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소녀 (감사~ 일단 음악 나오네요)

은하철도200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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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소녀



소녀가 며칠에 한번씩 놀러오면서 꽃을 한 묶음씩 가져 왔는데, 가난했던 그 소녀는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산 아래서 들꽃을 주로 따왔어. 이것은 무슨 꽃이고, 또 이것은 무슨 꽃이라고 종알대면서 꽃병에 갖은 모양을 내어 담아 책상에 놓았는데, 사실 나는 꽃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거든.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정확히 아는 꽃은 손꼽아, 장미, 수선화, 달맞이꽃, 백합, 국화, 코스모스, 그 정도랄까,

빨간 색이면 다 장미 같았고, 하얀 색이면 다 국화 같았지, 또 나는 꽃에 대한 편견이 있어. 남자가 꽃이름이나 외우고 다니면 좀 쩨쩨해 보였지. 꼭 계집애들 같았거든,


집안이 가난해서 고등학교를 중퇴했던 그 소녀가 나를 자주 찾아온 이유는, 내가 책상에 앉아 있던 모습이 좋아서였을 거야. 비록 자기는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지만 가까이에 공부하는 오빠를 둔 것이 위로가 되었을 테지, 그때 내가 21살이었고, 소녀는 18살이었어. 마당으로 난 방문을 열어놓고 책을 보고 있으면, 소녀는 반쯤 열려진 대문으로 머리를 쏙 들이밀어 나를 바라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생긋 웃었지, 그리고 팔짝팔짝 뛰듯 마당에 들어서서는 먼저 수돗가에 가서 따온 꽃을 대야에 담아놓고, 나에게 와서 책상위에 있는 화병을 달라고 했어.

화병에는 며칠 전에 꽂아놓은 꽃이 반쯤 시들어 있었지, 이파리도 좀 쳐지고 활짝 벌어졌던 꽃잎도 약간 오그라들어, 누런 갈대무늬가 그려진 화병과 어울려 조그만 가을이 책상에 걸린 느낌이었거든.


초여름의 햇살이 마당에 가득 들어앉은 유월. 장독대 밑의 그늘진 수돗가에서 들리는 물 쏟아지는 소리와, 너는 키가 크니깐 뒤에 서 있고, 또 너는 키가 작으니깐 앞에 꽂을게, 이파리가 넓으니깐 너는 들러리로 이렇게 서야 해, 하며 꽃에 대고 쫑알쫑알 대는 소리, 그 소리에 나는 씩 웃곤 했었지.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바지 아래로 뻗은 뽀얀 다리, 물에 젖어서 불룩 솟아나와 보였던 티셔츠의 가슴부분, 물기를 탁탁 털던 하얀 팔뚝과 조그만 손, 소녀는 그런 모습으로 꽃을 화병에 잔득 꽂아들고 마당을 가로질러 고개를 흔들며 왔지. 성숙하고 싱그러운 그녀의 모습에 취하듯 빤히 쳐다보기라도 하면 소녀의 뺨이 빨개지기도 했어.


사람들은 대부분 5월을 좋아하지만 나는 6월을 더 좋아해, 왜냐하면 5월은 너무 현란해. 화려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거든, 5월은 내리쬐는 햇볕 자체가 수많은 꽃 같고, 간들거리는 바람이 다 흔들리는 이파리 같아. 하늘에서 꽃이 솨솨 쏟아지는 느낌이거든, 그러니깐 오월은 비바람이 아닌, 꽃비바람, 바로 꽃비바람이 몰아치는 계절이지. 거기에다가 또 대지에서 솟아오른 꽃까지 합세하여 마구 요동하잖아. 너무 눈부셔.

그러나 6월은 그 모든 무늬가 안정되어 가는 달이야. 사방을 흔들던 꽃비바람도 멎고 녹색바탕이 바다처럼 드러나며 그 언저리와 중간 중간에 배가 떠가듯 꽃이 드문드문, 피어도 그만, 안 피어도 그만, 눈에 띄듯 안 띄듯 하니깐 꽃을 편하게 살펴 볼 수가 있거든.


그녀가 바로 유월의 소녀였어,

소녀에게는 분명히 내가 첫사랑이었을 거야. 보통 첫사랑은 현란하고 격렬한 감정을 수반하지만 소녀는 꽃의 계절인 5월을 지난 6월처럼 약간의 여유와 넉넉함을 보였어. 아마 내 모습이 안정되어 보였던 모양이야. 지나가다 언제 들려도 그 자리에 늘 있고, 한결 같이 빙글빙글 웃으며 맞이하고, 가끔 라면도 같이 끓여 먹으며 선선한 저녁바람에 몸을 내맡기기도 했거든, 둑을 나란히 산책할 때는 말 한 마디 없어도 느낄 수 있는 어떤 여유와 편안함이 우리사이에 끼어 있었지. 소녀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았어. 그러니깐 오십 가까이 된 나이에 그 소녀를 봤다는 거야. 남들은 할아버지와 손녀 사이 같다고 놀렸지만, 소녀는 아버지를 창피하게 생각한 때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극진히 감싸 돌았어. 무척 고운 심성이었지. 나는 그 마음이 참 좋았던 거야.


