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멍청한 짓이다! 충동적인 자기 기만에의한 행동은 늘 후회와 자책을 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되돌리기 싫었다. 역시 남자들의 행동은 위선과 자기포장일 뿐이다. "좋아! 오늘 유미랑 한번 취해보지뭐. 어때 유미야? 괜찮겠어?" 수연이 물어오자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야호! 좋았어! 내가 오늘 아주 확 망가진다! 인간 김석호의 진면목을 보여주겠어." 김석호가 활짝핀 얼굴로 호들갑을 떨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야! 영진아. 알아서 모셔라.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이 형님이 오늘 모두 책임진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유미가 수연을 만나러 서울 강북지역으로 오고 김석호는 친구인 김영진을 만나려는 때에 석호가 수연에게 삐삐로 호출을 한 것이다. 화양리에서 우연한 만남을 가진 자리였다. 지난번 유미와 석호의 불미스런 일이 있은 이후 석호에겐 더없이 좋은 자리였고 유미에겐 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지금 유미의 마음은 침참히 가라앉은 상태여서 자신의 버젓한 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 유미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췌하고 거칠어져 있었다. 수연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감기 기운이라 둘러댔지만 그 핑계를 대면서 그녀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뻔했다. "영진아 너 되게 오래간만이다. 그치?" 수연이 작은 키에 뽀얀 얼굴을 지닌 영진을 바라보며 반가운 마음을 표하자 영진이 고개 주억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래 한 이년 되었나? 추림이 자식따라 시골에 가서 만나고 한번도 못봤지?" "그래? 어떻게 지냈어? 추림에게 물으니 그냥 열심히 산다고 하던데?" 김영진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슥해 보였는데 서먹한 상태임을 수연은 알고 있었다. 유미는 수연의 입에서 추림이 거론되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면서 그리운 사람이다. "아참! 야 수연아. 추림이 자식 사라진거 알아?" 석호가 수연에게 뚱한 얼굴로 말을 건네자 수연의 고개가 갸웃거렸고 유미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유미의 그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라졌다고? 어디로? 사라지긴 어디로 사라지냐?" "아니야. 정말이야. 회사에다 전화했는데 그냥 모른데. 집에다가 전화도 해봤다." 석호가 조금 심각해져 말하자 영진이 의아해했다. "추림이 사라져? 어디간거냐? 나 그자식 본지 서너달 됐는데. 그놈 거기서 짱박힌 채 죽어라고 일만 하는놈 아니었나?" "아 새끼야! 그런게 아니라 회사에서 뭔가 알고 있는거 같은데 말하지 않는단 말이다. 경리들이 숨기고 있는거 같은데 말씀이야... 이놈 여자랑 살림 차렸나?" 석호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미는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추림아! 나랑 놀자 응? 나 심심해.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나랑 조금만 놀아줘.' '아이도 아니고 자꾸 그럴래? 너 자꾸 그러면 보내버린다.' 문 밖으로 들려오던 희미한 여자와 추림의 대화. 사실이 아니길 빌었지만 분명한 현실이었고 추림의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 "무슨 살림이냐? 농담을 해도 꼭 저렇게 재미없는 말만 한다니까." 수연이 타박을 하자 석호가 큰 눈을 더욱 치뜨고 수연을 쳐다보았다. "너 몰라서 그러는데? 추림하면 여자고 여자하면 추림인거 몰라? 안그러냐? 영진아?" "미친놈! 추림처럼 하면 여자가 마구 달라붙게 되어있어. 매너하면 추림이고 남자하면 그새끼가 정답이다." 영진이 옆에 앉은 석호의 등짝을 툭 치며 말을 정정해 버리자 석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가? 하긴 그놈이 좀 그렇기는 해. 그런데 진짜야. 그새끼 없어졌다니까! 한번도 이런적이 없어." 석호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 졌는데 이제는 수연과 영진도 장난이 아님을 인식한 얼굴이었다. "무슨일이 있겠지. 뭘 그리 심각해 하냐?" 수연이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하자 석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경리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에게 -언니 또 추림 찾는 전환데 어떻게 해야돼.- 그러니까 어디서 그러더라구. 대충 어디갔다고 둘러대. 한두번도 아니고... 그러더라구 이거 뭔일 있는거 아니겠어?" 석호의 말에 유미는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연히 추림의 집을 찾아갔다가 알게된 사실! 추림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것도 버젓이 추림의 집에 그와 함께 있는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가 거짓을 말했다. 위선이었고 기만이었다. 자신에게 행한 일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주었던 그 많은 마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고 자신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져주는 손길에 행복해 했고 입맞춤에 전률을 느끼는 환희에 빠졌었다. 그에게 믿음을 가졌고 단 하나의 진실을 발견했었다. 아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는 그와 상관없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우리 선주가 행복하길 바라는건 추림의 마음이라는거 알지? 니가 이러면 나도 힘들어진다는거 항상 기억해라. 이리와라 그렇게 힘없이 굴지말고.' 그가 어떤 여자에게 말한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는 그 여자를 안아 주었을까? 자신에게 한 그 로맨틱한 행동을 보여 주었을까? 결국... 추림은 자신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았다. 자신을 안았으면서... 자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으면서... 날 기만한 것이다! 차라리 그때 가지 말것을... 