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사랑 (17장/ 장난감 병정) <실극화>

지금처럼만2006.05.19
조회132

 

추림......

지난 밤에 정말 고마웠어요.

짧았던 시간이었지만 진정으로 원했고 그리웠던 추림씨를

만나 한 공간안에서 밤을 지세웠다는 것만으로도 전 행복했어요.

철이 들고 나서 누군가에게 업혀 본것은 처음이었어요.

그거 아세요? 추림씨 마음 들켰다는거? 그거 아세요? 추림씨 혼자

그녀를 좋아하는것이 아닌것을? 그거 아세요? 추림씨의 품이 정말

따뜻했다는 것을? 그거 아세요? 정말 제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구정 잘 보내세요. 전화번호 남겨 놓았어요. 전화 하세요.

몰래 가는것을 용서하시고... 늘 생각날 거예요.

다시 만나면 그땐... 조금의 용기를 내보세요. 거칠게 대할 거라는 추림씨의

말 기대할께요. 정말 고맙고 행복한 밤이었어요.


추림씨의 품... 정말 따듯했어요... 잘 있어요.

유미가 - 02- 6** - ****


* * *


한주가 지나고나서 새주를 맞는 새벽부터 엄청난 폭설이 전국을 뒤덮었다.

연일 계속되는 노동 운동과 범죄와의 전쟁... 정치싸움과 민생안정으로 나라안팍이

매우 소란스러운 때에 엄청난 눈이 쏟아져 교통망이 마비된 각 지방의 도시들은

때아닌 난리를 겪고 있었다.


각 산업체들과 경제단체들은 자연제해로 해결책을 찾으려 고심하느라 아침부터

전국에 비상이 내려졌다. 십 수년만에 내린 눈이라했다.


남영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재와 교통이 공수되지 못하고 단절되어 연구팀만 분주하고 나머지는 부서들은

때아닌 한가한 월요일을 맞고 있었다.


"이새끼가 근데 뭐 잘못 처먹었나? 너 어제 뭐했어? 어떤년 빤스라도 밤새 만지고

논거 아니야? 이 신발놈이 쪼고만게 어디서 어른 돈을 야금 야금 갉아먹고 있어?

빨랑 말하지 않을래?"


박도형이 버럭 소리치며 다시 험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 저 그만할까요? 네네! 그랬어요. 이년 빤스 저년 빤스 마구 만지고 놀았어요?

아 이걸 다 어디다 쓰나? 걱정되네! 어이 거기 이대준씨! 이따 끝나고 해물탕이나

먹으러 갑시다."

"어? 그래 거 좋지! 딴말하지 않기다?"


이대준이 추림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좋아라하자 박도형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추림아. 이 형도 간다."

"나도 갈란다!"

"니가 오늘 쏘는거야?"


이과장과 몇몇 사람들이 얼른 끼어들며 한 소리씩 하자 박도형은 더 불쌍한 얼굴이

되었다. 한가한 시간이고 일도 없어 어물쩡 거리다가 박도형과 이과장이 한판 놀자며

화투를 들었는데 종종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그들만의 특권이었는데 그것은 남영기업 사장도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의 시작은 바로 사장이었던 것이다. 철제 산업은 일년에 두번 정도가 비수기를

타고 한가해지는 진통을 겪는데 지금이 딱 그때였고, 더구나 눈으로 인해 아예 일

자체가 불가능해져 버린 것이다.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남영기업으 꾼들이 모여

들었는데 추림은 그 중 타짜로 통했다.


섰다라는 화투놀음은 서너명이나 두명이 가능한 게임이었다.

마흔 여덟장의 화투장을 두장씩 나누어 갖고 두 수의 합 중 높은 끝수나 각기 정해져

있는 패를 겨루는 놀이였다. 판돈은 정하기 나름인데 오늘 게임에서 걸린 기본 값은

천원이었고 네번씩 걸수 있도록 정해졌다.


처음 추림은 안한다고 했는데 한 시간이 지나자 워낙 빠른 놀음이어서 몇몇이 떨어져

나가고 머릿수를 맞춘다고 따로 떨어져 있던 추림을 강제로 끼워 넣은 것이다.

