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호수도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따금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음위의 분설을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특별이 갈 곳이 생각나지 않거나 까닭없이 허전해 올 때면 무작정 찾아오던 곳. 그 누구 하나 아는 이도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는 곳. 그러나 이 자리에만 서면 싸한 그리움 같은 걸 느끼곤 했었다.
호수를 건너면 골짜기가 나오고 작은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면 솔숲 우거진 오솔길이 나그네를 맞는다.
가는 사람 잡지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사색의 오솔길. 겨울바람이 소나무위를 스칠적마다 하얀 눈가루가 연기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거무티티한 갈참나무둥치들과 단풍나무가 좁다란 산길 양켠에 줄지어 서서 떨고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길손이 뜸한 걸 보면 콧털까지 얼어붙는 날씨 탓이리라.
느린 걸음으로 허위허위 걷는 걸음엔 반겨줄 이 없으니 하나 바쁠 것 없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입속에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노래가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허밍이 되어 간간히 입밖으로 새나왓다. 가끔 심호흡을 하기위해 입을 열면 연기같은 김이 피어올랐다.
오르막길이 나오자 호흡이 가빠졌다. 저 만치에서 키 작은 여자가 혼자서 걷고 있다. 노란 병아리색 파카에 흰색 목도리 그리고 회색빛 털모자를 눌러 쓴 뒷모습과 숲속의 한적한 오솔길이 묘한 어울림이되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키 작은 여자는 언덕 마루 쯤에서 힐끗 뒤돌아 보았다. 그녀와의 거리가 약간 멀긴했지만 얼굴의 윤곽이 잠깐 스치듯 보였다.
여자는 걸음을 간간히 멈춰서서 멀리 정적에 쌓인 숲을 바라보곤 했다. 그 바람에 L 과의 간격이 좁혀져서 나란히 걷게 되었다. 둘이 걸으면 어깨를 스쳐야 할 정도로 길은 좁았다. 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L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옆 모습을 힐끗 훔쳐봤다. 뽀얗고 귀여운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스치는 감정은 앙징스런 어린애를 볼 때의 사랑스러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잔잔히 피어 올랐다.
L은 길가다가도 그런 꼬마아이만 보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던가 꿀밤을 한 대 주면서 애정표현을 해야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한테서도 그런 똑 같은 감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이마를 쓸어 주기는 커녕 말 한마디 잘못 붙였다가는 치한으로 내몰리기 쉽상이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무심한 척 땅만 바라보며 그녀를 스치 듯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귀에 익은 노래의 멜로디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물고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L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 것은 그녀가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는 자신이 조금전까지 속으로 웅얼거렸던 바로 그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일까. L이 그 노래를 부른 것은 속으로만 웅얼거렸기에 거리로 봐서는 도저히 이 여자가 들을 수 없었음에도 지금 이 여자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그렇다고 생판 첨보는 여자한테, 그리고 인적도 없는 이 외딴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한테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앞서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뒤 돌아서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역시 예쁜 얼굴이다. 홀로 여행와서 좋은 이야기상대를 만난다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이겠는가.
그러나 곧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너무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어리다는 건 세대차이가 난다는 뜻이고 대화상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동문서답의 이야기만 오고갈 뿐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흘러간 노래를 부른다는 것과 L이 좋아하고 조금전까지 불렀던 노래가 거의 같은 시간대에 다른 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흐뭇했다.
앞의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눈무게에 더욱 휘늘어진 노송숲 사이로 절의 일주문이 보였다. 빛바랜 단청과 주변의 분위기가 매우 포근하게 다가왔다. 대웅전 마당에서 그 고요함을 맛 보려고 발길을 멈췄다.
