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숍으로 들이닥쳐서 불 여시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놓으려고 한 게 언제인데, 두 사람 눈에 피눈물 나는 꼴을 보겠다고 이를 갈던 게 언젠데. 막상 당사자가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자 여진은 계획을 실천할 수 없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꼭 죄짓다 걸린 사람 같다. 분명 죄지은 건 서여진이 아닌 백진우 인데 왜 여진이 심장이 떨리는 것이고, 왜 뒷걸음을 치는 것일까 의아했다.
“오..랜만이지?”
어느새 여진에게 다가온 진우가 손을 내민다. 악수하자는 뜻이다. 허나 여진은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내어줄 수는 없다. 멋쩍은 진우는 미소로 무마하곤 손을 거두었다.
“봤어. 문 앞에 서 있는 너.”
“....”
“너도 봤구나. 그래서 피한거니?”
‘아니. 난 그 커피숍 뒤엎어버리려고 들어 간 거였어. 백여시 머리털 다 뽑아버리고, 바람난 너, 사람들 앞에서 창피주려고 들어간 거였어. 내가 가만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니? 불여시랑 놀아나는 너, 모르는 척 할 줄 알았니?’
여진은 그리 고함 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도 뻥긋 못했다.
불편하다. 어색하다. 백진우와 지금은 헤어졌지만 예전엔 사랑했던 사이인데, 둘이 있을땐 할말이 너무 많아서 시간 가는지도 몰랐는데 왜 지금은 이리도 어색한 것인지, 왜 이리도 불편한 것인지, 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헤어짐이란 이런 것 일까? 내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던 반쪽이 이젠 불편하고 어색한 타인이 되어버리자 여진은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또한, 여진 만큼이나 진우에게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허나, 여진을 모르는 척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최소한 잘 있느냐 라는 말은 물어봐주고, 잘 있으라는 말로 불편한 만남을 끝내야 했다. 진우는 그랬다.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커피숍 문 앞에서 웬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여진을 보는 순간, 마음 놓고 연인과 차를 마실 수는 없었다. 분명 여진도 자신을 봤으리라. 그래서 자리를 피한 거라 생각되자 여진에게 죄를 짓는 거 같았다. 그래서 잠시 화장실을 핑계로 여진을 찾았다. 의도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날 못나가서 미안하다고, 핑계가 아니라 출장을 갔는데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와서 다음날 확인했다고, 확인하고 바로 연락하려고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못했다고, 그냥 네 기억 속에 난 못된 놈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고, 너에겐 끝까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다행이 여진을 찾았지만, 원망이 가득 담긴 눈을 보자 진우는 그 어떠한 말로도 여진의 닫힌 마음을 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여진에겐 그 역시 상처 되는 말이었다. 진우는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척 할걸 잠시 후회도 해보았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렵사리 건넨 손도 거절한 여진에게 무슨말을 어떻게 해줘야할까….
10초가 1분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자 진우가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인다...”
진우의 말에 여진은 현기증이 날것만 같았다.
‘좋아보인다고? 백진우, 네 눈엔 내가 좋아 보이니? 두 눈 크게 뜨고 다시봐. 이 모습이 좋아보인다고? 질투에 눈멀고 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무쳐서 네 앞에서 웃지도, 그렇다고 울수도 없는 내가 좋아보인다고? 백진우 너, 불여시한테 홀리더니 이젠 그 눈까지 홀렸구나.’
진우가 무슨 말을 하려나, 행여 그날의 일을 사과한다면 여진은 어떤 말로 받아 쳐줘야하는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좋아보인다니... 최소한 사과는 해야하는거 아닌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쯤은 해줘야하는 게 예의 아닌가. 양심에 털 난 인간이 아니고서야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지 여진은 내심 진우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양심에 털 난 백진우는 또 한번 여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한다.
“애..인?”
진우는 보디가드 마냥 여진의 옆에 서 있는 정후를 곁눈질로 보곤 여진의 남자친구라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밉다. 백진우가 너무 밉다. 애인이라니.. 얼토당토 않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는 백진우가 너무도 야속해서 여진은 그와 얼굴을 마주대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흐른다. 진우도 여진도 할말이 없었다. 또한,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여진의 새 애인이 되어버린 정후는 불쾌한 표정으로 못마땅해 했다.
어색한 분위기속에 진우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저기 여진아..”
“더 이상 할말 없으면 가 볼께. 기다리겠다. 너도 들어 가봐.”
변명하지 않았다. 이정후와 난 애인사이가 아니라고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잘됐다 싶기도 하다.
이정후의 말처럼 “너 아니어도 난 잘 살고 있다. 너만 새 애인 생긴지 아니? 나도 새 애인 생겼다, 너만 행복한지 알았니? 나도 행복하다. 너만 바라보며 지지리 궁상 떨고 있을지 알았니? 아니, 착각하지마라. 난 너 깨끗이 잊었다. 네 생각 하지도 않는다.” 그리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 이유없이 서여진의 애인이 되어버린 죄없는 이정후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이정후보다 서여진이 더 중요했다. 백진우 눈에 비추는 서여진의 모습이 더 우선이었다. 어쩌면 깨끗이 잊어주는 게 복수다 라고 말했던 이정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 복수가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왕 백 진우가 오해하는 이상 여진은 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미, 불여시와 백진우 사이를 깽판 칠 시기은 지났다. 지금 와서 깽판 쳐 봤자 서여진만 우스운 꼴이 된다. 또한, 깽판칠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 거린다. 또 도진 모양이다. 이 지긋지긋한 이별 증후군-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가요. 이정후씨.”
여진은 정후의 팔을 끌어당겼고, 어정쩡하게 여진에게 이끌려가는 정후는 ‘당신 미쳤어? 내가 왜 당신의 애인이냐’고 따지듯 눈으로 말했지만, 여진은 끝까지 정후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진우가 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다정한 연인 관계 인양 연출되었다.
그리고 막 상가 출구로 나가려 할 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긴 생머리를 가진 불여시가 상가로 들어오고 있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진우씨...”
인형 같은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진우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불여시.
진우의 웃옷까지 가지고 나온걸 보니 진우를 기다리다 지쳐 커피숍을 나온 모양이다. 가는 팔에 걸쳐있는 진우의 웃옷을 보자 여진은 또다시 질투가 샘솟아 올랐다.
