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박혜정2006.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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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오래된 짐을 정리하다 2년 전, 로댕 갤러리에서 주관했던 오노요코 의 팜플릿을 본다.
그날은 추석연휴 전이라 같이 동행키로 했던 친구마저 집안일을 돕느라 못왔을 정도로 모두가 분주했었고 비가 무섭게 오던 날이었다.
사실 내게 주어진 갤러리 마감시간은 그날 밖에 허락되지 않은터라, 바쁜 일정에 스스로도 신기해할 정도의 기대감 으로 터벅터벅 그곳을 향했다.
난 사실 그녀에게 큰 관심도 없었고 그닥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일본출신인데다 존 레논과 관련된 천방지축 행동들.. 개성적이고 지나치게 당당해 보이는 외모..
난 편견에 가득차 있었다..
이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결국 그곳으로 향하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의식하지 못한사이 그녀의 세계와 작품이 보고 싶었던 것일까?
도착을 하니 그녀의 얼굴이 크게 확대된 사진이 보인다..
그얼굴은 어쩐지 시간을 초월해 미소지은것 같지만 슬퍼보이고,뒤틀려 보이며,
뭔가 오랜시간 끝에 다짐을 한사람처럼 굳게 다문입술이 강직해보였다..
작품을 다 보구서 느꼈던 혼란과 생생한 긴장을 아직 잊을수 없다..
작품 자체는 소박하고 유머러스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이미지는 복잡하고 난해했다.

[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전통을 엄격히 따지던 일본 상류층에서 태어나 예의 바른 행동과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지만, 그녀는 집안의 모든것이 답답했기에 늘 탈출을 꿈꿨다고 한다.
집안에 언제나 클래식이 울려퍼절정도로 요코의 아버지는 그녀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원했지만 그녀는 열네살이 되던해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944년 11살이 되던 해, 미국이 폭격을 터뜨렸고 가족은 시골로 대피를 하게 되는중 오노는 전쟁전에는 꿈도 꿀수 없는 공포와 멸시와 첫 시련을 경험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이후 그녀의 예술적 영감으로 쓰이게 된다.
1953년 요코의 아버지의 출세로 가족모두가 뉴욕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2년뒤에 브링크빌의 새러로렌스 대학에서 철학과 작곡을 공부하고.. 지금까지의 억압에서 벗어나 그녀는 난생 처음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른바 플럭서스와 오브제 속으로 뛰어들게 되고 전위작곡가이자 동료인 이치야나기 도시와 결혼을 한다.
연인으로 발전한 감정도 있었지만 이결혼은 아버지의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한 저항 이었고 전위적인 미래로 나가기 위한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예술을 위해 그녀의 정열과 에너지가 멈추지 않고 표출된다.
컴플렉스마저도 예술로 활용을 했고,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추구하고, 낙태를 하고.. 망설임 없이 무서운 집중력으로 작업에 임했다.
1962년 11월28일 오노는 임신중이었고, 이치야나기와 이혼하지 않은채 앤소니 콕스와 결혼을 한다.
온갖 잡음이 생겼지만 1963년 3월1일법적인 이혼을 마친뒤1963년 6월 6일 다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사태는 수습이 된다.
그들 부부는 1963년 3월 21일 "자루피스"에 출현을 하고 자루예술은 그녀 예술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된 행위 예술이 된다.

그러나 아기가 태어나고 일본에서 2년을 살아가는 동안 긴장과 불화의 날들이 이어진다.
그녀의 예술은 서서히 인정을 받았지만 오노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 심한 부담감을 느꼈다.
실제 원치 않았던 딸 보다는 그레이프푸르트 를 비롯해 그녀의 예술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아이의 가책과 죄책감을 작품에 여지없이 이용하며 무관심과 지극한 사랑의 양극단을 오간다.
앤소니 콕스는 요코가 딸을 만나는 것을 싫어했고, 요코가 딸을 만나지 못하게 갖은 방법을 동원했으며 결국 양육권 문제까지 불거지고 만다.
(여론은 요코의 태도를 강력히 공격했고, 비틀즈를 해체시킨 장본인이라는 비난이 들끓었으며,양육권 공방 문제에서도 대중들은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결국 1971년 12월 미국의 한 판사가 교코의 양육권을 앤소니에게 양도한다.)
1964년12월 요코는 혼자 가방을 싸서 뉴욕으로 돌아온다.
앤소니와 딸도 몇달뒤 뉴욕으로 돌아오지만 한번 멀어진 두사람은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한다.
2년동안 체류하면서 요코는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창작력을 폭발하게 된다.
전통을 고려하지 않는 자유로운 작품으로 "플럭서스"라는 개념이 사용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녀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1965년 5월 2일 오노요코의 주요작이될 컷 피스(cut piece)가 탄생한다.
이 작품은 완전히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예술이 무엇이며 어디를 향해야하는지 에 대한 기존의 평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평과 함께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자기파괴적인 공격성이 극단에 달한 작품이기도 했던것이다.
공연 지침은 "무언가를 잘라라"
관객의 참여는 절대적으로 의도 된것이다. 즉흥적인 위험은 배제 할수 없었고, 선발된 그녀의 관객이 무대로 올라와 그녀 자신도 위협으로 느껴질만큼 그녀의 옷을 자르는 동안, 그녀는 몸에 걸친 옷이 거의 남지 않을때까지 꼼짝도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바닥에 앉아 있다.
관객들은 파괴하는 배우가 되어 스트립쇼를 만들어 낼수 있었다