L이 절을 찾는 이유는 어떤 신앙때문이 아니라 큰 규모의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적막함이 스며있어서 그것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발빠르게 움직이며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문득 멈춰진 듯한 느낌. 정갈한 분위기. 뭔지모를 땅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하고 주변의 경관들이 L을 자꾸만 이런 장소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요함은 조금 전까지만해도 바깥의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하던 진흙탕싸움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하고 L자신의 삶을 되돌아 서서 반추할 수 있게 하는 이런 환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절 뒤꼍의 돌담 너머에는 빛바랜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넓은 대웅전 마당 어디에도 절 뒷 편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L은 자신도 모르게 궁금해 졌다.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따지고 보면 L자신이 그녀의 소재에 궁금해 할 것도 없었고 사라진 그녀의 그림자를 못찾아 당황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허전했다.
아까보다 더 넓게 보이는 마당을 천천히 가로질러 걸으며 마음 한 구석에서 밀려오는 공허함과 아쉬운 감정을 달래야 했다.
대웅전을 다시 바라보고 돌아설 때 신발 한 켤레가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L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 문앞에 멈춰섰다. 한뼘밖에 안되보이는 작은 등산화가 겨울 햇살을 받고 앙징맞게 놓여져 있었다.
여자가 법당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찬 마루바닥에 없드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천천히 일어나 절을 올렸다. 쪽문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던 L은 그녀가 티끌같은 잡념도 없이 무아의 경지에서 온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옆 모습은 너무도 경건하고 성스럽게 보였으며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무언가 한 곳에 집중해서 간구하는 그 모습을 보자 L자신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고귀하게 보였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절을 올리고 있는 걸까? L은 저 아름답고 성스러운 자태를 잊어먹지 않게 뇌리에 깊이 사진을 찍어 두고 싶었다.
잠시후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신발끈을 묶다가 저 만치서 바라보고 있는 L을 의식했음인지 가벼운 목례를 했다.
"여기까지 오셨네요."
약간은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맑은 목소리였다. 아까 스치 듯 지나친 것도 인연이라고 그녀가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L은 순간 얼떨떨해져서 얼버무렸다.
"예.....네.. 오다보니까...."
그녀가 마당으로 내려서며 또 물었다.
"여긴 자주 오세요?" "예... 가끔 바람 쐬려고 옵니다. 자주 오시나봐요?"
어느새 둘이는 나란히 걸으며 일주문을 나서고 있었다.
"예, 저는 집이 여기서 멀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들르곤 했었습니다. 댁은 이 지방분이 아니시죠?" "예...어떻게 아셨어요? 서울서 왔습니다." "여기 말고도 이 근처에는 호젓한 산책길이 많이 있어요." "아까 보니까 노래 부르면서 올라 오시던데 그 노래를 좋아하시나 봐요?" "예, 혼자있을 때면 자주 부르는 노래예요. 그 노래 아세요?" "하하하, 그럼요. 저도 좋아합니다. 조금 전에도 그 노랠부르면서 올라 왔는데 댁에서 똑같은 노래를 부르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호호호~~ 텔레파시가 통했나 보죠?" "그런데 그 노래는 꽤 지난 노래라서 사람들이 잘 모르던데...... 댁같은 나이에 그 노래를 아는 걸 보고 몹시 반가웠었습니다." "그래요. 좀 오래된 노래지요. 근데 제가 그렇게 어려보이세요? 호호호호"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들어나 보였다.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맑고 천진해 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30대 초반으로 밖에 안보이는데.. 그럼 더 먹었다는 거예요?" "호호호~~ 그렇게 봐 주신다니 고맙네요. 그렇지만 그것보담 훨씬 더 먹었습니다."
그녀는 분홍색 벙어리 장갑 낀 손을 뻗어 소나무에 쌓인 눈을 훑었다.
"그 노래가 유행할 무렵에 제가 이십대였으니 짐작이 가시죠?" "네??....어떻게 그럴수가..."
L은 그녀가 어림해서 알으켜 주는 나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얼굴 그 어디에서 그런 연륜의 세월이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잔주름 하나없는 얼굴엔 피부마저 너무나 곱고 투명한데다 맑은 눈망울이 많은 시간의 덮게를 느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회색빛 털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에선 소녀같은 청순함마저 배어 있었던 것이다. L은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고선 속으로 뛸 듯이 기뻤했다.