지금이라도 불여시의 머리를 죄다 뽑아 놓을까? 불여시의 하얀 얼굴에 오선지를 그려 넣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좁은 출입문 앞에서 마주친 서여진과 불여시는 서로 자리를 피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불꽃 튀는 눈싸움-
여진은 불여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눈에 살기가 띌 정도로 노려보았지만, 백진우의 옛 연인이 서여진이라는 걸 모르는 불여시는 여진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 통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저편에 서 있는 진우만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진우를 보고 있던 불여시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지더니 서여진을 쳐다본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여진의 옆에 서 있는 이정후를 쳐다본다.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간다. 커다란 눈이 2배는 더 커진다. 그리고 앵두같이 작고 예쁜 입술이 달싹거린다.
“저..정...”
우물거리는 작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모든 일이 딱 3초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3초 후, 정후가 여진을 이끌고 출입문을 나왔으니 그 이후의 상황은 알 수가 없다.
여진과 정후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후, 진우는 출입문 앞에서 넋 나간 사람마냥 서 있는 정인에게 다가왔다.
“정인아...”
창백해진 정인의 얼굴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진우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 눈치 챘으리라, 진우는 그리 여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었는데, 진우는 그녀에게 이런 난처한 상황을 안겨주어 미안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가봐야 할 거 같아서.. 방금 꽃집에서 전화가 왔거든. 주문이 들어왔다고...”
“아, 그래..”
“기다려도 안 오길래 가지고 왔어.”
정인은 웃옷을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그녀의 음성이 떨린다. 진우는 가냘픈 정인의 어깨를 잡아 그의 품에 안기게 했다. 진우의 품에 파묻힌 정인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속삭였다.
“미안해. 정인아..”
“뭐가? 진우씨가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어쩌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진우가 아니라 최정인 자신일지도 모르기에 정인은 그저 먹먹해져가는 정신을 진우에게 기대었다.
*******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는 여진은 정후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댁이 그때 끌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 불여시 머리털을 반쯤 뽑아 놓았을 거 에요.”
“그만해요. 이제.”
“그만하라구요?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말짱 황이 됐는데 그만 하라구요?”
“보니까 그 남자 당신한테 더 이상 미련 없어 보이니까 혼자 쌩쑈 하지 말고 이제 그만해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쌩쇼 하지 말고 그만해라?’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여진에게 쏴 붙이는 정후의 말이 윙윙거리며 귓속에 맴돈다.
‘쌩쇼 하지 마라. 백진우는 서 여진에게 미련 없다.’빌어먹게도 그렇다. 여진의 눈에도 그리 비추었다. 백진우는 더 이상 서여진에게 미련이 없어보였다. 새 애인 만나서 잘살고 있기 때문에 옛 애인과의 추억을 떠올릴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정후의 팔에 매달려 이 남자가 내 애인이라고 보여줘도 진우는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데, 당사자인 여진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저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백진우는 당신에게 미련이 없다는 그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땅으로 푸욱 꺼지는 거 같기도 하고, 번화가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외톨이 같아 보였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 같았다. 하물며,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정후 역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모두들 옛 남자에게 아직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거 같고, 만약이라도 불 여시의 머리털을 뽑아 놓았더라면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돌을 던질 거 같았다.
피해자는 나 서여진인데, 불쌍한 사람은 나 서여진인데, 왜 내가 나쁜 사람이 된것인지...
여진은 몸을 돌려 맥 빠진 걸음으로 돌아섰다.
“여진씨.”
정후가 그녀를 쫓아와 옷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정후의 힘이 그녀의 발을 멈추게 했다. 아마도 정후의 말이 여진은 많이도 서러웠던 모양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볼을타고, 턱끝에 매달리고, 결국엔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를 울린 죄로 난처해진 정후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사과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
“그래도... 내편... 들어줄지 알았어요. 막상 하라고 하면 못할 거 아는데.. 그래도... 그 백여시 머리털 뽑아놓으라고.. 말해줄지 알았어요. 난...”
“.....마음 상했어요?”
“그래요. 마음 상했어요.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말 알죠? 이정후씨 말실수 했어요. 나, 이정후씨가 던진 말에 마음 많이 상했어요.”
“미, 미안해요.”
“아뇨. 틀린 말 아니에요. 이정후씨 말이 맞아요. 나 혼자 쌩쇼 했어요, 오늘.”
속이 울렁거린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구역질이 나온다. 버스를 오래타서 어지러운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이별증후군이 불쑥 튀어나와서 또 여진을 괴롭힌다. 아무래도 약국 먼저 찾아야할 거 같다. 눈물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자 저만치 뿌옇게 약국 간판이 보인다.
여진은 약국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정후가 따라온다. 이 여자, 수면제 먹고 또 자살시도 하는거 아닌가. 정후는 겁부터 덜컥 났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약국을 찾는 여진이 불안해 보인다.
“약국엔 왜 가요?”
“멀미약사러...”
“멀미약?”
“두통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수면제를 먹어도 낫지 않아요. 이번엔 멀미약을 먹어보려구요. 멀미약도 낫지 않으면 그땐 술이라도 마셔야겠어요.”
“사람 참 궁상스럽네, 정말.”
다행이 자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자 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멀미약을 먹겠다는 여진의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픈 이유는 뭘까. 두통약에 수면제, 거기다 이젠 멀미약까지 먹어본단다. 그것도 약발이 안받으면 술이라도 마시겠단다.
약국에서 산 멀미약을 먹고 있는 여진을 보며 정후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지켜봤다.
이별 후에 많이 힘들었었구나, 이 여자.
백진우라는 남자를 정말로 사랑했었구나, 이 여자.
그놈의 사랑이라는 게 뭔지, 이별이라는 게 뭔지 그 두 가지가 사람을 이리도 바보같이 만들어 놓는 것 일까? 정후는 손에 쥐고 있던 한병 남은 멀미약을 무심히 쳐다보곤 뚜껑을 열었다. 한 병으로는 안될 거 같다면 두병을 구입한 여진에게서 약발 받기도전에 죽고 싶냐며 뺏은 멀미약이다.
여진 만큼이나, 지금 정후 역시 머리가 복잡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생각치도 못한 만남-
당신보다 날 더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가겠다고 이별을 고하던 여자.
이별을 고하면서도 당신이 잡아주면 가지 않겠다고 하던 여자.
그럼에도 붙잡아주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며 떠나간 여자.
그 여자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후는, 멀미약을 입에 털어 넣고는 입술을 닦아냈다. 멀미약이 쓴 건지 아님, 마음이 쓴건지, 그의 입술에서 쓰디쓴 미소가 번진다.
‘한달만이구나, 최정인.’
6장.
