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86화

피바다2006.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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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온다. 크크크크." 

 " 누구지? 누구야?응?"

 " 죽여버리자! "

 " 그럴까? 죽여버려도 돼?"

 북궁의 어둡고 을씨년스러운 방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들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으로 실낱같은 햇빛이 악을 쓰며 스며들 뿐, 조용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구와 집기들은 어둠을 둘러 쓴 채 괴기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형체없는 목소리들만 흥분하여 소리치고 있었다.

  아주 오랜만에 제황성 북궁의 녹슨 철문이 열린 셈이었다. 목소리들은 간만의 손님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들은 몹시도 지루했던 것이다.

  제황성 왕자궁 북궁의 고요한 정원으로 막 들어 선 설무랑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수많은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호기심과 반가움으로 빛나는 그 시선은, 허나 전혀 호의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설무랑은 그런 시선을 무시하고 정원을 둘러 보았다.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아 식물들은 멋대로 뒤엉켜 자라나고 있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의 기를 먹고 자라는 푸른 존재들은 햇빛이 비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줄기와 잎을 뻗어놓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아 오르고 얼키고 설키며 발버둥치는 모습을 둘러보면서 설무랑은 잠시 수라계를 떠 올렸다. 생존 자체가 태어난 의미인 수라족과 이 정원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존재들, 하지만 그것뿐이기에 순결하고 고결한 존재들인 수라족의 생명들. 화려하고 양적으로 팽창해가는 천계나 마계의 문화와 철학, 예술, 제도에는 비할 데 없이 초라하지만 가장 근원에 가깝고 생의 의미에 진실한 것이 바로 수라족의 삶이라고 설무랑은 새삼 생각했다.

  " 뭐.....나름대로 자연미가 넘치는 정원이군. 그 녀석한테 더 이상 잘 어울릴 수도 없겠군."

 한 걸음 한 걸음 설무랑이 정원 깊숙이 걸어들어오자, 목소리들은 더욱 흥분하여 야단을 떨었다.

  " 계속 들어온다. 그냥 콱 죽여버리자. 내가 할 게. 응? 내가 한다구!"

  " 이번엔 내 차례야. 웃기지 마!"

   " 잠깐만, 보랏빛 눈이다. 황족인가.....?"

  일순 침묵이 흘렀다. 다들 설무랑의 보랏빛 눈동자에 집중하는 모양이었다. 잠시나마 다들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곧 소란은 이어졌다.

  " 황족일까? 왕족인거야?"

  누군가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 무슨 상관이야? 그냥 죽이자니깐. 제 4황자가 그랬잖아. 누구든 발을 들이는 자는 죽여도 된다고!" 

 " 맞아, 맞아!!"

  동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침착한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 멍청이들! 아무리 돌머리라도 그렇지, 생각을 좀 해!! 왕족이나 황족이 죽으면 4황자도 곤란해 진다고. 다시 잡혀가면 어쩔거야?"

  " 그렇지! 또 감옥에 기면 어떻게 해? 또 기다리기 싫단 말이야!"

  " 죽여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리면 되지 않을까?"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순서도 없이 거의 겹쳐나오면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결론에 닿기엔 가망이 없어보였다. 그 가운데 천장에서 여덟 개의 긴 다리가 줄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더니 웅크린 몸을 세웠다. 세 쌍의 창과 같이 뽀족한 팔과 한 쌍의 다리를 가진 거미 여인, 흑요였다. 그녀가 그 소란을 정리하였다.

  " 환휴에게 물어보자."

  정원을 여유롭게 둘러보며 걸음을 옮기던 설무랑은 갑자기 소란스러움이 뚝 끊기자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거 참, 되게 시끄럽군."

