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한번은 미우의 얼굴을 보고 끝내도 끝내야지... 막상. 창원으로 향하고 있기는 했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미우의 얼굴을 봐야할지.. 또, 뭐라고 해야할지...
4시간 30여분에 걸친 긴 고민과 갈등 끝에. 태봉은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일 비워둔 탓에. 집안엔 온기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태봉 자신의 마음처럼..
집에 두고갔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되서 꺼져있었다.
태봉은 배터리 충전기를 꽂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전원이 켜지자 마자.. 그 동안 도착했던 문자메세지와, 음성메세지 알림이 정신없이 도착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미우겠지..
태봉은 휴대폰을 열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무슨일이야?]
[어디야? 전화 왜? 안받아?]
[일부러 걱정시킬려고 하는거면, 재미없어!]
[집에도 없고, 대체 어디있는건데?]
[이 문자 받고 5분안에 전화 안하면 끝이야]
[야! 차태봉! 너 죽을래?]
[너 내 눈에 보이면 죽을줄 알아!]
[나 안울린다며! 지금 뭐하는거야?]
문자들을 들여보는 동안 태봉은 눈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음성메세지를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가져다 대었다. 곧, 미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일이길래, 연락도 없이 잠수타는거야? 혹시. 집에 무슨일 생겼어? 걱정되 죽겠으니까. 제발 전화좀 받아... 지금 나! 태봉씨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 드는것 같아.. 제발 연락좀 해! 바보야...
절대로, 나 울게하는일 없을거라며! 전화좀 받아 제발!]
흐느끼는 목소리로,,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더듬으며 녹음된 미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촉촉하게 젖었던 태봉의 눈에선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부모님이 아닌 다른사람 때문에,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였다.
이제까지 사랑을 하면서 먼저 돌아선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먼저 사랑이 변한적도 없었다.
한 사람을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의 감정이 충실하고, 언제나 그 사랑이 하자는 대로 따라줬다. 매몰차게 태봉을 버리고 가던 여자에게도, 그 여자를 위해서 묵묵히 그 이별을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사랑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기 싫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미우는 상처를 입을것이다. 과연, 다수를 위해서, 마음이 변한 척, 먼저 돌아서야 하는것이 제대로된 방법인지 장담할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게 최선인것만 같았다.
미우가... 태봉 자신 때문에 상처 받게되면.... 그 사실은 생각도 하기 싫을만큼 괴로웠지만... 사실대로 말을해도... 힘들게 분명했다. 둘이 안될걸 알면서. 미련을 가지고 아파하는 것 보다는, 그저 태봉의 변심이라고 잠깐 아프고 말아줬으면.... 그래줬으면....
태봉은 몇일간 멍하게 눌러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이를 악물어봤지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의 괴로움보다. 자신이 미우에게 입힐 상처에 더.. 눈물을 견디기가 힘이들었다. 태봉은 이를 악물로, 눈물을 참아내려고 하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미안해.......”
미우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태봉의 집 초인종을 또, 눌러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몇일간 연락도 없는 태봉덕분에 미우의 얼굴도 혈색이 좋지만은 않았다. 미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찬바람에 두눈에 차오르는 열을 식히듯. 억지로 웃고는 괜찮을거라고 돌아섰다. 그때, 태봉의 집 현관안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우는 얼른 돌아서자. 몇일간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곳엔 그토록 보고싶었던 태봉이 서있었다.
미우는 혹시라도 자신이 헛것을 본게 아닌지 두눈을 비볐다. 하지만, 분명 태봉이였다.
미우는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태봉의 바로앞에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찬찬히 태봉을 훑어보았다.
몇일간 꽤. 야윈 얼굴이였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뭐야? 너!? 장난해?”
“..........”
“왜? 연락 안했어.. 계속, 집에 있었어?”
태봉은 대답없이 고개만 가로젔고, 덤덤한 얼굴로. 미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지 말 안해줄거야? 나 정말 화나게 할거야?”
미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태봉의 분위기에 쉽게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나려는걸 참고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미안해요!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미우의 두눈이 당황하고 있었다. 태봉의 말투는 마치 처음만난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은 딱딱한 예의를 차린 말투였다. 미우는 변한 태봉의 태도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멀뚱히 태봉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봄날같기만 하던 태봉의 분위기가. 사막같이 황량한지 알수없었다.
“그런데, 미우씨는 아침일찍부터 무슨일이세요? 뭐.. 할말 있어요?”
“.......지금.. 장난해? 하나도 안웃기니까. 그만해!”
“..... 웃기려고 한말 아닌데... 할말 없으면, 그만 돌아가시죠!..”
태봉은 미우에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매몰차게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졌고, 미우는 믿을수 없다는듯이. 석고상처럼 굳은채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아주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태봉이 아주 지독한 장난을 치는거라고..
하지만. 꿈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아침 바람이 차갑게 미우를 에어왔고, 지독한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엔..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태봉은 매몰차게 현관문을 닫고. 그 자리에 미우처럼 굳은채 서있었다. 다리가 떨려왔다 주저앉을 것처럼...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였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보다 더하게... 조금 전의 못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태봉은. 한참이 지나. 미우가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올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우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우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미우는 믿을수 없다는듯. 냉장고의 찬물을 꺼내 연거푸 들이켰다.
꿈이 아닌지.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침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뺨은 차가웠고, 그 뺨을 꼬집자 더 아픈것 같았다. 아픈걸 보니... 꿈은 아닌것 같았지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쩐지. 몸이 으슬거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미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어지러웠다.
출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미우는 하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온통 태봉으로 가득차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무슨일인지 꽤나 충격적인 일이였는지..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하는거다.. 분명.. 이건.. 너무하는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무실의 여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렀다.
“들었어요? 차태봉씨. 그만둔대요!”
“뭐? 언제?”
“좀 전에. 권상무님 방에서 나와서 부장님한테 얘기하는거 들었어!”
“그럼.. 몇일 잠수탄거 때문에 잘리는건가?”
“그건 아닌것 같아. 스스로 그만두는거지!”