-사랑, 너무도 흔한 말. 하지만 하기 힘든 말!
“이정후씨, 술... 마실래요?”
백화점 광장에 자리 깔고 앉아 있던 여진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후에게 넌지시 묻는다.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그냥 옆에 있길래 예의상 물어 봐준 거였으니까.
이 기분으론 도저히 집에 갈수 없었다. 분명 집으로 가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온갖 청승을 다 떨고 있을게 불보 듯 뻔하다. 술이 마시고 싶었고, 술을 마시기위해선 술친구가 필요했다. 멀미약으로도 이 어지러움증은 가시지 않았다. 역시 이별증후군의 극약처방은 술뿐이다. 다행인건지 아님 불행인건지 이 남자, 신경쓰지 말고 너 갈길 가라고 하는데도 1시간째 여진의 옆에 앉아 아까 편의점에서 산 새우깡을 하는 일 없이 먹고만 있다. 동정하는 건가? 그렇게도 내가 불쌍해보였나? 하긴 이정후 눈에 서여진은 지지리도 못난 여자로 보일 테지. 이왕 못난여자로 찍힌거 술친구라도 삼아서 서여진이 어디까지 못난 여자가 되어서 망가지는지 못되 먹은 오기까지 발동되었다. 지금 서여진의 심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쉽게도 이정후 뿐이었으니까. 뭐, 도움이 될지는 장담 못하지만.
“낮술은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낮술 먹고 또 뭔 짓을 저지르려고 그러시나.”
역시나 도움이 안 되는 이정후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하긴 지금 시간은 5시 30분. 해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알콜이 온몸에 분해 되지 않으면 버틸 자신이 없는 여진은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심정으로 이정후를 흘겨보며 먼지 묻은 엉덩이를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서여진씨가 사는 거면 고려해보고.”
여전히 심드렁하게 뒷목을 긁으며 정후가 염치없게 말하자 여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더치패이-”
“먹고 싶은 사람이 내는 거 아닌가?"
"내가 먹은 건 내가 내고, 댁이 먹은 건 댁이 내고.."
"보답은 해야지."
"무슨 보답?"
"연기자해도 되겠던데? 눈하나 깜짝 안하고 내 팔짱 끼는 거 보니까. 애인이라니!! 애인이라니!!! 나 참~ 내가 눈이 그렇게 낮은지 아나."
"뭐라고요?"
"확 불어버리려다 말았네. 그러니까 술사란 말이에요. 애인행세 해줬으니까."
"웃겨. 누가 해달랬나? 그리고 내가 이정후씨 한테 술을 사주는 이 차라리 혼자 마시고 말랍니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가 서여진씨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애인행세 하느랴 오해까지 샀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가서 불어요. 그럼 되겠네."
"진짜?"
"진짜."
"진짜로?"
"진짜로.."
“좋아요. 진짜 갑니다.”
“네~ 가세요. 누가 겁난데?”
"쯔쯧, 하여간 저 똥고집.”
다먹어치운 새우깡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골인시킨 정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각자 냅시다. 술값”
조금씩 저물어가는 해….
온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저녁 노을 속에서 이정후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이정후에게 향해있던 여진의 뾰족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지는듯 싶었다. 뭐, 어쨌든 혼자 처량맞게 소주잔을 채우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으니까.
******
“아주머니 여기 꼼장어랑 소주 한병이요. 참 오이 좀 듬뿍 좀 썰어줘요.”
포장마차에 들어서자마자 여진은 으레 단골인 마냥 한참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단골이나 봐?”
앉기도 불편한 의자에 걸터앉으며 이정후가 물었다.
단골집... 맞다. 허름한 포장마차 이름이 “순이네 “, 그 건너편 포장마차는 순이의 짝 “철수네”다. 철수네는 순이네의 체인점이란다. 우습게도 부부가 하는 포장마차였다. 순이네 장사가 잘되어서 남편이 철수네를 오픈한 것이다. 그게 벌써 5년전이다.
여진은 포장마차가 좋았다. 지저분하지만 인심이 좋았고, 음악은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화장실은 멀어 불편했지만 적당히 취기가 올라 화장실 찾으러 나갈때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순이네를 찾는 이유는 아주머니가 굽는 이 꼼장어 맛이 일품이라는 것이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그맛! 매콥쌉쌀한 꼼장어 한입에 소주한잔이면 인생의 희노애락이 느껴진다.
“예전엔 단골이었죠. 그런데 안온 지 오래됐어요.”
반듯하게 썰린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먹고 있던 여진이 씁쓸하게 미소를 담았다.
“한참 글에 미쳐있었을 때요, 그때 많이 왔어요. 소주 한병에 꼼장어 한 마리시켜 놓고, 여기에 손님들이 꽉 찰 때 까지 기다렸어요.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들려요.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가... 눈을 감고 있어도 보여요. 그들의 인생사가... 예전에 저 앞에 건물을 하나 새로 지었거든요. 여름철이라 장사가 한창 잘됐을 때죠. 밤이면 인부들이 많이들 왔어요. 지쳐 보이기도 하고, 지저분해보이기도하고, 상스러운 욕도 서슴치 않고 하더라고요. 싫었죠. 사람들도 자리를 피하고... 덥수룩한 머리에, 땀 냄새는 어찌나 심하던지, 멀찌감치 앉아 있는데도 땀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거예요. 그런데요, 그 사람들 참 부지런하데요. 어떻게 보면 그분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아버지들이에요. 벽돌 한장 나르면 유치원 다니는 작은 아들 크레파스 사주고, 철근하나 들어올리면 큰아들 대학 등록듬 내고, 시멘트 칠하고 모레 퍼 담으면 마누라한테 생활비주고. 그래서 힘이 난데요. 벽돌이 종이보다 가볍고, 철근이 돌맹이 보다 가볍데요. 감동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좋아요. 사람냄새가 나거든요. 이곳은....”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꼼장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여진은 군침을 삼키며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꼼장어를 한입에 넣고 입가심으로 소주도 비워냈다. 알싸하게 퍼지는 소주의 맛이 뱃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캬~ 조오타~”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내려오는 알코올로 인해 몸을 움추린 여진이 소주잔을 테이블위에 탁 내려놓았다.
“많이 고팠나보네. 술”
“많이 고팠죠.”
“잘 마시나봐.”
“필받 으면 소주 3병정도?”
“여자가 술 많이 마시는 거 보기 안 좋은데..”
“걱정 마요. 사람 가려가면서 마시니까.”
“듣고 보니 기분 안 좋네. 사람 가려가면서 먹는다니.”
