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제 >-1

네시사십오분..2006.06.10
조회912

 

<나 항상 하늘을 등지고 살았어.

내 등뒤에 뭐가 있는지 보려고 하지 않았어.

내 앞에 있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지.

그것이 비록..

쓰레기 같은 세상일지라도..>



#


'6시 20분'


민석은 시계를 들여다 보고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평소 집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교해볼때 오늘은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전처럼 늦게들어갈때도 잠들때까지 할 일이 없어 심심해했었는데 오늘은 어떻게 시간을 때우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때 민석의 눈에 비디오 가게가 들어왔다. 집에 있는 플레이어가 거의 사용을 안한지라 작동이나 될런지 의문이었지만, 그래도무료한 시간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으로 가게문을 열었다.



#


-어서오세요


아침에 들여온 최신영화를 보고 있던 연희는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았다. 방금전까지 이마에 파리가 앉아도 모를 정도로 영화에 열중해 있었지만, 손님이 오자 언제그랬냐는 듯 금방 전원을 꺼버렸다.


-뭐 찾으시는 영화 있으세요?


남자가 쉽게 나아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자, 연희가 재빨리 다가서며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처음으로 온 손님 같았고, 그래서 어디에 무슨 코너가 있는지 잘 모른 다고 생각해서였다. 자칭, 타칭 이동네에서 제일로 친절한 비디오가게 주인 바로 최연희였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꼭 영화제목이 아니라도 되요. 장르만 말씀하시면 제가 좋은 걸로 추천해 드릴수도 있어요.


연희는 미소까지 더해가며 자신있게 말했다. 영화를 좋아해 이 비디오가게에 거의 모든 영화를 다 섭렵하고 있었던 연희는 재밌는 영화, 슬픈 영화 손님의 취향대로 골라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런 연희의 실력을 인정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런 적극적인 친절에도 남자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느의 무뚝뚝한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됐다는 말이나 예의상의 미소..심지어 손사래조차도...


연희는 남자가 자신을 말을 씹었다는 것을 대번에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연희가 아니었다. 한번 온 손님은 꼭 단골로 만들고 마는 그녀였다. 연희는 한층더 밝은 목소리로 그에게 다가갔다.


-뭐 필요한거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세요..


옆에 다가온 그녈 느꼈는지, 드디어 남자가 한마디 던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은 여전히 앞의 비디오 목록을 향한채.


- 원래 그렇게 말이 많아요?


순간 연희는 무안해졌다. 자신의 친절이 오히려 딴 사람에게는 불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아니요. 죄송합니다.


풀이 죽어 꾸벅 인사를 돌아가려는데, 돌연 그 사람이 연희를 잡았다.


- 이 영화는 무슨 내용이에요?


그는 빼곡이 꽂여있는 비디오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연희의 표정이 금새 환하게 바뀌었다. 그것은 그녀가 두 번씩이나 본 영화였다.


자신이 아는대로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제야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인지 연희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이었건만 그는 여전히 연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연희는 이 남자가 자신의 설명를 듣고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손님이라도 이건 너무하다.


-저기 제 얘기 듣고 있어요?


그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연희는 확실히 이 남자가 자신의 얘기를 듣고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은 말을 시켜놓고 딴짓하는 ..그러니까 자신을 놀린 것이다.


연희는 더 이상 친절을 베풀 맘이 딱 사라졌다.


-계속해요..듣고 있으니까.


갑자기 말을 멈춘 연희에게 그가 툭 한 마디 던졌다. 연희가 설명하고 있는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의 줄거리를 읽으면서..


화나는 마음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 다시 영화에 대해 설명하려다, 연희는 급기야 그 사람을 돌려세우고 말았다.


그러자 처음으로 그와 눈이 마추쳤다.


-저기요. 사람이 말을 할땐 이렇게 서로 마주 봐야 하는 거에요.


난 당신 귀에다 일방적으로 떠드는 헤드폰 따위가 아니니까...



<나 몰랐을거야.

그때 니가 날 억지로 돌려세우지 않았다면..>



제법 강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선 여전히 대답히 없었다. 그냥 연희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뭐야..이남자!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연희는 약간 뻘줌해졌다...


그것도 잠시 연희도 점점 그남자의 눈빛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왜이러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재차 그에게 물었다.



-저기요..내말 듣고 있냐구요...?



<내 등뒤에 그토록 파란 하늘이 있는 줄은..>



마침내 남자는 여전히 연희의 얼굴에 온신경을 집중한채 서서히 입술을 움직이기시작했다.


-응.


보고 있어요..


보고 있다고...!



<내가 ..

그 하늘을....

..................

그토록 동경하게 될 줄은..>




#



여러 개의 사업체의 큰 지분을 갖고 있지만 영훈의 본 직업은 사채업이었다. 그리고 그는 폭력 조직의


보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7년전 불의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고 말았다. 남들은 그의 다리로


는 더 이상 조직을 이끌 수 없기 때문에 보스로서의 인생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신만의 방법


으로 조직을 다잡았다. 다행히 그의 충직스런 부하들도 그의 뜻에 따라 주었다.