그녀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부장만 표정이 좋지않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섰고, 미우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태봉이 뒤따라 들어오는지 눈여셔 봤지만.. 태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우는 불안한 느낌에 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궁금증에 몇몇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부장에게 태봉의 소식을 물었다.
“부장님.. 차태봉씨! 그만둔다는게 사실입니까?”
“.... 좀 전에. 사직서 제출하고 갔습니다.”
“인사도 없이요?”
“글쎄,... 권상무랑 얘기 끝내고 나한테만 인사하고 가더군.. 무슨일인지.. 표정도 별로 좋지 않고..”
미우는 거기까지 듣고, 빠르게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분명.. 꿈이 아니다... 태봉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미우는 태봉이 아직 회사를 빠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태봉은 아직 주차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미우는 태봉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이 지금 낼수 있는 최대한 큰소리로 태봉을 불러세웠다.
“야! 야! 차태봉! 너 거기서!”
미우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태봉은 멈칫거리고 그 자리에 멈춰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듯...
미우는 그런 태봉의 모습에 조금씩 더 당황하고 놀라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기에, 갑자기 회사까지 그만둬? 대체. 무슨일이야! 지금 뭐하자는거야! 그만해! 정말로 화날려고 하니까”
태봉은 표정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스르고 씩씩거리고 있는 미우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미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일동안. 많이 야위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유를 묻고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태봉은 아무것도... 말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할수 있을것이다... 미우의 가슴에날 상처보다 몇배 깊은 상처를 자신에게 내면서라도.. 거짓말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
“한번에 알수 있게 돌아서줬는데.. 아직도 눈치 못채고, 이러면 곤란하죠!”
미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태봉이 마치 다른 세계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말이야?”
“... 뭐.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갈게요.. 회사를 옮기게 됬어요... 얼마전에 결정난거였고... 그리고, 그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 정리할때가 돼서. 차마 말하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몇일 연락끊어 준건데... 그 정도 눈치도 없었어요?”
“............”
“너무 나한테 까칠하게 굴고, 도도한척 하길래, 어쩌나 봤는데.. 너무 빠져드니까. 나도 감당이 안되서요.. 안그랬으면.. 미리 애기 했을텐데..”
“지금...뭐라고 하는거야?”
“꽤나. 충격받은 얼굴이네? 뭐, 미안하게 됐어요, 그렇게까지 할건 아니였는데... 이젠 볼일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세요.. 난 설마 당신이 그렇게까지 진실일거라곤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이제 껄끄럽게 됬으니. 앞으로 우연이라도 만나면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 부담스러워서...“
말을마친 태봉은 자신이 할수있는 최대한 차가운 몸짓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말을 내뱉고 있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 말을 하고있는 동안.. 미우의 얼굴은..
미우의 두 눈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태봉이 몇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받은 미우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야! 차태봉! 너! 거기 서란 말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 가는 태봉의 뒷통수를 향해 미우는 신고있던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어깨쯤에 구두를 맞은 태봉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실 안에 서있는 것이다. 미우는 그녀의 평생에 몇 번 받은 상처의 충격보다 더 큰 충격으로 두 눈에선 불이 뿜어져 나왔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는 태봉에게 다가가. 태봉의 앞으로 돌아서가서 무표정한 태봉을 올려다 보며, 태봉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상처로 일그러진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보다 얼마 안 살았어도, 산전수전 다 격었거든? 그런데! 너 같은 악질은 처음본다. 뭐? 미안하게 됐어? 심심했어? 하하!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네. 눈치없어 줘서. 그런줄 모르고! 진드기처럼 들러붙어서 미안하네! 그래! 미안하네...”
미우의 눈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이 왈칵왈칵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그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미우는 억지로 억지로 말을 이었다.
“또, 얼마나 낳은 여자들한테 그런식으로 하고 다녔어? 진심인척 하고..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 심심해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후~너! 니가 말한 니 부모님 얘기가 사실이라면, 넌! 그 얘기 입에 올릴 자격도 없는 자식이야! 알아? 나쁜자식!“
미우는 북받치는 눈물을 훔치며 태봉을 노려보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태봉은. 미우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니. 미우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슴이 찢어졌지만. 내색할수 없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하고싶은말 다했어요? 그래요! 나. 나쁜 자식이라고 생각하세요.. 그편이 훨씬 괜찮겠네... ”
그리고, 태봉은 미우를 비켜서 자신의 차에 올라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혼자남은 미우는 주차장 바닥에 내팽개쳐진... 조금전, 태봉의 어깨를 때리고 떨어진 구두를 보며. 눈물을 거두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실감나는 현실이였다.
어떻게.. 그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그 표정만큼. 마음을 느꼈는데.. 어떻게 그 모든게 다 거짓일수가 있단 말인지... 미우는 바닥에 있는 구두가 꼭! 자기마음 같았다.
그리고, 주차장 한켠에선... 윤호가,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해했다...
자신이 원한대로 되고 있었지만.. 미우의 눈물과 허탈한 표정을 보는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미우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차장에서 사라질때까지.. 미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입은 상처쯤은 금새 잊어버리게 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고, 제발 꿈이라고 빌었지만. 태봉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몇일뒤, 태봉의 집은 활짝 열림채, 그 안의 모든 짐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미우는 멍하니. 현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다가. 맥없이 집으로 들어왔고. 곁에있던 하다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말을 걸지도 못할 무거운 침묵이 미우를 감싸고 있었고, 하다역시 태봉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우를 향한 마음이 진심인줄 알고, 둘을 연결시켜주었는데.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리자. 하다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미우역시 태봉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고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생각하기 싫었다.
미우는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멍하니. 침대머리에 앉아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태봉이 갑자기 변하기 전만해도, 윤호를 만나기 전만해도, 한결같았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고 생각됬지만... 태봉은 없고, 윤호도 아무런 일이 아니라고 하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미우는 가슴이 답답해져와. 숨을 쉴수가 없었다. 화도 났고, 눈물도 났고, 아직 차가운 바람이 가득 남아있지만. 미우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몸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 이였지만. 미우는 이 바람을 오히려 시원한 듯 느끼고 있었다.