서점에서 펴본 칼릴지브란의 시집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에게 선물하고 싶어, 깜짝 이벤트를 하려던 유치한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나쁜자식... 내게 아니라고 말해줄래! 그 여자를 좋아해도 상관없으니까 날 더 좋아한다고 말해줄래! 조금만 그 여자보다 날 더 좋아해줄 수 있다고 말해줄래! "야 유미야!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뭐야? 기분 나쁜일 있는거야?" 수연이 유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몇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자 아예 쥐고 흔들어 버린것이다. 그제서야 수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수연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술들 안마셔?" 유미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새라 호프잔을 들고 수연에게 내밀어 자신을 감추었다. "...그래서 추림이 자식이 혼자 거길 들어간거야. 미친놈! 우리 그때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야 김수연. 너 그때 운거 기억나지?" 석호가 영진에게 지난 구정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수연을 놀릴 심산으로 말 했는데 수연은 아무런 반응없이 고개를 끄덕여버려 석호의 의도가 빗나가 버렸다. "뭐야? 김빠지게... 하여튼 추림이 그 자식이 혼자서 거길 떡하니 들어가서 멀쩡히 걸어 나올 때 난리도 아니었다. 우린 크게 다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들어가는건데 히힛!" "그럴 용기나 있고?" 석호가 히히덕 거리자 수연이 이번엔 반대로 놀리니 석호가 눈을 치떴다. "아니 김수연씨! 날 어떻게 보시는겨? 전설도 못들어 봤어? 강원도에서 벌어진 팔십인의 혈투에 대해? 그때 선봉이 나였고 추림은 들러리 였다고. 이거 왜 그러셔?" 수연과 석호가 별일도 아닌것을 가지고 투닥거렸다. 유미는 그들의 장난을 의미없이 지켜보았다. 추림. 그의 친구들은 만나면 늘 그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평범하게 살면서 그는 가끔 이렇게 도마위에 올려진 생선이 될 일들을 벌인다. 그가 보고싶었다. 석호의 말대로 그가 사라졌다면... 혹 여자와... 그건 아닐것이다. 그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찮게 여길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인 남자다. 하지만 그날 목격한 일들이 자꾸 머리속에서 끊임없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질투! 욕심! 애증! 왜 자신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도 못했을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가 물어보면 될 수도 있는데... 차라리 그날 만나야 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유일한 믿음이라 여긴 진실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기댈 수 있는 작은 언덕이 무너지고 있었다. 분열... 자신의 마음은 또다시 그렇게 흐트러지려 하고 있었다. "초면인데 잘 부탁합니다. 제가 술한잔 따라 드려도 되지요?" 영진이라 소개한 수연의 친구가 맥주병을 들며 말을 걸어왔다. 이남자...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무척 끈적거린다. 느낌이 썩 좋지가 않은 친구다. "네에......" 힘없이 대답한 유미가 잔을 내밀자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맥주가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채워졌다. 유미가 영진을 무심히 바라보자 그곳에 영진대신 추림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무척 인상적인 분이시네요. 자주 뵐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을 건네왔지만 머리속에 윙윙 거리는 공명음만이 울려 퍼지며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추림... 내가 찾아 가겠어!' * *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름위에 올려진 육신처럼 붕 뜬듯한 허탈감만이 느껴졌다. 머리속이 빙글거리며 심한 구역질이 느껴졌고 목안이 따끔거렸다. 팔다리가 없는듯 존재감을 잃어버린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 분명히 그것은 기억했다. 여전히 유미의 손을 잡은 채 걷다가 그녀가 사라지는 꿈이었고 자신은 끝없는 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유미와 둘만의 공간에서 원색적인 욕망을 불사르는 행위에 몰두했고 파괴적인 환희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선주의 오빠되는 사람이다... 내가 선주의 오빠되는 사람이다... 내가 선주의....' 그 말이 수도없이 떠오르며 엄청난 고통이 육신을 잠식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렇지... 난... 죽...었나? 아무것도 안보여! "무...울......" 추림의 입에서 미약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곁에서 듣지 않는다면 전혀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응? 지선아! 추림씨가... 세상에 말했어!" 야구모자를 눌러쓴 선주가 사인 입원실에 가득한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지선을 불렀다. "추림아! 뭐라고? 다시 말해봐! 뭐라고?" 선주는 무척 서둘고 있었다. 분명 뭐라고 말한 것이 확실했다. 단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스쳐가는 천만분의 일 일지라도 분명히 기억했다. 추림이 말한것을 들었다. 아주 낮고 미약했지만 그의 음성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선주야 너 왜 그래? 조용히 해. 창피하게." 밖에 나갔다가 막 들어오는 지선이 선주가 크게 소리치는 것을 문밖에서 들은터라 주위 사 람들을 둘러보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지선아. 추림씨가 말했어! 정말이야. 깨어났다고! 가만... 조용해봐!" 선주가 지선에게 말하다가 추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빠짝 대고 귀를 기울였다. "무...울......" "......!" "물......!" "물? 물 달라고? 물... 물달래... 들었지 그렇지? 봐 깨어났어! 물달래 추림이 물을... 지선아 물 어딨지? 물... 여기... 이걸로... 