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생활 동안 가장 듣기 좋았던 호칭이다. 이름은 수연이. 나이는 그때 다섯이었다. 그애는 나를 창수삼춘이라고 불렀다. 수연이는 얼굴이 약간 포동포동한데다 말수도 적어 의젓하기 그지없는 애였다.
수연이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하였다. 수연이는 의족을 하더라도 여간 고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허벅지 아래로 절단해서 의족은 허리에 묶어야 하고, 성장뼈도 없으므로 수시로 의족을 큰 걸로 바꿔줘야 한다. 수연이의 가슴에 얼룩진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을 것이다. 의족을 갈 때 마다 아물만한 상처를 건드는 꼴이 되니 언제 마음 편할 날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 다섯살인데.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시고 형편도 약간 넉넉한 편이므로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수연이 아버지는 수연이한테 진 빚은 평생 갚은 수 없다고 울먹이신다. 수연이가 얌전해서 혼자도 잘 노는데 그것이 너무 기특해서 천원짜리 한장 쥐어주었다고 한다. 수연이는 그걸 들고 가게에 나가다가 그만 트럭에 치인 것이다. 수연이 아버지는 애한테 천원짜리 쥐어 준 것을 통탄해 하신다.
수연이는 정말 귀여운 모습으로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큰 차 아저씨가 그랬써어.”
“그 아저씨 미우니?”
“안 미워어.”
말 끝을 올렸다 내리면서 길게 끄는 수연이의 말투는 너무 귀엽다. 그러나 처음에 수연이의 고통에 찌든 목소리를 들을 때는 너무 안타까워서 정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도 하루에 한번씩 석고실에서 드레싱을 할 때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어린 것이 오죽했겠는가.
“아가 안 아프게 해줘요.” 하면서 울먹이는 수연이의 제주도 방언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어찌 어렇게 서른 살 먹은 다 큰 놈이나 다섯살 먹은 아이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심정이 어쩌면 이리 꼭 같을 수 있을까? 나도 ‘선생님 이왕이면 안아프게 좀 해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놈의 체면 때문에 입에 솜 물고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의사들은 수연이의 비명과 신음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수연이의 고통을 외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혹 얄미웠다.
석고실에서 치료받으며 처음 수연이를 보았는데 너무나도 애처로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수연이 병실로 휠체어를 끌고 들어갔다.
“아프더라도 꼭 참고 의사선생님 말씀 잘들어야 한다. 그리고 밥 많이 먹고, 응?”
처음 보았지만 나는 막 떠들어댔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어서였다. 그때 내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턱뼈와 광대뼈가 부러져 철사줄로 위아래 이빨을 꽁꽁 묶어 둔 상태여서 입을 벌릴 수가 없었으니,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더구나 입술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이빨을 묶고 있는 철사가 흉칙하게 비쳐서 무슨 괴기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에 이빨이 그 꼴이나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영양주사만 맞고 음료수 정도만 먹으며 50일을 보냈으니 얼굴도 해골바가지였다.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아프리카에서 왔냐’며 놀려댔겠는가? 그 똑똑하고 야물딱진 양현이 아들 의창이도 나를 보고 바들바들 떨었는데...
나는 기껏 한다고 했지만 수연이가 그 몰골의 나를 보고 위안을 얻기는 무슨 위안을 얻었겠는가. 그저 꿈속에만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기도 안했으면 다행이지. 수연이 어머니도 내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 참 많이 다친 모양이구나’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말은 안하셨지만 ‘저사람 몰골 되게 흉하네. 수연이가 무서워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수연이를 만나서 어느덧 서로 안보면 견딜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수연이는 심심하면 창수삼춘 방에 가자고 졸라대서 내방에 놀러온다.
수연이는 내방 입구에서 부터 ‘삼추우---운’하고 목이 늘어지게 나를 부른다. 내가 못들은 체하고 ‘누구냐’라고 하기라도 하면 ‘나야 나-’한다. 자기를 몰라줘서 무척 억울하다는 태도가 아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나를 측은히 여기되, 내 자존심이 안상하게 가르쳐준다는 투다. 내가 뭘 물어봐도 ‘그것도 몰라’라는 투가 아니다. 차분하게 나에게 진실을 일러주되 뻐기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병동에서 수연이의 제일 친한 벗으로 명성을 날렸다. 병원에서 수연이 모르를 사람이 없으니, 나는 수연이 덕에 유명해진 것이다.