미우가 아직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지 상관도 하지 않고, 창을 열어둔채, 잠들 그 시간.. 태봉도 괴로움에 찬장에 진열되어있던 술을 두병째 들이키고 있었다.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식도를 태우는 듯 했지만. 그리고, 이미 꽤 마신 알콜 덕분에. 눈앞이 흐릿할만큼 정신을 차릴수도, 몸을 가눌수도 없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 차갑게 미우를 뿌리치고, 돌아서 오는내내. 자동차 백밀러에 보인 미우의 모습에... 자신을 노려보던 미우의 그 표정에...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자신에게. 말하던. 미우의 목소리... 그 하나하나가. 더 괴로웠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이미 상처가 많은 여자라서.. 더 상처를 주면 안되는데.. 결국. 태봉 자신이 한 선택으로 미우는 다시 상처를 받았다. 그 사실을 견딜수가 없었다.
지금 얼마나 힘들어할 미우를 알기 때문에... 이제.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아버리고, 차갑게 변해버릴 미우를 알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여리고, 수줍은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태봉은 더 이상 속에서 알콜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제껏 마신 술이 역류해서 올라오는것 같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다 토해냈다.
자신의 아픈 마음도 같이 토해내듯이... 그리고는 차가운 물을 틀어 자신의 몸에 뿌려댔다.
하다는 미우의 방문을 계속 두드렸다.
전날 저녁 문을 걸어잠그고 들어간 미우가 아무래도 불안했다.
이제껏. 꽤 상처를 받은 미우였지만. 어제같은 표정은 전에 본적이 없었다.
차가움을 떠나. 마치 무생물같이 감각없는 얼굴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벌써 몇일째였고, 미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기척도 없이 하룻밤을 세었다.
혹시하도.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불안한 느낌에. 하다도 밤새 잠을 설치다 싶이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이생했다.
하다는 방문을 두드리다가 안되었는지. 집안의 열쇠를 찾아 미우의 방문을 열었다.
미우의 방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하다는 놀라서 미우에게 뛰어가 미우를 흔들었다. 방 창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 창문으로 아직 남은 겨울 바람이 매섭에 불어닥치고 있었고. 미우는 집에서 입는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태봉에게서 선물 받았을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잠들어 있었다. 아니!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해야 맍는 표현일 것이다.
하다는 얼른 미우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이마는 불같이 뜨러웠고. 입술은 새파랬다. 하다는 창문을 닫고. 얼른 미우의 침대이불로 미우를 감싸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구급대가 도착하기까지 얼마되지 않는 시간동안. 하다는. 자신의 방 이불마져 가져와 미우를 덮어서 꼭 안아 팔을 부볐다. 얼음장같이 얼어있는 미우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싶었다. 얼마뒤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미우를 싣고 나갈때까지. 하다는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응급실. 간밤에 실려온 환자들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그 가운데. 미우도 팔에 몇가지의 링거를 꽃고 죽은듯 누워있었다. 실려 오자마자. 응급처치가 끝이나고, 링거가 꽃힌채 잠들어 있었다.
하다는 파랗게 질려있던 미우의 혈색이 조금 돌아오자. 그제서야. 조금 안도하면서. 침대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말대로, 만약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뻔 했다니..
정신 잃은 미우도 미우지만. 하다도.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였다.
그리고, 조금전. 윤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다시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했다.
미우의 말대로라면, 태봉이 심심해서 미우를 가지고 놀았다지만. 그건 아닌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았었다. 둘의 사랑의 시작을... 그리고, 태봉의 그런 모습으로 봐선.. 절대로, 그 이유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분명, 윤호를 만나고 그 다음부터였다. 몇일만에 나타나서는 사직서를 내고 미우에겐 상처가 되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분명하다는 심증이 생기는건, 윤호와 분명. 어떤 얘기가 오갔을 것이라는것뿐... 아무래도 그 얘기가. 미우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일거란 추측은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갑자기. 그렇지 않을 사람이 한순간에 바뀔만큼 얘기가 있었을지...
한참.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하다의 귀에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윤호가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하다씨. 어떻게 된일입니까!”
“쉿! 조용히 하세요. 여기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까”
하다는 잔뜩 놀란것 같은 윤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집에서 입고있었을 트레이닝복 차림에 급하게 뛰어온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제껏 얼음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에 꽤나 놀란고 당혹스런 표정에. 하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다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이 남자가 처음에 어떤 계획이 있어서 미우에게 접근을 시도했는지 어떤지 지금은. 미우에게. 다른 마음이 생긴것 같았다. 그러니, 어떤 방법으로든 태봉을 미우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을것이다.. 분명... 이 사람이 원인일것이다..
“잠깐 나가세요...”
하다는 윤호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새벽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다가 말을 하는 동안. 윤호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 몇일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입원.. 시켜야 할것 같아요.”
“후....”
“권상무님... 아시겠지만. 전! 미우친구이기도 하지만. 비서이기도 해요.. 아마. 후에 미우가 임원직에 오르게 되면.. 그렇게 될거에요. 권여사님의 부탁이니까. 그래서. 전. 미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서로서. 친구로서, 보호자로서...”
윤호는 하다의 말에 갑자기 왠 뜬금없는 얘기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다는 그 표정에 대답을 하듯이. 바로 뒤의 말을 이었다.
“차태봉씨.... 와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간거죠? 권상무님 표정으로 봐선 이미 태봉씨와 미우가 사귀는 사실을 알고 있는것 같은데요... 도대체 무슨 말로, 단 한번에. 그 사람이 돌아서게 만들었죠?”
하다의 물음에. 윤호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전! 미우만큼 순진하지가 않아서요! 말씀해 주시죠! 안그러면. 미우가 이렇게 된데에 대한 원인을 회장님께 다 말씀 드릴겁니다.”
“장하다씨... 방금. 미우씨 보호자이지 비서이자 친구! 라고 하셨나요?”
윤호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마치 하다를 우습다는듯 비꼬아보는 표정이였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다는 이 남자가 기분나빴다. 그저 표정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네! 그렇게 말했는데요?”
“그렇다면. 미우씨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확실히 알아봐야 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말이죠?”
“........”