  한 편, 환휴는 한가한 오후에 침을 늘어놓고 닦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굳은 채 동작을 멈추었다. 표정이 전혀 없는 환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다. 당혹감과 두려움이 환휴의 얼굴 근육을 일그러 뜨렸다. 침 하나를 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침을 탁자에 놓았다. 탁자 위에는 새하얀 천이 반듯하게 세 번 접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길고 짧거나 굵고 가는 침이 크기 순으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환휴는 창가로 다가가섰다. 설마하던 느낌이 딱 들어맞자 냉철한 환휴조차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정원을 걸어 들어오고 있는 여유로운 사내는 분명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보는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마치 오랜 친구와 같은 친숙함이 그 남자에게서 풍겨져왔다. 남자가 웃으며 환휴가 서 있는 창가를 바라보는 듯 했다. 환휴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창가에서 멀어지며 몸을 숨겼다.

  환휴는 눈에 띄게 온 몸을 떨고 있었다. 자신의 몸이 의지에서 벗어나 멋대로 떨고 있음을 그는 스스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도 없었고 그 떨림을 멈출 수도 없었다. 방금 전 시선을 마주쳤던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니 몸은 더욱 주체할 수 없이 떨려왔다. 환휴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힘썼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니 점차 몸의 떨림은 수그러들었다. 한 여름에 식은 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두려우면서도 미치도록 끌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수건으로 땀을 훔쳤다. 떨림은 멈추었지만 심장은 터질 듯 뛰고 있었다.

  환휴는 익숙한 인기척을 느꼈다. 어느 새 흑요가 방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본성대로 가느다란 은빛 줄에 의지한 채 천장에 매달려 환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쑥 나타나는 마계 전사들의 돌발에는 이미 익숙한 환휴였지만 이번에는 그런 흑요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숨기고 싶은 것을 들킨 사람처럼 불쾌감이 솟아 올랐다. 하지만 이계의 두 족속 사이에는 애초에 예의는 통하지 않는 상식이었고 무법천지인 북궁에서 나름대로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환휴는 잘 알고 있었다.

  " 침입자가 있어. 다들 죽이자는데 어떻게 할까?"

  흑요가 줄을 타고 내려서며 물었다. 세 쌍의 끝이 날카로운 다리가 사뿐히 바닥에 닿더니 살짝 반동을 일으키며 그녀의 몸이 약간 솟았다. 그녀는 여덟 개의 다리를 각기 움직여 편하게 자리잡고 서서 환휴의 결정을 차분히 들을 준비를 했다.

  " 보라색의 눈은 귀족이잖아? 그래서 물어보는거...."

  흑요는 덧붙여 말을 하다 멈추었다. 환휴는 자신을 쳐다보는 흑요의 눈빛에 노골적인 의아함이 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유리알처럼 크고 검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차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흑요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여 잠시 멍청히 입을 닫고 정확하게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 너...이상해. 눈이 왜 그래?"

  환휴는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흑요의 말에 그의 머릿 속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침착하게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등을 돌리고 흑요의 집요한 눈빛을 피했다. 환휴는 그대로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을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흑요는 환휴가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환휴가 마침내 다시 몸을 돌려 흑요를 바라보았을 때 흑요는 마치 자신이 홀린 듯 했다. 환휴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가운 회색빛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굳은 회색의 눈동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보았던  그 피빛의 붉은 눈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 제 눈이 어떻다는 겁니까?"

  당황한 흑요에게 환휴는 여전히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흑요는 더듬거렸다.

  " 아...아니..그게....."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이 진짜 착각이었나 의심이 들면서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 오신 손님은 제가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환휴는 살짝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히 뜻을 전하고는 그녀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갔다.