어떻게 줘야지?" 선주가 무척 서두르며 허둥거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지선은 마음이 아파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선도 들었다.추림이 깨어났다. 확실히 -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순간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가 깨어나거나 정신이 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 "선주야! 잠깐만. 먼저 의사선생님에게 알려야 해.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떻하려고?" 지선이 선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물병을 들고 막 추림의 입에 가져가려던 선주의 어이없는 행동이 저지되었다. "안돼! 추림이 물 달라고 하잖아! 줘야해. 다시 잠들면 어떻해! 물이라도 마시게 해야지." 선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피부가 검게 변해 있었다. 눈물이 방울거리게 맺힌 선주는 지금 확실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삼일전에 집을 몰래 도망쳐 나와 바로 이곳으로 와서는 여지껏 잠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있었으니 사람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전에 이미 몸이 지치고 심적으로도 정상이 아닌 선주였다. 자신들이 이곳에 와서 그 다음날 입원병동으로 옮겨진 추림의 곁을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추림씨가 더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니? 제발 침착하자 응? 먼저 의사를 부르고 기다려보자 응?" "어? 그래 그럼 빨리 의사를... 내가 다녀올께!" "아니 넌 여기에 있어라... 내가 다녀오마." 지선이 선주를 말리고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 저녁 회진 시간이 되어서 의사는 간호사와 인턴무리를 이끌고 오분도 안되어서 들어왔다. 추림의 손을 꼭 잡고 훌쩍거리던 선주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물을 찾았다고요?" 사십대의 의사는 무척 피곤한 얼굴로 지선을 바라보며 묻고는 청진기를 추림의 가슴에 대어 보고 눈을 뒤집어 보며 이곳 저곳을 살폈다. "예. 물을 찾았어요. 무척 힘없는 소리였는데... 확실했어요." 선주가 의사가 그냥 갈새라 급하게 말하며 무언가 바라는 얼굴로 의사를 응시했다. 선주를 힐긋 바라본 의사가 추림의 얼굴을 손으로 건드렸다. "이봐요! 이추림씨? 내말 들려요? 정신이 납니까?" 의사가 추림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무...울... 무울!" 추림의 입에서 다시 미약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음... 깨어나려나 보군. 무척 빠른데?" "아니 선생님? 진작에 깨어나야 하는거 아닌가요?" 선주가 의사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몸의 기관도 많이 저하되어 있었고. 추위에 노출되어 있던터라 이십대의 몸이 노인같은 상황이었단 말이요. 한 열흘이나 보름정도 걸릴거라 예상했는데... 무척 강한 사람이군." 머리속에서 무언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기계의 엔진 소리같은 것이 회전하다가 멈추고 다시 도는듯한 이상한 소리처럼 들려왔다. 사람이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사람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려 했는데 천근 만근처럼 눈꺼풀이 무겁기만 하다. 무언가 얼굴을 건드리고 있다. 느껴진다. 거칠지만 따듯한 손길이다. 숨소리도 느껴진다. 사람이 확실하다! "이추림씨! 눈을 떠 봐요. 내 말이 들리면 천천히 눈을 떠봐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눈을 뜹니다. 자 해봐요!" 인간의 육체는 오묘하다. 무엇인가를 해본 일이면 육체는 그것을 기억하고 저장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일을 하게되면 자연스러워 지려고 스스로 알아서 방응하려 하는데 지금 추림이 상황도 그랬다. 여기서 그가 깨어난다면 그는 앞으로 빠른 회복을 보일 것이고 다시 잠든다면 무척 더디고 느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좋다. 의사가 그것을 알기에 그를 강제로라도 깨우려는 것이다. "이봐. 물을 가져와. 깨끗한 솜에 묻혀서 가져와." 의사가 간호사에게 말하고 추림의 몸상태를 다시 살폈다. 약 붕대를 풀러 상처난 곳들을 보려는지 가위로 어깨와 복부 부근의 붕대를 잘라냈다. 심한 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퍼지며 추림의 상처가 드러났다. 무려 서른 여덟 바늘이나 꿰메어진 추림의 오른 허벅지의 관절 상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칼에 깊숙히 찔려 혈관이 절단되었고 찔린 상태로 거칠게 움직여 상처가 더욱 벌어지고 흉하게 나 버린 것이다. 허벅지 곳곳과 장단지 어깨, 옆구리가 온통 멍투성이고 상처 투성이었다. 얼굴이 시퍼렇게 멍자국이 나 있고 머리에도 붕대로 감겨진 상태니 그의 모습은 시체에다 염을 한 모습 같았다. 의사가 익숙하게 추림의 상처를 치료하고 소독하다가 간호사가 건넨 솜뭉치를 추림의 입에다 물려 주었다. 아주 느리고 조금씩 물이 넘어갈 것이다. 오래도록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난 환자에게 많은 양의 물을 마시게 하는건 죽으라는 행위다. 물이다! 차고 시원한 느낌이 따갑고 메마른 목을 적시고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왔다. 청량한 생동감이 전해져 온다. 살아... 있다! 몸의 이곳 저곳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건... 좋은 반응이다. 육신이 살아있다. 힘이 느껴진다. 아직 무기력하고 기운이 없지만 확실히 기운이 난다. 뿌연 시야가 반갑다. 어른거리는 것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경물이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단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추림아! 흑... 추림아!" 선주가 추림이 눈을 아주 느리게 뜨자 의사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가며 그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미 선주의 정성은 외과 병동에 유명해져 있었다.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는 괴물 최선주! "정신을 차렸군! 