가득 채워진 소주에 입만 대었다 땐 정후가 금새 또 소주한잔을 먹어치운 여진을 향해 기분 나쁘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 눈빛을 모른는 척 하는 여진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나 추한 꼴 다 본 사람 앞에서 뭐 내숭떤다고.”
“설마 오늘도 죽네 사네 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말라니까요. 나 지금 기분 좋으니까. 아~오랜만에 오니까 정말 좋다. 여기..”
포장마차의 주황색 천막을 걷어내고 하나둘씩 들어오는 손님들 속에서 여진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꼼장어 굽는 냄새 가득한 포장마차를 둘러보며 조금씩 취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난 후, 기분 좋다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여진은 돌변하고 말았다. 술 이라는게 그렇다. 처음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지만, 끝마무리는 항상 안 좋게 만든다. 더구나, 실연 후 마시는 술은 더 그러하다. 그래서 이별 후 마시는 술은 극약처방이 아니라 독약이다.
“끄윽. 이정후씨, 내가 말이에요. 내가, 나 서여진이 왜 여기를 안 왔는지 알아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놈이, 그 나쁜 놈이 그 빌어먹을 새끼가 꼴에 나 걱정해준다고 여기 그만 오라는 거예요.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는 거 보기 싫다고. 나는 작가거든요? 작가가 뭐냐~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게 작가거든요. 여기 오면 다 나와. 여기서 2시간만 투자하면 마음이 부자가돼. 드라마 투성이야 여기는... 소재거리 투성이라고요. 여기가.. 그런데 백진우가 싫다네. 일도 중요하지만 늦게까지 위험한곳에 있는 게 싫다네..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아이디어 구상하는 곳 많다고 내가 못 찾으면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가지 말라네. 나요, 그래서 여기 끊었어요. 여기, 백진우 때문에 안 왔어요. 그런데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아무리 백진우가 좋은 곳을 많이 데리고 갔어도 여기 안 오니까 글이 안 써져. 시나리오에 생명이 없어, 생명이.. 주인공들이 다 인형들이야”
여진의 말을 듣고는 있는건지 건성건성 고개만 끄덕거리며 식어빠진 꼼장어만 젓가락으로 휙휙 젖고 있는 이정후를 여진이 팩 노려보았다.
“내말 듣고 있는 건가요? 이정후씨.”
“네네! 듣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결론은 그 남자가 나쁜 놈이 라는 거지.”
“어? 맞아! 맞아요. 이정후씨 말이 정답!!! 나, 이제 내가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라고.. 백진우가 싫어했던 거 다 할라고.. 나 이제부터 여기 맨날 올 거야. 백진우가 싫어 했던거, 그래서 못했던 거 맘껏 하고 살 거야. 에이씨. 나쁜놈.”
“그 남자 참, 여자 인생 하나 버려놨네.”
혀를 차며 정후가 중얼거렸다. 알코올이 온몸에 분해 되어 뼈 없는 연체 동물마냥 추욱 늘어진 손으로 소주를 딸 던 여진이 힘 조절을 못해 소주잔엔 술이 넘쳐났고, 정후가 재빨리 소주병을 빼앗았다.
“돈 남아도나? 어째 먹는거 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
“남자가 왜 이리 쪼잔해?”
“쪼잔한 게 아니라, 흘리는 술이 아까워서 그러네요.”
가르치려고 드는 정후 때문에 심통이 잔뜩 난 여진이 두 볼을 실룩대며 가득 채워진 소주를 단번에 마시곤 입술을 닦아냈다. 소주의 쓴맛에 저절로 눈썹이 접히고 코끝이 시리다. 그리고 마음도, 시리다.
“왜 사람들은 이별을 하면 술을 마실까...이정후씨, 궁금하지 않아요?”
“그다지..”
“난 아는데...머리부터 발끝까지 술에 지배당하면 용감해지잖아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이거지 뭐, 귀신이 나타나도 술에 지배당하면 귀신이랑 맞짱 뜬다고 할걸요?”
“거참 말만한 여자 입에서 맞짱이 뭡니까? 맞짱이.”
정후가 토를 달았지만, 여진은 심각했다. 잔뜩 분위기를 잡은 여진이 비어있는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린다. 비어진 술잔처럼 지금 여진의 마음도 텅 비어있는 듯 공허하다. 촉촉해진 눈동자를 바닥으로 떨구며 여진이 읊조린다.
“술마시고 난 다음날엔 늘 후회를 하더라구요. 내가 전날 무슨 실수를 저지른건 아닌가하고…. 아무생각이 안 나서 답답해서 미칠지경이예요, 필름이 끊겼으니까. 머리도 아프고, 속은 울렁거리고, 기억은 안나서 답답하고, 쪽팔리고…. 그리고 다짐하죠. 다시는 술 안마시겠다고….”
男女戀愛白書 [남여연애백서] -05
“진우.....야..”
커피숍으로 들이닥쳐서 불 여시의 머리털을 죄다 뽑아놓으려고 한 게 언제인데, 두 사람 눈에 피눈물 나는 꼴을 보겠다고 이를 갈던 게 언젠데. 막상 당사자가 제 발로 눈앞에 나타나자 여진은 계획을 실천할 수 없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꼭 죄짓다 걸린 사람 같다. 분명 죄지은 건 서여진이 아닌 백진우 인데 왜 여진이 심장이 떨리는 것이고, 왜 뒷걸음을 치는 것일까 의아했다.
“오..랜만이지?”
어느새 여진에게 다가온 진우가 손을 내민다. 악수하자는 뜻이다. 허나 여진은 그의 손을 잡지 못했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을 내어줄 수는 없다. 멋쩍은 진우는 미소로 무마하곤 손을 거두었다.
“봤어. 문 앞에 서 있는 너.”
“....”
“너도 봤구나. 그래서 피한거니?”
‘아니. 난 그 커피숍 뒤엎어버리려고 들어 간 거였어. 백여시 머리털 다 뽑아버리고, 바람난 너, 사람들 앞에서 창피주려고 들어간 거였어. 내가 가만 보고만 있을 줄 알았니? 불여시랑 놀아나는 너, 모르는 척 할 줄 알았니?’
여진은 그리 고함 치고 싶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꿀 먹은 벙어리 마냥 입도 뻥긋 못했다.