수연이랑 나는 매일밤 산소치료를 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이다. 피부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기 위해 고압산소통에서 30뿐씩 있어야 한다. 나랑 수연이랑 그리고 몇사람이 더 밤이면 산소통이 있는 성형외과 병동으로 옮겨서 산소통에 들어간다. 산소통에 들어가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동질성이 생겨서인지 7층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대부분 중환자들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병동을 옮길 수도 없고, 더구나 산소통에는 더욱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너 사람이 필요한데 환자가족들끼리 품앗이 같이 서로서로 도와서 산소통에 집어 넣는다.
이렇게 수연이랑 매일 밤 만나고, 가족들끼리 서로 필요한 관계가 되니까 수연이랑 사귀기에는 내가 조건이 제일 좋은 편이지 뭐.
산소통에 몇차례 들랑날랑 하니까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야 뭐 피부가 워낙에 형편없으니까 산소치료를 그렇게 오랜동안 했어도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수연이랑 수연이 엄마는 얼굴이 뽀해 지는 것이다. 산소치료가 미용에 좋은 것이래나. 수연이가 나이가 어려서 혼자 산소통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수연이 엄마가 수연이를 안고 산소통에 들어가는데, 며칠 지나니까 수연이 엄마가 얼굴이 희뜩희뜩해 지는 것이다.
산소통이란 게 반원통형으로 ‘관’만한 크기라고나 할까. 그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산소통 압력을 높이기 위해서 문을 꽁꽁 잠근다. 물 샐 틈 없을 뿐 아니라, 공기방울이 샐 틈도 없다. 수연이 엄마가 수연이를 안고 그속에 드나들기를 몇차례 하니까 마음고생에도 불구하고 낯빛이 정말 좋아지는 것 아닌가. 수연이 엄마는 그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상태가 호전되자 동네 작은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을 옮긴 후 걸어다닐 정도가 되자 수연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하루종일 아양 떤 결과 외출허락을 받았다. 그림카드하고 음료수 좀 사들고 백병원을 찾았다.
나는 너무 좋았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랫만에 반가운 사람만나면 부둥켜안고 울어대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하겠다. 수연이는 통통해졌다. 내가 병원을 옮긴 후로는 별로 나돌아 다니지도 않고 자기 침대만 지킨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나를 봐도 시큰둥이다. 이 무딘 나도 감정이 울컥하여 눈물이 나올 지경인데, 이 녀석은 아는 척도 안하고 그저 지 장남감 가지고 놀이에만 열중이다.
수연이 엄마랑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면서 계속 수연이에게 말을 붙였다. 그림카드를 보여주고 글자와 그림을 비교하면서 이게 뭐냐고 자꾸 묻자 마지못해 하는 척 하면서 입을 연다. ‘짜식 진작 그럴 것이지 내숭은...’
30분쯤 지나자 드디어 예전처럼 환히 웃으며 말을 붙여온다.
“엄마가 다리 만들어주면 집에 갈꺼다! 기태오빠도 다리 만들어 가지고 집에 갔따.”
나는 또 울컥했다. ‘녀석아 다리를 만들기는 뭘 만드니.’
백병원을 다시 찾아가 수연이가 목발을 짚고 걷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뻤다. 수연이의 목발은 하얀 빛이 도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또 쪼끄만했다. 마치 장남감 목발 같았다. 수연이는 어느새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다. ‘이제 엄마가 다리만 만들어 주면 집에 간다’고 그랬다.
수연이 부모님은 연락처를 일러주면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나는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볼일이 있어서 제주도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나는 수연이 집에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수연이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웠던 병원생활 다 잊고 잘 적응하여 사는 애를 내가 연락해서 상처나 덧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연이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창수삼춘’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겠지. 다시 연락해서 나를 기억하느라 고민하는 수연이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를 너무도 좋아했던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던 그런 수연이하고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래도, 수연아! 정말 보고 싶다. ‘창수삼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다. 너의 노래소리, 너의 휠체어 타는 모습, 너의 웃는 얼굴, 너의 말투, 모든 게 그립다. 너의 걷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다.
보고싶은 사람, 어떻게 해야할까요?
1992년 11월에 교통사고가 나서 서울 명동의 백병원에 몇 달간 입원해있었습니다. 그때 만났던 당시 5살이었던 수연이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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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 삼춘!”
병원생활 동안 가장 듣기 좋았던 호칭이다. 이름은 수연이. 나이는 그때 다섯이었다. 그애는 나를 창수삼춘이라고 불렀다. 수연이는 얼굴이 약간 포동포동한데다 말수도 적어 의젓하기 그지없는 애였다.