그는 거의 집밖을 나오지 않았지만 전혀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다. 모든 회의나 보고는 전화나,,컴퓨터


로 인해 실시간으로 이루어졌다..그는 그것도 모자라 시시때때로 부하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보고를 받


았다. 다리가 불편함에도 영훈은 어느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활동하여 자신의 사업을 불려나갔다. 영훈


이 이처럼 짧은 시간안에 크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치밀한 계획과 추진력,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인정에 이끌리지 않는 냉철한 성격 때문이었다.


오늘도 그의 사무실이자 서재에는 검은 양복의 많은 부하들이 영훈에게 보고를 하기위해 와 있었다.


영훈은 큰 소파위에 편안히 앉아 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오직 영훈만을 향해 다소곳이 앉아 있는 독수리의 박제가 있다.


그는 그 박제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결국은 못받아 왔단 말이지.


건장한 사내 둘이 영훈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네 사장님..

아 그놈이 지 마누라 죽는다니깐 아주 간이 배밖으로 나왔더라구요..

마누라 죽을 병 걸렸다고..마누라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거라면서..해볼테면 해보라는 식으로...

아주 맛이 간 것 갔더라구요..


-한심한 녀석들..


영훈은 박제를 한번 더 쓰다듬었다.

이런 인간들보단 차라리 박제가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 민석이 들어왔다.


-부르셧습니까..사장님


꾸벅 절을 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오면서 얘기는 다 들었지?


-네..


-받아올 수 있겠냐..


먼저 일을 나갔던 사내들이 흠칫 놀랐다. 그리고 이내 민석도 어쩔 수 없을거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일을 수없이 했던 자신들도 못한 일을 그동안 서류만 훓어보던 민석이 해결할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민석의 조직내 직함은 기획실장이었다.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여 투자하고, 영훈대신 기업체 사장들을


만나고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민석은 조직내에서는 드물게 학구파에 유학파였다. 영훈


이 애초에 그런 쪽으로 계획하고 아낌없는 투자를 한 결과였다. 민석의 안목과 능력은 그가 사업을 확


장하고 유지하는데 큰 몫을 햇다. 그는 조직과 영훈에게 없어서는 안될 보배 같은 존재엿다. 영훈은 일


찌감치 민석을 앞으로 자기의 조직과 사업을 이끌어 나갈 후계자로 점찍어 놓았다.



민석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일주일 안에 해결하겟습니다.


민석의 입주위에 건조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믿어보십시요


영훈은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영훈도 이번건은 어느정도 포기한 상태였다.. 이미 수차례 찾아가 엄청난 협박과 상해를 입혔지


만 꿈쩍도 안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목숨을 버릴생각으로 버틴다면 도저히 당해낼수 없다는 것


을 영훈은 알고있었다. 그런데 민석은 너무나 간단히 해결을 약속했다.


민석이 나가자 영훈을 이십년동안 보필해왔던 비서실장 박성철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엇다.


-너무 무리한 일 아닐까요?..전에 나갔던 놈들도 패고부시고 별의별 짓을 다 했다는데요..


영훈이 다시한번 박제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두고보면 알겠지.




#


한민수는 한달전에 500만원을 사채로 빌려썼다.


처음엔 차를 담보로 맡겼었지만..돈이 궁해지자 그 차까지 팔아버렸다..


돈이 필요했던 것은 부인의 치료비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밑빠진 독에 물붇기 꼴이 됬고, 그의 아내


는 병도 고치지 못한채 죽을 날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내가 그렇게 되자 한민수도 세상 살기가 싫어졌다. 그동안 자신이 부인한테 못해준 것만 생각나고,,


평생 고생만하다 병에 걸린 부인이 불쌍해 미칠 것 같았다. 부인을 위해서라면 한민수는 어떡해서든지


갖은 방법을 다 써보고 싶었다. 병원에선 수술해도 가망성이 없다고 했지만, 며칠만이라도 아내의 생


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기꺼이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빚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또 다른 사채를 빌렸다.


‘어짜피 영희죽으면 나도 죽을 껀데 뭐..

그깟짓 나쁜놈들 돈 갚을 필요 없어..


오늘도 사채업자에게 입에 담지 못한 욕설과 협박을 들었지만, 한민수는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술은 이틀후로 잡혀 있었다.


한민수가 병실에 들어와보니 부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검사실에 가 있을 시간이다.


널부러진 이불이 안쓰러워 정리하려는데.. 이불위에 어떤 서류봉투가 있는게 보였다. 그 서류봉투를


열자 갑자기 한민수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니..이게..


거기에는 몇장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자신과 어떤여자가 호텔방에서 정사를 나누는 모습을 찍은..