윤호는 바로 대답을 해주는 대신. 하다는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친구란 명목으로 미우옆에 늘쌍 붙어있으면서. 그런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지금 자신에게 도전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또, 말해주면, 미우에게 말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생각이 있다면. 그런걸 말해줄 만큼 어리석진 않을테니까.
“뭐에요? 기분나쁘게 쳐다보지 마시고, 무슨말인지 설명해 주시죠? 권상무님?”
“... 차태봉... 그 사람은 절대로 미우와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어째서죠?”
“회장님의 결벽증을 자극할 사람이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 몇사람 인생이 망가지는걸테니까..”
“뭐라구요?”
하다는 요점을 바로 말하지 않고 빙빙돌리고 있는 윤호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곧! 윤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잠깐 멍해지는 느낌이였다.
“차태봉... 그 누나. 차태선....가명... ‘강유미’ 우리나라안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배우죠?”
“........”
“아마. 그 배우덕분에. 미우씨가 작년 봄에 있었던 결혼식에서 개망신을 당했었다죠?”
하다의 황당한 표정을 보면서. 윤호는 생각했다. 하나같이 다들 놀란다고...
그리고, 윤호는 묵묵히 하다가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다가 다시 윤호에게 말했다.
“무슨....”
“말그대로.. 강유미 동생이. 차태봉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시겠어요? 이 사실 회장님께서 아시게 되면. 또 한번 난리가 날텐데.. 그때, 더 깊어질 미우씨 감정은 어떻게 추스르란 말입니까? 이쯤에서 이렇게라도 끝난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권상무님은 이 사실 어떻게 아셨죠?”
“그날 저녁.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우연히... 나도 처음엔 놀랐어요! 그리고, 태봉씨에게 모든걸 말해주었고. 그 다음날부터. 그런 행동이 이어진건.. 차태봉씨 결정이였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시끄럽기 전에. 정리하고 싶었겠죠..”
“어째서.. 미우한테.. 아무말도 하지 않은거죠?”
“그 점에 대해서 얘기해 드리죠! 내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안될 사인데. 사실을 다 알고 미련을 가지느니, 차라리 못되게 해서라도, 정리하고 싶었겠죠. 사직서 내러온날. 태봉씨가 그러더군요. 미우씨에겐 절대 알리지 말라고.. 내가 하다씨한테. 이 얘기 해주는 이유 알겠어요?”
“.......”
“아까 하다씨 입으로 말했잖아요. 비서겸. 친구겸, 보호자라고! 그럼. 앞으로 미우씨가 잘 추스르도록 도우세요.”
말을 마친 윤호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미우가 누워있는 응급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윤호의 모습을 보던 하다는 복도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윤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우가 다시 받게된 상처가... 이번엔 무서웠다.
이전같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그런일을 당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웃었던 미우였다.
하지만... 하다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윤호가 미우의 곁에 왔을땐 . 미우가 조금 정신이 드는듯. 가늘게 눈을 뜨고있었다.
윤호는 반갑게 다가가. 미우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올려 놓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우씨! 정신들어요? 이제 좀 괜찮아요? 놀랬잖아요...”
하지만, 미우는 대답대신. 물끄러미 윤호를 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갓 눈을 뜬 미우에게. 열때문인지. 앞이 흐릿하게 보이면서. 실루엣만 보이는 윤호를 태봉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 태봉의 고백을 듣게 된 날도, 아픈 자신의 옆에서 이렇게 손을 잡고. 한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태봉이였다.
“태봉씨? 왜? 이제왔어!”
하지만. 지금 미우의 손을 잡은 사람은 태봉이 아닌, 윤호였다.
윤호는 미우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온 다른 사람의 이름에 뭔가가 울컥하는 것 같았다.
“전미우씨! 저! 권윤홉니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미우에겐 들리지 않는듯. 윤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윤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그리고, 미우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윤호는 화가났다. 도대체, 차태봉이란 녀석이 미우의 마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몰라도, 이렇게 헛것으로 보일정도인가? 윤호는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뺨을 만지며, 다른 사람으로 본 미우가 미웠지만. 아파서 정신을 잃고 있는 여자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질 않은가..
윤호는 미우의 손을 감싸 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차태봉! 잊게 해줄게.. 그런 자식따윈.. 금방 잊게 해준다고!“
윤호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발판으로 생각했던 미우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버린건지.. 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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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13장. < 사랑이 아프다.. > - 1
태봉은 유미와 헤어지고 답답한 마음에 서울집으로 향하지 않고, 창원행 버스에 올라탔다.
어떻게든. 한번은 미우의 얼굴을 보고 끝내도 끝내야지... 막상. 창원으로 향하고 있기는 했지만. 용기는 나지 않았다. 어떻게 미우의 얼굴을 봐야할지.. 또, 뭐라고 해야할지...
4시간 30여분에 걸친 긴 고민과 갈등 끝에. 태봉은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두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몇일 비워둔 탓에. 집안엔 온기라곤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태봉 자신의 마음처럼..
집에 두고갔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다 되서 꺼져있었다.
태봉은 배터리 충전기를 꽂고 휴대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전원이 켜지자 마자.. 그 동안 도착했던 문자메세지와, 음성메세지 알림이 정신없이 도착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미우겠지..
태봉은 휴대폰을 열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무슨일이야?]
[어디야? 전화 왜? 안받아?]
[일부러 걱정시킬려고 하는거면, 재미없어!]
[집에도 없고, 대체 어디있는건데?]
[이 문자 받고 5분안에 전화 안하면 끝이야]
[야! 차태봉! 너 죽을래?]
[너 내 눈에 보이면 죽을줄 알아!]
[나 안울린다며! 지금 뭐하는거야?]
문자들을 들여보는 동안 태봉은 눈을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리고, 음성메세지를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가져다 대었다. 곧, 미우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일이길래, 연락도 없이 잠수타는거야? 혹시. 집에 무슨일 생겼어? 걱정되 죽겠으니까. 제발 전화좀 받아... 지금 나! 태봉씨 때문에... 심장이 오그라 드는것 같아.. 제발 연락좀 해! 바보야...
절대로, 나 울게하는일 없을거라며! 전화좀 받아 제발!]