"댁은 떡국을 얼마나 드셨어요?" "하하하~ 떡국요? 재밌네요. 저도 댁하고 비슷해요. 반갑네요. 이런 곳에서 또래를 만나게 되다니.."
L은 무엇보다 대화상대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던 것이다.
"절에 다니시는 모양이죠? 저도 그런 데를 자주 가긴 하지만........ 그냥 절간 분위기가 제 성격상 맞는 것 같아서 좋아만 하고 있습니다." "저도 첨엔 고요한 분위기하고 주변 경치가 좋아서 자주 찾다가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됐어요."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솔바람 소리같다고 생각했다. 둘이는 얼어붙은 호수로 내려섰다. 올 때는 황량해 뵈던 호수가 둘이서 나란히 걷으니 낭만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오실 때 저쪽 길로 오셨나요?"
그녀는 어린애들이나 낄 법한 분홍색 벙어리 장갑을 들어 건너편 산기슭을 가리켰다. 장마때 산사태가 났었는지 황토빛 단애가 졌고 그 옆으로 좁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예, 댁도 그리로 오신거군요. 저 길을 걸으며 TV에서 보았던 silk road를 연상하면서 내내 그 연주 음악을 머리속에 떠올렸습니다. 그 왜 '댓상의 행렬'인가요? 나귀등에 짐을 싣고 걸어가는 상인들요." "어머나!! 어머나!! 정말 그러셨어요? 정말 실크로드 음악을 상상하셨어요? 어머나 세상에 어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어요? 호호호~~"
그녀는 손벽을 치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L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함과 반가움의 눈빛이었다. L은 저 길을 걸으면서 외롭고 고탈픈, 그러나 그 상인들 나름의 소중한 삶을 떠올리며 나귀목에 걸린 짤랑거리는 방울소리를 환청처럼 떠올렸었다. L은 그녀보다 더한 묘한 감동을 받았다.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만한 황량하게 보이는 길에서 똑같은 음악에 똑같은 연상작용을 하며 걸었다는 것도 신기한데다가 그 상대가 이렇게 예쁘고 앙징스런 여인이라는 데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던 것이다. L은 너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소름끼치는 오싹함을 느꼈다.
"아아~~~!! 정말 희한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아까 부르던 노래도 그렇고...."
L은 장난스레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채 시야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그런 L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가느다란 미소를 살포시 지어 보이며 얼음위로 미끄럼을 주루루 탔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든 게 언듯 보였다.
개구쟁이가 되어 미끄럼타기를 하는 그녀의 뒷 모습은 분홍색 벙어리 장갑과 흰 목도리와 노란색 파카, 그리고 회색빛 털모자가 한아름의 꽃이 되어 흰 설원에 피어난 듯 보였다.
어느 사랑 이야기 <첫번째>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들 모두 성취하시길 빕니다.
아래의 글은 제 홈페지에 올렸던 글인데, 7회에 걸쳐서 올려 봅니다.
참고로, 이 내용은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대화내용이나 주변 정황, 분위기 등등을 조금도 보태지도 않고 고스란히 살렸습니다.
......................................................................................................
음악은....... 비지스--->Holiday >
어느 사랑 이야기 < 1 >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언덕위에서 내려다 본 호수도 꽁꽁 얼어붙어 있다.
이따금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음위의 분설을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특별이 갈 곳이 생각나지 않거나 까닭없이 허전해 올 때면 무작정 찾아오던 곳.
그 누구 하나 아는 이도 기다려 주는 사람도 없는 곳.
그러나 이 자리에만 서면 싸한 그리움 같은 걸 느끼곤 했었다.
호수를 건너면 골짜기가 나오고 작은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는 곳을 지나면 솔숲 우거진 오솔길이 나그네를 맞는다.
