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초기의 북벌론 연구는 효종 중심이 아니라 송시열 중심의 사상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기존의 북벌에 관한 연구가 송시열 중심으로만 편중되어 있는데 강한 반론을 제기하며 북벌의 주체를 효종 및 효종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관료로 파악하고 송시열은 반 북벌론자로 규정하는 연구가 나왔고, 이 논문은 북벌의 주체는 물론 북벌정책의 시각을 넓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효종을 부각시키려는 지나친 의욕이 앞서서 송시열에 관한 언급에서는 무리한 사료의 해석으로 정곡을 얻지 못한 점은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루어지는 북벌론 연구는 양자의 입장 모두를 고려하는 한층 폭넓은 시각으로 연구되고 있다.
북벌론이란 인조반정과 호란 및 세자책봉 등 일련의 정치사건2)을 통하여 왕과 신료들이 각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공론의 대상으로 취했던 정책으로 볼 수 있다.3) 효종대의 북벌추진은 크게 효종주도기와 송시열 위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북벌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같았으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4) 효종은 정통성 결여와 함께 사류들에 의해 제약당하던 왕권의 강화를 위한 기반으로의 군사권의 장악을 통해서 북벌론을 추진했다. 즉 효종의 북벌론은 실제적 군사권의 강화에 있다. 이에 반해 송시열은 춘추대의의 화이관에 입각한 사상적인 차원에서의 북벌론 이였으며, 양병을 통한 북벌론 이전에, 안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두 사람의 입장차이로 인해, 9년간의 효종 주도기에서는 송시열 등의 산림세력이 배제된 채 북벌이 추진되게 된다.5) 효종의 박서, 이완, 원두표, 김익희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북벌론을 추진해간다. 효종의 대표적인 북벌책으로는 노비추쇄, 중앙군의 확충(금군, 관무재의 정비포함), 대동법의 확대와 보급, 금속화폐의 발행6)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남인을 등용하는 등 당시 서인 주도의 정권을 견제하여 왕권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무신 우대책과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신료들과 마찰을 겪게 되고, 이들의 지지를 잃자 효종주도의 북벌추진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효종은 이런 난국의 타개책으로 산림의 총수인 송시열에게 북벌론의 추진을 위임시켰다. 이는 산림을 정계에 복귀시킴으로써 왕의 실추된 위상과 여론의 안정을 도모하여 북벌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고자 함 이였다.7) 이로 인해 송시열과 송준길, 이유태 등이 정계에 등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북벌책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가 송시열위임기이다. 하지만 송시열의 북벌론의 추진목적은 왕권강화가 아니라, 산림의 정국주도권 확보에 있었다. 따라서 왕권강화 차원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통한 실질적 북벌책은 사라지게 되고, 안민을 우선으로 하는 사상적인 차원에서의 북벌책이 대두되게 된다.
결국 이런 송시열 위임기 때의 북벌론은 갑작스런 효종의 급서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효종의 왕권강화의 꿈이었던 북벌론 역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결론적으로 북벌론은 두 차례의 호란으로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은 사류들의 화이관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지지로 효종이 추진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효종의 북벌론의 추진목적은 군사권의 장악, 군사력의 강화로 인한 왕권강화에 있다. 즉위 초 당시 사류들의 지지로 인해 순조롭게 북벌론이 추진되려는 듯 보였으나, 북벌론의 방법을 가지고 사류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벌이게 되었다. 효종은 마찰이 벌어질 때마다, 강압적으로 사류들을 억압했고, 무신 우대 정책(일부 효종 주도의 북벌론 지지자들만 우대)을 썼다. 결국 향촌과 사류들의 지지를 잃고 정치적 위기에 빠진 효종의 취할 수 있는 타개책은 산림등용밖에는 없었다. 당시 정계에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양송을 불러드려, 이들을 통해 북벌론을 추진해나가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의 북벌론은 양병보다는 안민에 있었다. 따라서 효종 주도의 군사력 증강은 이 시기에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을 구제하는 측면에서의 북벌론이 대두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효종이 꿈꿔오던 군사력 강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이를 통한 실질적인 북벌론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북벌론의 실패요인으로는 문?무신의 지지를 함께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북벌론의 방법을 가지고 사류들과 마찰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효종은 자신의 군사력강화를 통한 북벌론에 지지를 보이는 몇몇 문신과 문신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또다시 사류들과 반발을 낳았고,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결국 사류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더 이상 북벌론을 추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 안민을 내세워 군사력 강화에 반대했던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함을 들 수 있다. 