불편하다. 어색하다. 백진우와 지금은 헤어졌지만 예전엔 사랑했던 사이인데, 둘이 있을땐 할말이 너무 많아서 시간 가는지도 몰랐는데 왜 지금은 이리도 어색한 것인지, 왜 이리도 불편한 것인지, 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헤어짐이란 이런 것 일까? 내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던 반쪽이 이젠 불편하고 어색한 타인이 되어버리자 여진은 이 자리를 도망치고 싶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또한, 여진 만큼이나 진우에게도 불편하기 그지없는 자리였다. 허나, 여진을 모르는 척은 할 수 없었다. 그건 예의가 아니다. 최소한 잘 있느냐 라는 말은 물어봐주고, 잘 있으라는 말로 불편한 만남을 끝내야 했다. 진우는 그랬다. 우연히 고개를 돌렸을 때 커피숍 문 앞에서 웬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여진을 보는 순간, 마음 놓고 연인과 차를 마실 수는 없었다. 분명 여진도 자신을 봤으리라. 그래서 자리를 피한 거라 생각되자 여진에게 죄를 짓는 거 같았다. 그래서 잠시 화장실을 핑계로 여진을 찾았다. 의도한 만남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날 못나가서 미안하다고, 핑계가 아니라 출장을 갔는데 핸드폰을 사무실에 두고 와서 다음날 확인했다고, 확인하고 바로 연락하려고 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못했다고, 그냥 네 기억 속에 난 못된 놈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고, 너에겐 끝까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었다.
다행이 여진을 찾았지만, 원망이 가득 담긴 눈을 보자 진우는 그 어떠한 말로도 여진의 닫힌 마음을 풀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도 여진에겐 그 역시 상처 되는 말이었다. 진우는 차라리 끝까지 모르는 척 할걸 잠시 후회도 해보았다.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 분위기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어렵사리 건넨 손도 거절한 여진에게 무슨말을 어떻게 해줘야할까….
10초가 1분같은 시간이 지나고 나자 진우가 입가에 미소를 담고 입을 열었다.
“좋아 보인다...”
진우의 말에 여진은 현기증이 날것만 같았다.
‘좋아보인다고? 백진우, 네 눈엔 내가 좋아 보이니? 두 눈 크게 뜨고 다시봐. 이 모습이 좋아보인다고? 질투에 눈멀고 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무쳐서 네 앞에서 웃지도, 그렇다고 울수도 없는 내가 좋아보인다고? 백진우 너, 불여시한테 홀리더니 이젠 그 눈까지 홀렸구나.’
진우가 무슨 말을 하려나, 행여 그날의 일을 사과한다면 여진은 어떤 말로 받아 쳐줘야하는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좋아보인다니... 최소한 사과는 해야하는거 아닌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쯤은 해줘야하는 게 예의 아닌가. 양심에 털 난 인간이 아니고서야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쉽게 나올 수 있는지 여진은 내심 진우가 원망스럽다. 그리고, 양심에 털 난 백진우는 또 한번 여진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말을 한다.
“애..인?”
진우는 보디가드 마냥 여진의 옆에 서 있는 정후를 곁눈질로 보곤 여진의 남자친구라 결론을 내린 모양이다.
밉다. 백진우가 너무 밉다. 애인이라니.. 얼토당토 않는 말을 너무도 쉽게 내뱉는 백진우가 너무도 야속해서 여진은 그와 얼굴을 마주대기 싫어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흐른다. 진우도 여진도 할말이 없었다. 또한, 옆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로 여진의 새 애인이 되어버린 정후는 불쾌한 표정으로 못마땅해 했다.
어색한 분위기속에 진우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저기 여진아..”
“더 이상 할말 없으면 가 볼께. 기다리겠다. 너도 들어 가봐.”
변명하지 않았다. 이정후와 난 애인사이가 아니라고 사실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오해를 하고 있는 게 잘됐다 싶기도 하다.
이정후의 말처럼 “너 아니어도 난 잘 살고 있다. 너만 새 애인 생긴지 아니? 나도 새 애인 생겼다, 너만 행복한지 알았니? 나도 행복하다. 너만 바라보며 지지리 궁상 떨고 있을지 알았니? 아니, 착각하지마라. 난 너 깨끗이 잊었다. 네 생각 하지도 않는다.” 그리 보여주고 싶었다. 아무 이유없이 서여진의 애인이 되어버린 죄없는 이정후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지금은 이정후보다 서여진이 더 중요했다. 백진우 눈에 비추는 서여진의 모습이 더 우선이었다. 어쩌면 깨끗이 잊어주는 게 복수다 라고 말했던 이정후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그 복수가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왕 백 진우가 오해하는 이상 여진은 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이미, 불여시와 백진우 사이를 깽판 칠 시기은 지났다. 지금 와서 깽판 쳐 봤자 서여진만 우스운 꼴이 된다. 또한, 깽판칠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질 거린다. 또 도진 모양이다. 이 지긋지긋한 이별 증후군-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
“가요. 이정후씨.”
여진은 정후의 팔을 끌어당겼고, 어정쩡하게 여진에게 이끌려가는 정후는 ‘당신 미쳤어? 내가 왜 당신의 애인이냐’고 따지듯 눈으로 말했지만, 여진은 끝까지 정후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백진우가 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마치 다정한 연인 관계 인양 연출되었다.
그리고 막 상가 출구로 나가려 할 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긴 생머리를 가진 불여시가 상가로 들어오고 있는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진우씨...”
인형 같은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진우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오는 불여시.
진우의 웃옷까지 가지고 나온걸 보니 진우를 기다리다 지쳐 커피숍을 나온 모양이다. 가는 팔에 걸쳐있는 진우의 웃옷을 보자 여진은 또다시 질투가 샘솟아 올랐다.
지금이라도 불여시의 머리를 죄다 뽑아 놓을까? 불여시의 하얀 얼굴에 오선지를 그려 넣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좁은 출입문 앞에서 마주친 서여진과 불여시는 서로 자리를 피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불꽃 튀는 눈싸움-
여진은 불여시에게 지지 않기 위해 눈에 살기가 띌 정도로 노려보았지만, 백진우의 옛 연인이 서여진이라는 걸 모르는 불여시는 여진이 길을 비켜주지 않는 통에 오도 가도 못한 채 저편에 서 있는 진우만을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진우를 보고 있던 불여시의 검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커지더니 서여진을 쳐다본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여진의 옆에 서 있는 이정후를 쳐다본다.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간다. 커다란 눈이 2배는 더 커진다. 그리고 앵두같이 작고 예쁜 입술이 달싹거린다.
“저..정...”
우물거리는 작은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소리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모든 일이 딱 3초 만에 일어난 일이다. 그 3초 후, 정후가 여진을 이끌고 출입문을 나왔으니 그 이후의 상황은 알 수가 없다.
