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혁은 병실을 나선 이묘환이 짜놓은 현 상황에 대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두 번 해온 일은 아니지만, 역시나 배우처럼 대본을 외듯 거짓말을 외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카메라의 셔터소리와 사람들의 아쉬운 소리에 거짓을 말하는 혀끝은 모래알을 씹은 듯 꺼끌거리고 심란한 마음은 곧 걱정이 된다.
“기억 상실증으로 어디까지 울궈먹을 수 있을지... 참 걱정 되는 구나.”
끝까지 넘겨본 카르테에 씁쓸해지는 입을 다시며, 민혁은 끼워진 노트를 꺼내 들었다. 이묘환이 가기 전에 말한 일기장이다.
“이천년 사월 팔일이라... 어디 그럼 이 놈은 어떻게 살았는 가 구경이나 좀 할까?”
알아 볼 수 없는 문자로 가득한 일기장의 모습에 민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른 모든 것은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 하나 지워지지 않는 재능 하나 있다. 일기장에 적힌 기묘한 문자들의 암호학[暗號學, cryptology]이 바로 그것이다.
“가만히 있어보자. 저기 저 달력이 맞는다면 지금은 이천삼년 유월이고, 내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은 1999년 화랑. 그럼 이건 약 삼년여 간의 기록이 되는 셈인가? 하아- 또, 느낄 세도 없이 나이 세 살이나 먹어버렸군. 젠장... 벌써 스물을 훌쩍 넘어버렸네.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봤는데... 교복 입은 여고생은 이제 안녕인가.”
일기장과 달력을 번가라 바라보던 민혁의 입술이 작게 실룩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항상 긴 잠에서 깨어날 때면 가슴이 쓰다. 분명 어린 꼬마였는데 자고 일어나니 어른이다. 때를 부릴 사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여유도 없다. 한번 쓰고 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이라고, 때를 놓친 추억의 꿈은 망상이 되어버릴 뿐이다.
“이천년 사월 팔일. 실용 수학에 발을 들여 놓다 라...”
민혁은 머릿속으로 차오르는 헛된 생각을 털어버린 채 손에 쥐고 있는 일기장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퍼즐처럼 얽힌 암호문과 낯선 자신의 일기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더없이 좋은 약이 되었다.
“에엑? 애가 있다고?”
두꺼운 일기장을 반쯤 읽었을까?
민혁은 두 눈이 번뜩 떠지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애가 있다. 이천일년 삼월에 여섯 살이라 말했으니, 지금쯤 최소 여덟살은 된다는 소리다.
“애인이 있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아니, 애인이 있다는 것을 떠나서 너무나 뜬금이 없잖아. 내가 애가 있다니? 결혼을 했나? 아니면... 사고?”
진정 되지 않는 생각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마음이 서질 않는다.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아이일까?
민혁은 일기장 어디에가 나와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아이의 흔적을 찾아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한 장 한 장. 수많은 상념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던 민혁은 바로 어제 이천 삼년 유월 십사일의 일기에 와서 탄식을 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입양? 총각인 주제에 애 아빠가 되겠다고? 앙?”
답답한 마음에 털썩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산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금 것 몇 번을 맞은 상황이지만, 오늘처럼 당황스러운 적은 또 없다. 기면증에 빠졌을 때의 그는 최소 자신이 깨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라이프스타일을 무너트릴 일은 가급적 저지르지 않는다.
언젠가 지워져 버릴 신기루 같은 삶.
기면증에 빠진 그는 그렇기에 더욱 더 하루를 황금처럼 여기고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 유리? 유리라고...?
더는 글이 쓰이지 않은 일기장을 내려놓으며, 민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꼬마 여자아이에게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을 아빠로 알고, 늦게 들어오지 말라며 애교를 피우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옇게 밤안개가 낀, 창밖을 바라보며 민혁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혼잣말도, 암호처럼 헝클어진 일기장도 더는 마음에 안정제가 되지 않는다. 아빠가 되었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인 삶은 꿈꿀 수도 없는 기묘한 삶의 부적절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누가... 설명 좀 해줘. 나 도대체 어떤 놈이었던 거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대체...”
“그걸 누가 알아. 빌어먹을 자식... 귀찮기도 하다.”
답답한 마음에 푸념이 흐를 쯤, 꽉 닫힌 병실 문이 열렸다.
“후- 이제 끝났어요?”
“그래, 대충 끝났다. 여기 니가 좋아하는 야채 죽.”
“아... 고마워요.”
이묘환은 넙죽 야채 죽을 받아드는 민혁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또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 야채 죽이잖아? 화 안내?”
“아아... 됐어요 그럴 기운도 없고. 마음도 아니에요.”
“이거 왠지 너답지 않은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냐?”
넌지시 말을 물어오는 이묘환의 모습에 민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 애 아빠래요. 총각인데... 애 아빠가 됐데요.”
“애 아빠? 아아- 유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이 틀렸어. 겉모습만 다 큰 너와는 반대로 그 아이는 작은 겉모습과 달리 생각이 너무 커버렸거든.”
[기면증] 1. 깨어난 소년 -2-
“그럼 어디보자...”
카르테에 끼워진 이름도 모를 병명들과, 현 상황에 대한 대처법들...
민혁은 병실을 나선 이묘환이 짜놓은 현 상황에 대해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한 두 번 해온 일은 아니지만, 역시나 배우처럼 대본을 외듯 거짓말을 외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카메라의 셔터소리와 사람들의 아쉬운 소리에 거짓을 말하는 혀끝은 모래알을 씹은 듯 꺼끌거리고 심란한 마음은 곧 걱정이 된다.