이는 반정의 이유라는 것 하나만으로 숭명배금책을 내세워 호란을 야기시켜 민에게 씻지 못할 고통을 준 당시 위정자 층의 대한 비판이다. 자신들의 옹졸한 권위의식 때문에 민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민을 위한다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말은 모순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효종 역시, 진정으로 민을 위한 안민을 추구하고, 우선 안민이 된 후에 군사력의 강화를 통한 북벌론을 추진했다면, 효종이 꿈꾸던 왕권강화와 북벌론은 아마 현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2)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였던 숭명배금책은 결국 두 차례의 호란을 야기시켰다. 치욕적인 굴욕감 속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소현세자는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인조는 이때 원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國有君長論’을 내세워 둘째 아들 봉림을 세자로 책봉한다. 효종은 이렇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결여에서 오는 취약한 왕권을 군사력의 확보로 보완하려고 했다. 이것이 북벌론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경찬. <조선 효종조의 북벌운동>. <<청계사학>> 5. 성남: 청계사학회, 1988. p181 참조
5) 여기서는 입장차이 뿐만이 아니라, 대동법문제가 포함되어있다. 효종 즉위 초 김자점 등이 산림 등용을 권유했고, 효종은 이를 받아드려 산림의 정계진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양송의 스승이었던 김집이 김육과 대동법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는데, 이때 효종은 김육의 편을 든다. 이로 인해 김집을 비롯한 양송은 낙향을 하게 된다. 이는 효종이 송시열의 북벌론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자신이 주도하는 북벌에 송시열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 대동법의 확대와 보급, 금속화폐의 발행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재원마련책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연속된 흉년으로 대동법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으며, 금속화폐의 발행으로 인한 물가폭등 등의 폐단으로 인해, 결국 이 두 가지 북벌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논문으로는 “최완기. <17세기의 위기론과 효종의 경제정책>. <<국사관논총>>88집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9 p73~74”가 있다.
북벌론 연구동향
<북벌론 연구동향>
대체로 초기의 북벌론 연구는 효종 중심이 아니라 송시열 중심의 사상적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기존의 북벌에 관한 연구가 송시열 중심으로만 편중되어 있는데 강한 반론을 제기하며 북벌의 주체를 효종 및 효종을 중심으로 한 일군의 관료로 파악하고 송시열은 반 북벌론자로 규정하는 연구가 나왔고, 이 논문은 북벌의 주체는 물론 북벌정책의 시각을 넓혔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하지만 효종을 부각시키려는 지나친 의욕이 앞서서 송시열에 관한 언급에서는 무리한 사료의 해석으로 정곡을 얻지 못한 점은 한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 그렇기 때문에 현재 이루어지는 북벌론 연구는 양자의 입장 모두를 고려하는 한층 폭넓은 시각으로 연구되고 있다.
북벌론이란 인조반정과 호란 및 세자책봉 등 일련의 정치사건2)을 통하여 왕과 신료들이 각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공론의 대상으로 취했던 정책으로 볼 수 있다.3) 효종대의 북벌추진은 크게 효종주도기와 송시열 위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사람은 북벌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그 의견이 같았으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4) 효종은 정통성 결여와 함께 사류들에 의해 제약당하던 왕권의 강화를 위한 기반으로의 군사권의 장악을 통해서 북벌론을 추진했다. 즉 효종의 북벌론은 실제적 군사권의 강화에 있다. 이에 반해 송시열은 춘추대의의 화이관에 입각한 사상적인 차원에서의 북벌론 이였으며, 양병을 통한 북벌론 이전에, 안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두 사람의 입장차이로 인해, 9년간의 효종 주도기에서는 송시열 등의 산림세력이 배제된 채 북벌이 추진되게 된다.5) 효종의 박서, 이완, 원두표, 김익희 등의 인물을 중심으로 북벌론을 추진해간다. 효종의 대표적인 북벌책으로는 노비추쇄, 중앙군의 확충(금군, 관무재의 정비포함), 대동법의 확대와 보급, 금속화폐의 발행6)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남인을 등용하는 등 당시 서인 주도의 정권을 견제하여 왕권강화에 힘썼다. 하지만 무신 우대책과 강압적인 정책으로 인해 신료들과 마찰을 겪게 되고, 이들의 지지를 잃자 효종주도의 북벌추진은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효종은 이런 난국의 타개책으로 산림의 총수인 송시열에게 북벌론의 추진을 위임시켰다. 이는 산림을 정계에 복귀시킴으로써 왕의 실추된 위상과 여론의 안정을 도모하여 북벌책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하고자 함 이였다.7) 이로 인해 송시열과 송준길, 이유태 등이 정계에 등장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북벌책이 추진되었다. 이 시기가 송시열위임기이다. 하지만 송시열의 북벌론의 추진목적은 왕권강화가 아니라, 산림의 정국주도권 확보에 있었다. 따라서 왕권강화 차원에서의 군사력 강화를 통한 실질적 북벌책은 사라지게 되고, 안민을 우선으로 하는 사상적인 차원에서의 북벌책이 대두되게 된다.