여진과 정후가 바람처럼 사라져버린 후, 진우는 출입문 앞에서 넋 나간 사람마냥 서 있는 정인에게 다가왔다.
“정인아...”
창백해진 정인의 얼굴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진우는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분명 눈치 챘으리라, 진우는 그리 여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곤 예상치도 못했었는데, 진우는 그녀에게 이런 난처한 상황을 안겨주어 미안했다.
“왜 나왔어.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가봐야 할 거 같아서.. 방금 꽃집에서 전화가 왔거든. 주문이 들어왔다고...”
“아, 그래..”
“기다려도 안 오길래 가지고 왔어.”
정인은 웃옷을 진우에게 건네주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그녀의 음성이 떨린다. 진우는 가냘픈 정인의 어깨를 잡아 그의 품에 안기게 했다. 진우의 품에 파묻힌 정인의 검은 머리카락을 만져주며 속삭였다.
“미안해. 정인아..”
“뭐가? 진우씨가 뭐가 미안해..”
“그냥, 다 미안해..”
어쩌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해야 할 사람은 진우가 아니라 최정인 자신일지도 모르기에 정인은 그저 먹먹해져가는 정신을 진우에게 기대었다.
*******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대는 여진은 정후를 향해 눈을 부라린다.
“댁이 그때 끌고 나오지만 않았어도 그 불여시 머리털을 반쯤 뽑아 놓았을 거 에요.”
“그만해요. 이제.”
“그만하라구요? 당신 때문에 내 계획이 말짱 황이 됐는데 그만 하라구요?”
“보니까 그 남자 당신한테 더 이상 미련 없어 보이니까 혼자 쌩쑈 하지 말고 이제 그만해요.”
‘더 이상 미련이 없다. 쌩쇼 하지 말고 그만해라?’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여진에게 쏴 붙이는 정후의 말이 윙윙거리며 귓속에 맴돈다.
‘쌩쇼 하지 마라. 백진우는 서 여진에게 미련 없다.’빌어먹게도 그렇다. 여진의 눈에도 그리 비추었다. 백진우는 더 이상 서여진에게 미련이 없어보였다. 새 애인 만나서 잘살고 있기 때문에 옛 애인과의 추억을 떠올릴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정후의 팔에 매달려 이 남자가 내 애인이라고 보여줘도 진우는 어떠한 동요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이는데, 당사자인 여진이 모를 리는 없었다. 그저 부정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서 백진우는 당신에게 미련이 없다는 그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땅으로 푸욱 꺼지는 거 같기도 하고, 번화가를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만 외톨이 같아 보였다. 아무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없는 거 같았다. 하물며,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정후 역시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모두들 옛 남자에게 아직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는 자신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거 같고, 만약이라도 불 여시의 머리털을 뽑아 놓았더라면 사람들은 자신에게만 돌을 던질 거 같았다.
피해자는 나 서여진인데, 불쌍한 사람은 나 서여진인데, 왜 내가 나쁜 사람이 된것인지...
여진은 몸을 돌려 맥 빠진 걸음으로 돌아섰다.
“여진씨.”
정후가 그녀를 쫓아와 옷소매를 잡았다. 그리고 정후의 힘이 그녀의 발을 멈추게 했다. 아마도 정후의 말이 여진은 많이도 서러웠던 모양이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볼을타고, 턱끝에 매달리고, 결국엔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자를 울린 죄로 난처해진 정후가 이마를 쓸어 올리며 사과는 해야 하는데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
“그래도... 내편... 들어줄지 알았어요. 막상 하라고 하면 못할 거 아는데.. 그래도... 그 백여시 머리털 뽑아놓으라고.. 말해줄지 알았어요. 난...”
“.....마음 상했어요?”
“그래요. 마음 상했어요. 재미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말 알죠? 이정후씨 말실수 했어요. 나, 이정후씨가 던진 말에 마음 많이 상했어요.”
“미, 미안해요.”
“아뇨. 틀린 말 아니에요. 이정후씨 말이 맞아요. 나 혼자 쌩쇼 했어요, 오늘.”
속이 울렁거린다. 먹은 것도 없는데 자꾸 구역질이 나온다. 버스를 오래타서 어지러운 것처럼 어질어질하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던 이별증후군이 불쑥 튀어나와서 또 여진을 괴롭힌다. 아무래도 약국 먼저 찾아야할 거 같다. 눈물을 닦고 주변을 둘러보자 저만치 뿌옇게 약국 간판이 보인다.
여진은 약국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뒤를 정후가 따라온다. 이 여자, 수면제 먹고 또 자살시도 하는거 아닌가. 정후는 겁부터 덜컥 났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죽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는 약국을 찾는 여진이 불안해 보인다.
“약국엔 왜 가요?”
“멀미약사러...”
“멀미약?”
“두통약을 먹어도 낫지 않고, 수면제를 먹어도 낫지 않아요. 이번엔 멀미약을 먹어보려구요. 멀미약도 낫지 않으면 그땐 술이라도 마셔야겠어요.”
“사람 참 궁상스럽네, 정말.”
다행이 자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자 정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허나, 멀미약을 먹겠다는 여진의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픈 이유는 뭘까. 두통약에 수면제, 거기다 이젠 멀미약까지 먹어본단다. 그것도 약발이 안받으면 술이라도 마시겠단다.
약국에서 산 멀미약을 먹고 있는 여진을 보며 정후는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지켜봤다.
이별 후에 많이 힘들었었구나, 이 여자.
백진우라는 남자를 정말로 사랑했었구나, 이 여자.
그놈의 사랑이라는 게 뭔지, 이별이라는 게 뭔지 그 두 가지가 사람을 이리도 바보같이 만들어 놓는 것 일까? 정후는 손에 쥐고 있던 한병 남은 멀미약을 무심히 쳐다보곤 뚜껑을 열었다. 한 병으로는 안될 거 같다면 두병을 구입한 여진에게서 약발 받기도전에 죽고 싶냐며 뺏은 멀미약이다.
여진 만큼이나, 지금 정후 역시 머리가 복잡하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생각치도 못한 만남-
당신보다 날 더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가겠다고 이별을 고하던 여자.
이별을 고하면서도 당신이 잡아주면 가지 않겠다고 하던 여자.
그럼에도 붙잡아주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며 떠나간 여자.
그 여자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정후는, 멀미약을 입에 털어 넣고는 입술을 닦아냈다. 멀미약이 쓴 건지 아님, 마음이 쓴건지, 그의 입술에서 쓰디쓴 미소가 번진다.