내가 보여요? 난 외과 전문의 이형수라고 합니다. 알아 들었으면 눈을 깜박거려 봐요." 의사가 추림의 상태를 시험하려는지 그렇게 말하자 추림이 한동안 촛점없는눈을 허공에 두고 있다가 느리게 눈을 깜박 거렸다. "다시 해봐요. 이번에 두번!" 추림이 반응이 이제는 조금 빨라졌다. 두번의 눈짓을 하자 의사가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회복하면 좋아질거요. 이외로 강철같은 체력을 지녀 회복 속도도 그만큼 빠를 거요. 조금 더 지켜보다가 치료문제를 조금 달리 합시다. 최선주씨? 그렇게 좋소?" 의사가 그렇게 물을 정도로 선주는 대놓고 기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손을 맞잡고 마구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럼요!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참나! 그 정도로 죽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는데... 최선주씨 상태를 한번 보시기나 하시오. 누가 더 환자 같은지!" "히히... 뭐 상관 없어요. 자고 먹고 씻으면 그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하하!" "호호호!" 그러자 의사는 물론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굴하지 않는 선주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휴. 정말 못 말리겠어요. 이제는 간호실에 과일이나 먹거리도 안 가져 오시겠지요?" 한 간호사가 조금 아쉬운듯 말했다. 선주가 유명해진 것은 비단 추림을 돌보려는 정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간호사들을 쫒아 다니면서 귀찮게 구는지, 하루에도 서너번을 추림에게 가 보라며 생떼를 부렸다. 그러다가 아예 간호사들을 구워 삶아 버렸는데 그 방법이 간식거리였다. 간호사들은 횡재를 했지만 대신 추림을 슬쩍 찾아가 살펴보는 시늉을 해야했던 것이다.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그래... 선주 네가 있었구나... 지선씨도...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선주... 너의 오빠가 내게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모르고 있으면 좋겠다. 넌 분명 힘들어 할텐데! 추림의 그 생각은 모두 틀렸다. 모든것을 예측한 선주는 지금 추림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하고 있지 않았다. 최진규의 업! 그의 잘못을 대신 갚아 나가고 있음을 그는 현재 모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때아닌 즐거움이 사라진 병실이 다시 원래의 우울한 상황에 젖어 들었다. 4인 병실인데 이곳은 추림처럼 심각한 환자들이 입원한 곳이었다. 그러니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이 편할리 없는 것이다. "선주...야!" 추림의 입에서 선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선주가 얼른 추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맟추며 바라보았다. "나 보여? 보이는거지?" 선주의 물음에 추림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거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추림아! 흑흑... 니가 잘못 될까봐 난......!" 선주가 울자 추림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얼른 전처럼 되었으면...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선주를 사랑해 주지도 못하면서 이런 시련이라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뜬 눈이 다시 무거워졌다. 잠들어 버릴것 같았다. "선주야... 그러지...마. 너 많이 힘들...어 보여. 나 다시 일어나면 밝은 니모습 보고... 싶어 알...았지?" 선주에게 힘겹게 말한 추림이 희미하게 웃음짓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선주의 엉망인 모습을 확인한 추림은 애써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추림의 말에 감동한 선주가 입을 꾹 다물고 눈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들었지? 추림씨도 너 이런 모습 원하지 않잖아? 좀 자고 씻고 먹고 쉬고... 알았니?" 지선이 선주의 등을 두르리며 말했다. 선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고 보니까 나 되게 피곤하다. 이제 잘 수 있을거 같아. 나 지금 너무 기분좋아. 지선아! 나 추림씨 되게 좋아하나보다 그치? 히히히."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선주의 눈빛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지선은 선주가 변해가고 있음을 예감했다. 며칠사이에 큰 일을 겪은 선주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가는것 같았고 진짜 여자로 변모해 가는 중임을 직감했다. "선주야. 너 정말 추림씨를... 힘들어 질거라는 걸 알잖아?" "아니! 힘들어도 이게 나아. 죽어도 이 마음 그대로 죽을테야!" 지선은 친구 선주가 그저 이성에 눈을 뜨고 있는 중이 아님을 알고 걱정이었다. 최선주! 그녀는 지금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선주 그녀는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 추림이 정신을 차린 그 날... 같은 하늘아래 존재하는 어떤 여자의 믿음은 또다른 욕망에 의해 잔인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유리사랑 (27장/ 잔인한 시대.. 두번째) <실극화>
이건 멍청한 짓이다!
충동적인 자기 기만에의한 행동은 늘 후회와 자책을 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되돌리기 싫었다. 역시 남자들의 행동은 위선과 자기포장일 뿐이다.
"좋아! 오늘 유미랑 한번 취해보지뭐. 어때 유미야? 괜찮겠어?"
수연이 물어오자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야호! 좋았어! 내가 오늘 아주 확 망가진다! 인간 김석호의 진면목을 보여주겠어."
김석호가 활짝핀 얼굴로 호들갑을 떨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야! 영진아. 알아서 모셔라.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이 형님이 오늘 모두 책임진다."
정말 우연의 일치였다.
유미가 수연을 만나러 서울 강북지역으로 오고 김석호는 친구인 김영진을 만나려는
때에 석호가 수연에게 삐삐로 호출을 한 것이다.
화양리에서 우연한 만남을 가진 자리였다.