결국 이런 송시열 위임기 때의 북벌론은 갑작스런 효종의 급서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효종의 왕권강화의 꿈이었던 북벌론 역시,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결론적으로 북벌론은 두 차례의 호란으로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은 사류들의 화이관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지지로 효종이 추진한 정책이라 볼 수 있다. 물론 효종의 북벌론의 추진목적은 군사권의 장악, 군사력의 강화로 인한 왕권강화에 있다. 즉위 초 당시 사류들의 지지로 인해 순조롭게 북벌론이 추진되려는 듯 보였으나, 북벌론의 방법을 가지고 사류들과 끊임없는 마찰을 벌이게 되었다. 효종은 마찰이 벌어질 때마다, 강압적으로 사류들을 억압했고, 무신 우대 정책(일부 효종 주도의 북벌론 지지자들만 우대)을 썼다. 결국 향촌과 사류들의 지지를 잃고 정치적 위기에 빠진 효종의 취할 수 있는 타개책은 산림등용밖에는 없었다. 당시 정계에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던 양송을 불러드려, 이들을 통해 북벌론을 추진해나가는 것이 효종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송시열의 북벌론은 양병보다는 안민에 있었다. 따라서 효종 주도의 군사력 증강은 이 시기에 이루어지지 못했고, 민을 구제하는 측면에서의 북벌론이 대두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효종이 꿈꿔오던 군사력 강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이를 통한 실질적인 북벌론은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북벌론의 실패요인으로는 문?무신의 지지를 함께 받지 못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북벌론의 방법을 가지고 사류들과 마찰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효종은 자신의 군사력강화를 통한 북벌론에 지지를 보이는 몇몇 문신과 문신 위주의 정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이는 또다시 사류들과 반발을 낳았고,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 되면서, 결국 사류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더 이상 북벌론을 추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으로 안민을 내세워 군사력 강화에 반대했던 당시 위정자들의 무능함을 들 수 있다. 이는 반정의 이유라는 것 하나만으로 숭명배금책을 내세워 호란을 야기시켜 민에게 씻지 못할 고통을 준 당시 위정자 층의 대한 비판이다. 자신들의 옹졸한 권위의식 때문에 민은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았는데, 이제 와서 민을 위한다는 정치를 펼치겠다는 말은 모순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효종 역시, 진정으로 민을 위한 안민을 추구하고, 우선 안민이 된 후에 군사력의 강화를 통한 북벌론을 추진했다면, 효종이 꿈꾸던 왕권강화와 북벌론은 아마 현실로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울 뿐이다.
1) 우인수. <조선 효종대 북벌정책과 산림>. <<역사교육논집>> 15, 1990. p99
2) 인조반정의 명분 중 하나였던 숭명배금책은 결국 두 차례의 호란을 야기시켰다. 치욕적인 굴욕감 속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소현세자는 귀국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인조는 이때 원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國有君長論’을 내세워 둘째 아들 봉림을 세자로 책봉한다. 효종은 이렇게 변칙적인 방법으로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정통성 결여에서 오는 취약한 왕권을 군사력의 확보로 보완하려고 했다. 이것이 북벌론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경찬. <조선 효종조의 북벌운동>. <<청계사학>> 5. 성남: 청계사학회, 1988. p181 참조
3) 김세영. <조선 효종기 북벌론 연구> <<백산학보>>51 백산학회, 1998. p49
4) 우인수. <조선 효종대 북벌정책과 산림>. <<역사교육논집>> 15. 1990. p120
5) 여기서는 입장차이 뿐만이 아니라, 대동법문제가 포함되어있다. 효종 즉위 초 김자점 등이 산림 등용을 권유했고, 효종은 이를 받아드려 산림의 정계진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양송의 스승이었던 김집이 김육과 대동법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는데, 이때 효종은 김육의 편을 든다. 이로 인해 김집을 비롯한 양송은 낙향을 하게 된다. 이는 효종이 송시열의 북벌론이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자신이 주도하는 북벌에 송시열이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항녕. <조선 효종대 정국의 변동과 그 성격>. <<태동조건연구>> 18,1993. p30~32 참조
6) 대동법의 확대와 보급, 금속화폐의 발행은 군사력 강화를 위한 재원마련책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연속된 흉년으로 대동법이 더 이상 확대되지 못했으며, 금속화폐의 발행으로 인한 물가폭등 등의 폐단으로 인해, 결국 이 두 가지 북벌책도 실패하고 말았다.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논문으로는 “최완기. <17세기의 위기론과 효종의 경제정책>. <<국사관논총>>88집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1999 p73~74”가 있다.
7) 김세영. <조선 효종기 북벌론 연구>. <<백산학보>> 51.백산학회,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