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을 데리고 온 곳은 그들이 자주 왔던,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이별을 했던 ‘비발디’라는 커피숍이었다. 정후를 만나기 위해 늘 정인이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으며, 정후의 사랑이 야속해서 혼자 많이 울기도 했던 곳이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을 때 늘 상 하던 버릇처럼 정인은 비엔나커피를 시켰고, 정후는 아이스티를 시켰다. 변한 건 없다. 그들이 자주 왔던 커피숍도 그랬고, 그들이 즐겨먹었던 음료도 같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의 엇갈린 마음과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남자의 눈빛뿐이다.
그런 남자의 눈빛을 알면서도 정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후씨.. 잘 지내?”
“...응.”
“나는.. 잘 못 지내는데.”
정인이 눈을 내리 깔며 비엔나커피 위에 올려진 하얀색 생크림을 보며 말했다.
“그 남자…알았니?”
“아니. 그 사람 몰라.”
“.....잘해줘?”
“응.. 잘해줘.”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슬퍼지고, 그녀의 입가에 퍼져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일자로 굳어버린 입술이 어렵사리 움직인다.
“찾아오면, 안되는 거 아는데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차갑게 식어가는 비엔나커피와, 얼음이 녹아 사라진 아이스티. 벌써 테이프 한 면이 다 돌아가 그들이 처음 비발디로 들어왔을 때 들리던 “임재범의 너를 위해”노래가 그들의 침묵의 시간을 알려준다.
정후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고 있었다. 1달 전, 사랑에 지친 정인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는 남자에게 간다며 정후에게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짐을 말한 정인은 정후를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했던 남자였는데...
여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까지 그에게 보여줬음에도, 정인은 정후를 떠나보낼 수 없어 잡아두었다.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낱낱이 알고 있는 정후가 가끔은 두려웠지만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정후를 보면서도, 조금씩 멀어져가는 정후를 보면서도 정인은 그를 향한 마음을 접지 못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고 하는데, 그들의 사랑은 정인이 늘 약자였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사랑했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멀어져가는 정후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정인은 더 이상의 사랑에 상처 받기 싫어 그를 떠나려 했다. 운 좋게도 정후와 헤어져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무렵, 고교시절 첫사랑이었던 백진우와 우연히 재회했고, 그의 품안에서 정후를 조금씩 밀어내가고 있었다. 만일하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정후가 남겨뒀다면 그녀는 정후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이별통보를 정후는 순순히 받아드렸다. 잡아주었더라면, 조금의 희망고문이라도 남겨뒀다면 정인은 떠나지 않았을 텐데 희망고문 조차 정후는 보여주지 않았다.
정인은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정후가 야속했다. 일방적인 사랑이라 할지라도, 억지로 그를 곁에 두려는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3년을 만났다. 3년간의 정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매정한 정후의 이별이 정인에게는 잔인하기만 하다.
매정한 정후와의 이별 후에도 그녀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정인의 옆자리엔 정후보다 그녀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인은 그것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백진우와 함께 있어 ‘편하고 좋다는 것’과 정후의 옆에 있어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백진우를 ‘좋아 한다’는 것과 이정후를 ‘사랑한다.’는 것. 그 감정은 분명 틀렸다.
어쩜, 저리도 매정하게 말할까. 정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정후 역시 차갑고 매정한 말로 정인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주는 자신이 괴로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칠지 알았어. 그래서 항상 대비하고 있었어. 정인아, 우린.. 이미 끝났어.”
“이런 일이 닥칠지 알았다니? 대비하고 있었다니? 정후씨 그게 무슨 말이야?”
떨리는 정인의 음성이 1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말하는 건 아닌 가 불안함에 떨리고 있다.
“다시 반복하기 싫다.”
역시나, 정후는 그때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런 거야? 아니라고 했잖아. 그 일은 정후씨 잘못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내가 괜찮다는데 그만 잊어주면 안돼?”
“잊을 수가 없어. 너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생각 날거야. 너도 그럴 테고…. 그럼 또다시 반복되겠지. 넌 또 힘들어 할 테고. 난 그런 널 보면서 괴로워 할 테고. 이제 자신 없어..”
“안 힘들어하면 되잖아. 안 괴로워하면 되잖아. 정후씨 만 힘든 거 아니잖아. 그래, 나도 그랬어. 여자한테는 치욕적인 일이라 할 수만 있다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서 그때 일 지우고 싶어. 어쩔 땐 사람들이 날 알아볼까 무서워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도 가고도 싶었어. 죽고 싶었을 때도 있었고, 정후씨가 미웠던 적도 있었어. 그때 날 그곳에 내버려두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정인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룰 수 없었다. 넘쳐흐르는 눈물로 인해 정후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정인은 볼에 얼룩진 눈물을 훔쳐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정후씨 마음 알거 같아. 날 위해서 그러는 거.. 그 일 아는 사람 정후씨 뿐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한테 가서 새 출발하라고.. 어두웠던 옛 기억 다 묻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래서 정후씨가 나 잡지 않은 거 알겠어. 그런데, 싫어. 내가 싫어졌어.”
닦아도 닦아내도 하얗고 고운 얼굴엔 투명한 눈물이 계속 번져 흘러내린다. 정인은 눈물을 삼키며 독하게 말했다.
“나. 그 남자한테 말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그 사람한테 간다고.”
