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
백승권
|2006.01.23 13:28
조회 1,069 |추천 0
눈을 감기엔 한참이나 늦은 시간이었고 눈을 뜨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불을 끄고 머리를 눕혔지만 이상하게도 어둑한 천장만 깜빡거릴뿐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과연 용서받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용서받지 못한 채 누군가의 원망어린 술자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가해자가 되어있는 것은 아닐까
용서받지 못한 자.
어딜 가든 군대이야기만 나오면 쓴웃음을 지으며 어서 화두가 바뀌길 바라는 극단적인 기피증을 보이는 이로서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그새 아물긴 바랬던 상처의 딱지를 조금씩 벗겨내는 기분과 다를바 없다. 시간이 지나면 굳어져 피부로 변할 줄 알았는데 상흔으로 남아 남에게 보이기 싫고 거울조차 외면하고 싶은 부분이 되어버린 지금. 어느 누가 치아를 보이며 환히 웃을 수 있겠냐만은 묻고 싶은 건 이건 정말 어떤 성형기술로도 지울 수 없는 것인지.
학대를 받으면서 자란 아이의 손은 결국 그 아비를 닮게 된다는 말을 여러차례 들은 적이 있다. 적응이라는게 결국 그 속한 곳을 닮아 일부가 되어버린다는 의미를 담았을텐데. 난 완전한 적응보다는 관찰자에 가까워지고 싶었던 듯 하다. 웃음 띈 인사속에 적개심을 굳이 담지 않아도 수많은 상황들 속에서 종종 내면의 갈등을 읽고 싶었다. 여유가 아닌 처음부터 완전한 적응을 거부한 스스로와의 약속이었고 정해진 기간이 마쳐지는 마지막 날들까지 위치에 맞지 않는 마인드를 지니고 있다는 소리를 장난섞어 주고 받았다. 어렵게 길들인 긍정적인 기억만을 남겨두려는 습관을 통해 분노와 억울함등은 '지난 날'이 되었지만 난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두렵다.
군복과 헬맷이 마냥 불편했던 초반. 총을 들고 핏발 선 기합과 함께 훈련을 받는 내내 머릿속엔 사람 죽이는 연습에 대한 회의감으로 가득했다. 단순해져야만 생활하기 편한 곳이었는데. 온통 그냥 살아남자 라는 생각 뿐이었다. 독특함은 선망의 대상이 아닌 지탄 받아 마땅한 표적이 될 수 있었기에 되도록 숨겨야만 했다. 마음이 끌어당기지 않는 이상 몸이 먼저 반응해야 하는 여러 과정을 쉽게 익히지 못하는 입장에서 분위기를 익히는게 급선무였던 것 같다. 늘 걸려 넘어졌고 예민함과 소심함이 벌떡 돌변하여 튀어나오려고도 했지만 나말고 수십만이 버틴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지니고 있던 온갖 긍정적 마인드는 바닥이 날때까지 끌어모았고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버텨야만 했다. 겨울을 길고 추웠지만 우리나라의 계절은 하나뿐이 아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고개가 아파도 하늘을 봐야 했다. 그곳엔 벽이 없었으니까.
긴장 속에서도 어김없는 시행착오와 온갖 변수안에서 달력은 찢어졌고 사라지는 사람들과 새로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직도 익혀야 될 것은 많기만 했고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가르쳐야할 위치가 되었다. 수개월전 제대 며칠 안남은 형앞에서 막내라고 시키는대로 노래를 몇번이고 크게 불렀었는데 목이 아프면서도 재미있는 기분이 들었었다. 새로 온 막내들에게는 노래가 컴플렉스인 이들도 있을테니 이렇다할 엔터테이먼트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남는 노하우를 혹시나해서 귀뜸해줬을 뿐이다. 말이 길었고 내 행동은 종종 그들에게 본이 되지 못했겠지만 조금 익숙해진 여유로써 그들의 입가에 웃음을 주는 낙으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어디에 속해 있던 크고 작은 사고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끈이 엉켰다고 마구 잡아당기면 점점 더 걷잡을 수 없을 뿐. 한발짝 뒤로 선 채 신중한 조율이 필요했다. 책임이 전가되는 위치에서 책임을 맡는 위치로 옮겨졌고 일이 꼬이는 경우엔 주체하기 힘든 답답함이 밀려왔다. 그러고보니 그 시기에 참 많은 욕을 입에 담았던 듯하다. 점점 자연스러워졌고 "C발"은 욕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신기했다. 나쁜 걸 알면서도, 알았으면서도 멈춰지지가 않았다. 더하면 더해지 누구도 뭐라하는 사람이 없었고 그런 그들을 보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래도 넌 나은 편이야 이러면서. 변화는 이 안에서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조금 밖에 모르는 일을 많이 가르쳐줘야 했고 그 와중에 트러블이 일어났다. 나도 이전엔 다르지 않았으면서도 아직 익숙치 않은 막내가 답답하기만 했다. 종종 거울을 보며 놀랐다. 난 순간순간 내가 그토록 가증스러워했던 이들과 닮은 부분을 지니고 있었다. 좀 더 참아야 했던 눈빛과 말투들. 별 것 아닌 것처럼 나온 표현방식들이 어느 누군가에겐 증오를 잉태하는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최대한 조심하고 싶었다. 악순환을 전부 막을 수는 없겠지만 나마저 그 중간의 톱니가 되어 마치 그러한 것들이 당연한 것마냥 받아들이게 할 수 없었다. 내가 속한 집단은 다행히도 분위기가 최악의 경우는 아니었고 그렇기에 목숨이 오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나 이런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톱스타들이 어색한 연기를 펼치는 군홍보영화가 아니었기에.