지난번 유미와 석호의 불미스런 일이 있은 이후 석호에겐 더없이 좋은 자리였고
유미에겐 피하고 싶은 자리였지만 지금 유미의 마음은 침참히 가라앉은 상태여서
자신의 버젓한 마음이 무엇인지 전혀 알고 싶어하지 않고 있었다.
유미의 모습은 무척이나 초췌하고 거칠어져 있었다.
수연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감기 기운이라 둘러댔지만 그 핑계를 대면서 그녀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뻔했다.
"영진아 너 되게 오래간만이다. 그치?"
수연이 작은 키에 뽀얀 얼굴을 지닌 영진을 바라보며 반가운 마음을 표하자 영진이
고개 주억거리며 말을 받았다.
"그래 한 이년 되었나? 추림이 자식따라 시골에 가서 만나고 한번도 못봤지?"
"그래? 어떻게 지냈어? 추림에게 물으니 그냥 열심히 산다고 하던데?"
김영진은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으슥해 보였는데 서먹한 상태임을 수연은 알고 있었다.
유미는 수연의 입에서 추림이 거론되자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면서 그리운 사람이다.
"아참! 야 수연아. 추림이 자식 사라진거 알아?"
석호가 수연에게 뚱한 얼굴로 말을 건네자 수연의 고개가 갸웃거렸고 유미는 얼굴을
굳혔다. 하지만 유미의 그런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사라졌다고? 어디로? 사라지긴 어디로 사라지냐?"
"아니야. 정말이야. 회사에다 전화했는데 그냥 모른데. 집에다가 전화도 해봤다."
석호가 조금 심각해져 말하자 영진이 의아해했다.
"추림이 사라져? 어디간거냐? 나 그자식 본지 서너달 됐는데. 그놈 거기서 짱박힌
채 죽어라고 일만 하는놈 아니었나?"
"아 새끼야! 그런게 아니라 회사에서 뭔가 알고 있는거 같은데 말하지 않는단 말이다.
경리들이 숨기고 있는거 같은데 말씀이야... 이놈 여자랑 살림 차렸나?"
석호의 농담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유미는 가슴이 갈갈이 찢어지는 느낌이었다.
'추림아! 나랑 놀자 응? 나 심심해.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나랑 조금만 놀아줘.'
'아이도 아니고 자꾸 그럴래? 너 자꾸 그러면 보내버린다.'
문 밖으로 들려오던 희미한 여자와 추림의 대화. 사실이 아니길 빌었지만 분명한
현실이었고 추림의 다정한 목소리는 어느 여자를 달래고 있었다.
"무슨 살림이냐? 농담을 해도 꼭 저렇게 재미없는 말만 한다니까."
수연이 타박을 하자 석호가 큰 눈을 더욱 치뜨고 수연을 쳐다보았다.
"너 몰라서 그러는데? 추림하면 여자고 여자하면 추림인거 몰라? 안그러냐? 영진아?"
"미친놈! 추림처럼 하면 여자가 마구 달라붙게 되어있어. 매너하면 추림이고 남자하면
그새끼가 정답이다."
영진이 옆에 앉은 석호의 등짝을 툭 치며 말을 정정해 버리자 석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가? 하긴 그놈이 좀 그렇기는 해. 그런데 진짜야. 그새끼 없어졌다니까!
한번도 이런적이 없어."
석호의 표정이 조금 심각해 졌는데 이제는 수연과 영진도 장난이 아님을 인식한
얼굴이었다.
"무슨일이 있겠지. 뭘 그리 심각해 하냐?"
수연이 맥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말하자 석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받은 경리가 떠드는 소리가 들렸어.
누군가에게 -언니 또 추림 찾는 전환데 어떻게 해야돼.- 그러니까 어디서 그러더라구.
대충 어디갔다고 둘러대. 한두번도 아니고... 그러더라구 이거 뭔일 있는거 아니겠어?"
석호의 말에 유미는 엉뚱한 상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연히 추림의 집을 찾아갔다가 알게된 사실!
추림에게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그것도 버젓이 추림의 집에 그와 함께
있는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가 거짓을 말했다.
위선이었고 기만이었다.
자신에게 행한 일은 무엇일까!
자신에게 주었던 그 많은 마음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고 자신은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까! 정말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만져주는 손길에 행복해 했고 입맞춤에 전률을 느끼는 환희에 빠졌었다.
그에게 믿음을 가졌고 단 하나의 진실을 발견했었다.
아니다!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함께 있던 여자는 그와 상관없는 여자인지도 모른다.
'우리 선주가 행복하길 바라는건 추림의 마음이라는거 알지? 니가 이러면 나도
힘들어진다는거 항상 기억해라. 이리와라 그렇게 힘없이 굴지말고.'
그가 어떤 여자에게 말한 그 의미가 무엇일까!
그는 그 여자를 안아 주었을까? 자신에게 한 그 로맨틱한 행동을 보여 주었을까?
결국... 추림은 자신에게 마음을 다 주지 않았다.
자신을 안았으면서... 자신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으면서... 날 기만한 것이다!
차라리 그때 가지 말것을... 서점에서 펴본 칼릴지브란의 시집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에게 선물하고 싶어, 깜짝 이벤트를 하려던 유치한 행동이 후회스러웠다.
나쁜자식... 내게 아니라고 말해줄래! 그 여자를 좋아해도 상관없으니까 날 더
좋아한다고 말해줄래! 조금만 그 여자보다 날 더 좋아해줄 수 있다고 말해줄래!