“정인아.”
“나만 생각할거야. 내 사랑만 생각할거야.”
“네 욕심일 뿐이야. 그 사람과 헤어지면 넌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거야. 모르겠니?”
“괜찮아. 난 정후씨만 있으면 되니까. 상처를 받든, 주던 상관없어, 이제. 정후씨만 있으면 되니까.”
“정인아. 그러지마. 너의 그 이기적인 판단이..... 아니다. 관두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탓하자면 그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이기적인 마음. 남을 상처 입히면서도, 또는 자신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르고 마는 사람의 마음.
정후는 문득 처음 여진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겁 없이 한강대교 난간에 매달려 있던 서 여진. 그때 그 여자의 마음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까? 또한, 한 여자의 사랑을 매정하게 짓밟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간 그 백진우라는 남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같은 여자에게 상처를 줘서 빼앗은 남자에게서 다시 벗어나려는 정인이와, 그런 그녀의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주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또 어떨까.
“널 많이 좋아했어, 정인아. 아니 사랑했어. 하지만 이제 아니야. 넌 그 남자와 있을 때가 행복해보여. 더 이상 여러 사람에게 상처 주지 말고, 지금 네 자리 지켜.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그.. 여자 때문이야? 정후씨 옆에 있던 그 여자?”
“.....”
“사랑하는 거야? 그 여자?”
“.....”
“난 죽어도 얻지 못한 정후씨 마음.. 그 여자는 한 달 만에 얻어 낸 거야? 그런 거야?”
“.....”
“못됐다.. 정후씨.”
정후가 끝까지 대답이 없자 정인은 넘쳐흐르는 눈물을 틀어막으며 비발디를 나갔고, 정인이가 간 후에도 정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또다시 테이프의 한 면이 돌아갔다.
[내 거친 사랑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 줄 거야. 너를 위해 떠날 거야.]
임재범의 노래 가사가 정후의 귀에 자꾸만 맴돈다.
********
왜 그 불여시가 이정후를 만나러 온 거지? 왜? 왜?
이유가 궁금해서 도통 참을 수가 없어 여진은 몇 번이나 이정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정후의 핸드폰은 먹통이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듯 당황하던 이정후.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 멀어져가는 그 불여시.
지금쯤이면 백진우의 옆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어야할 그녀가 왜 이정후를 찾아왔을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생각뿐이었고, 저녁밥을 먹을 때도,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까지도 여진은 오로지 그 생각으로 머리속이 꽉차있었다. 결국 여진은 긴 밤을 꼴딱 지새워야만 했다.
다음날에도 여진은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는지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핸드폰만 쳐다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냥, 백진우에게 가서 네 애인과 다른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고 고자질하기엔 여진이 느끼기에도 참으로 유치하고 비참해 보이는 방법이다. 우선, 정후의 연락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일이 흘러갔다.
삼일동안 궁금증에 머리를 싸매고 있던 여진은 뭐라도 해야 싶은 마음에 세븐라이너로 종아리를 빡빡 문지르며 ‘인생은 아름다워’ 의 대본을 읽으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주옥같은 대사들이...”
대본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드라마의 한 씬 이 떠오른다. 대본 속으로 빠져갈수록 이정후와, 백여시의 생각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렇게 감정에 빠져 있던 여진이 다음 회 대본을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8회분은 정후에게 받지 못했던 대본이다. 역시 흐름이 깨지면 김이 센다. 여진은 신경질이 났고, 신경질이 나자 다시 또 이정후와 백여시의 생각으로 괴로웠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는 여진의 핸드폰의 울린 건 그때였다. 핸드폰 액정엔 “이정후”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삼일 만에 온 전화다.
“헬로~!”
“왜 이제 전화해요? 아니, 왜 내 전화 안받았어요?”
“무슨 전화를 이리도 많이 하셨데? 내 목소리가 그렇게나 듣고 싶었나?”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 만나요.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 데이트 신청?”
“미쳤어요?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요.”
“내가 좀 바쁜데...”
“이정후씨 있는 쪽으로 내가 갈게요.”
******
“말해봐요. 그여자, 불 여시 맞죠?”
얼마나 뛰어왔으면 오자마자 냉수를 먼저 들이키며, 여진은 정후가 무슨 말을 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평일 오후시간이라 손님이 없는 썰렁한 커피숍에는 주인이 틀어놓은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만이 낮게 깔려있었다.
“자요, 8편이랑, 18편.”
여진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후가 “인생은 아름다워” 8회와 18회 대본을 던져준다. 허나, 지금 여진에겐 이 대본이 중요하지 않았다. 정후의 저 입에서 튀어나올 폭탄발언이 궁금할 뿐이다. 청심원이라도 먹고 올 걸 후회도 했다. 떨리는 가슴이 터지기 일부직전이다. 과연 무슨 폭탄발언을 할까..
감미로웠던 피아노 선율이 절정에 다다르자 빨라지기 시작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여진의 지금 심정을 말하는 거 같다. 입에 침이 마르고, 손발이 저린다.
“빨리 말해 봐요, 이정후씨.”
“그 대본 찾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나, 이정후씨랑 농담 따먹기 하려고 여기 나온 거 아니에요. 미치게 궁금한 게 있어서 온거라구요. 이정후씨가 왜 그 불여시를 만난 거예요? 왜요?”