그가 다름아닌 박도형이었다.


추림은 밀고 당기다가 열 서너판째부터 싹쓸이를 시작했다. 이과장이 육만원을

순식간에 잃고 다시 십만원을 꺼내들었을 때 박도형은 사십만원을 잃고 허연 수표를

서너장 꺼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추림의 타켓이 박도형이 된것이 아니라 추림의 운이 박도형을 물고 늘어진 것이다.

박도형은 처음 별거 아니라고 대담한 모습을 보였지만 사십만원 쯤 잃어가자 그 전에

이미 꼭지가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시근덕 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난 죽었어!"

"나도. 지미! 네긋이 뭐야!"


다섯명 중 세명이 떨어져 나가고 다시 박도형과 추림이 남았다.

박도형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 얼굴은 굳어 있지만 눈과 입 꼬리가 웃고 있었다.

그것을 간파한 추림은 두장의 하투장 중 한장을 보았다.


풍 껍데기... 이놈 뒤에 뭐가오든 그것에 의해 패는 결정된다. 두 장을 합쳐 열을

넘기고 난 나머지 수를 가지고 겨루거나 일정한 방식에 의해 정해진 서열 패가 윈이

되는 것이다.


"이만 받고 오만!"

박 과장이 조금 강하게 나왔지만 그의 얼굴은 무덤덤했다. 소위 말하는 샤킹(속임수)

이었다. 추림은 대충 박도형의 심리를 생각해 보았다. 한번에 질러 크게 먹거나 조금씩

상대를 끌어들이는 것 중 그가 자주 써먹는 방법은 한번에 모험을 거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방식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한 수법이다.


이미 한장을 받고 돈을 걸었으니 나머지 한장을 가지고 세번의 돈을 걸수 있다.

액수는 한번 후려치는데 많아봐야 오십만원을 넘지 않는다.

박과장이 바닥에 꺼내 놓은 한장의 패! 구짜리 국화꽃. 수는 아홉이다. 만약 그가

다른 국화 하나를 들었다면 구땡이고 숫자 사자리를 들었다면 이 게임은 원칙적으로

무효게임이 된다. 그가 국화가 아닌 다른 것을 들고 최고로 나올 수 있는 패는 끝 수인

아홉이다. 십 풍을 들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미 한장은 추림에게 있으니 확률은

떨어지고 나머지 패는 불가능하다. 이미 보여진 패들 중 거서을 증명하는 패는나왔다.


"오만에 십만 더!"


추림은 나머지 패 하나를 보지 않고 두배로 돈을 올려 때려 버렸다. 박도형이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장은 십자리 풍인데 나머지 하나는 그나 추림도 보지 않았으니

지금 추림은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누구의 배짱이 클까!

추림은 이미 육십만원을 넘게 땄다. 잃어도 아쉬울게 없는 유리한 입장이었으니

불리한건 박도형이라서 이기려면 크게 나가야 한다. 돈은 앞으로 두번을 더 걸 수 있고

판돈은 이십만원이 기본이다. 이십만원을 기본으로 걸고 사십만원에 팔십만원 최대

삼백 이십만원까지 걸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어쭈? 장땡이다 이거지? 어디 보자......"


박도형이 위세를 부리며 자신의 패를 다시 한번 살폈다. 이미 보았으면서 심리전을

쓰는것인데 추림은 그저 웃으며 기다렸다.


"걸지. 십에 이십만 더 넣겠어!"


약하게 나온다. 심리전이다. 좋거나 아주 나쁘거나 둘 중의 하나지만 그건 추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잔뜩 고무된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추림이 한장의 숨겨진

패를 들었다. 십짜리가 나오면 장땡이고 아니면...


"점심시간도 다 되었으니 전 다 걸지요. 한 칠팔십 되는데... 올인입니다.

따라오실려면 찌르시죠?"


느긋하게 앞에 쌓인 돈을 탁자위로 밀어넣은 추림이 쇼파에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였다.


"이새끼 장땡이구나!"