가는 사람 잡지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사색의 오솔길.
겨울바람이 소나무위를 스칠적마다 하얀 눈가루가 연기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거무티티한 갈참나무둥치들과 단풍나무가 좁다란 산길 양켠에 줄지어 서서 떨고 있었다.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길손이 뜸한 걸 보면 콧털까지 얼어붙는 날씨 탓이리라.
느린 걸음으로 허위허위 걷는 걸음엔 반겨줄 이 없으니 하나 바쁠 것 없는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입속에선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노래가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허밍이 되어 간간히 입밖으로 새나왓다.
가끔 심호흡을 하기위해 입을 열면 연기같은 김이 피어올랐다.
오르막길이 나오자 호흡이 가빠졌다.
저 만치에서 키 작은 여자가 혼자서 걷고 있다.
노란 병아리색 파카에 흰색 목도리 그리고 회색빛 털모자를 눌러 쓴 뒷모습과 숲속의 한적한 오솔길이 묘한 어울림이되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했다.
키 작은 여자는 언덕 마루 쯤에서 힐끗 뒤돌아 보았다.
그녀와의 거리가 약간 멀긴했지만 얼굴의 윤곽이 잠깐 스치듯 보였다.
여자는 걸음을 간간히 멈춰서서 멀리 정적에 쌓인 숲을 바라보곤 했다.
그 바람에 L 과의 간격이 좁혀져서 나란히 걷게 되었다.
둘이 걸으면 어깨를 스쳐야 할 정도로 길은 좁았다.
그 어색함을 피하기 위해 L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옆 모습을 힐끗 훔쳐봤다.
뽀얗고 귀여운 얼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순간적으로 스치는 감정은 앙징스런 어린애를 볼 때의 사랑스러움이 가슴 밑바닥에서 잔잔히 피어 올랐다.
L은 길가다가도 그런 꼬마아이만 보면 귀여워서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던가 꿀밤을 한 대 주면서 애정표현을 해야 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런데 이 여자한테서도 그런 똑 같은 감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이마를 쓸어 주기는 커녕 말 한마디 잘못 붙였다가는 치한으로 내몰리기 쉽상이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냥 무심한 척 땅만 바라보며 그녀를 스치 듯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귀에 익은 노래의 멜로디가 조그맣게 들려왔다.
그녀가 입을 꼭 다물고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L의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 것은 그녀가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는 자신이 조금전까지 속으로 웅얼거렸던 바로 그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텔레파시가 통한 것일까.
L이 그 노래를 부른 것은 속으로만 웅얼거렸기에 거리로 봐서는 도저히 이 여자가 들을 수 없었음에도 지금 이 여자가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반가웠다.
그렇다고 생판 첨보는 여자한테, 그리고 인적도 없는 이 외딴 오솔길에서 만난 사람한테 아는 체를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앞서 나가면서 다시 한 번 뒤 돌아서 그녀를 슬쩍 쳐다봤다.
역시 예쁜 얼굴이다.
홀로 여행와서 좋은 이야기상대를 만난다면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는 사건이겠는가.
그러나 곧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녀가 너무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어리다는 건 세대차이가 난다는 뜻이고 대화상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면 동문서답의 이야기만 오고갈 뿐 공통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흘러간 노래를 부른다는 것과 L이 좋아하고 조금전까지 불렀던 노래가 거의 같은 시간대에 다른 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흐뭇했다.
앞의 오르막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눈무게에 더욱 휘늘어진 노송숲 사이로 절의 일주문이 보였다.
빛바랜 단청과 주변의 분위기가 매우 포근하게 다가왔다.
대웅전 마당에서 그 고요함을 맛 보려고 발길을 멈췄다.
L이 절을 찾는 이유는 어떤 신앙때문이 아니라 큰 규모의 건물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하고 적막함이 스며있어서 그것이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발빠르게 움직이며 돌아가던 시계바늘이 문득 멈춰진 듯한 느낌.