생긴 거답지 않게 눈치 하나는 빠른 여자다. 내심 서여진이 모르길 바랐는데 여진은 정인이를 알아봤고, 이 여자 성격에 그냥 넘어가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따져묻는다. 서로 알아봤자 상처만 되는일, 때로는 모르는게 약인데도 기필코 밝혀내서 상처만 받는일을 왜 하는 걸까... 정후는 꼬치꼬치 캐묻는 여진이 안타깝다.
“여진씨,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에요.”
“알아야겠어요. 지금 당장! 그 불여시 왜 만났어요?”
“알면 후회해요.”
“후회해도 내가 해요.”
“그 남자랑, 여진씨는 이미 끝난 사이에요. 왜 자꾸 신경을 써요?”
“내가 한때 사랑하던 사람이에요. 사랑하던 사람이 눈 뻘겋게 뜨고 있는데 그사람 모르게 불여시가 이정후씨를 찾아왔어요. 그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구요. 그런데도 신경쓰지 말라구요? 이정후씨라면 신경 안 쓰이겠어요?”
“난, 오늘 이 대본 전해주려 온 거예요. 그런 쓸데없는 말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두 사람 관계....뭐예요?”
계속 추궁했지만, 묵비권을 행사하는지 정후는 입에 자물쇠를 걸어 놨다. 여간해서는 열리지 않을듯 하다. 안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그럼 내 마음대로 판단할게요. 그리고 진우한테 가서 말 할 거예요. 그 여자 알고보니 양다리다, 넌 그여자한테 당한다거다, 그렇게 말해줄거예요.”
“섣부른 판단하지 말아요.”
“아니요, 나 그럴 자격 충분히 돼요.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뭘 더 이상 확인하고 판단해요? 좋아요. 그렇게 말하죠. 그 여자, 그 정인이라는 여자 알고 보니 이정후랑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백진우, 너 나버리더니 꼴좋게 당했다. 이렇게 가서 전해주죠. 됐죠?”
그리 쏘아붙인 여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후가 잡지 않으면 곧장 백진우게 달려가서 고자질 할 기세다.
“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요? 그 남자한테?”
“.....”
“여진씨 마음대로 말하고 나면, 그남자 다시 서여진씨한테 돌아올거 같아요? 그래서 이래요?”
“누, 누가 미련이 남아서 이런데요? 난 있는 사실 그대로 전하는거 뿐이라구요.”
감정이 격해진 여진이 소리쳤다. 정후는 무슨 말을 해도 이 여자가 곱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사랑하던 여자였어요.. 그 여자...”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 여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이정후가 뭐라고 말했더라? 사, 사랑하는 여자였다고? 무거운 돌덩이가 쿵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서여진씨가 차인 날, 나도 차였다고요. 그 여자한테..”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 뻥이겠어요?”
여진은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정후가 한말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뭐야? 내가 백진우한테 차인 날, 이정후도 차였다? 이정후를 찬 그 못되 먹은 불여시가 알고보니 백진우의 새 애인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도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여진은 비워진 컵을 들어 리필을 시켰고, 종업원이 냉수를 갖다주자 마자 다시금 물을 들이 켰다.
“그래요. 무슨 소린지 대충 알아듣겠어요. 근데 그 여자가 왜 다시 이정후씨를 찾아온거예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지들끼리 죽고 못 살고 있을 텐데 왜 이정후씨 찾아온거죠?”
“미안하니까..”
“미안이요?”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 우리 네 사람 부딪혔잖아요, 신촌에서. 뭐,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찾아 왔나봐요. 다른 건 없었어요.”
“그여자 진짜 웃긴다. 지가 차놓고 무슨 염치로 찾아와? 찾아오긴... 얼굴은 착하게 생겨서는 뒤로 호박씨 까는 거야 뭐야?”
“말 좀 곱게 합시다. 듣기 얹잖네.”
“꼴에 옛날 애인이라고 편드는 거예요?”
“편은 누가 편을 든다고.. 아무튼 별일 아니었으니까 잘못된 오해는 하지 마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정후의 태도에 여진은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일이 과연 별일이 아닌 것일까?
그래,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같은 날 동시에 이별통보를 받은 건 정후와 여진 쪽이었고, 서로의 애인에게 비수를 꽂으며 이별통보를 한건 백진우와, 서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신당한 정후와 여진은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 한강대교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야?
꼬이고 꼬인 관계에 여진은 편두통이 오기 시작한다. 쿡쿡 쑤시는 관자노리를 누르며 여진은 차근차근 상황을 따져보았고, 그 결과 서여진과 이정후는 피해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최정인이 이정후를 찾아왔느냐 그 부분에선 딱 막혀버린다. 정후의 말대로 미안해서? 그럴 수 있다. 다른 남자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어도 가끔씩은 옛 애인과의 추억은 불쑥불쑥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한번 만나보고 싶고, 특히나, 현재 애인과 얼굴 붉히는 싸움이 날 경우 옛 애인에게 술 먹고 전화도 하고 싶어진다. 잘 지내나, 나 말고 다른 애인이 생겼나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하고 마음정리를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찾아와 예전의 일은 다 잊고 너도 새 삶을 찾으라는 희망고문만 잔뜩 남겨주고 또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애써 마음잡은 사람은 혼란스럽다. 만약, 그 불여시가 그럴 심산으로 이정후를 찾아왔다면, 그야말로 최정인은 아주 못된년, 나쁜년, 착하게 생겨서는 뒤로 호박씨 깔 년이다.