"얼라리? 이놈 오늘 운수가 터진거야 뭐야? 정말인가부네?"


고무된 얼굴로 지켜보던 사람들이 추림의 배짱에 놀라 한마디씩 하자 박도형의

얼굴이 심각해 졌다. 만약 추림이 박도형보다 높다면 그는 백만원쯤을 잃는 것이다.

걸린 판돈이 추림것과 합쳐 백이십만원쯤 되니 이기면 본전을 찾고도 남는 것이고

따라갔다가 지게 되면 본전 찾을길은 요원해 지는 것이다.


추림이 강하게 나오자 박도형은 속으로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며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선택에서 고심했다.

자신의 패는 구땡이다. 정말 운이 좋았다. 하지만 추림의 한장은 자신보다 한끗발

높은 십자리고 오늘 운이 유난히 따르는 추림에게 장쨍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설마 하다가 잃은 돈이 사십만원이 넘었다.


사람들이 추림의 승리를 당연하듯 말하며 박도형에게 어서 빨리 선택하라며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박도형은 어찌할까하는 생각을 수십번도 더하고 있었다.

추림은 승리를 확신했다. 저돌형인 박도형은 머리는 똑똑하지만 감정 조절과 인내심이

부족하다. 그러면서 어떨땐 소심해지기도 하고 현명해 지기도 하는데 지금 그는 현명한

길을 택하려 기울어진 마음을 확인하려 들고 있었다.


박도형 그는포기 할 것이다!

그는 이미 심리 싸움에서 지고 있었고 더 큰 바보가 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었다.


"좋아! 이새끼 누가 이기나 보자! 나도 올인... 이...다!"


느닷없이 박도형이 소리치자 사람들이 놀라고 추림은 더 놀랐다.

설마 그가 이렇게 나올줄은... 그러나!


"올인이다! 라고 말할 줄 알았지? 신발놈 너 먹어라... 졌다 패좀 보자."


쿡쿡! 결국 그것인데 마지막 미련이 장난질을 치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김빠지는 얼굴을 하며 곧 공개될 추림의 패를 기다렸다.


"확인하려면 돈 내요. 거기 이대준씨도! 이과장님도 돈내요 돈! 이게 얼마짜리 팬데

함부로보여 줄 것 같아요."


"에라이 도둑놈아! 잃은 돈이 얼만데!"

"안본다 이새끼야! 니나 실컷 쳐봐라!"

"빨랑 안까! 진짜 확 돌아버리기 전에!"


사람들이 궁시렁 대며 추림의 패를 억지로 뒤집으려 하자 추림이 손안에 화투패를

숨기며 말했다.


"놀음의 기본은 내 패가 아닌 상대 패라는 걸... 얼른 적어요 적어! 좋은 말이니...

자자! 조용하시고 자알 보세요. 짜잔!"


추림이 탁자위에 숨긴 한장의 화투장을 뒤집어 올려 놓았다.


"억!"

"신발!"

"뭐야? 삼끝이잖아?"


추림이 공개한 패는 박도형의 짐작데로 십자리 풍이 아닌 삼 피였다. 십과 삼의 수!

삼끗! 결국 추림의 배짱과 심리전에 박도형은 실기를 놓치고 져버린 것이다.


"에이... 신발놈아!"


박도형이 얼굴이 붉게 변해서 추림을 죽일듯이 노려 보았다.


"하하!"

"아따 신발놈! 징한 새끼구마잉!"

"박과장 똥 밟았다!"


사람들이 웃겨 죽겠다고 난리쳤다. 한두번 추림에게 당하는 것도 아니면서 매번

이렇게 당하는 박도형이었다. 당연했다. 그들의 진짜 놀음 사부는 추림이었다.

카드 놀음인 바카라와 훌라 블랙 잭 따위의 게임을 추림이 전수했고 화투장으로 노는

바둑이라는 게임도 추림이 전수한 마당인데 나이와는 상관없이 추림이 그들의

머리위에서 놀고 있는 것이다.


"오우 예! 이게 얼마야? 손대면 책임 안져 이대준씨! 이대리형! 저리안가?