‘한달만이구나, 최정인.’
6장.
-사랑, 너무도 흔한 말. 하지만 하기 힘든 말!
“이정후씨, 술... 마실래요?”
백화점 광장에 자리 깔고 앉아 있던 여진이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정후에게 넌지시 묻는다. 거절해도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그냥 옆에 있길래 예의상 물어 봐준 거였으니까.
이 기분으론 도저히 집에 갈수 없었다. 분명 집으로 가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온갖 청승을 다 떨고 있을게 불보 듯 뻔하다. 술이 마시고 싶었고, 술을 마시기위해선 술친구가 필요했다. 멀미약으로도 이 어지러움증은 가시지 않았다. 역시 이별증후군의 극약처방은 술뿐이다. 다행인건지 아님 불행인건지 이 남자, 신경쓰지 말고 너 갈길 가라고 하는데도 1시간째 여진의 옆에 앉아 아까 편의점에서 산 새우깡을 하는 일 없이 먹고만 있다. 동정하는 건가? 그렇게도 내가 불쌍해보였나? 하긴 이정후 눈에 서여진은 지지리도 못난 여자로 보일 테지. 이왕 못난여자로 찍힌거 술친구라도 삼아서 서여진이 어디까지 못난 여자가 되어서 망가지는지 못되 먹은 오기까지 발동되었다. 지금 서여진의 심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쉽게도 이정후 뿐이었으니까. 뭐, 도움이 될지는 장담 못하지만.
“낮술은 애미 애비도 못 알아본다는데 낮술 먹고 또 뭔 짓을 저지르려고 그러시나.”
역시나 도움이 안 되는 이정후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하긴 지금 시간은 5시 30분. 해떨어지려면 아직 멀었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 알콜이 온몸에 분해 되지 않으면 버틸 자신이 없는 여진은 개똥도 약에 쓸려면 없다는 심정으로 이정후를 흘겨보며 먼지 묻은 엉덩이를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서여진씨가 사는 거면 고려해보고.”
여전히 심드렁하게 뒷목을 긁으며 정후가 염치없게 말하자 여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더치패이-”
“먹고 싶은 사람이 내는 거 아닌가?"
"내가 먹은 건 내가 내고, 댁이 먹은 건 댁이 내고.."
"보답은 해야지."
"무슨 보답?"
"연기자해도 되겠던데? 눈하나 깜짝 안하고 내 팔짱 끼는 거 보니까. 애인이라니!! 애인이라니!!! 나 참~ 내가 눈이 그렇게 낮은지 아나."
"뭐라고요?"
"확 불어버리려다 말았네. 그러니까 술사란 말이에요. 애인행세 해줬으니까."
"웃겨. 누가 해달랬나? 그리고 내가 이정후씨 한테 술을 사주는 이 차라리 혼자 마시고 말랍니다."
"이러면 곤란한데. 내가 서여진씨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애인행세 하느랴 오해까지 샀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가서 불어요. 그럼 되겠네."
"진짜?"
"진짜."
"진짜로?"
"진짜로.."
“좋아요. 진짜 갑니다.”
“네~ 가세요. 누가 겁난데?”
"쯔쯧, 하여간 저 똥고집.”
다먹어치운 새우깡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골인시킨 정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각자 냅시다. 술값”
조금씩 저물어가는 해….
온세상이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저녁 노을 속에서 이정후가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동시에, 이정후에게 향해있던 여진의 뾰족한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지는듯 싶었다. 뭐, 어쨌든 혼자 처량맞게 소주잔을 채우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으니까.
******
“아주머니 여기 꼼장어랑 소주 한병이요. 참 오이 좀 듬뿍 좀 썰어줘요.”
포장마차에 들어서자마자 여진은 으레 단골인 마냥 한참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주머니를 향해 말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단골이나 봐?”
앉기도 불편한 의자에 걸터앉으며 이정후가 물었다.
단골집... 맞다. 허름한 포장마차 이름이 “순이네 “, 그 건너편 포장마차는 순이의 짝 “철수네”다. 철수네는 순이네의 체인점이란다. 우습게도 부부가 하는 포장마차였다. 순이네 장사가 잘되어서 남편이 철수네를 오픈한 것이다. 그게 벌써 5년전이다.
여진은 포장마차가 좋았다. 지저분하지만 인심이 좋았고, 음악은 없지만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았다. 화장실은 멀어 불편했지만 적당히 취기가 올라 화장실 찾으러 나갈때 밤하늘에 떠있는 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순이네를 찾는 이유는 아주머니가 굽는 이 꼼장어 맛이 일품이라는 것이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그맛! 매콥쌉쌀한 꼼장어 한입에 소주한잔이면 인생의 희노애락이 느껴진다.
“예전엔 단골이었죠. 그런데 안온 지 오래됐어요.”
반듯하게 썰린 오이를 고추장에 찍어먹고 있던 여진이 씁쓸하게 미소를 담았다.
“한참 글에 미쳐있었을 때요, 그때 많이 왔어요. 소주 한병에 꼼장어 한 마리시켜 놓고, 여기에 손님들이 꽉 찰 때 까지 기다렸어요.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들려요. 사람들이 사는 이야기가... 눈을 감고 있어도 보여요. 그들의 인생사가... 예전에 저 앞에 건물을 하나 새로 지었거든요. 여름철이라 장사가 한창 잘됐을 때죠. 밤이면 인부들이 많이들 왔어요. 지쳐 보이기도 하고, 지저분해보이기도하고, 상스러운 욕도 서슴치 않고 하더라고요. 싫었죠. 사람들도 자리를 피하고... 덥수룩한 머리에, 땀 냄새는 어찌나 심하던지, 멀찌감치 앉아 있는데도 땀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 거예요. 그런데요, 그 사람들 참 부지런하데요. 어떻게 보면 그분들이야말로 우리들의 진정한 아버지들이에요. 벽돌 한장 나르면 유치원 다니는 작은 아들 크레파스 사주고, 철근하나 들어올리면 큰아들 대학 등록듬 내고, 시멘트 칠하고 모레 퍼 담으면 마누라한테 생활비주고. 그래서 힘이 난데요. 벽돌이 종이보다 가볍고, 철근이 돌맹이 보다 가볍데요. 감동적이지 않아요? 그래서 좋아요. 사람냄새가 나거든요. 이곳은....”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꼼장어가 테이블 위에 올라왔고, 여진은 군침을 삼키며 나무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꼼장어를 한입에 넣고 입가심으로 소주도 비워냈다. 알싸하게 퍼지는 소주의 맛이 뱃속을 뜨겁게 달구었다.