여진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정후를 동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찾아온 불여시로 인해 애써 다 잡은 마음만 다친 저 남자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걸까.
여진은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 많이 아팠겠네요, 이 정후씨.”
커피숍을 나와 지하철역을 찾아 걷고 있는 내내 여진은 정후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다. 두 사람 관계가 무엇이냐 따져 물으러 왔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되려 새로운 사실만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기분이 엉망이 되었을 정후에게 말조차 붙일 수가 없었다. 왕수다쟁이 이정후가 침묵을 하는걸 보면 지금 이 남자의 기분이 꽝 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진도 정후의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때 웬 여자들이 정후에게 달려들었다. 정후의 옆에서 걷던 여진은 갑작스럽게 출두한 여자들로 인해 저만치 밀리게 되었다. 그중에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사람이 정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CC잡지 설수진 실장입니다. 시간 되시면 저희 잡지에 모델 한번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마스크도 시원시원한게 잘 생기셨고, 키도 크신 게 저희 쪽에서 찾는 모델과 딱 맞아떨어져서요.”
역시나, 인물 값 제대로 한다. 말로만 듣던 거리캐스팅이라니.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어 여자들 틈에 낀 정후를 보던 여진이 부러웠는지 쓴 입맛만 다신다.
“하하하. 모델이요? 아~ 이거 쑥스럽구만.. 그런데 무슨 모델?”
잘생겼다는 칭찬과 모델 한번 해달라는 달콤한 말에 홀라당 넘어간 정후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운 듯(그다지 쑥스러워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모델을 원하느냐 묻는다.
또 또 발동되는 저 오지랖. 좀전까지 보여주었던 슬픈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잘생겼다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대는 정후의 모습이 매우 가식적이 다고 느껴지는 건 여진뿐일까?
“이 정후씨. 시간 없어요. 빨리 가요.”
짜증스런 투로 가자고하는 여진에게 “넌 빠져!”라는 식으로 흘겨보는 CC잡지의 실장의 눈초리에 여진은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광경이다. 여자들 틈에 낀 남자의 저 황홀한 표정은....
“의류모델 이예요. 저희 잡지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건 아시죠? 요즘 뜨고 있는 모델들 저희 잡지에서 데뷔했을 정도니까. 사진 촬영비는 당연히 드리고요. 피부 맛사지 상품권도 드려요.”
오만 인상을 쓰며 시계만 쳐다보던 여진의 눈이 빛난 건 피부 맛사지 상품권을 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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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진우와 여진, 그리고 정후와 정인과의 관계가 아주 꼬인 관계라는건 아시겠죠?
어찌보면 식상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꼬이고 꼬인 관계를 알려주는게 아닌,
이별후에, 여진이가 겪는 이별증후군과, 또다른 사람이 나타났을때의 설레임,
그리고, 옛연인을 잊어가는 단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소설을 계속 읽다보면, 이별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걸 아실거에요.
항상, 상상만 하면서 불여시의 머리를 죄다 뽑아놓겠다고 이만 갈지만 정작 당사자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수 없는 여진이의 소심한 이별.-_-
잡아주기를 바라는데도, 남자가 잡아주지 않아 미련만 잔뜩 안고 떠나가는 정인이의 미련한 이별.
男女戀愛白書 [남여연애백서] -08
7장.
[희망고문]
한번 어긋난 인연은 다시 엮을 수 없다
정인을 데리고 온 곳은 그들이 자주 왔던,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이별을 했던 ‘비발디’라는 커피숍이었다. 정후를 만나기 위해 늘 정인이 기다리던 곳이기도 했으며, 정후의 사랑이 야속해서 혼자 많이 울기도 했던 곳이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왔을 때 늘 상 하던 버릇처럼 정인은 비엔나커피를 시켰고, 정후는 아이스티를 시켰다. 변한 건 없다. 그들이 자주 왔던 커피숍도 그랬고, 그들이 즐겨먹었던 음료도 같았다. 바뀐 것이 있다면, 두 사람의 엇갈린 마음과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는 남자의 눈빛뿐이다.
그런 남자의 눈빛을 알면서도 정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후씨.. 잘 지내?”
“...응.”
“나는.. 잘 못 지내는데.”
정인이 눈을 내리 깔며 비엔나커피 위에 올려진 하얀색 생크림을 보며 말했다.
“그 남자…알았니?”
“아니. 그 사람 몰라.”
“.....잘해줘?”
“응.. 잘해줘.”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슬퍼지고, 그녀의 입가에 퍼져있던 미소가 조금씩 사라져간다. 일자로 굳어버린 입술이 어렵사리 움직인다.
“찾아오면, 안되는 거 아는데 한번 보고 싶어서...”
“그래.”
차갑게 식어가는 비엔나커피와, 얼음이 녹아 사라진 아이스티. 벌써 테이프 한 면이 다 돌아가 그들이 처음 비발디로 들어왔을 때 들리던 “임재범의 너를 위해”노래가 그들의 침묵의 시간을 알려준다.