흐느끼는 목소리로,,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더듬으며 녹음된 미우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촉촉하게 젖었던 태봉의 눈에선 눈물이 뚝! 하고 떨어졌다. 부모님이 아닌 다른사람 때문에,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였다.
이제까지 사랑을 하면서 먼저 돌아선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먼저 사랑이 변한적도 없었다.
한 사람을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의 감정이 충실하고, 언제나 그 사랑이 하자는 대로 따라줬다. 매몰차게 태봉을 버리고 가던 여자에게도, 그 여자를 위해서 묵묵히 그 이별을 받아들였었다.
그런데..... 사랑이 변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기 싫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미우는 상처를 입을것이다. 과연, 다수를 위해서, 마음이 변한 척, 먼저 돌아서야 하는것이 제대로된 방법인지 장담할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게 최선인것만 같았다.
미우가... 태봉 자신 때문에 상처 받게되면.... 그 사실은 생각도 하기 싫을만큼 괴로웠지만... 사실대로 말을해도... 힘들게 분명했다. 둘이 안될걸 알면서. 미련을 가지고 아파하는 것 보다는, 그저 태봉의 변심이라고 잠깐 아프고 말아줬으면.... 그래줬으면....
태봉은 몇일간 멍하게 눌러왔던 감정들이 북받쳐 올랐다. 이를 악물어봤지만,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을수는 없었다. 지금 자신의 괴로움보다. 자신이 미우에게 입힐 상처에 더.. 눈물을 견디기가 힘이들었다. 태봉은 이를 악물로, 눈물을 참아내려고 하며.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미안해... 미안해...미안해.......”
미우는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태봉의 집 초인종을 또, 눌러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몇일간 연락도 없는 태봉덕분에 미우의 얼굴도 혈색이 좋지만은 않았다. 미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찬바람에 두눈에 차오르는 열을 식히듯. 억지로 웃고는 괜찮을거라고 돌아섰다. 그때, 태봉의 집 현관안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우는 얼른 돌아서자. 몇일간 굳게 닫혀있던 현관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곳엔 그토록 보고싶었던 태봉이 서있었다.
미우는 혹시라도 자신이 헛것을 본게 아닌지 두눈을 비볐다. 하지만, 분명 태봉이였다.
미우는 떨리는 발걸음을 옮겨 태봉의 바로앞에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찬찬히 태봉을 훑어보았다.
몇일간 꽤. 야윈 얼굴이였다. 대체 무슨일이 있었기에....
“뭐야? 너!? 장난해?”
“..........”
“왜? 연락 안했어.. 계속, 집에 있었어?”
태봉은 대답없이 고개만 가로젔고, 덤덤한 얼굴로. 미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뭐야? 무슨 일인지 말 안해줄거야? 나 정말 화나게 할거야?”
미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태봉의 분위기에 쉽게 더 다가서지 못하고, 자꾸만 눈물이 나려는걸 참고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미안해요! 그냥. 일이 좀 있었어요..”
미우의 두눈이 당황하고 있었다. 태봉의 말투는 마치 처음만난 사람에게 말하는 것 같은 딱딱한 예의를 차린 말투였다. 미우는 변한 태봉의 태도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멀뚱히 태봉을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봄날같기만 하던 태봉의 분위기가. 사막같이 황량한지 알수없었다.
“그런데, 미우씨는 아침일찍부터 무슨일이세요? 뭐.. 할말 있어요?”
“.......지금.. 장난해? 하나도 안웃기니까. 그만해!”
“..... 웃기려고 한말 아닌데... 할말 없으면, 그만 돌아가시죠!..”
태봉은 미우에게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매몰차게 문을 닫고 안으로 사라졌고, 미우는 믿을수 없다는듯이. 석고상처럼 굳은채 그 자리에 못 박힌듯 서있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아주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태봉이 아주 지독한 장난을 치는거라고..
하지만. 꿈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아침 바람이 차갑게 미우를 에어왔고, 지독한 장난이라고 생각하기엔..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태봉은 매몰차게 현관문을 닫고. 그 자리에 미우처럼 굳은채 서있었다. 다리가 떨려왔다 주저앉을 것처럼...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였는데.. 자신도 모르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보다 더하게... 조금 전의 못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스스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 미우는 아직 돌아가지 않았는지.. 현관 밖에선 미우의 숨결이 들려오느것 같았다.
태봉은. 한참이 지나. 미우가 느린 걸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들려올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우에게 씻을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우를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미우는 믿을수 없다는듯. 냉장고의 찬물을 꺼내 연거푸 들이켰다.
꿈이 아닌지. 뺨을 꼬집어보았다. 아침 찬바람을 맞아서인지 뺨은 차가웠고, 그 뺨을 꼬집자 더 아픈것 같았다. 아픈걸 보니... 꿈은 아닌것 같았지만... 꿈이라고 믿고 싶었다.
어쩐지. 몸이 으슬거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미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어지러웠다.
출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게 미우는 하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있었지만.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있었지만. 생각은 온통 태봉으로 가득차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갑자기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는 없었다. 무슨일인지 꽤나 충격적인 일이였는지..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건 너무하는거다.. 분명.. 이건.. 너무하는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사무실의 여직원들이 호들갑을 떠렀다.
“들었어요? 차태봉씨. 그만둔대요!”
“뭐? 언제?”
“좀 전에. 권상무님 방에서 나와서 부장님한테 얘기하는거 들었어!”
“그럼.. 몇일 잠수탄거 때문에 잘리는건가?”
“그건 아닌것 같아. 스스로 그만두는거지!”
그녀들이 수군거리고 있을 때, 부장만 표정이 좋지않은 얼굴로 사무실로 들어섰고, 미우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태봉이 뒤따라 들어오는지 눈여셔 봤지만.. 태봉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우는 불안한 느낌에 부장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궁금증에 몇몇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부장에게 태봉의 소식을 물었다.
“부장님.. 차태봉씨! 그만둔다는게 사실입니까?”
“.... 좀 전에. 사직서 제출하고 갔습니다.”
“인사도 없이요?”