몇분 후 그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창에 발신자표시제한이란 글씨가 깜박거렸다.. 평소 이런


전화는 아예 받지 않곤 했지만, 뭐에 이끌린듯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웃음소리..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듯한 날카로운 비웃음이었다.


-지금 표정이 어떠시나.~

하지만 내가 궁금한건 당신표정이 아냐.


한민수의 숨이 저절로 멎어졌다.


-그걸 본 당신 아내의 표정이지..

살날이 얼마 안남은..당신아내의 표정..

훗..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악마엿다.

한민수는 부들부득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움켜쥐었다.

마치 수화기 너머속의 상대를 부셔버리기라도 할 듯이..


-이.......... 인간 말종.. 니네가 사람이야?


-하! 하! 그럼 당신은?

아내가 병실에서 죽어가는데..

자기물건 하나 못다스려, 새파랗게 젊은 애랑 모텔방에 직행한 당신은 성인군잔가?

헌신적인 남편인양, 죽어가는 부인을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바칠 것인양 행동하는 니 모습..

위선적이고 역겨워!


삼일전이었다. 그일이 일어난것은..

그날도 하루종일 아내병간호를 하고 아내가 잠시 눈을 부치는 사이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을 먹게 되었다. 그런데 친구에게 급한 전화가 걸려와 도중에 먼저 술값을 지불하고 가게 되었고..비싼술이 아까워 남은 술을 마저 마시다..유독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그 술집아가씨와 그렇게 된 것이다.

만취해 있었고 거의 일년동안 성욕을 채우지 못한 상태라

자신도 모르게, 어쩔수 없이.. 저질러 버린 일이었다...

다음날 아내에게 너무나 미안함 맘이 들어, 자신의 행동이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스러웠다.

그런데..어떡해..그 사진을 찍었지?


-긴말 하지 않겠어.

내일까지 500만원 현찰로 가져와 너 돈있다는 거 알아..


그건 아내의 수술비였다.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그건 안돼..절대로..


-그럼 할 수 없지..당신의 부인에게 그 사진을 보여주는 수밖에..

당신 아내는 죽는 순간까지 남편의 부정을 보며 눈감게 될거야..

머릿속으론 자신이 아프니까 어쩔수 없었겠지.. 라고 이해하겠지만..

과연 마음은 그럴까?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 지질거야.

아니면 남편의 성욕조차 채워주질 못하는 자신의 몸이 더없이 비참하고 싫어지겠지..

이렇게 사느니 빨리 죽어버리는게 낫겟다는 생각까지 들지 않을까..

훗..


한민수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루 흘러내리고 있엇다.

그 사진을 영희가 본다면...생각만해도 무서웠다.


-다시한번 말할게.

내일까지야..

만일 돈을 안가져오거나..

허튼 수작 부리는 날이면

내가 너에게 약속하지. 기필코

그 사진을 니 아내에게보여주겠어

내 목숨을 걸고서라고..



#



민석이 통화를 마치자 시끌 벅쩍하게 밥을 먹고 있던 민석의 부하들이 저절로 조용해졌다. 모두들 그를 대단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민석은 아무일 없다는 듯이 남을 밥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홍기를 향해 말했다.


-내일 니가 가서 받아와..준비할꺼야.


-네...근데 형님..어떻게 그런 방법을 다 생각해 내셨습니까?


-홍기야..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어..절대 무시할 수 없는.

난 그 약점을 이용한 거 뿐이야.


-약점이라..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 약점을 찾아내셨습니까?..


-아주 간단해..

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게 무엇인지만 생각하면 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것..그것이 약점이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몸이나 목숨따위가 약점이지만

이자식의 그것은 자기 부인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내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신뢰겠지..


-한민수는 결국 자신의 목숨보다 부인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거군요..

왠지 그자식이 대단하게 느껴지는데요....


-훗! 대단하긴 뭐가..그자식도 남들하고 별반 다를 거 없어. 그 자식은 단지 아내에게 끝까지 헌신적인 남편의 모습으로 남고 싶은 거야..그동안 잘 쌓아온 신뢰가 이제와서 무너지는 게 아까워서..

결국 지 자신을위해서라구..

그럼 나 그만 들어간다..


-안녕히 가십시오. 형님..


네 다섯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민석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다시 자리에 앉으며 홍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형님은 왠지 인간이 아닌 거 같애..


그러자 옆에 앉은 현수가 그의 말을 받아쳤다.


-왜? 난 멋있던데..똑똑하고....바늘로 찔러도 피안방울 안나올것처럼..냉철하잖아..

이런 일엔 제격이지..


-약점이 없어..아까도 형님이 말했잖아..인간은 누구나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저형님한테서는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난 저형님이 크게 웃거나 크게 화내거나..또 크게 좋아하거나, 실망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어..

............

건조한 사막처럼...

마치 심장이 메말라 버린 것 같애..



#


민석은 오랜만에 유민이 아르바이트로 일하고 있는 편의점에 들렀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