  하지만 문을 나선 환휴는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아슬아슬하게 흑요의 의심을 지나친 순 있었지만 방금 자신에게 나타난 현상은 스스로도 놀란 일이었다. 방심한 사이 다시 나타난 붉은 눈의 증상에 스스로도 당황했던 것이다. 감정을 스스로 완벽하게 제어하게 되면서부터 그런 괴현상은 사라진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현상이 다시 나타나게 된 건 아마도 북궁에 나타난 낯선 남자의 영향이 분명했다. 환휴는 두려움을 몰고 나타난 낯선 남자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 때,설무랑은 북궁의 현관에 이르렀다. 그가 막 문 앞에 튀어나와있는 대리석 바닥돌에 오르려 할 때, 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하얀 비단옷에 그보다 더 창백한 피부와 감정없는 회색눈을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설무랑은 그를 보자 반가운 듯, 비밀스러운 웃음을 띄었지만 환휴는 웃지 않았다. 환휴는사실 겨우 자신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설무랑을 대하는 순간 아까보다 더욱 격심한 반응이 몸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온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공포에 질려 터질 듯 고통스러웠다. 그 감정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온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자의로 떨칠 수 없는 공포였다. 그리고 짙은 그리움이었다.

  " 왜 두려워하는거지?"

  설무랑의 낮고 조용하지만, 마치 아기를 얼르는 어미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환휴는 휘청했다. 순간 무릎이 절로 꺾이려는 걸 겨우 버티어냈다. 환휴의 가면같은 무표정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의문과 혼란이 고스란히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지만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설무랑은 흥미로운 듯이 웃고 있었다.

  "  제 4 황자의 심복인가?"

  " 그러하옵니다."

  환휴는 힘겹게 입을 떼었다. 한 번 무너지자, 두려움과 경이로움의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를 덮쳤다.

  " 제 4황자를 만나러 왔다."

  설무랑은 땀이 흐르는 환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말했다. 환휴는 초율의 얼굴을 떠올리며 힘을 얻거 자신의 본분을 지켜내고 있었다.

  " 죄송합니다만 전하께선 출타중이시옵니다. 존함을 알려주시면 소인이 전하께 전하겠습니다."

  환휴는 상체를 조아리며 예를 다하여 말했다. 그의 머릿 속은 온통 이 낯선 남자의 정체에 대한 의문으로 차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남자가 어찌하여 이토록 친근하며 또한 두려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아니다, 번거로운 건 피차 서로의 취향이 아니지. 그대가 전하라."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에 정원의 식물들은 물큰한 푸른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환휴와 설무랑이 마주하여 속삭이는 모습을 북궁의 목소리들은 소리 죽여 내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설무랑이 낮게 내는 소리는 그들까지 닿지 못했다.  환휴는 설무랑이 방문 목적을 전달하는 것을 끝내자, 비로소 그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 반드시 전하겠나이다."

  이 남자가 바로 초율과 촉룡산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던 남자, 동방성 지국천왕의 장자라는 것을 환휴는 알았다. 그리고 초율에게 얼마나 거슬리는 존재였을지도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만만치 않은 남자였다. 설무랑은 자신의 뜻을 전하고도 금방 자리를 뜨지 않았다. 뭔가 남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설무랑은 그 말을 하기로 결심한 듯 했다. 설무랑은 확신을 가진 어투로 물었다.

  " 혼계인이냐?"

   설무랑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물어오자 환휴는 대답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설무랑은 거침없이 놀라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네 피의 반은 수라족의 것이군. 비록 반쪽이지만 고귀한 수라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 알고 있는가?"

  환휴는 번쩍 뜨인 눈을 뜨고 자신도 모르게 설무랑을 응시했다. 설무랑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한 가닥 풀려나오는 순간이었다. 낯선 남자, 묘한 힘을 가진 남자에게서 듣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알아내려고 발버둥치다 기어이 포기하고 만 자신의 비밀이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해, 정글처럼 우거진 이계의 장소에서 드러날 거라곤 누가 생각했겠는가.

  설무랑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환휴의 귀를 어루만지듯 말했다.

  " 너는....네 아비를 닮았구나."

  환휴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란 말인가. 설무랑의 말은 이어졌다. 여전히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환휴는 소름끼치도록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내가 두렵지 않느냐, 혼계의 아이야? 온 몸이 저리도록 두렵고 심장이 터질 듯 무섭지 않느냐? 네 무릎이 절로 꺾이어 내게 절을 올리고 발에 입을 맞추고 싶지 않느냐?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싶지 않느냐?"