여름 내내 놀러오던 소녀가 그 해 가을에 취직을 했어. 봉제공장에 다녔는데 일이 바쁘니깐 노는 날인 첫째와 셋째 일요일에 한번씩 꽃을 따왔는데, 그녀가 마지막으로 따온 들꽃이 코스모스였어.

“오빠, 날씨가 추워지니깐, 코스모스도 이것으로 마지막이야. 내가 봉급타면 화원에서 꽃을 사올게. 겨울 동안에도 꽃 걱정은 말아. 알았지?”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꽃을 바라보던 소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어.

“아버지가 좋아하는 막걸리나 한 되 더 사다드리지 무슨 꽃을 사오냐?”

“아잉, 오빠 책상이 너무 쓸쓸하잖아. 내가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되지 뭐.”


12월 중순 때였을 거야. 산악회에 있던 여자친구가 크리스마스 연휴에 계획되었던 동계등반을 상의하러 나한테 왔었어.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7명의 회원이 준비할 물품목록을 작성하는데, 방문 밖에서 멈칫하는 인기척이 나더니 잠깐의 틈을 주다가 나를 부르는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어. 문을 여니깐 그 소녀가 장미와 안개꽃을 한 다발 들고 서 있었어. 굳어진 표정으로 섰던 소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고 할까, 하여튼 어색한 표정으로 꽃을 방안에 들이밀더니 아빠가 기다려서 빨리 집에 가야한다고 얼른 돌아선 거야. 몸을 일으키며 내가 뭐라고 하려는데 소녀는 마당을 토닥토닥 가로질러 대문으로 달려가면서 “오빠, 나오지 마.”하고 뒤를 힐끔 한번 돌아보더니 그대로 사라졌지. 나중에 생각해보니 소녀가 내 방문 앞에 놓여있던 여자구두를 발견하고 당황했던 것 같아. 또 방문 안을 들여다보니 어떤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나와 다정히 앉아 있었거든.


그 다음부터 소녀는 발길을 뚝 끊었어. 소녀가 일하니깐 무척 바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좀 궁금해서 소녀가 사는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 마당 안을 들여다보기도 했거든. 소녀는 눈에 띄지 않았어. 그렇게 삼년 정도가 흘러간 거야. 내 기억에서도 그녀는 희미해져 갔지. 어느 날 동네의 시장을 지나다가 임신복을 입은 어떤 여자가 저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분명히 그 소녀가 아니었겠어. 깜짝 놀랐지. 결혼해서 임신을 벌써 하다니, 언젠가 그녀가 이런 말을 했긴 했었어. 자기 아버지가 연세가 많아서 빨리 자기를 시집보내야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거야. 그래서 결혼을 빨리 한 것 같아.


대파와 열무, 그리고 몇 가지 반찬이 담긴 장바구니를 들고 기웃기웃 걸어오던 그녀가 나를 발견했어. 시선이 마주치자 깜짝 놀란 그녀의 뺨에는 미소가 언 듯 떠올랐지만 눈동자는 당혹감에 흔들렸지. 아주 짧은 순간이었어. 못 본 척 고개를 얼른 돌린 그녀는 마침 바로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황급히 발길을 옮겼어. 나도 역시 끌리듯 쫓아가게 되더군. 골목에서 그 소녀의 이름을 불렀지. 그녀는 내 목소리가 꼭 철퇴 같았을 거야. 우뚝 선 그녀는 살짝 나를 향해 몸을 돌렸는데 장바구니로 불룩 나온 배를 슬쩍 가렸어.

“오빠, 나 지금 바빠서 말할 틈이 없어. 나중에 봐.”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어땠는지 알아? 정말 표현하기 힘들어. 나를 살짝 비켜간 시선이었는데, 그 눈빛 속에서 어떤 분노가 비친 거야. 분명한 분노였어. 가슴이 철렁했지. 소녀는 휙 돌아서더니 총총 골목을 돌아 사라졌어. 그게 마지막이야.


지금 그 소녀가 몇 살일까, 아마 쉰 살이 넘었겠지.

사람이야 늙으면 변하지만 계절은 아무리 돌고 돌아도 늙지 않아. 몇 십 년 전의 유월이 그때의 모습으로 다가오네. 그 소녀의 첫사랑처럼 말이야. 따가운 햇살이나 들판의 꽃들도 역시 그 모습이지만 사람만 없어. 내가 조금만 세심했다면 그 소녀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 않았을 텐데, 혹시 알아? 지금쯤 내 아내가 되어서 옆에서 쫑알거리고 있을지도. 화병에 꽃을 꽂으며 말이야.



글 / 은하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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