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사랑이야기를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촌스럽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들의 두근거렸던 심장을 애써 숨기고 과거와 추억이라는 타임캡슐에 닫아두고 영영 꺼내보지 않을 심산인지 쓴 웃음만 짓는다. 유치한게 진심이고 그때 그 목소리와 그 수줍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보물과 같은 찬란함이었음에도 이젠 힘없는 고개를 내젓는다. 이젠 다 잊었다고 말한다. 사랑이 있기나 하는거냐고. 사랑따위 그게 가당키나 한거냐고. 지겹다고 이젠 기다리기도 주저앉기도 지쳐버렸다고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다고. 그냥 이렇게 아닌 척하며 지워버렸다고. 찡그려진 눈가엔 눈물이 마른지 오래. 이제 감정같은 건 잊고 산다. 이런걸 생활이라고 말한다. 이런게 삶이고 인생이란다.
사랑을 놓치다
술병을 아무리 비우고 그 사람이 내 가슴과 머리를 빌려간 양 가득 채워져 있어도 그 사람은 모른다. 말하지 못했으니까. 착각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심각하면 내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짓고 떨려하고 이름부르고 괴로워하고 외로워하고 기다리면 그러면 올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다. 그럴지고 모른다고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고 했잖아 그래 올거야 알아줄거라고 언젠가 그동안의 고민을 모두 씻어버리고 두팔을 벌려 날 흠뻑 안을거라고. 꾹 다문 입으로 그렇게 속으로만 중얼거린다. 되지도 않는 산수로 확률을 계산하며 이렇게 하면 이렇게 만나서 이렇게 얘기해서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순정만화의 왕자는 말을 잃어 버렸고 공주는 드레스를 준비하지 못했는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그녀가 내게 말만 걸어준다면 따뜻한 눈빛만 한 컷 보내준다면 난 목이 달아날새라 달려가 내 맘을 꺼내줄텐데. 모두가 쳐다보는 것 같은 이 미칠 것 같은 순간에도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술을 들이켜야 목소리가 커졌고 맨정신으로는 차마 안되겠더라. 부끄러워서 같은 햇빛아래 이렇게 비천한 나와 이토록 고귀한 니가 같이 서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어서 그냥 숨어 있다가 그냥 아무 말 못하고 서운해하다가 그렇게 보내게 되더라. 울어도 이젠 소용이 없는데 그제서야 나를 미워하고 싶더라. 난 정말 바보였는지.
그 나이가 되어서야만 짐작할 수 있는 그 나이만의 감이란게 생기더라 . 너무 늦은 줄도 모르고 용기를 내보았지만 입에서 새어나오는건 미안하다는 말. 뭐가 미안하고 뭐가 널 이렇게 머뭇거리게 하는건지. 왜, 니 입에서는 내가 맘에 든다고 내가 좋다고 나와 같이 있다는 말이 나오면 안돼는건지. 항상 내가 먼저 아파하고 힘든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쯤은 니가 다가와야 하는 건 아니냐고. 이렇게 사랑이란게 불공평한거였냐고. 정말 이렇게 평생의 짐처럼 무겁기만 한거였냐고. 나이가 들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때묻지 않은건 마음뿐이 아니었는지. 넌 왜 아직도 나를 겁내는 건지. 마음 알거 같은데. 안아주지 못해도 큰소리로 고백하지 않아도 알것 같은데.
아주 흔하고 아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을법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누구는 공감하고 누구는 답답해하면서도 맞장구를 치겠지만 누구는 지겨워하며 코웃음을 칠테고 누구는 말도 안된다며 외면을 할지도 모를 그런 둘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중에 사랑은 전부인 것 같아도 겉에서 보기엔 별로 차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전부인. 그런 이야기가 있다. 유치하고 재미없고 끝을 다 알 것 같은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가 자기것이 되보지 않는 이상 절대 공감했다 말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가 있다. 사랑이란거 자격과 조건 까지지 않고 해본사람만이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흔한 이야기가 있다. 아주 슬프지도 아주 아름답지도 않은 - 현실이 원래 그렇듯 - 진짜에서 벗어나 희망과 낭만을 심어주기 보다는 그냥 누군가의 골목을 훔쳐본듯한 그런 이야기가 있다.
영화같은 극적인 느낌도 드라마같은 로맨틱함도 다 걷어버린 그런 재미없는 진짜인것 같은 사랑이 있더라. 가슴을 저리게 하는 노래가사에 자신의 상황을 전부 옮겨서 똑같이 여기게 하는 그런 사랑이 있더라. 너무 늦게 알았고 자꾸 놓치지만 결국엔 다시 생각나는 수없이 엇갈리고 수없이 피해가지만 그래도 언젠가 느닷없이 만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의 그런 사랑. 알만한 사람은 알만한 그런 이야기였더라. 그냥 그저 그런 사랑이야기.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보이겠지만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이야기. 그들이 하지 못한말과 해주지 못한 말. 지금은 너무 쉬워져 버린 그 말 한마디에 수십년을 혼자 애닳아하는 그런 사람들. 그 바보들. 유치하지만 행복해지길. 그게 진심일테니 제발 그래주길. 사랑을 끝내 놓아주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