정갈한 분위기.
뭔지모를 땅기운이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기도 하고 주변의 경관들이 L을 자꾸만 이런 장소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고요함은 조금 전까지만해도 바깥의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하던 진흙탕싸움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게 하고 L자신의 삶을 되돌아 서서 반추할 수 있게 하는 이런 환경이 좋다고 생각했다.
절 뒤꼍의 돌담 너머에는 빛바랜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리며 손짓하고 있었다.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넓은 대웅전 마당 어디에도 절 뒷 편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L은 자신도 모르게 궁금해 졌다.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따지고 보면 L자신이 그녀의 소재에 궁금해 할 것도 없었고 사라진 그녀의 그림자를 못찾아 당황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지만 그래도 허전했다.
아까보다 더 넓게 보이는 마당을 천천히 가로질러 걸으며 마음 한 구석에서 밀려오는 공허함과 아쉬운 감정을 달래야 했다.
대웅전을 다시 바라보고 돌아설 때 신발 한 켤레가 댓돌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L은 계단을 천천히 올라 문앞에 멈춰섰다.
한뼘밖에 안되보이는 작은 등산화가 겨울 햇살을 받고 앙징맞게 놓여져 있었다.
여자가 법당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찬 마루바닥에 없드려 한참을 그렇게 있더니 천천히 일어나 절을 올렸다.
쪽문에 서서 조용히 지켜보던 L은 그녀가 티끌같은 잡념도 없이 무아의 경지에서 온 몸과 마음을 던져서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옆 모습은 너무도 경건하고 성스럽게 보였으며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무언가 한 곳에 집중해서 간구하는 그 모습을 보자 L자신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멀고 고귀하게 보였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절을 올리고 있는 걸까?
L은 저 아름답고 성스러운 자태를 잊어먹지 않게 뇌리에 깊이 사진을 찍어 두고 싶었다.
잠시후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뒤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신발끈을 묶다가 저 만치서 바라보고 있는 L을 의식했음인지 가벼운 목례를 했다.
"여기까지 오셨네요."
약간은 가라앉은 듯 하면서도 맑은 목소리였다.
아까 스치 듯 지나친 것도 인연이라고 그녀가 아는 체를 하는 것이다.
L은 순간 얼떨떨해져서 얼버무렸다.
"예.....네.. 오다보니까...."
그녀가 마당으로 내려서며 또 물었다.
"여긴 자주 오세요?"
"예... 가끔 바람 쐬려고 옵니다.
자주 오시나봐요?"
어느새 둘이는 나란히 걸으며 일주문을 나서고 있었다.
"예, 저는 집이 여기서 멀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들르곤 했었습니다.
댁은 이 지방분이 아니시죠?"
"예...어떻게 아셨어요? 서울서 왔습니다."
"여기 말고도 이 근처에는 호젓한 산책길이 많이 있어요."
"아까 보니까 노래 부르면서 올라 오시던데 그 노래를 좋아하시나 봐요?"
"예, 혼자있을 때면 자주 부르는 노래예요. 그 노래 아세요?"
"하하하, 그럼요. 저도 좋아합니다.
조금 전에도 그 노랠부르면서 올라 왔는데 댁에서 똑같은 노래를 부르길래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나, 그러셨어요? 호호호~~ 텔레파시가 통했나 보죠?"
"그런데 그 노래는 꽤 지난 노래라서 사람들이 잘 모르던데......
댁같은 나이에 그 노래를 아는 걸 보고 몹시 반가웠었습니다."
"그래요. 좀 오래된 노래지요.
근데 제가 그렇게 어려보이세요? 호호호호"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하얀 치아가 들어나 보였다.
웃는 그녀의 모습이 맑고 천진해 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많이 봐줘도 30대 초반으로 밖에 안보이는데.. 그럼 더 먹었다는 거예요?"