  " 으..."

  환휴는 신음을 씹었다. 실로 옴 몸에서 터져나오는 공포를 겨우 누르고 있었던 그였다. 설무랑은 그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치 희롱하듯 그의 감정을 긁어내고 있었다.

  " 네 피 때문이다."

  설무랑은 환휴를 괴롭히는 것에 종지부를 찍듯 말했다.

  " 또한 네가 제 4황자를 벗어날 수 없는 것도 네 피가 가진 굴레때문이다. 잔인하고도 매력적인 피의 속박이지.결코...벗어날 수 없는....하하하하"

  설무랑은 뭐가 그리도 우스운지 낮고 긴 웃음의 여운을 남기며 돌아섰다. 환휴는 하늘이 부서지는 착각을 느꼈다.

 

  " 그 사내를 만났습니다."

  환휴는 간만에 북궁으로 돌아온 초율에게 차갑게 식힌 차를 내어오며 단조로운 높낮이로 말을 꺼냈다. 초율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투로 삐딱하게 고개를 쳐들며 환휴를 바라보았고 차 주전자를 내려놓는 환휴는 맞은 편 자리에 앉은 뒤 찻잔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 동방성의 왕자님 말입니다. 전하의 촉룡산을 잠시 가지었던 그 사내."

  " 아! 지국천의 아들 말이군. "

  초율은 무관심하게 툭 던지듯 말하고 찻잔을 들었다. 깔끔한 잎내음이 목구멍을 넘어가자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별다른 이야기거리를 찾지 못했으니 되묻는다는 듯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 어땠어?"

  환휴는 다시 초율의 잔에 차를 채우며,

  "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의 느낌이었습니다. 본성적으로 결코 남의 손에 지배당할 수도, 길들여질 수도 없는 검은 야수와 같은 사내였습니다. "

  감정을 싣지 않고 주저없이 말하는 환휴를 초율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율은 그의 표정없는 얼굴과 딱딱한 말투에서조차 얼핏 스치는 미묘한 감정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 그 놈이 네 흥미를 불러 일으킨 모양이군."

 초율은 비꼬듯 말을 뱉었다. 초율은 언제인가부터 환휴가 타인에게 가지는 관심의 빈도가 잦아지는 것이 영 못마땅했다. 물론 그건 초율만이 느끼는 변화였고 그럴 때면 초율은 이유모를 짜증이 났다. 하지만 환휴는 초율의 그러한 감정을 느낄 여유조차 없이 다시금 온 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반응하는 것에 당황하고 있었다. 설무랑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세포 각각이 마치 서로 다른 유기체인 모양으로 격렬하게 진동하며 터져나갈 듯 굴었다. 그는 소름이 돋으며 목이 턱 메였다. 달아나고 싶으면서도 막연히 그리워지는 묘한 반대급부가 충돌하고 있었다. 환휴는 이를 꽉 물고 오기가 생겨 그 감정에 덤벼들었다.

  " 전하께 전해올리라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 .........? "

  " 사흘 후 수라족을 치기 위해 도솔천으로 갈 것이라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오시어 싸움을 감상해주길 바란다 하였습니다."

  " 미친 놈......"

  초율은 고스란히 못마땅한 심정을 드러냈다.

  " 가실....것이옵니까?"

  환휴의 조심스러운 물음은 초율에게도 뜻밖이었다. 늘 묵묵히 명령만을 따르고 전적으로 초율의 결정을 지지하던 환휴는 감히 초율의 의견을 묻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환휴는 진심으로 그의 결정을 듣고 싶어했고 왠지 그 말투에는 거부의 느낌이 실려있었다. 초율은 설무랑의 방문이 단지 자신에게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함만이 아니었음을 짐작했다. 설무랑의 바람같은 등장은 환휴에게 어떤 자극을 남긴 게 분명했다. 불쾌하기 그지없는 자극을 남겼다. 초율은 혹여나하는 느낌으로,

  " 같이 가고 싶으냐?"