놔두란 말이예요! 구정때 떡값은 제가 드릴께요."


돈을 차곡하게 정리해 안주머니에 넣으며 추림이 좋아 죽겠는지 신나하자 나머지

사람들은 부러운 반 심술 반으로 추림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 돈중 일부는 몇몇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고 내일 쯤이나 그 후에 간식거리로 추림이 선심을 쓸것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너 이새끼야 저녁에 후반전 하자!"

"싫거든요? 아저씨! 술마셔야지 애들 장난은 그만 하렵니다."


"뭐라고? 애들 장난? 저게 아주 막가라 막 가!"

"엥? 그럼 이게 어른 놀이예요? 그렇게 가르쳐 주어도 써먹지도 못하는게 어른인가?"


"우아악! 너 이리 와! 이리 안와!"

"아이구! 나 약속있는데! 저 점심은 나가서 먹고 올께요. 거기 아저씨 왜 그런 얼굴로

절 노려 보시나요? 때릴거 같잖아? 소문 내야지... 누구는 돈 조금 잃고 밑에 사람

팬다고!"


추림이 심술이 뚝뚝 떨어지는 박도형을 끝까지 놀리며 밖으로 잽싸게 빠져 나갔다.


"어이구! 저새낄 저걸 어떻해 죽이나! 미치겠구나!"

"그러게 박형은 왜 추림을 그렇게 못살게 구시는거요."


박도형이 억울해 하자 김행술씨가 한마디 내뱉았다.


"김형은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요? 내가 저놈 때문에 요즘 엄청 고생하는게 안보여요?"

"허 참내 원! 엇그제도 조금 늦었다고 하루종일 괴롭힌걸 사내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

놈 그대로 내버려 두시구랴. 저놈만큼만 하는 놈 서넛만 있으면 회사일 신경 안써도

되겠더만 안그래요 이과장님?"


"모르겠구랴 난. 하여튼 오늘 밤 꼬맹이가 술 사준다는 건만 알겠구랴."


이과장이 김행술씨의 말투를 흉내내며 장난치자 박과장이나 그도 입맛만 다셨다.


"어이구 내 피같은 돈을 어디가서 찾나! 재수가 꽝이야 꽝!"


휴계실을 빠져 나가며 박도형이 궁시렁 대자 사람들이 다시 웃음을 왁자하게 터트렸다.


"아 눈 진짜 많이도 쏟아진다! 그런데 정말 장관이지요? 보기도 좋구."


점심시간이 이십분이나 남았지만 허락된 시간이어서 일찍 명화를 만났다.

다행이 명화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아서 마음이 가뿐해진 추림은 명화와 나란히

걸으며 쏟아지는 눈을 즐겼다.


"우리 테이트 할래요 명화씨?"

"예? 테이트요? 그게 무슨?"


조용히 추림의 아이같은 모습을 보며 웃음짓던 명화가 추림의 난데없는 말에 의하해

했다.


"눈도 오고 바람은 없고 예쁜 아가씨랑 길을 걸으니 데이트가 마구 하고 싶어 졌어요."

"여자 친구랑 하세요. 전 안되잖아요."


"왜 안되요? 성규대신 하면 되지요! 자 이렇게 해봐요."

"......!"


추림이 막무가네로 명화의 팔을 잡아끌어 자신의 팔에 끼워넣었다.

부끄러워진 명화가 당황하자 추림이 눈을 찡긋하며 밝게 웃어주었다.

그러자 명화가 다소곳해져 버렸다.


"얼마나 좋아요. 저거봐요? 지나가는 사람들이 부럽게 쳐다보잖아요.

멋진 남자와 아리따운 아가씨의 다정한 모습! 내가 봐도 부러울 건데... 히히!"


익살스럽게 웃은 추림이 명화의 팔을 강하게 당겨 미끄러운 길을 살펴주었다.


"추림씨는 참 좋은 사람이예요."

"예예! 당연하지요.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이놈도 좋다하고 저놈도 좋다하니 도대체

전 좋다는 말이 뭔 말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거 먹는건 아니겠죠?"


"호호!"