"호호호~~ 그렇게 봐 주신다니 고맙네요.
그렇지만 그것보담 훨씬 더 먹었습니다."
그녀는 분홍색 벙어리 장갑 낀 손을 뻗어 소나무에 쌓인 눈을 훑었다.
"그 노래가 유행할 무렵에 제가 이십대였으니 짐작이 가시죠?"
"네??....어떻게 그럴수가..."
L은 그녀가 어림해서 알으켜 주는 나이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얼굴 그 어디에서 그런 연륜의 세월이 나타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잔주름 하나없는 얼굴엔 피부마저 너무나 곱고 투명한데다 맑은 눈망울이 많은 시간의 덮게를 느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회색빛 털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에선 소녀같은 청순함마저 배어 있었던 것이다.
L은 그녀의 나이를 짐작하고선 속으로 뛸 듯이 기뻤했다.
"댁은 떡국을 얼마나 드셨어요?"
"하하하~ 떡국요? 재밌네요.
저도 댁하고 비슷해요.
반갑네요. 이런 곳에서 또래를 만나게 되다니.."
L은 무엇보다 대화상대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던 것이다.
"절에 다니시는 모양이죠?
저도 그런 데를 자주 가긴 하지만........
그냥 절간 분위기가 제 성격상 맞는 것 같아서 좋아만 하고 있습니다."
"저도 첨엔 고요한 분위기하고 주변 경치가 좋아서 자주 찾다가 본격적으로 입문하게 됐어요."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피어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가 솔바람 소리같다고 생각했다.
둘이는 얼어붙은 호수로 내려섰다.
올 때는 황량해 뵈던 호수가 둘이서 나란히 걷으니 낭만이 흐른다고 생각했다.
"오실 때 저쪽 길로 오셨나요?"
그녀는 어린애들이나 낄 법한 분홍색 벙어리 장갑을 들어 건너편 산기슭을 가리켰다.
장마때 산사태가 났었는지 황토빛 단애가 졌고 그 옆으로 좁은 길이 이어져 있었다.
"예, 댁도 그리로 오신거군요.
저 길을 걸으며 TV에서 보았던 silk road를 연상하면서 내내 그 연주 음악을 머리속에 떠올렸습니다.
그 왜 '댓상의 행렬'인가요? 나귀등에 짐을 싣고 걸어가는 상인들요."
"어머나!! 어머나!! 정말 그러셨어요? 정말 실크로드 음악을 상상하셨어요?
어머나 세상에 어쩜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하셨어요? 호호호~~"
그녀는 손벽을 치며 동그랗게 뜬 눈으로 L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기함과 반가움의 눈빛이었다.
L은 저 길을 걸으면서 외롭고 고탈픈, 그러나 그 상인들 나름의 소중한 삶을 떠올리며 나귀목에 걸린 짤랑거리는 방울소리를 환청처럼 떠올렸었다.
L은 그녀보다 더한 묘한 감동을 받았다.
누구나 무심코 지나칠만한 황량하게 보이는 길에서 똑같은 음악에 똑같은 연상작용을 하며 걸었다는 것도 신기한데다가 그 상대가 이렇게 예쁘고 앙징스런 여인이라는 데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있었던 것이다.
L은 너무 감격에 겨운 나머지 소름끼치는 오싹함을 느꼈다.
"아아~~~!! 정말 희한하군요.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아까 부르던 노래도 그렇고...."
L은 장난스레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본 채 시야를 정지시켰다.
그녀는 그런 L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지 가느다란 미소를 살포시 지어 보이며 얼음위로 미끄럼을 주루루 탔다.
그녀의 볼이 발갛게 물든 게 언듯 보였다.
개구쟁이가 되어 미끄럼타기를 하는 그녀의 뒷 모습은 분홍색 벙어리 장갑과 흰 목도리와 노란색 파카, 그리고 회색빛 털모자가 한아름의 꽃이 되어 흰 설원에 피어난 듯 보였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