  " 아니옵니다, 전하."

  환휴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 전하, 소인의 이야기를 오해없이 들으소서."

  초율은 그런 환휴의 태도에 마음을 추스렸다. 그의 그런 태도는 목을 내놓을 각오로 하는 충고나 엄청난 비밀의 고백에 앞서 나오는 모습이었다.

  " 그 자를 멀리 하소서. 곁에 두기에 너무나 위험한 사내이옵니다."

  충직한 환휴의 말에 초율은 피식 웃음으로 화답했다.

  " 하핫, 나를 상대로 농담을 할 생각인가, 환휴? 내가 너를 너무 살려 둔 모양이다."

 하지만 초율의 말 끝에는 싸늘한 기운이 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충분히 그 말은 초율을 겁쟁이로 몰아가는 말과도 같았다. 환휴는 초율이 화를 내고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결코 물러나지 않았다. 필사적인 조언이었다.

  "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저는 두려웠습니다. 그 느낌은 피에 굶주린 짐승이나 수라족의 손아귀에 잡힐 때와 차원이 다른 공포였습니다. 저는 그 때 저를 쫓던 수라족의 두 짐승보다 그들을 없앤 전하에게 더 큰 공포를 느꼈습니다. 영혼이 갈갈이 찢어져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런 두려움과 마음의 고통, 죽음 그 이상의 두려움.그게 전하를 처음 본 제 느낌이었습니다."

  초율은 말없이 듣고 있었다. 환휴의 목소리는 여느때보다 절실하게 들렸다. 

  " 처음에 그 두려움에 저는 숨이 막힐 듯 괴로워 전하께서 놓아주셨을 때 안도하며 달아났던 것이지요. 허나......제가 다시 돌아갔던 건 결코 제가 부상당한 전하를 동정할 만큼 착한 품성이었다거나 공포를 멀리할 만큼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몸이 전하에게서 멀어질 수록 마음은 저를 전하께로 다시 잡아 끌었던 겁니다. 미칠 것처럼 두려운데 죽을 것처럼 그리웠던 겁니다."

  초율은 그의 말을 흘려듣진 않았지만 더 이상 낯간지러운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 새삼스럽게 옛 이야기를 하다니, 네가 약초를 잘못 맛본 게로구나."

 " 그 남자....그 남자도 같았습니다. 그 때와 똑같았습니다, 전하. 충분히 전하를 위협할 수 있는 남자입니다."

  " 환휴....."

  초율은 일어서며 손을 내밀어 환휴의 가느다란 턱을 감쌌다.

  " 그 이상이다. "

  환휴는 떨리는 눈빛으로 초율을 바라보았다. 초율은 진지하게 말했다.

  " 너도 사실은 알고 있지 않느냐? 위협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란 것을 말이다. 그 남자 손에 내가 죽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더냐?"

  " .....!"

  " 그 놈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처음 그 놈을 만났을 때 알아버렸지. 그 놈의 칼 끝에 내가 죽는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마저 숨 넘어가게 짜릿할 것만 같이 강한 놈이란 걸 말이다."

  초율은 손을 떨어뜨렸다.

  " 하지만 환휴, 나는 안죽어."

  초율은 돌아서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리고 말을 남겼다.

  " 내 칼이 먼저 그 놈 목을 따 버릴 거거든. 그건 내가 죽는 것보다 더욱 황홀한 느낌일거야." 

  환휴는 초율의 뒷 모습에 설무랑이 겹치는 것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의 눈이 붉은 빛이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두 달만이네요. 그 동안 글을 중단한 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드셨을테고 기다리다 지치신 분도 계실테고^^죄송합니다.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바쁜척한다고 제가 그 꼴이었네요. 머릿 속으로는 구상이 끝이 없으면서도 도통 쓰지를 못하고 있다가 2~3일동안 연필만 대었다면 팔이 아플 정도로 글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쓰는 동안 짬을 내 부분을 올렸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찾아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