그렇게 해볼게...........”
정말 이별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는 슬픈 이별이었다. 여자는 힘없이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내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닫힌 방문을 열고 나가 너만 사랑한다고, 너 없이는 안 되겠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영효는 대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맴돌 때 까지 영효는 아픔을 즐기기라도 하듯 터져버린 입술을 더 잘근거리며 깨물었다.
“나 갈께.............”
영원한 이별의 말임을 알면서도, 이제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자. 여자는 남자의 마지막 말에 새어 나오는 울음을 막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제 그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미칠 것 같은 외로움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현관문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지,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그 상태로 쪼그려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가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