정후는 그녀가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알고 있었다. 1달 전, 사랑에 지친 정인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주는 남자에게 간다며 정후에게 이별을 고했다. 하지만 정작 헤어짐을 말한 정인은 정후를 아직까지 잊지 못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녀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했던 남자였는데...
여자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까지 그에게 보여줬음에도, 정인은 정후를 떠나보낼 수 없어 잡아두었다.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낱낱이 알고 있는 정후가 가끔은 두려웠지만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조금씩 변해가는 정후를 보면서도, 조금씩 멀어져가는 정후를 보면서도 정인은 그를 향한 마음을 접지 못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고 하는데, 그들의 사랑은 정인이 늘 약자였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사랑했었으니까.
하지만, 더는 멀어져가는 정후를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정인은 더 이상의 사랑에 상처 받기 싫어 그를 떠나려 했다. 운 좋게도 정후와 헤어져야겠다는 마음을 가졌을 무렵, 고교시절 첫사랑이었던 백진우와 우연히 재회했고, 그의 품안에서 정후를 조금씩 밀어내가고 있었다. 만일하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정후가 남겨뒀다면 그녀는 정후를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이별통보를 정후는 순순히 받아드렸다. 잡아주었더라면, 조금의 희망고문이라도 남겨뒀다면 정인은 떠나지 않았을 텐데 희망고문 조차 정후는 보여주지 않았다.
정인은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는 정후가 야속했다. 일방적인 사랑이라 할지라도, 억지로 그를 곁에 두려는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해도 3년을 만났다. 3년간의 정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매정한 정후의 이별이 정인에게는 잔인하기만 하다.
매정한 정후와의 이별 후에도 그녀는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정인의 옆자리엔 정후보다 그녀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는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정인은 그것을 행복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백진우와 함께 있어 ‘편하고 좋다는 것’과 정후의 옆에 있어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백진우를 ‘좋아 한다’는 것과 이정후를 ‘사랑한다.’는 것. 그 감정은 분명 틀렸다.
“난.. 아직도 안 되는 거야?”
“정인아.”
“난.. 정후씨 아니면 안 되는데..”
슬픈 어조로 정인이 읊조렸다.
“정인이 한텐 그 남자가 있잖아.”
“착한남자야. 나한텐 너무도 과분한 남자야. 좋아해. 진심으로.. 하지만 가슴이 뛰지가 않아.”
“너.. 충분히 행복해보여. 나와 있을 때 보다..”
“편하고 좋을 뿐이야.”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해주는 사람이잖아.”
“그치만 내 마음이 원하지 않아해”
“정인아..”
“돌아가고 싶어, 정후씨 한테. 용기내서 찾아왔어. 내 용기, 제발 져버리지 마.”
“끝난 사이야. 너와 난.”
“아니, 정후씨는 끝났을지 모르지만, 난 아니야. 다시 시작하고 싶어.”
“잊었니? 넌 날 떠났고, 난 널 보내줬어. 그걸로, 우리 사이는 끝이 난거야.”
어쩜, 저리도 매정하게 말할까. 정인의 눈에는 눈물이 맺힌다. 정후 역시 차갑고 매정한 말로 정인의 가슴에 상처를 남겨주는 자신이 괴로운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언젠가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칠지 알았어. 그래서 항상 대비하고 있었어. 정인아, 우린.. 이미 끝났어.”
“이런 일이 닥칠지 알았다니? 대비하고 있었다니? 정후씨 그게 무슨 말이야?”
떨리는 정인의 음성이 1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을 말하는 건 아닌 가 불안함에 떨리고 있다.
“다시 반복하기 싫다.”
역시나, 정후는 그때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런 거야? 아니라고 했잖아. 그 일은 정후씨 잘못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내가 괜찮다는데 그만 잊어주면 안돼?”
“잊을 수가 없어. 너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생각 날거야. 너도 그럴 테고…. 그럼 또다시 반복되겠지. 넌 또 힘들어 할 테고. 난 그런 널 보면서 괴로워 할 테고. 이제 자신 없어..”
“안 힘들어하면 되잖아. 안 괴로워하면 되잖아. 정후씨 만 힘든 거 아니잖아. 그래, 나도 그랬어. 여자한테는 치욕적인 일이라 할 수만 있다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려서 그때 일 지우고 싶어. 어쩔 땐 사람들이 날 알아볼까 무서워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도 가고도 싶었어. 죽고 싶었을 때도 있었고, 정후씨가 미웠던 적도 있었어. 그때 날 그곳에 내버려두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정인은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룰 수 없었다. 넘쳐흐르는 눈물로 인해 정후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정인은 볼에 얼룩진 눈물을 훔쳐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정후씨 마음 알거 같아. 날 위해서 그러는 거.. 그 일 아는 사람 정후씨 뿐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한테 가서 새 출발하라고.. 어두웠던 옛 기억 다 묻어버리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래서 정후씨가 나 잡지 않은 거 알겠어. 그런데, 싫어. 내가 싫어졌어.”
닦아도 닦아내도 하얗고 고운 얼굴엔 투명한 눈물이 계속 번져 흘러내린다. 정인은 눈물을 삼키며 독하게 말했다.
“나. 그 남자한테 말할 거야.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그 사람한테 간다고.”
“정인아.”
“나만 생각할거야. 내 사랑만 생각할거야.”
“네 욕심일 뿐이야. 그 사람과 헤어지면 넌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거야. 모르겠니?”