추림의 농담에 명화가 정말 웃겼는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지 않아도 성규가 그랬어요. 추림씨에게 가면 이럴지도 모른다고요.

실컷놀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달라고 말하래요. 그놈이면 다 드어준다면서요.

아! 그놈은 빼구요."

"자식. 형을 너무 잘아는군! 그러다가 돌려 보내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명화가 정말 즐거운지 추림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눈길을 따라 추림에게 기대며

걸었다.


"명화씨. 성규놈이랑 이렇게 걸어본지 오래 됐지요?"

"글쎄... 언제 그랬는지 기억도 안나요. 이젠 같이 다녀도 떨어져서 걷고...

애정이 식었나봐요. 아니면 다른 여자가 생겼던가."


"어? 명화씨도 그런 말 할 줄 아세요? 햐... 이거 뜻밖인데요? 가끔 이렇게 걷고

싶은데 성규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찾아 오세요. 제가 실컷 빌려드릴께요."


부드럽게 추림이 말하자 명화가 쓸쓸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남자와 살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은 여자의 슬픔이란 그렇게 허무하고

외로운 것 인지도 모른다.


새로 생긴 칠층 건물의 사층으로 올라가자 넓은 한식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작년 여름에 완공되고 음식점은 시월에 개업했다. 벌써 단골이 되어있는

남영기업의 사람들이어서 종업원과 주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점심시간이어서 사람들이 매우 많았지만 사장의 배려로 예약되어 있다는 방 하나를

따로 들어 갈수 있었다. 세시전에 비워주면 되었으므로 시간은 넉넉했다.


"여기 소갈비 주세요. LA 갈비던가? 그게 요즘 유행이라하는데 그거 삼인분 주시고요

완숙 되지 않은 것 있으면 오인분 따로 포장 좀 해주세요. 아. 야채도 넉넉하게

주셔야 해요. 회사 가져 갈꺼니까."


"네. 식사하실거죠? 술은?"

"술? 명화씨 한잔 하시고 가실래요?"


종업원이 착실하게 물어와 추림은 명화에게 물었다. 그는 근무중이어서 술은 마시지

못하지만 명화는 마실지도 몰랐다.


"조금요. 추림씨 일하셔야 하잖아요?"

"딱 한잔만 마시지요."


상이 차려지고 곧 고기 굿는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명화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고 추림이 재촉하자 명화는 조용하게 식사에 열중했다.


"이게 미국 엘에이에서 만들어 진거래요. 조금 다르죠? 소도 미국산이고 갈비를 재는

방식도 다르고. 저도 몇번 먹어보지 않았는데 전 국산이 난것 같아요.

많이 드세요 명화씨."

"전 좋아요. 육질도 부드럽고. 색다른데요. 아! 편하네요. 추림씨를 만나면 이상하게

편해요 부담도 덜 돼고 집에 마치 고향에 있는 느낌이예요."


정말 맛있는지 공기밥까지 깨끗하게 비워낸 명화가 술잔을 들고 말했다.


"다행이네요. 부담되면 어쩌나하는게 제 고민이죠 항상.

"처음에 성규가 추림씨를 만나러 가자고 극구 우길 때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어요.

참 많이 들었고 막 질려갈 때였거든요. 재작년이니 벌써 이년이 지났네요."


"그때 명화씨 정말 아름다웠어요. 봄이었잖아요. 짧은 치마에 블라우스차림인 명화씨가

오월의 햇살에 어찌나 눈 부시던지 성규가 부럽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확! 빼앗아

올까하고도 고민했어요. 어? 안믿는 얼굴이네요? 정말인데."

"핏. 그런 거짓말 누가 믿어요? 성규가 추림씨 만큼은 절대 그러지 못할거라고 했어요.

정말 전 추림씨를 믿어요. 늘 같은 모습이시고, 밝은 추림씨를 성규가 반만 닮았다면

좋을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명화의 얼굴에 어두운 기색이 서렸다. 추림의 성격은 늘 그렇게 성규와 비교되곤 했는데 그

건 성규의 오랜 자격지심이었지만 언제부턴가 성규에게 그것이 사라졌다.