“글쎄,... 권상무랑 얘기 끝내고 나한테만 인사하고 가더군.. 무슨일인지.. 표정도 별로 좋지 않고..”
미우는 거기까지 듣고, 빠르게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분명.. 꿈이 아니다... 태봉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미우는 태봉이 아직 회사를 빠져나가지 않기를 바라며,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태봉은 아직 주차장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미우는 태봉을 발견하자마자. 자신이 지금 낼수 있는 최대한 큰소리로 태봉을 불러세웠다.
“야! 야! 차태봉! 너 거기서!”
미우의 목소리에. 걸어가던 태봉은 멈칫거리고 그 자리에 멈춰섰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치 얼굴을 보지 않겠다는 듯...
미우는 그런 태봉의 모습에 조금씩 더 당황하고 놀라면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기에, 갑자기 회사까지 그만둬? 대체. 무슨일이야! 지금 뭐하자는거야! 그만해! 정말로 화날려고 하니까”
태봉은 표정을 가다듬고, 마음을 추스르고 씩씩거리고 있는 미우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미우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몇일동안. 많이 야위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이유를 묻고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태봉은 아무것도... 말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할수 있을것이다... 미우의 가슴에날 상처보다 몇배 깊은 상처를 자신에게 내면서라도.. 거짓말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여자가! 그렇게 눈치가 없어요?”
“...............”
“한번에 알수 있게 돌아서줬는데.. 아직도 눈치 못채고, 이러면 곤란하죠!”
미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태봉이 마치 다른 세계의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무슨..말이야?”
“... 뭐. 속 시원하게 말해주고 갈게요.. 회사를 옮기게 됬어요... 얼마전에 결정난거였고... 그리고, 그동안, 심심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제 정리할때가 돼서. 차마 말하긴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 몇일 연락끊어 준건데... 그 정도 눈치도 없었어요?”
“............”
“너무 나한테 까칠하게 굴고, 도도한척 하길래, 어쩌나 봤는데.. 너무 빠져드니까. 나도 감당이 안되서요.. 안그랬으면.. 미리 애기 했을텐데..”
“지금...뭐라고 하는거야?”
“꽤나. 충격받은 얼굴이네? 뭐, 미안하게 됐어요, 그렇게까지 할건 아니였는데... 이젠 볼일 없으니까. 빨리 정리하세요.. 난 설마 당신이 그렇게까지 진실일거라곤 상상도 못했었거든요! 이제 껄끄럽게 됬으니. 앞으로 우연이라도 만나면 모른 척 해줬으면 좋겠어요. 당신.. 부담스러워서...“
말을마친 태봉은 자신이 할수있는 최대한 차가운 몸짓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말을 내뱉고 있었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자신이 그 말을 하고있는 동안.. 미우의 얼굴은..
미우의 두 눈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태봉이 몇걸음 옮기지 않았을 때.
믿을 수 없다는 듯 충격받은 미우가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거기서 야! 차태봉! 너! 거기 서란 말이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서 가는 태봉의 뒷통수를 향해 미우는 신고있던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
어깨쯤에 구두를 맞은 태봉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현실 안에 서있는 것이다. 미우는 그녀의 평생에 몇 번 받은 상처의 충격보다 더 큰 충격으로 두 눈에선 불이 뿜어져 나왔다. 석상처럼 가만히 서있는 태봉에게 다가가. 태봉의 앞으로 돌아서가서 무표정한 태봉을 올려다 보며, 태봉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 뱃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와 상처로 일그러진 목소리로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내가! 너보다 얼마 안 살았어도, 산전수전 다 격었거든? 그런데! 너 같은 악질은 처음본다. 뭐? 미안하게 됐어? 심심했어? 하하! 아니!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하네. 눈치없어 줘서. 그런줄 모르고! 진드기처럼 들러붙어서 미안하네! 그래! 미안하네...”
미우의 눈에선 어느새 굵은 눈물이 왈칵왈칵 솟아올라오고 있었다.
그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 미우는 억지로 억지로 말을 이었다.
“또, 얼마나 낳은 여자들한테 그런식으로 하고 다녔어? 진심인척 하고..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 심심해서? 어떻게.. 그런 얼굴을 하고...후~너! 니가 말한 니 부모님 얘기가 사실이라면, 넌! 그 얘기 입에 올릴 자격도 없는 자식이야! 알아? 나쁜자식!“
미우는 북받치는 눈물을 훔치며 태봉을 노려보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태봉은. 미우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지만! 아니. 미우 그 자체로도, 충분히 가슴이 찢어졌지만. 내색할수 없었다. 그리고, 겨우 말했다.
“하고싶은말 다했어요? 그래요! 나. 나쁜 자식이라고 생각하세요.. 그편이 훨씬 괜찮겠네... ”
그리고, 태봉은 미우를 비켜서 자신의 차에 올라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혼자남은 미우는 주차장 바닥에 내팽개쳐진... 조금전, 태봉의 어깨를 때리고 떨어진 구두를 보며. 눈물을 거두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실감나는 현실이였다.
어떻게.. 그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그 표정만큼. 마음을 느꼈는데.. 어떻게 그 모든게 다 거짓일수가 있단 말인지... 미우는 바닥에 있는 구두가 꼭! 자기마음 같았다.
그리고, 주차장 한켠에선... 윤호가, 그 모습을 보고 씁쓸해했다...
자신이 원한대로 되고 있었지만.. 미우의 눈물과 허탈한 표정을 보는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씁쓸해졌다.
그리고, 미우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차장에서 사라질때까지.. 미우를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입은 상처쯤은 금새 잊어버리게 해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었고, 제발 꿈이라고 빌었지만. 태봉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몇일뒤, 태봉의 집은 활짝 열림채, 그 안의 모든 짐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미우는 멍하니. 현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다가. 맥없이 집으로 들어왔고. 곁에있던 하다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말을 걸지도 못할 무거운 침묵이 미우를 감싸고 있었고, 하다역시 태봉의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우를 향한 마음이 진심인줄 알고, 둘을 연결시켜주었는데.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되버리자. 하다는 누구에게 물어볼 수 없었다.