극한의 상황이란 한쪽에서만 닥치는 것이 아니다. 전화와 편지라는 매체가 있는 이상 외부와의 교류가 아주 단절된 것은 아니기에, 하지만 바깥세상이라고 마냥 반갑고 보고싶은 일들만 생기는 것은 아닐터. 첫번째 희생자는 기댈 곳을 잃었다. 수화기로 넘어오는 차가운 음성에, 그 날카로운 단절음에.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지켜줄줄 알았던 누군가에게 손찌검을 당함으로써 혼자 설 힘을 잃어버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다. 신발끈을 풀러 자신의 목에 매는 법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쉽없이 연습이나 했던 것처럼 성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것말고도 수많은 해결책들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의 눈빛을 차분히 봐주기만 했어도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 외딴 화장실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잊고 있었고 그랬기에 모두가 살인범이었다. 사는게 다 그런거지라고 혀를 찰지도 모르겠다만 그런 무관심으로 인해 지난해 뉴스에는 수많은 군복들이 걸레조각이 되어 살점과 날아갔다. 그렇게 살면 안된다. 절대로.
주인공은 특이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조금 마르고 조금 소심한 되도록 바르게 살아오려고 애써왔고 그런 생각들을 쌓아 가치관을 만들어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군대란 집단은 바른 가치관의 정의를 바뀌어 놓았다. 주인공은 자신이 생각한 정의로 집단을 바꿀 수 있을 거란 야심도 있었지만 이를 위해 숱한 갈등과 희생을 겪어야했고 '친구'라는 방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의는 결코 창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자신도 적응이란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기브give가 있어야 테이크take도 따른다는 걸 알았다. 인정하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살아남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의 후임은 그걸 끝내 알 기회를 잃어버렸다. 주인공은 그의 시신을 확인하며 오만가지 생각이 겹쳤을 것이다. 자신이 방패가 되주지 못한 점과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어디부터 잘못된 것이고 이게 과연 말이나 되는 일인지.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음에도 감정에 복받쳐 오랜만에 만난 친구앞에서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을 것이다. 가지 말았어야 했을 길. 그는 마지막 순간에 누굴 생각했을까. 친구. 후임. 그리고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들?
영화는 국방부의 원성을 들을 정도로 어두운 면에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허구는 없었고 거기엔 극의 형식을 빌린 다큐멘터리와 다름없을 정도의 사실성만 남겨졌을 뿐이다. 상처는 애써 지워내고 군대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보고 싶은 이들이 더 많이 생각나는 이로써 이런 영화를 만들어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이제 스물여덞인 젊은 감독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하고 싶은 말은 술자리에서나 해야하는 불문율 같은 게 깔려있는 곳이었다. 이를 계기로 말하지 못한 것들이 점점 더 국내영화를 통해 더 많이 보여졌으면 한다. 정권이 바뀌고 사회분위기가 달라짐에 따라 군대는 점점 공개되어야만 하는 곳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런 영화가 더이상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자신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여기며 감정을 몰입하게 하는 역활이 아닌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나오는 이야기로 비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다쳐야 하고 얼마나 많은 더 아파야 하나. 이제 그만, 이제 제발 그만이란 부탁이 한사람만의 염원이 아닐 것임을 군대 안쪽과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이 좀 더 알아주었으면 한다.
윤종빈 감독/제작/각본
제작비 2천만원/상영시간 121분
The unforgiv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