“캬~ 조오타~”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내려오는 알코올로 인해 몸을 움추린 여진이 소주잔을 테이블위에 탁 내려놓았다.
“많이 고팠나보네. 술”
“많이 고팠죠.”
“잘 마시나봐.”
“필받 으면 소주 3병정도?”
“여자가 술 많이 마시는 거 보기 안 좋은데..”
“걱정 마요. 사람 가려가면서 마시니까.”
“듣고 보니 기분 안 좋네. 사람 가려가면서 먹는다니.”
가득 채워진 소주에 입만 대었다 땐 정후가 금새 또 소주한잔을 먹어치운 여진을 향해 기분 나쁘다는 눈빛을 보내자 그 눈빛을 모른는 척 하는 여진이 코웃음을 쳤다.
“이미 나 추한 꼴 다 본 사람 앞에서 뭐 내숭떤다고.”
“설마 오늘도 죽네 사네 하는 건 아니겠지?”
“걱정 말라니까요. 나 지금 기분 좋으니까. 아~오랜만에 오니까 정말 좋다. 여기..”
포장마차의 주황색 천막을 걷어내고 하나둘씩 들어오는 손님들 속에서 여진은 콧노래마저 흥얼거리며 꼼장어 굽는 냄새 가득한 포장마차를 둘러보며 조금씩 취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난 후, 기분 좋다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던 여진은 돌변하고 말았다. 술 이라는게 그렇다. 처음엔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지만, 끝마무리는 항상 안 좋게 만든다. 더구나, 실연 후 마시는 술은 더 그러하다. 그래서 이별 후 마시는 술은 극약처방이 아니라 독약이다.
“끄윽. 이정후씨, 내가 말이에요. 내가, 나 서여진이 왜 여기를 안 왔는지 알아요?”
“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그놈이, 그 나쁜 놈이 그 빌어먹을 새끼가 꼴에 나 걱정해준다고 여기 그만 오라는 거예요.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는 거 보기 싫다고. 나는 작가거든요? 작가가 뭐냐~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쓰는 게 작가거든요. 여기 오면 다 나와. 여기서 2시간만 투자하면 마음이 부자가돼. 드라마 투성이야 여기는... 소재거리 투성이라고요. 여기가.. 그런데 백진우가 싫다네. 일도 중요하지만 늦게까지 위험한곳에 있는 게 싫다네.. 굳이 여기가 아니어도 아이디어 구상하는 곳 많다고 내가 못 찾으면 자기가 찾아주겠다고 가지 말라네. 나요, 그래서 여기 끊었어요. 여기, 백진우 때문에 안 왔어요. 그런데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거야. 아무리 백진우가 좋은 곳을 많이 데리고 갔어도 여기 안 오니까 글이 안 써져. 시나리오에 생명이 없어, 생명이.. 주인공들이 다 인형들이야”
여진의 말을 듣고는 있는건지 건성건성 고개만 끄덕거리며 식어빠진 꼼장어만 젓가락으로 휙휙 젖고 있는 이정후를 여진이 팩 노려보았다.
“내말 듣고 있는 건가요? 이정후씨.”
“네네! 듣고 있습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러니까 결론은 그 남자가 나쁜 놈이 라는 거지.”
“어? 맞아! 맞아요. 이정후씨 말이 정답!!! 나, 이제 내가 하고 싶은거 다 하고 살라고.. 백진우가 싫어했던 거 다 할라고.. 나 이제부터 여기 맨날 올 거야. 백진우가 싫어 했던거, 그래서 못했던 거 맘껏 하고 살 거야. 에이씨. 나쁜놈.”
“그 남자 참, 여자 인생 하나 버려놨네.”
혀를 차며 정후가 중얼거렸다. 알코올이 온몸에 분해 되어 뼈 없는 연체 동물마냥 추욱 늘어진 손으로 소주를 딸 던 여진이 힘 조절을 못해 소주잔엔 술이 넘쳐났고, 정후가 재빨리 소주병을 빼앗았다.
“돈 남아도나? 어째 먹는거 보다 흘리는 게 더 많아?”
“남자가 왜 이리 쪼잔해?”
“쪼잔한 게 아니라, 흘리는 술이 아까워서 그러네요.”
가르치려고 드는 정후 때문에 심통이 잔뜩 난 여진이 두 볼을 실룩대며 가득 채워진 소주를 단번에 마시곤 입술을 닦아냈다. 소주의 쓴맛에 저절로 눈썹이 접히고 코끝이 시리다. 그리고 마음도, 시리다.
“왜 사람들은 이별을 하면 술을 마실까...이정후씨, 궁금하지 않아요?”
“그다지..”
“난 아는데...머리부터 발끝까지 술에 지배당하면 용감해지잖아요.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이거지 뭐, 귀신이 나타나도 술에 지배당하면 귀신이랑 맞짱 뜬다고 할걸요?”
“거참 말만한 여자 입에서 맞짱이 뭡니까? 맞짱이.”
정후가 토를 달았지만, 여진은 심각했다. 잔뜩 분위기를 잡은 여진이 비어있는 소주잔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린다. 비어진 술잔처럼 지금 여진의 마음도 텅 비어있는 듯 공허하다. 촉촉해진 눈동자를 바닥으로 떨구며 여진이 읊조린다.
“술마시고 난 다음날엔 늘 후회를 하더라구요. 내가 전날 무슨 실수를 저지른건 아닌가하고…. 아무생각이 안 나서 답답해서 미칠지경이예요, 필름이 끊겼으니까. 머리도 아프고, 속은 울렁거리고, 기억은 안나서 답답하고, 쪽팔리고…. 그리고 다짐하죠. 다시는 술 안마시겠다고….”
“그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나서 문제지..”
“나 말 아직 안 끝났거든요? 왜 자꾸 끼어들어요? 사람 말하는데!””
“인생 한풀이 그만 좀 해요. 진짜 재미없네. 이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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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끊어야 할지 몰라, 말도 안되는 부분에서 끊어버렸네요.ㅠ_ㅠ
죄송합니다.(__*)
꼬리말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완전 용기 얻어서 더욱더 열씨미 쓸라구요..^^
꼬리말에 목말라 있는저에게 힘을 실어주세요..으흑.
즐거운 하루 잘 마무리 하시구요.
재미없는글이더라도 끝까지 저와함께 해주세요.
오케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