미우역시 태봉의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고 사랑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생각하기 싫었다.
미우는 안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멍하니. 침대머리에 앉아서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건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태봉이 갑자기 변하기 전만해도, 윤호를 만나기 전만해도, 한결같았다. 아무래도 뭔가가 있다고 생각됬지만... 태봉은 없고, 윤호도 아무런 일이 아니라고 하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미우는 가슴이 답답해져와. 숨을 쉴수가 없었다. 화도 났고, 눈물도 났고, 아직 차가운 바람이 가득 남아있지만. 미우는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몸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 이였지만. 미우는 이 바람을 오히려 시원한 듯 느끼고 있었다.
미우가 아직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는지 상관도 하지 않고, 창을 열어둔채, 잠들 그 시간.. 태봉도 괴로움에 찬장에 진열되어있던 술을 두병째 들이키고 있었다. 독한 술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식도를 태우는 듯 했지만. 그리고, 이미 꽤 마신 알콜 덕분에. 눈앞이 흐릿할만큼 정신을 차릴수도, 몸을 가눌수도 없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 차갑게 미우를 뿌리치고, 돌아서 오는내내. 자동차 백밀러에 보인 미우의 모습에... 자신을 노려보던 미우의 그 표정에... 울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자신에게. 말하던. 미우의 목소리... 그 하나하나가. 더 괴로웠다.
그렇게 하면 안되는데.. 이미 상처가 많은 여자라서.. 더 상처를 주면 안되는데.. 결국. 태봉 자신이 한 선택으로 미우는 다시 상처를 받았다. 그 사실을 견딜수가 없었다.
지금 얼마나 힘들어할 미우를 알기 때문에... 이제. 그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마음을 닫아버리고, 차갑게 변해버릴 미우를 알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여리고, 수줍은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태봉은 더 이상 속에서 알콜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이제껏 마신 술이 역류해서 올라오는것 같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다 토해냈다.
자신의 아픈 마음도 같이 토해내듯이... 그리고는 차가운 물을 틀어 자신의 몸에 뿌려댔다.
하다는 미우의 방문을 계속 두드렸다.
전날 저녁 문을 걸어잠그고 들어간 미우가 아무래도 불안했다.
이제껏. 꽤 상처를 받은 미우였지만. 어제같은 표정은 전에 본적이 없었다.
차가움을 떠나. 마치 무생물같이 감각없는 얼굴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벌써 몇일째였고, 미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기척도 없이 하룻밤을 세었다.
혹시하도.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불안한 느낌에. 하다도 밤새 잠을 설치다 싶이 했지만. 아무래도 뭔가가 이생했다.
하다는 방문을 두드리다가 안되었는지. 집안의 열쇠를 찾아 미우의 방문을 열었다.
미우의 방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하다는 놀라서 미우에게 뛰어가 미우를 흔들었다. 방 창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 창문으로 아직 남은 겨울 바람이 매섭에 불어닥치고 있었고. 미우는 집에서 입는 가벼운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태봉에게서 선물 받았을 인형을 꼭 끌어안고는 잠들어 있었다. 아니! 정신을 잃고 있었다고 해야 맍는 표현일 것이다.
하다는 얼른 미우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았다. 이마는 불같이 뜨러웠고. 입술은 새파랬다. 하다는 창문을 닫고. 얼른 미우의 침대이불로 미우를 감싸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구급대가 도착하기까지 얼마되지 않는 시간동안. 하다는. 자신의 방 이불마져 가져와 미우를 덮어서 꼭 안아 팔을 부볐다. 얼음장같이 얼어있는 미우가 혹시라도 잘못될까 싶었다. 얼마뒤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미우를 싣고 나갈때까지. 하다는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 응급실. 간밤에 실려온 환자들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그 가운데. 미우도 팔에 몇가지의 링거를 꽃고 죽은듯 누워있었다. 실려 오자마자. 응급처치가 끝이나고, 링거가 꽃힌채 잠들어 있었다.
하다는 파랗게 질려있던 미우의 혈색이 조금 돌아오자. 그제서야. 조금 안도하면서. 침대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말대로, 만약 조금이라도 더 늦었더라면. 정말 큰일 날뻔 했다니..
정신 잃은 미우도 미우지만. 하다도. 죽을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였다.
그리고, 조금전. 윤호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는 다시 심각하게 고민을 해봐야 했다.
미우의 말대로라면, 태봉이 심심해서 미우를 가지고 놀았다지만. 그건 아닌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먼저 알았었다. 둘의 사랑의 시작을... 그리고, 태봉의 그런 모습으로 봐선.. 절대로, 그 이유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분명, 윤호를 만나고 그 다음부터였다. 몇일만에 나타나서는 사직서를 내고 미우에겐 상처가 되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분명하다는 심증이 생기는건, 윤호와 분명. 어떤 얘기가 오갔을 것이라는것뿐... 아무래도 그 얘기가. 미우의 배경에 관한 이야기일거란 추측은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인지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갑자기. 그렇지 않을 사람이 한순간에 바뀔만큼 얘기가 있었을지...
한참.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하다의 귀에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윤호가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하다씨. 어떻게 된일입니까!”
“쉿! 조용히 하세요. 여기 다른 환자들도 있으니까”
하다는 잔뜩 놀란것 같은 윤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집에서 입고있었을 트레이닝복 차림에 급하게 뛰어온 흔적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제껏 얼음이라고 생각했던 얼굴에 꽤나 놀란고 당혹스런 표정에. 하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다의 눈이 틀리지 않다면. 이 남자가 처음에 어떤 계획이 있어서 미우에게 접근을 시도했는지 어떤지 지금은. 미우에게. 다른 마음이 생긴것 같았다. 그러니, 어떤 방법으로든 태봉을 미우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을것이다.. 분명... 이 사람이 원인일것이다..
“잠깐 나가세요...”
하다는 윤호를 끌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새벽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하다가 말을 하는 동안. 윤호의 표정은 굉장히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의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 몇일 조심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입원.. 시켜야 할것 같아요.”
“후....”