"야 유미야! 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불러도 대답도 안하고! 뭐야? 기분 나쁜일
있는거야?"
수연이 유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몇번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자 아예 쥐고 흔들어
버린것이다. 그제서야 수연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수연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술들 안마셔?"
유미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킬새라 호프잔을 들고 수연에게 내밀어 자신을 감추었다.
"...그래서 추림이 자식이 혼자 거길 들어간거야. 미친놈! 우리 그때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야 김수연. 너 그때 운거 기억나지?"
석호가 영진에게 지난 구정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수연을 놀릴
심산으로 말 했는데 수연은 아무런 반응없이 고개를 끄덕여버려 석호의 의도가
빗나가 버렸다.
"뭐야? 김빠지게... 하여튼 추림이 그 자식이 혼자서 거길 떡하니 들어가서 멀쩡히
걸어 나올 때 난리도 아니었다. 우린 크게 다칠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들어가는건데 히힛!"
"그럴 용기나 있고?"
석호가 히히덕 거리자 수연이 이번엔 반대로 놀리니 석호가 눈을 치떴다.
"아니 김수연씨! 날 어떻게 보시는겨? 전설도 못들어 봤어? 강원도에서 벌어진
팔십인의 혈투에 대해? 그때 선봉이 나였고 추림은 들러리 였다고. 이거 왜 그러셔?"
수연과 석호가 별일도 아닌것을 가지고 투닥거렸다.
유미는 그들의 장난을 의미없이 지켜보았다.
추림. 그의 친구들은 만나면 늘 그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평범하게 살면서 그는 가끔 이렇게 도마위에 올려진 생선이 될 일들을 벌인다.
그가 보고싶었다. 석호의 말대로 그가 사라졌다면... 혹 여자와... 그건 아닐것이다.
그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찮게 여길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보다 열심인 남자다. 하지만 그날 목격한 일들이 자꾸 머리속에서 끊임없는 장면을 만들어냈다.
질투! 욕심! 애증!
왜 자신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도 못했을까!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가 물어보면
될 수도 있는데... 차라리 그날 만나야 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유일한 믿음이라 여긴 진실이 어그러지고 있었다.
기댈 수 있는 작은 언덕이 무너지고 있었다.
분열... 자신의 마음은 또다시 그렇게 흐트러지려 하고 있었다.
"초면인데 잘 부탁합니다. 제가 술한잔 따라 드려도 되지요?"
영진이라 소개한 수연의 친구가 맥주병을 들며 말을 걸어왔다.
이남자...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이 무척 끈적거린다. 느낌이 썩 좋지가 않은 친구다.
"네에......"
힘없이 대답한 유미가 잔을 내밀자 하얀 거품을 일으키며 맥주가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채워졌다. 유미가 영진을 무심히 바라보자 그곳에 영진대신 추림이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 착각에 빠져 들었다.
"무척 인상적인 분이시네요. 자주 뵐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가 말을 건네왔지만 머리속에 윙윙 거리는 공명음만이 울려 퍼지며 심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추림... 내가 찾아 가겠어!'
* * *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름위에 올려진 육신처럼 붕 뜬듯한 허탈감만이 느껴졌다.
머리속이 빙글거리며 심한 구역질이 느껴졌고 목안이 따끔거렸다.
팔다리가 없는듯 존재감을 잃어버린것 같았다.
꿈을 꾸었다. 분명히 그것은 기억했다. 여전히 유미의 손을 잡은 채 걷다가 그녀가
사라지는 꿈이었고 자신은 끝없는 길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순간 유미와
둘만의 공간에서 원색적인 욕망을 불사르는 행위에 몰두했고 파괴적인 환희에 눈물을
흘렸다.
'내가 선주의 오빠되는 사람이다... 내가 선주의 오빠되는 사람이다... 내가 선주의....'
그 말이 수도없이 떠오르며 엄청난 고통이 육신을 잠식한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렇지... 난... 죽...었나? 아무것도 안보여!
"무...울......"
추림의 입에서 미약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곁에서 듣지 않는다면 전혀 들리지 않을 소리였다.
"응? 지선아! 추림씨가... 세상에 말했어!"
야구모자를 눌러쓴 선주가 사인 입원실에 가득한 사람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치며 지선을 불렀다.
"추림아! 뭐라고? 다시 말해봐! 뭐라고?"
선주는 무척 서둘고 있었다.
분명 뭐라고 말한 것이 확실했다. 단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스쳐가는 천만분의 일
일지라도 분명히 기억했다. 추림이 말한것을 들었다. 아주 낮고 미약했지만 그의
음성만은 또렷하게 기억했다.
"선주야 너 왜 그래? 조용히 해. 창피하게."
밖에 나갔다가 막 들어오는 지선이 선주가 크게 소리치는 것을 문밖에서 들은터라
주위 사 람들을 둘러보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지선아. 추림씨가 말했어! 정말이야. 깨어났다고! 가만... 조용해봐!"
선주가 지선에게 말하다가 추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빠짝 대고 귀를 기울였다.
"무...울......"
"......!"
"물......!"
"물? 물 달라고? 물... 물달래... 들었지 그렇지? 봐 깨어났어! 물달래 추림이 물을...
지선아 물 어딨지? 물... 여기... 이걸로... 어떻게 줘야지?"