“괜찮아. 난 정후씨만 있으면 되니까. 상처를 받든, 주던 상관없어, 이제. 정후씨만 있으면 되니까.”
“정인아. 그러지마. 너의 그 이기적인 판단이..... 아니다. 관두자.”
누구를 탓할 수 없다. 탓하자면 그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의 마음이다. 자신도 모르게 판단하고 움직이는 이기적인 마음. 남을 상처 입히면서도, 또는 자신이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저지르고 마는 사람의 마음.
정후는 문득 처음 여진을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사랑에 배신당하고 겁 없이 한강대교 난간에 매달려 있던 서 여진. 그때 그 여자의 마음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까? 또한, 한 여자의 사랑을 매정하게 짓밟고 또 다른 사랑을 찾아간 그 백진우라는 남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같은 여자에게 상처를 줘서 빼앗은 남자에게서 다시 벗어나려는 정인이와, 그런 그녀의 사랑을 알면서도 받아주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또 어떨까.
“널 많이 좋아했어, 정인아. 아니 사랑했어. 하지만 이제 아니야. 넌 그 남자와 있을 때가 행복해보여. 더 이상 여러 사람에게 상처 주지 말고, 지금 네 자리 지켜. 그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야.”
“그.. 여자 때문이야? 정후씨 옆에 있던 그 여자?”
“.....”
“사랑하는 거야? 그 여자?”
“.....”
“난 죽어도 얻지 못한 정후씨 마음.. 그 여자는 한 달 만에 얻어 낸 거야? 그런 거야?”
“.....”
“못됐다.. 정후씨.”
정후가 끝까지 대답이 없자 정인은 넘쳐흐르는 눈물을 틀어막으며 비발디를 나갔고, 정인이가 간 후에도 정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 또다시 테이프의 한 면이 돌아갔다.
[내 거친 사랑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 줄 거야. 너를 위해 떠날 거야.]
임재범의 노래 가사가 정후의 귀에 자꾸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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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불여시가 이정후를 만나러 온 거지? 왜? 왜?
이유가 궁금해서 도통 참을 수가 없어 여진은 몇 번이나 이정후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정후의 핸드폰은 먹통이다.
뭔가 숨기는 거라도 있는 듯 당황하던 이정후.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대 멀어져가는 그 불여시.
지금쯤이면 백진우의 옆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어야할 그녀가 왜 이정후를 찾아왔을까.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생각뿐이었고, 저녁밥을 먹을 때도,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까지도 여진은 오로지 그 생각으로 머리속이 꽉차있었다. 결국 여진은 긴 밤을 꼴딱 지새워야만 했다.
다음날에도 여진은 기다리는 전화라도 있는지 하루 종일 울리지 않은 핸드폰만 쳐다봤지만 헛수고였다. 그냥, 백진우에게 가서 네 애인과 다른 남자가 함께 있는 걸 목격했다고 고자질하기엔 여진이 느끼기에도 참으로 유치하고 비참해 보이는 방법이다. 우선, 정후의 연락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렇게 삼일이 흘러갔다.
삼일동안 궁금증에 머리를 싸매고 있던 여진은 뭐라도 해야 싶은 마음에 세븐라이너로 종아리를 빡빡 문지르며 ‘인생은 아름다워’ 의 대본을 읽으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주옥같은 대사들이...”
대본 한 줄을 읽을 때마다 드라마의 한 씬 이 떠오른다. 대본 속으로 빠져갈수록 이정후와, 백여시의 생각은 조금씩 사라져간다. 그렇게 감정에 빠져 있던 여진이 다음 회 대본을 찾으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8회분은 정후에게 받지 못했던 대본이다. 역시 흐름이 깨지면 김이 센다. 여진은 신경질이 났고, 신경질이 나자 다시 또 이정후와 백여시의 생각으로 괴로웠다. 머리를 박박 긁으며 오만가지 인상을 쓰고 있는 여진의 핸드폰의 울린 건 그때였다. 핸드폰 액정엔 “이정후”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삼일 만에 온 전화다.
“헬로~!”
“왜 이제 전화해요? 아니, 왜 내 전화 안받았어요?”
“무슨 전화를 이리도 많이 하셨데? 내 목소리가 그렇게나 듣고 싶었나?”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우리 만나요. 만나서 얘기해요”
“지금 데이트 신청?”
“미쳤어요? 확인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래요.”
“내가 좀 바쁜데...”
“이정후씨 있는 쪽으로 내가 갈게요.”
******
“말해봐요. 그여자, 불 여시 맞죠?”
얼마나 뛰어왔으면 오자마자 냉수를 먼저 들이키며, 여진은 정후가 무슨 말을 할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평일 오후시간이라 손님이 없는 썰렁한 커피숍에는 주인이 틀어놓은 감미로운 피아노 선율만이 낮게 깔려있었다.
“자요, 8편이랑, 18편.”
여진의 답답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후가 “인생은 아름다워” 8회와 18회 대본을 던져준다. 허나, 지금 여진에겐 이 대본이 중요하지 않았다. 정후의 저 입에서 튀어나올 폭탄발언이 궁금할 뿐이다. 청심원이라도 먹고 올 걸 후회도 했다. 떨리는 가슴이 터지기 일부직전이다. 과연 무슨 폭탄발언을 할까..