“권상무님... 아시겠지만. 전! 미우친구이기도 하지만. 비서이기도 해요.. 아마. 후에 미우가 임원직에 오르게 되면.. 그렇게 될거에요. 권여사님의 부탁이니까. 그래서. 전. 미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서로서. 친구로서, 보호자로서...”
윤호는 하다의 말에 갑자기 왠 뜬금없는 얘기를 하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하다는 그 표정에 대답을 하듯이. 바로 뒤의 말을 이었다.
“차태봉씨.... 와 사이에 어떤 말들이 오간거죠? 권상무님 표정으로 봐선 이미 태봉씨와 미우가 사귀는 사실을 알고 있는것 같은데요... 도대체 무슨 말로, 단 한번에. 그 사람이 돌아서게 만들었죠?”
하다의 물음에. 윤호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전! 미우만큼 순진하지가 않아서요! 말씀해 주시죠! 안그러면. 미우가 이렇게 된데에 대한 원인을 회장님께 다 말씀 드릴겁니다.”
“장하다씨... 방금. 미우씨 보호자이지 비서이자 친구! 라고 하셨나요?”
윤호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마치 하다를 우습다는듯 비꼬아보는 표정이였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하다는 이 남자가 기분나빴다. 그저 표정만으로도 사람의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네! 그렇게 말했는데요?”
“그렇다면. 미우씨가 만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확실히 알아봐야 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말이죠?”
“........”
윤호는 바로 대답을 해주는 대신. 하다는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친구란 명목으로 미우옆에 늘쌍 붙어있으면서. 그런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지금 자신에게 도전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있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또, 말해주면, 미우에게 말해주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지는 않겠지... 생각이 있다면. 그런걸 말해줄 만큼 어리석진 않을테니까.
“뭐에요? 기분나쁘게 쳐다보지 마시고, 무슨말인지 설명해 주시죠? 권상무님?”
“... 차태봉... 그 사람은 절대로 미우와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어째서죠?”
“회장님의 결벽증을 자극할 사람이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 몇사람 인생이 망가지는걸테니까..”
“뭐라구요?”
하다는 요점을 바로 말하지 않고 빙빙돌리고 있는 윤호의 태도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곧! 윤호의 입에서 떨어진 말에 잠깐 멍해지는 느낌이였다.
“차태봉... 그 누나. 차태선....가명... ‘강유미’ 우리나라안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배우죠?”
“........”
“아마. 그 배우덕분에. 미우씨가 작년 봄에 있었던 결혼식에서 개망신을 당했었다죠?”
하다의 황당한 표정을 보면서. 윤호는 생각했다. 하나같이 다들 놀란다고...
그리고, 윤호는 묵묵히 하다가 입을 열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믿을수 없다는 표정으로 하다가 다시 윤호에게 말했다.
“무슨....”
“말그대로.. 강유미 동생이. 차태봉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아시겠어요? 이 사실 회장님께서 아시게 되면. 또 한번 난리가 날텐데.. 그때, 더 깊어질 미우씨 감정은 어떻게 추스르란 말입니까? 이쯤에서 이렇게라도 끝난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권상무님은 이 사실 어떻게 아셨죠?”
“그날 저녁.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우연히... 나도 처음엔 놀랐어요! 그리고, 태봉씨에게 모든걸 말해주었고. 그 다음날부터. 그런 행동이 이어진건.. 차태봉씨 결정이였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시끄럽기 전에. 정리하고 싶었겠죠..”
“어째서.. 미우한테.. 아무말도 하지 않은거죠?”
“그 점에 대해서 얘기해 드리죠! 내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안될 사인데. 사실을 다 알고 미련을 가지느니, 차라리 못되게 해서라도, 정리하고 싶었겠죠. 사직서 내러온날. 태봉씨가 그러더군요. 미우씨에겐 절대 알리지 말라고.. 내가 하다씨한테. 이 얘기 해주는 이유 알겠어요?”
“.......”
“아까 하다씨 입으로 말했잖아요. 비서겸. 친구겸, 보호자라고! 그럼. 앞으로 미우씨가 잘 추스르도록 도우세요.”
말을 마친 윤호는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돌려. 미우가 누워있는 응급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 윤호의 모습을 보던 하다는 복도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았다.
윤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우가 다시 받게된 상처가... 이번엔 무서웠다.
이전같지 않았다. 결혼식장에서 그런일을 당하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웃었던 미우였다.
하지만... 하다는 불길한 예감에 미간을 찌푸렸다.
윤호가 미우의 곁에 왔을땐 . 미우가 조금 정신이 드는듯. 가늘게 눈을 뜨고있었다.
윤호는 반갑게 다가가. 미우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올려 놓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미우씨! 정신들어요? 이제 좀 괜찮아요? 놀랬잖아요...”
하지만, 미우는 대답대신. 물끄러미 윤호를 보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갓 눈을 뜬 미우에게. 열때문인지. 앞이 흐릿하게 보이면서. 실루엣만 보이는 윤호를 태봉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 태봉의 고백을 듣게 된 날도, 아픈 자신의 옆에서 이렇게 손을 잡고. 한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던 태봉이였다.
“태봉씨? 왜? 이제왔어!”
하지만. 지금 미우의 손을 잡은 사람은 태봉이 아닌, 윤호였다.
윤호는 미우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온 다른 사람의 이름에 뭔가가 울컥하는 것 같았다.
“전미우씨! 저! 권윤홉니다!”
하지만, 그 말조차 미우에겐 들리지 않는듯. 윤호에게 잡히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윤호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보고싶었는데..”
그리고, 미우는 다시. 잠이 들어버렸다.
윤호는 화가났다. 도대체, 차태봉이란 녀석이 미우의 마음을 어떻게 얻었는지 몰라도, 이렇게 헛것으로 보일정도인가? 윤호는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자신을 뺨을 만지며, 다른 사람으로 본 미우가 미웠지만. 아파서 정신을 잃고 있는 여자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질 않은가..
윤호는 미우의 손을 감싸 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차태봉! 잊게 해줄게.. 그런 자식따윈.. 금방 잊게 해준다고!“
윤호 자신도 모르게, 인생의 발판으로 생각했던 미우에게 다른 감정이 생겨버린건지.. 윤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