이 작품에서 침묵은 희생자라는 인상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한 도구다.
여성또한 신체를 마음먹은 대로 할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함으로써 남녀의 역할과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려했고, 스스로를 무의지의 대상으로 전락시킴으로써 공연자 들에게 이들 자신이 얼마나 조작당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오노의 이 작품은 도발적인 에술이 다앙하게 제 자리를 찾는데 큰 공헌을 한다.
몇년뒤 그녀의 퍼포먼스는 존 레논과 공동 연출한 정치적 색깔이 짙은 이벤트로 발전한다.
그러나 요코의 사생활은 여전히 혼란을 벗어나지 못했고 두사람의 관계와 재정 문제는 악화일로를 치닫는다.
1966년 오노는 미국 미술계의 발전을 유럽에 소개하는 마리오 아마야 라는 미국 남자를 알게되고, 엔소니 콕스는 결국 영국행을 결심한다.
[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1966년 오노가 남편과 딸과 영국을 찾았을 당시 마땅한 거처가 없었을때, 영국인 예술가 애드리언 모리스가 그들에게 3개월간 별장을 빌려준다. 그곳의 가까운곳에 "인디카 캘러리"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오노와 존 레논이 처음 만나게 된다.
존 레논은 오노요코의 첫인상에 대해 묘사하길

"나는 늘 한 여성을 꿈 꾸었다.
아름답고 지적이며 광대뼈가 도드라진 검은 머리의 여자,(줄리엣 그레코처럼) 생각이 자유로운 예술가, 나와 영혼이 닮은 여자, 내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하다 잃어버린 여자...
잠시 인도를 찾았다가 오스트레일리아를 거쳐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 꿈의 여성상이 약간 변했다.
검은 눈동자의 동양여자 여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 꿈은 현실이 될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여성상이 되기전에는 ..
이제 그여성상이 완성 되었다..."

1966년 10월 인터내셔널 타임지에는 다음과 같은 광고가 실린다.
"미완성 페인팅 오노요코, 인디카 갤러리, 11월 8일에서 18일 까지.. 평일 오후 2시에서 6시..
오노요코 연출..
그리고 두사람에게 이 전시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전시회가 된다.
두사람의 첫만남에 대해서 여러 얘기가 있는데 존레논의 (이 역시 확실치 않지만)기억을 말하기로 하자.

"공식적인 개장 전날 저녁전시회를 보기위해 그곳으로 갔다 .
.....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작품의 주인에 대한 나의 판단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또 하나의 작품이 있었다.
천장에 걸려있는 그림까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작품이었다....
나는 사다리로 올라가 망원경을 들여다 보았고 아주 작은"Yes" 라는 글자를 알아보았다"

"천장화(Ceiling Painting)"
아주 합리적인 의미의 "Yes" - 절대적인 긍정
자신의 상황을 곰곰히 생각하고, 상황을 변화시키라고 요구하는 "Yes" 라는 낱말의 울림에는 자기 인식과 깨달음이 손에 잡힐듯 가까이 있다.
누군가 올라가 확대경을 붙잡고 "Yes"라는 글자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미완성인 작품.
순진무구한-복잡성이 존재하지 않음을 통해서 정신을 완벽한 휴식상태로 인도하는 진공 상태를 통해 비로서 관찰자가 자기 개인의 생활방식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한것이다.

존레논은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사다리를 내려왔고, 오노요코는 "못을 박기 위한 페인팅" 을 보고 있는 레논에게 다가와 "5실링을 주면 못을 박게 해주겠다" 고 한다. (그 오브제에는 못이 빠져 있었으므로)
그러자 그가 던진 신선한 대답은 "상상으로 5실링을 주고 상상으로 못을 그림에 박아넣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플럭서스의 완성임과 동시에 수수께끼의 해답처럼 그들은 서로를 알아봤다.
오노가 공연전부터 그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지의 여부는 제쳐두기로 한다.

[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1968년 10월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 중일때 오노요코는 임신중이었고 심각한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존 레넌은 1968년 11월 8일 신시아와 이혼하지만, 팬들은 그가 고함이나 지르고 벌거벗은 엉덩이 영화나 만드는 괴상망칙한 일본 여자때문에 자신의 명성을 버렸다는 사실에 오노요코를 향해 가차없이 공격을 퍼붓는다.
비틀즈 맴버조차도 거세게 비난했고, 이미 오노가 개입하기 이전부터 해체위기가 돌던 비틀즈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절대 같이 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결국 1970년 4월 10일 공식 해체 선언을 한다.)