선주가 무척 서두르며 허둥거렸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지선은 마음이 아파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선도 들었다.추림이 깨어났다. 확실히 -물- 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순간 의사의 당부가 떠올랐다. 그가 깨어나거나 정신이 들면 바로 알려 달라고 했다.
"선주야! 잠깐만. 먼저 의사선생님에게 알려야 해. 그러다가 잘못되면 어떻하려고?"
지선이 선주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물병을 들고 막 추림의 입에 가져가려던 선주의
어이없는 행동이 저지되었다.
"안돼! 추림이 물 달라고 하잖아! 줘야해. 다시 잠들면 어떻해! 물이라도 마시게 해야지."
선주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피부가 검게 변해 있었다.
눈물이 방울거리게 맺힌 선주는 지금 확실히 제 정신이 아니었다. 삼일전에 집을
몰래 도망쳐 나와 바로 이곳으로 와서는 여지껏 잠을 자지도 먹지도 않고 있었으니
사람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전에 이미 몸이 지치고 심적으로도 정상이 아닌 선주였다.
자신들이 이곳에 와서 그 다음날 입원병동으로 옮겨진 추림의 곁을 단 한순간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추림씨가 더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니? 제발 침착하자 응? 먼저 의사를
부르고 기다려보자 응?"
"어? 그래 그럼 빨리 의사를... 내가 다녀올께!"
"아니 넌 여기에 있어라... 내가 다녀오마."
지선이 선주를 말리고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침 저녁 회진 시간이 되어서 의사는 간호사와 인턴무리를 이끌고 오분도 안되어서
들어왔다.
추림의 손을 꼭 잡고 훌쩍거리던 선주가 한쪽으로 물러났다.
"물을 찾았다고요?"
사십대의 의사는 무척 피곤한 얼굴로 지선을 바라보며 묻고는 청진기를 추림의
가슴에 대어 보고 눈을 뒤집어 보며 이곳 저곳을 살폈다.
"예. 물을 찾았어요. 무척 힘없는 소리였는데... 확실했어요."
선주가 의사가 그냥 갈새라 급하게 말하며 무언가 바라는 얼굴로 의사를 응시했다.
선주를 힐긋 바라본 의사가 추림의 얼굴을 손으로 건드렸다.
"이봐요! 이추림씨? 내말 들려요? 정신이 납니까?"
의사가 추림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무...울... 무울!"
추림의 입에서 다시 미약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음... 깨어나려나 보군. 무척 빠른데?"
"아니 선생님? 진작에 깨어나야 하는거 아닌가요?"
선주가 의사에게 물었다.
"이 사람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요. 몸의 기관도 많이 저하되어 있었고.
추위에 노출되어 있던터라 이십대의 몸이 노인같은 상황이었단 말이요. 한 열흘이나
보름정도 걸릴거라 예상했는데... 무척 강한 사람이군."
머리속에서 무언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기계의 엔진 소리같은 것이 회전하다가 멈추고 다시 도는듯한 이상한 소리처럼
들려왔다.
사람이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다. 사람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뜨려 했는데 천근 만근처럼
눈꺼풀이 무겁기만 하다.
무언가 얼굴을 건드리고 있다. 느껴진다. 거칠지만 따듯한 손길이다.
숨소리도 느껴진다. 사람이 확실하다!
"이추림씨! 눈을 떠 봐요. 내 말이 들리면 천천히 눈을 떠봐요.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눈을 뜹니다. 자 해봐요!"
인간의 육체는 오묘하다.
무엇인가를 해본 일이면 육체는 그것을 기억하고 저장한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그
일을 하게되면 자연스러워 지려고 스스로 알아서 방응하려 하는데 지금 추림이 상황도
그랬다.
여기서 그가 깨어난다면 그는 앞으로 빠른 회복을 보일 것이고 다시 잠든다면 무척
더디고 느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좋다. 의사가 그것을
알기에 그를 강제로라도 깨우려는 것이다.
"이봐. 물을 가져와. 깨끗한 솜에 묻혀서 가져와."
의사가 간호사에게 말하고 추림의 몸상태를 다시 살폈다.
약 붕대를 풀러 상처난 곳들을 보려는지 가위로 어깨와 복부 부근의 붕대를 잘라냈다.
심한 비린내와 소독약 냄새가 퍼지며 추림의 상처가 드러났다.
무려 서른 여덟 바늘이나 꿰메어진 추림의 오른 허벅지의 관절 상처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칼에 깊숙히 찔려 혈관이 절단되었고 찔린 상태로 거칠게 움직여 상처가
더욱 벌어지고 흉하게 나 버린 것이다.
허벅지 곳곳과 장단지 어깨, 옆구리가 온통 멍투성이고 상처 투성이었다.
얼굴이 시퍼렇게 멍자국이 나 있고 머리에도 붕대로 감겨진 상태니 그의 모습은
시체에다 염을 한 모습 같았다.
의사가 익숙하게 추림의 상처를 치료하고 소독하다가 간호사가 건넨 솜뭉치를 추림의
입에다 물려 주었다.
아주 느리고 조금씩 물이 넘어갈 것이다.
오래도록 정신을 잃고 있다가 깨어난 환자에게 많은 양의 물을 마시게 하는건 죽으라는
행위다.
물이다!
차고 시원한 느낌이 따갑고 메마른 목을 적시고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흘러 들어왔다.
청량한 생동감이 전해져 온다.
살아... 있다!