수연이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단하였다. 수연이는 의족을 하더라도 여간 고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허벅지 아래로 절단해서 의족은 허리에 묶어야 하고, 성장뼈도 없으므로 수시로 의족을 큰 걸로 바꿔줘야 한다. 수연이의 가슴에 얼룩진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을 것이다. 의족을 갈 때 마다 아물만한 상처를 건드는 꼴이 되니 언제 마음 편할 날이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 다섯살인데.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시고 형편도 약간 넉넉한 편이므로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수연이 아버지는 수연이한테 진 빚은 평생 갚은 수 없다고 울먹이신다. 수연이가 얌전해서 혼자도 잘 노는데 그것이 너무 기특해서 천원짜리 한장 쥐어주었다고 한다. 수연이는 그걸 들고 가게에 나가다가 그만 트럭에 치인 것이다. 수연이 아버지는 애한테 천원짜리 쥐어 준 것을 통탄해 하신다.
수연이는 정말 귀여운 모습으로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큰 차 아저씨가 그랬써어.”
“그 아저씨 미우니?”
“안 미워어.”
말 끝을 올렸다 내리면서 길게 끄는 수연이의 말투는 너무 귀엽다. 그러나 처음에 수연이의 고통에 찌든 목소리를 들을 때는 너무 안타까워서 정말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도 하루에 한번씩 석고실에서 드레싱을 할 때면 그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데, 어린 것이 오죽했겠는가.
“아가 안 아프게 해줘요.” 하면서 울먹이는 수연이의 제주도 방언이 아직도 귀에 선하다. 어찌 어렇게 서른 살 먹은 다 큰 놈이나 다섯살 먹은 아이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심정이 어쩌면 이리 꼭 같을 수 있을까? 나도 ‘선생님 이왕이면 안아프게 좀 해주세요.’라는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나는 그놈의 체면 때문에 입에 솜 물고 이를 악물었을 뿐이다. 의사들은 수연이의 비명과 신음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수연이의 고통을 외면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간혹 얄미웠다.
석고실에서 치료받으며 처음 수연이를 보았는데 너무나도 애처로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뭔가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무턱대고 수연이 병실로 휠체어를 끌고 들어갔다.
“아프더라도 꼭 참고 의사선생님 말씀 잘들어야 한다. 그리고 밥 많이 먹고, 응?”
처음 보았지만 나는 막 떠들어댔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와주고 싶어서였다. 그때 내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턱뼈와 광대뼈가 부러져 철사줄로 위아래 이빨을 꽁꽁 묶어 둔 상태여서 입을 벌릴 수가 없었으니,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더구나 입술을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이빨을 묶고 있는 철사가 흉칙하게 비쳐서 무슨 괴기영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보였다. 거기에 이빨이 그 꼴이나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영양주사만 맞고 음료수 정도만 먹으며 50일을 보냈으니 얼굴도 해골바가지였다.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아프리카에서 왔냐’며 놀려댔겠는가? 그 똑똑하고 야물딱진 양현이 아들 의창이도 나를 보고 바들바들 떨었는데...
나는 기껏 한다고 했지만 수연이가 그 몰골의 나를 보고 위안을 얻기는 무슨 위안을 얻었겠는가. 그저 꿈속에만 나타나지 말아달라고 기도 안했으면 다행이지. 수연이 어머니도 내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 참 많이 다친 모양이구나’는 생각만 했다고 한다. 말은 안하셨지만 ‘저사람 몰골 되게 흉하네. 수연이가 무서워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하여튼 그렇게 수연이를 만나서 어느덧 서로 안보면 견딜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수연이는 심심하면 창수삼춘 방에 가자고 졸라대서 내방에 놀러온다.
수연이는 내방 입구에서 부터 ‘삼추우---운’하고 목이 늘어지게 나를 부른다. 내가 못들은 체하고 ‘누구냐’라고 하기라도 하면 ‘나야 나-’한다. 자기를 몰라줘서 무척 억울하다는 태도가 아니다.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나를 측은히 여기되, 내 자존심이 안상하게 가르쳐준다는 투다. 내가 뭘 물어봐도 ‘그것도 몰라’라는 투가 아니다. 차분하게 나에게 진실을 일러주되 뻐기지 않는다.
하여튼 나는 병동에서 수연이의 제일 친한 벗으로 명성을 날렸다. 병원에서 수연이 모르를 사람이 없으니, 나는 수연이 덕에 유명해진 것이다.