"성규 참 좋은 녀석입니다. 전 그놈을 믿어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악하고

바보는 없어요. 제가 그놈곁에서 빨리 사라져줘야 할텐데... 어떨땐 미안하기도 해요.

나라는 놈이 성규에게 너무 많은 부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니요. 성규가 그랬어요. 만약 부모와 추림씨를 두고 한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반드시 추림씨를 선택한다고 했어요. 성규는 어려서 추림씨의 장난감 같다고 느꼈다고

했어요. 무엇이든 추림씨 하는데로 따라하는 그런 장난감요. 그런데 언제 부턴가

자신이 장난감이 아니라 추림씨가 그렇다고 했어요. 자신을 위해 뭐든 하려하는 장난감

병정요. 오로지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움직이는 그런 장난감 병정요. 너무 미안해서

도망도 가고 싶다 했는걸요."


추림은 명화의 말을 들으며 마음이 아파왔다.

성규는 자신으로 인해 도움받는 것도 있지만 직접 비교 대상이 되었던 적이 더 많았다.

그것이 컴플렉스가 되어 고민하는 모습도 여러번 보았다. 그러나 성규는 그것을 잘

극복해 내었다. 우정! 그것을 놈은 알았고 배운것이다.


"가거든 말해 주세요. 기꺼이 장난감 병정이 되어 준다고 말입니다. 평생 변하지 않는

병정이 되어 지켜 준다고 맣해 주세요."


눈에 슬픈 기색을 담은 명화가 추림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남자의 가장 든든한 친구! 친구지만 존경으로 대하는 아주 어렵고도 근엄한

상대이기도 했다. 뭐든 가능하면서도 뭐든 어려운 친구가 이추림이라는 남자였다.


성규가 만약 추림을 닮았다면 명화는 정말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는 김성규라는 이름의 존재였고 변하지 않을 사랑이고

싶었다. 그가 나약하고 무능력하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돌보지 않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런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요. 제가 연락할께요. 구정때 고향에 꼭 다녀오세요.

성규는 제가 데리고 다녀 올거니까 안심하시구요."

"네 그럴께요. 저도 고향에 다녀오고 싶었어요. 동생들도 보고싶고 엄마도 아빠도

보고싶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명화는 일년동안 성규로인해 고향엘 다녀오지 못했다. 이제 그 책임을 추림이 대신

져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거... 집에 가서 보시구 그냥 넣어두세요. 병원에도 가야하시구 성규 그놈

약좀 해먹이세요. 고향에는 다녀 오실 수 있을 겁니다. 부담 가지면 제가 화내는건

아시죠?"

"미안......!"


"아 늦었네요. 회의가 있다는걸 깜박했어요. 기운 내세요. 밝은 척! 희망 있는 척!

하면서 사세요. 그럼 절로 그렇게 될 거예요. 그만 일어나죠 명화씨."


추림이 유난히 서둘렀다.

명화의 심정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헤어지려는 것이다.


"가시면 성규놈에게 말좀 전해 주세요. 술처먹으면 패 줄거고 헷짓거리하면 더 패

줄거라구요. 명화씨에게 제가 구혼했다고 거짓말 쯤 치면 더 좋겠어요."


밖으로 나오니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도로가로 나와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명화씨? 조심히 들어가시고 구정 지나면 제가 좋은곳에 모실께요. 한번 모여요.

여러 친구 들도 부르고 마음껏 놀아봅시다. 그때는 명하씨 친구들도 부르세요.

또 알아요? 명화씨 친구들 중 한명과 사랑에 빠질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네요."

"네 그럴께요. 잘 다녀오세요. 구정 지나고 뵐께요."


"어 택시온다!"


추림이 택시를 잡아 세우고 명화를 태워 보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이 어찌나 많이 내리는지 한점의 공간도 보이지 않았다.


깊게 한숨을 내쉰 추림은 아침에 일어나 유미가 남긴 글을 떠올렸다.

도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대충 유추할 수는 있었다.


유미... 그녀도 아마 지금쯤이면 이 눈을 보고 있으리라... 그녀가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