여론은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존과 신시아를 갈라놓고 음악을 사랑하는 세계인을 꼬드겨 그녀의 미술관과 음악성을 전염시킨다고 ..
오노요코는 마녀였고, 존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법에 걸린 죄없는 희생물이었다.
그녀의 이미지는 더이상 나빠질수도 없이 최악이었고, 세상에 그녀의 지지자는 물론 아무도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 노래 제목처럼 "살얼음판 위의 삶"은 매일 점검을 하고 안전성 여부를 살펴봐야 하는 줄타기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언제나 무장을 하고 전투 태세를 갖춘 여자, 어떤 난관이 와도 두려움이 없는 여자라며 "드래곤 레이디"라 불렀다.
(결국 유산을 하지만 이일은 훗날 "아기의 심장 박동 Baby's Heartbeat"이라는 매우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들과 함께 선을 뵌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았고, 수많은 공동 작업을 함께 해나간다
1969년 3월 20일 두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예술가의 절정기 였다.
결혼식후 두사람은 암스테르담 호텔에서 라이브 행사를 거행하여 다시한번 전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이른바 "베드 인"
2인 시위-파리에서 암스테르담 힐튼까지 차를 타고 가며, 일주일동안 침대애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자들이 물었다. 침대에서 뭘 했냐고 ..
그들은 "우리는 그저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중" 이라고 말했다.

오노는 존 레논과의 결혼으로, 그의 명성을 영특하게 이용하고, 자의식 강하며 진취적인 성격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런 요코를 레논은 우러러보고 경탄하고 그녀에게서 안식을 찾을수 있었다.
또한 오노요코는 비틀즈에 대한 회의와 불만에 가득차 있는 존레논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해주고 새로운 세계와 강한 영감을 불러 일으켜줬다.

1971년 그들은 미국에서 정착을 한다.
레논이 1980년 12월 8일 뉴욕에서 마크 채프먼의 총에 살해 되기까지 (잃어버린 주말" 을 제외하고) 그들은 전세계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들의 전부를 예술에 투자하게 된다.
두사람은 미국의 베트남전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았고,평화를 외쳤으며, 세상을 향해 예술의 정치화 와 사회 비판적인 작품을 선보인다. 또 부정에 저항하면서 억압받는 자들의 편에 섰다.
서서히 일본에서 온 이 젊은 여자는 오래전부터 우상이었던 한남자를 통해 세인의 주목과 경탄을 한몸에 받게 된다.
존 레논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활동에 매료됐고, 오노의 저항과 예술을 적극 지원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고,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두사람이 함께한 수많은 활동 속에서도 오노요코는 결코 자신의 예술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플럭서스 에술가라는 길을 철저히 고수하였고, 더불어 존 레논과 함께한 음악으로 자신과 자신의 샐각을 표현하였다.
- 이글은 클라우스 휘브너의 "마녀에서 예술가로" 중에서 발췌했음을 알립니다.
[인물] 오노요코, 결코 미워할수없는..  플럭서스 예술가이자 영화인이고 작곡가이고 가수이자 페미니스트 오노요코..
사실 그녀에 관한 애정이 없으니 요약도 잘되지 않은게 사실이다.
변덕스럽고 이기적인데다 교활하고 섬뜩하다.
"돈많고 달리 할일이 없었던 순진한 두 유명인의 생활" 도 모순적이고 관대하게 봐줄수 없다.
이해할수 없는건 아니지만 (극단적 고통 속에서 절실한 구원요청 수단이 아닌) 의식의 확대차원에서 마약경험이라니..
많은 예술가들이 저지르는 오류이지만 그들에게선 진지함이 아닌 장난스럽게 느껴진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여자가 그녀의 영특한 두뇌와 열정을 따라갈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그처럼 수없이 많은.. 소박하면서도 형이상학적이고, 독특하고 풍부하며 유머러스한 지침을 제시 했던가!!
상상해보라.
세계적인 스타가 어린아이처럼 흔들거리는 사다리에 쭈그리고 앉아 확대경을 잡고 뭔가 유심히 보고 있다..
그남자는 마침 인생의 혼란기에 있었고 뭔가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때 기적처럼 "Yes !! you can do it !! 긍정의 인식과 격려를 받게 된다.
또 페미니즘에 관해서도 그녀는 영특한 소신을 펼친다
"여성 해방은 남녀가 함께 힘을 합하여 투쟁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공할수 없다"
동의 하는 바이다..
물론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들도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극단적인 방법은 옳지 않다고 본다.
세상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닌 공동 노력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
얽매이지 않는 정신의 자유!!
그녀의 조각들은 너무나 시적이었고, 명상적이었으며, 역동적이었고...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날.. 비가 많이 오던날에 나는 "소망의 나무Wish Tree" 앞 에서 어떤 소망을 매달아 기원했던가 ..!!

무언가를 소망하라.
그 소망을 쪽지에 적어라.
쪽지를 접어 소망의 나뭇가지에 매달아라.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하라.
나뭇가지가 온통 소망으로 뒤덮일때까지 소망하기를 멈추지 말라.
- Wish Piece. y.o 1996

가져온 곳: [그곳은..어디에 있니..!!] 글쓴이: 숲속의 은자