“기억 상실증으로 어디까지 울궈먹을 수 있을지... 참 걱정 되는 구나.”
끝까지 넘겨본 카르테에 씁쓸해지는 입을 다시며, 민혁은 끼워진 노트를 꺼내 들었다. 이묘환이 가기 전에 말한 일기장이다.
“이천년 사월 팔일이라... 어디 그럼 이 놈은 어떻게 살았는 가 구경이나 좀 할까?”
알아 볼 수 없는 문자로 가득한 일기장의 모습에 민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다른 모든 것은 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 하나 지워지지 않는 재능 하나 있다. 일기장에 적힌 기묘한 문자들의 암호학[暗號學, cryptology]이 바로 그것이다.
“가만히 있어보자. 저기 저 달력이 맞는다면 지금은 이천삼년 유월이고, 내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은 1999년 화랑. 그럼 이건 약 삼년여 간의 기록이 되는 셈인가? 하아- 또, 느낄 세도 없이 나이 세 살이나 먹어버렸군. 젠장... 벌써 스물을 훌쩍 넘어버렸네.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해봤는데... 교복 입은 여고생은 이제 안녕인가.”
일기장과 달력을 번가라 바라보던 민혁의 입술이 작게 실룩였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항상 긴 잠에서 깨어날 때면 가슴이 쓰다. 분명 어린 꼬마였는데 자고 일어나니 어른이다. 때를 부릴 사람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 여유도 없다. 한번 쓰고 나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시간이라고, 때를 놓친 추억의 꿈은 망상이 되어버릴 뿐이다.
“이천년 사월 팔일. 실용 수학에 발을 들여 놓다 라...”
민혁은 머릿속으로 차오르는 헛된 생각을 털어버린 채 손에 쥐고 있는 일기장을 향해 정신을 집중했다. 퍼즐처럼 얽힌 암호문과 낯선 자신의 일기는 씁쓸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더없이 좋은 약이 되었다.
“에엑? 애가 있다고?”
두꺼운 일기장을 반쯤 읽었을까?
민혁은 두 눈이 번뜩 떠지는 이야기를 발견했다. 애가 있다. 이천일년 삼월에 여섯 살이라 말했으니, 지금쯤 최소 여덟살은 된다는 소리다.
“애인이 있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아니, 애인이 있다는 것을 떠나서 너무나 뜬금이 없잖아. 내가 애가 있다니? 결혼을 했나? 아니면... 사고?”
진정 되지 않는 생각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쳤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아 마음이 서질 않는다.
어떤 사람이고 또 어떤 아이일까?
민혁은 일기장 어디에가 나와 있을지 모를 또 다른 아이의 흔적을 찾아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한 장 한 장. 수많은 상념과 함께 페이지를 넘기던 민혁은 바로 어제 이천 삼년 유월 십사일의 일기에 와서 탄식을 내 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미친놈...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입양? 총각인 주제에 애 아빠가 되겠다고? 앙?”
답답한 마음에 털썩 침대 위로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산 것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지금 것 몇 번을 맞은 상황이지만, 오늘처럼 당황스러운 적은 또 없다. 기면증에 빠졌을 때의 그는 최소 자신이 깨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라이프스타일을 무너트릴 일은 가급적 저지르지 않는다.
언젠가 지워져 버릴 신기루 같은 삶.
기면증에 빠진 그는 그렇기에 더욱 더 하루를 황금처럼 여기고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 유리? 유리라고...?
더는 글이 쓰이지 않은 일기장을 내려놓으며, 민혁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막 여덟 살이 된 꼬마 여자아이에게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자신을 아빠로 알고, 늦게 들어오지 말라며 애교를 피우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부옇게 밤안개가 낀, 창밖을 바라보며 민혁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혼잣말도, 암호처럼 헝클어진 일기장도 더는 마음에 안정제가 되지 않는다. 아빠가 되었다.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안정적인 삶은 꿈꿀 수도 없는 기묘한 삶의 부적절한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누가... 설명 좀 해줘. 나 도대체 어떤 놈이었던 거야.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도대체...”
“그걸 누가 알아. 빌어먹을 자식... 귀찮기도 하다.”
답답한 마음에 푸념이 흐를 쯤, 꽉 닫힌 병실 문이 열렸다.
“후- 이제 끝났어요?”
“그래, 대충 끝났다. 여기 니가 좋아하는 야채 죽.”
“아... 고마워요.”
이묘환은 넙죽 야채 죽을 받아드는 민혁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또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 야채 죽이잖아? 화 안내?”
“아아... 됐어요 그럴 기운도 없고. 마음도 아니에요.”
“이거 왠지 너답지 않은데? 왜 무슨 일이라도 있냐?”
넌지시 말을 물어오는 이묘환의 모습에 민혁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하- 애 아빠래요. 총각인데... 애 아빠가 됐데요.”
“애 아빠? 아아- 유리에 대한 이야기라면 말이 틀렸어. 겉모습만 다 큰 너와는 반대로 그 아이는 작은 겉모습과 달리 생각이 너무 커버렸거든.”
“말 다했어요 지금?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벌떡 일어서 소리치는 민혁의 모습에 이묘환의 입가 가득 웃음이 걸렸다.
“집에 가봐. 그럼 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그게 무슨... 아 뜨뜨!”
한순간 바지를 뜨겁게 적셔오는 야채죽의 습격.
민혁은 일어서머 엎어버린 야채 죽의 역습에 병실을 방방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유리.
이묘환이 말하는 그녀가 너무도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