감미로웠던 피아노 선율이 절정에 다다르자 빨라지기 시작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여진의 지금 심정을 말하는 거 같다. 입에 침이 마르고, 손발이 저린다.
“빨리 말해 봐요, 이정후씨.”
“그 대본 찾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나, 이정후씨랑 농담 따먹기 하려고 여기 나온 거 아니에요. 미치게 궁금한 게 있어서 온거라구요. 이정후씨가 왜 그 불여시를 만난 거예요? 왜요?”
생긴 거답지 않게 눈치 하나는 빠른 여자다. 내심 서여진이 모르길 바랐는데 여진은 정인이를 알아봤고, 이 여자 성격에 그냥 넘어가주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따져묻는다. 서로 알아봤자 상처만 되는일, 때로는 모르는게 약인데도 기필코 밝혀내서 상처만 받는일을 왜 하는 걸까... 정후는 꼬치꼬치 캐묻는 여진이 안타깝다.
“여진씨,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에요.”
“알아야겠어요. 지금 당장! 그 불여시 왜 만났어요?”
“알면 후회해요.”
“후회해도 내가 해요.”
“그 남자랑, 여진씨는 이미 끝난 사이에요. 왜 자꾸 신경을 써요?”
“내가 한때 사랑하던 사람이에요. 사랑하던 사람이 눈 뻘겋게 뜨고 있는데 그사람 모르게 불여시가 이정후씨를 찾아왔어요. 그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구요. 그런데도 신경쓰지 말라구요? 이정후씨라면 신경 안 쓰이겠어요?”
“난, 오늘 이 대본 전해주려 온 거예요. 그런 쓸데없는 말 들으러 온 게 아니라.”
“두 사람 관계....뭐예요?”
계속 추궁했지만, 묵비권을 행사하는지 정후는 입에 자물쇠를 걸어 놨다. 여간해서는 열리지 않을듯 하다. 안되겠다. 특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그럼 내 마음대로 판단할게요. 그리고 진우한테 가서 말 할 거예요. 그 여자 알고보니 양다리다, 넌 그여자한테 당한다거다, 그렇게 말해줄거예요.”
“섣부른 판단하지 말아요.”
“아니요, 나 그럴 자격 충분히 돼요. 내 눈으로 확인했는데 뭘 더 이상 확인하고 판단해요? 좋아요. 그렇게 말하죠. 그 여자, 그 정인이라는 여자 알고 보니 이정후랑 그렇고 그런 사이더라. 백진우, 너 나버리더니 꼴좋게 당했다. 이렇게 가서 전해주죠. 됐죠?”
그리 쏘아붙인 여진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후가 잡지 않으면 곧장 백진우게 달려가서 고자질 할 기세다.
“아직도 미련 못 버렸어요? 그 남자한테?”
“.....”
“여진씨 마음대로 말하고 나면, 그남자 다시 서여진씨한테 돌아올거 같아요? 그래서 이래요?”
“누, 누가 미련이 남아서 이런데요? 난 있는 사실 그대로 전하는거 뿐이라구요.”
감정이 격해진 여진이 소리쳤다. 정후는 무슨 말을 해도 이 여자가 곱게 넘어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사랑하던 여자였어요.. 그 여자...”
그의 말이 끝나는 동시 여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이정후가 뭐라고 말했더라? 사, 사랑하는 여자였다고? 무거운 돌덩이가 쿵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서여진씨가 차인 날, 나도 차였다고요. 그 여자한테..”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 뻥이겠어요?”
여진은 진정되지 않은 가슴을 억누르며 차근차근 정후가 한말을 되짚어보았다.
그러니까, 이게 뭐야? 내가 백진우한테 차인 날, 이정후도 차였다? 이정후를 찬 그 못되 먹은 불여시가 알고보니 백진우의 새 애인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도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여진은 비워진 컵을 들어 리필을 시켰고, 종업원이 냉수를 갖다주자 마자 다시금 물을 들이 켰다.
“그래요. 무슨 소린지 대충 알아듣겠어요. 근데 그 여자가 왜 다시 이정후씨를 찾아온거예요?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지들끼리 죽고 못 살고 있을 텐데 왜 이정후씨 찾아온거죠?”
“미안하니까..”
“미안이요?”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 우리 네 사람 부딪혔잖아요, 신촌에서. 뭐, 미안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찾아 왔나봐요. 다른 건 없었어요.”
“그여자 진짜 웃긴다. 지가 차놓고 무슨 염치로 찾아와? 찾아오긴... 얼굴은 착하게 생겨서는 뒤로 호박씨 까는 거야 뭐야?”
“말 좀 곱게 합시다. 듣기 얹잖네.”
“꼴에 옛날 애인이라고 편드는 거예요?”
“편은 누가 편을 든다고.. 아무튼 별일 아니었으니까 잘못된 오해는 하지 마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정후의 태도에 여진은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일이 과연 별일이 아닌 것일까?
그래,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는 모르겠지만, 애석하게도 같은 날 동시에 이별통보를 받은 건 정후와 여진 쪽이었고, 서로의 애인에게 비수를 꽂으며 이별통보를 한건 백진우와, 서정인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배신당한 정후와 여진은 운명의 장난인지, 가혹한 형벌인지 한강대교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야?