수연이랑 나는 매일밤 산소치료를 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이다. 피부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기 위해 고압산소통에서 30뿐씩 있어야 한다. 나랑 수연이랑 그리고 몇사람이 더 밤이면 산소통이 있는 성형외과 병동으로 옮겨서 산소통에 들어간다. 산소통에 들어가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동질성이 생겨서인지 7층에서 제일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대부분 중환자들이기 때문에 혼자서는 병동을 옮길 수도 없고, 더구나 산소통에는 더욱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서너 사람이 필요한데 환자가족들끼리 품앗이 같이 서로서로 도와서 산소통에 집어 넣는다.
이렇게 수연이랑 매일 밤 만나고, 가족들끼리 서로 필요한 관계가 되니까 수연이랑 사귀기에는 내가 조건이 제일 좋은 편이지 뭐.
산소통에 몇차례 들랑날랑 하니까 이상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야 뭐 피부가 워낙에 형편없으니까 산소치료를 그렇게 오랜동안 했어도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수연이랑 수연이 엄마는 얼굴이 뽀해 지는 것이다. 산소치료가 미용에 좋은 것이래나. 수연이가 나이가 어려서 혼자 산소통에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수연이 엄마가 수연이를 안고 산소통에 들어가는데, 며칠 지나니까 수연이 엄마가 얼굴이 희뜩희뜩해 지는 것이다.
산소통이란 게 반원통형으로 ‘관’만한 크기라고나 할까. 그 속에 들어가야 하는데 산소통 압력을 높이기 위해서 문을 꽁꽁 잠근다. 물 샐 틈 없을 뿐 아니라, 공기방울이 샐 틈도 없다. 수연이 엄마가 수연이를 안고 그속에 드나들기를 몇차례 하니까 마음고생에도 불구하고 낯빛이 정말 좋아지는 것 아닌가. 수연이 엄마는 그게 쑥스러운 모양이다.
나는 상태가 호전되자 동네 작은 병원으로 옮겼다. 병원을 옮긴 후 걸어다닐 정도가 되자 수연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하루종일 아양 떤 결과 외출허락을 받았다. 그림카드하고 음료수 좀 사들고 백병원을 찾았다.
나는 너무 좋았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랫만에 반가운 사람만나면 부둥켜안고 울어대는 사람들 심정을 이해하겠다. 수연이는 통통해졌다. 내가 병원을 옮긴 후로는 별로 나돌아 다니지도 않고 자기 침대만 지킨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나를 봐도 시큰둥이다. 이 무딘 나도 감정이 울컥하여 눈물이 나올 지경인데, 이 녀석은 아는 척도 안하고 그저 지 장남감 가지고 놀이에만 열중이다.
수연이 엄마랑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면서 계속 수연이에게 말을 붙였다. 그림카드를 보여주고 글자와 그림을 비교하면서 이게 뭐냐고 자꾸 묻자 마지못해 하는 척 하면서 입을 연다. ‘짜식 진작 그럴 것이지 내숭은...’
30분쯤 지나자 드디어 예전처럼 환히 웃으며 말을 붙여온다.
“엄마가 다리 만들어주면 집에 갈꺼다! 기태오빠도 다리 만들어 가지고 집에 갔따.”
나는 또 울컥했다. ‘녀석아 다리를 만들기는 뭘 만드니.’
백병원을 다시 찾아가 수연이가 목발을 짚고 걷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기뻤다. 수연이의 목발은 하얀 빛이 도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또 쪼끄만했다. 마치 장남감 목발 같았다. 수연이는 어느새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루게 되었다. ‘이제 엄마가 다리만 만들어 주면 집에 간다’고 그랬다.
수연이 부모님은 연락처를 일러주면서 연락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그러나 나는 연락할 수가 없었다. 한참 후 볼일이 있어서 제주도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도 나는 수연이 집에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수연이의 반응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고통스러웠던 병원생활 다 잊고 잘 적응하여 사는 애를 내가 연락해서 상처나 덧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수연이 부모님께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창수삼춘’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겠지. 다시 연락해서 나를 기억하느라 고민하는 수연이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를 너무도 좋아했던 그래서 내가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게 되었던 그런 수연이하고 추억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다.
그래도, 수연아! 정말 보고 싶다. ‘창수삼춘’이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나 듣고 싶다. 너의 노래소리, 너의 휠체어 타는 모습, 너의 웃는 얼굴, 너의 말투, 모든 게 그립다. 너의 걷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