몸의 이곳 저곳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진다.
이건... 좋은 반응이다. 육신이 살아있다.
힘이 느껴진다. 아직 무기력하고 기운이 없지만 확실히 기운이 난다.
뿌연 시야가 반갑다. 어른거리는 것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경물이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단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추림아! 흑... 추림아!"
선주가 추림이 눈을 아주 느리게 뜨자 의사의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가가며 그를 부르고 눈물을 흘렸다. 이미 선주의 정성은 외과 병동에 유명해져
있었다.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는 괴물 최선주!
"정신을 차렸군! 내가 보여요? 난 외과 전문의 이형수라고 합니다. 알아 들었으면
눈을 깜박거려 봐요."
의사가 추림의 상태를 시험하려는지 그렇게 말하자 추림이 한동안 촛점없는눈을
허공에 두고 있다가 느리게 눈을 깜박 거렸다.
"다시 해봐요. 이번에 두번!"
추림이 반응이 이제는 조금 빨라졌다. 두번의 눈짓을 하자 의사가 만족한 얼굴이
되었다.
"이제 회복하면 좋아질거요. 이외로 강철같은 체력을 지녀 회복 속도도 그만큼 빠를
거요. 조금 더 지켜보다가 치료문제를 조금 달리 합시다. 최선주씨? 그렇게 좋소?"
의사가 그렇게 물을 정도로 선주는 대놓고 기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얼마나 좋으면 손을 맞잡고 마구 흔들며 웃고 있었다.
"그럼요!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참나! 그 정도로 죽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는데...
최선주씨 상태를 한번 보시기나 하시오. 누가 더 환자 같은지!"
"히히... 뭐 상관 없어요. 자고 먹고 씻으면 그만이니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하하하!"
"호호호!"
그러자 의사는 물론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굴하지 않는 선주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휴. 정말 못 말리겠어요. 이제는 간호실에 과일이나 먹거리도 안 가져 오시겠지요?"
한 간호사가 조금 아쉬운듯 말했다.
선주가 유명해진 것은 비단 추림을 돌보려는 정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얼마나 간호사들을 쫒아 다니면서 귀찮게 구는지, 하루에도 서너번을 추림에게 가
보라며 생떼를 부렸다. 그러다가 아예 간호사들을 구워 삶아 버렸는데 그 방법이
간식거리였다. 간호사들은 횡재를 했지만 대신 추림을 슬쩍 찾아가 살펴보는 시늉을
해야했던 것이다.
모든 것들이 뚜렷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그래... 선주 네가 있었구나... 지선씨도... 어떻게 여기에 있을까?
선주... 너의 오빠가 내게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모르고 있으면
좋겠다. 넌 분명 힘들어 할텐데!
추림의 그 생각은 모두 틀렸다.
모든것을 예측한 선주는 지금 추림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하고 있지
않았다. 최진규의 업! 그의 잘못을 대신 갚아 나가고 있음을 그는 현재 모르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때아닌 즐거움이 사라진 병실이 다시 원래의
우울한 상황에 젖어 들었다.
4인 병실인데 이곳은 추림처럼 심각한 환자들이 입원한 곳이었다.
그러니 환자나 보호자의 마음이 편할리 없는 것이다.
"선주...야!"
추림의 입에서 선주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선주가 얼른 추림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맟추며 바라보았다.
"나 보여? 보이는거지?"
선주의 물음에 추림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미약하게 끄덕거렸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추림아! 흑흑... 니가 잘못 될까봐 난......!"
선주가 울자 추림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얼른 전처럼 되었으면... 차라리 이것이 꿈이었으면...
선주를 사랑해 주지도 못하면서 이런 시련이라니!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뜬 눈이 다시 무거워졌다.
잠들어 버릴것 같았다.
"선주야... 그러지...마. 너 많이 힘들...어 보여. 나 다시 일어나면 밝은 니모습 보고...
싶어 알...았지?"
선주에게 힘겹게 말한 추림이 희미하게 웃음짓다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선주의 엉망인 모습을 확인한 추림은 애써 그렇게 부탁한 것이다.
추림의 말에 감동한 선주가 입을 꾹 다물고 눈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다.
"들었지? 추림씨도 너 이런 모습 원하지 않잖아? 좀 자고 씻고 먹고 쉬고... 알았니?"
지선이 선주의 등을 두르리며 말했다. 선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쳐냈다.
"그러고 보니까 나 되게 피곤하다. 이제 잘 수 있을거 같아. 나 지금 너무 기분좋아.
지선아! 나 추림씨 되게 좋아하나보다 그치? 히히히."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선주의 눈빛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지선은 선주가 변해가고 있음을 예감했다. 며칠사이에 큰 일을 겪은 선주는 점점 더
성숙해져 가는것 같았고 진짜 여자로 변모해 가는 중임을 직감했다.
"선주야. 너 정말 추림씨를... 힘들어 질거라는 걸 알잖아?"
"아니! 힘들어도 이게 나아. 죽어도 이 마음 그대로 죽을테야!"
지선은 친구 선주가 그저 이성에 눈을 뜨고 있는 중이 아님을 알고 걱정이었다.
최선주! 그녀는 지금 열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선주 그녀는 미처 알고 있지 못했다.
추림이 정신을 차린 그 날... 같은 하늘아래 존재하는 어떤 여자의 믿음은 또다른 욕망에
의해 잔인하게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