꼬이고 꼬인 관계에 여진은 편두통이 오기 시작한다. 쿡쿡 쑤시는 관자노리를 누르며 여진은 차근차근 상황을 따져보았고, 그 결과 서여진과 이정후는 피해자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왜 최정인이 이정후를 찾아왔느냐 그 부분에선 딱 막혀버린다. 정후의 말대로 미안해서? 그럴 수 있다. 다른 남자와의 사랑에 흠뻑 빠져 있어도 가끔씩은 옛 애인과의 추억은 불쑥불쑥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한번 만나보고 싶고, 특히나, 현재 애인과 얼굴 붉히는 싸움이 날 경우 옛 애인에게 술 먹고 전화도 하고 싶어진다. 잘 지내나, 나 말고 다른 애인이 생겼나 궁금하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걸 체념하고 마음정리를 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찾아와 예전의 일은 다 잊고 너도 새 삶을 찾으라는 희망고문만 잔뜩 남겨주고 또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애써 마음잡은 사람은 혼란스럽다. 만약, 그 불여시가 그럴 심산으로 이정후를 찾아왔다면, 그야말로 최정인은 아주 못된년, 나쁜년, 착하게 생겨서는 뒤로 호박씨 깔 년이다.
여진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정후를 동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시 찾아온 불여시로 인해 애써 다 잡은 마음만 다친 저 남자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하는 걸까.
여진은 적절한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마음, 많이 아팠겠네요, 이 정후씨.”
커피숍을 나와 지하철역을 찾아 걷고 있는 내내 여진은 정후의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다. 두 사람 관계가 무엇이냐 따져 물으러 왔다가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되려 새로운 사실만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되자 기분이 엉망이 되었을 정후에게 말조차 붙일 수가 없었다. 왕수다쟁이 이정후가 침묵을 하는걸 보면 지금 이 남자의 기분이 꽝 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여진도 정후의 옆에서 묵묵히 걷고 있었다. 그때 웬 여자들이 정후에게 달려들었다. 정후의 옆에서 걷던 여진은 갑작스럽게 출두한 여자들로 인해 저만치 밀리게 되었다. 그중에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사람이 정후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CC잡지 설수진 실장입니다. 시간 되시면 저희 잡지에 모델 한번만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마스크도 시원시원한게 잘 생기셨고, 키도 크신 게 저희 쪽에서 찾는 모델과 딱 맞아떨어져서요.”
역시나, 인물 값 제대로 한다. 말로만 듣던 거리캐스팅이라니. 졸지에 찬밥 신세가 되어 여자들 틈에 낀 정후를 보던 여진이 부러웠는지 쓴 입맛만 다신다.
“하하하. 모델이요? 아~ 이거 쑥스럽구만.. 그런데 무슨 모델?”
잘생겼다는 칭찬과 모델 한번 해달라는 달콤한 말에 홀라당 넘어간 정후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쑥스러운 듯(그다지 쑥스러워보이지는 않는다) 어떤 모델을 원하느냐 묻는다.
또 또 발동되는 저 오지랖. 좀전까지 보여주었던 슬픈 모습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잘생겼다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대는 정후의 모습이 매우 가식적이 다고 느껴지는 건 여진뿐일까?
“이 정후씨. 시간 없어요. 빨리 가요.”
짜증스런 투로 가자고하는 여진에게 “넌 빠져!”라는 식으로 흘겨보는 CC잡지의 실장의 눈초리에 여진은 어이가 없어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눈뜨고는 못 봐줄 광경이다. 여자들 틈에 낀 남자의 저 황홀한 표정은....
“의류모델 이예요. 저희 잡지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한건 아시죠? 요즘 뜨고 있는 모델들 저희 잡지에서 데뷔했을 정도니까. 사진 촬영비는 당연히 드리고요. 피부 맛사지 상품권도 드려요.”
오만 인상을 쓰며 시계만 쳐다보던 여진의 눈이 빛난 건 피부 맛사지 상품권을 준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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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진우와 여진, 그리고 정후와 정인과의 관계가 아주 꼬인 관계라는건 아시겠죠?
어찌보면 식상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지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꼬이고 꼬인 관계를 알려주는게 아닌,
이별후에, 여진이가 겪는 이별증후군과, 또다른 사람이 나타났을때의 설레임,
그리고, 옛연인을 잊어가는 단계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소설을 계속 읽다보면, 이별에도 여러가지 종류가 있다는걸 아실거에요.
항상, 상상만 하면서 불여시의 머리를 죄다 뽑아놓겠다고 이만 갈지만 정작 당사자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할수 없는 여진이의 소심한 이별.-_-
잡아주기를 바라는데도, 남자가 잡아주지 않아 미련만 잔뜩 안고 떠나가는 정인이의 미련한 이별.
사랑하지만, 과거의 일때문에 정인이의 행복을 위해 보내줘야만 하는 정후의 아픈 이별...
그리고, 진우의 이별이야기는 조만간에 나올겁니다..^^
과연 진우의 이별은 어떻게 될련지.....ㅋㅋㅋ
그리고, 이별뒤에 찾아오는 또다른 사랑들...
다시는 사랑안하겠다고 다짐하지만, 사랑은 소리 없이 찾아오는 감정..!!
그 미묘한 감정속에서 주인공은 어떤 사랑을 택하게 될지 쭈욱 기대해주세용.(__*)
꼬리말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